3월6일 [사순 제1주일]
루카 4,1-13
죽이지 못하면 사랑이 아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시는 내용입니다.
정말 잘 알아두어야 할 것은 예수님을 광야에서 악마에게 유혹을 당하도록 이끄신 분은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루카 4,1-2)
다시 말해 성령께서 오지 않으시면 누구도 광야에 나가지도 않고 유혹과 싸우지도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유혹과 싸우게 만드시어 주님께 더 합당한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유혹과 싸우면 그 사람 안에는 반드시 성령께서 함께하십니다.
자신과 싸운다는 말은 자아의 세속-육신-마귀와 싸운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가 세상을 섬기라고 유혹한 것이 세속이요,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고 한 것이 육신이며, 성전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한 것이 마귀입니다.
세속-육신-마귀와 싸우고 있음이 성령께서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죽입니다.
죽이지 못하면 사랑이 아닙니다.
JTBC, ‘내가 키운다’에서 ‘ADHD 솔루션 중단 위기?! - 다시 시작되는 우경이와의 전쟁’이 방영되었습니다.
이지현 씨의 아들 우경이는 정말 숨이 막힐 정도로 엄마를 몰아붙입니다.
전문가들이 여러 해결방법을 알려주고 지현 씨도 노력했지만 잘 먹히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엄마 앞에서 집을 나가겠다고 하고 죽어버리겠다고 합니다.
이에 이도 저도 안 되는 상황 때문에 지현 씨는 주저앉아 눈물을 흘립니다.
사랑은 분명 상대를 죽이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니 지현 씨 사랑은 우경이를 죽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나 분명 지현 씨가 하는 것은 참으로 사랑이 아닙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령을 부를 때, ‘사랑’(Amore-Persona)이신 한 인격체로 규정합니다.
성령께서 사랑이시기에 사랑과 반대되는 생존 욕구와 싸움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결국엔 죽입니다.
가리옷 유다처럼 다 성장하여 본인 의지로 성령을 거부하면 모를까 아이들은 100% 부모님 사랑이 참사랑이라면 반드시 자아가 죽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엄마가 사랑이 아닌 집착을 하고 있음을 알고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이 얻고 싶은 것을 얻어내려 떼를 쓰는 것입니다.
영화 ‘몽골’(2007)을 보니 세계 절반을 차지했던 칭기즈 칸이 그냥 싸움만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을 지키기 위해 자신과 싸움으로 그토록 강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 부족의 세력 다툼이 끊이지 않았던 12세기 몽골. 훗날 대륙의 지배자로 불리게 될 대 몽골 제국의 창시자, 테무진이 태어납니다.
테무진의 아버지는 자신의 부족을 지키기 위해 아들 테무진을 경쟁 부족과 혼인시키러 갑니다.
그런데 그중에 잠깐 들린 곳에서 테무진은 보르테라는 여자아이에게 한눈에 반해버립니다.
그런데 그 부족은 큰 부족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테무진의 선택을 존중하여 돌아갑니다.
하지만 결국 경쟁 부족에 의해 살해당합니다.
어쩌면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아버지를 잃은 테무진은 그 탓을 자신의 마음을 빼앗은 보르테에게 돌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테무진은 그럴수록 더욱 보르테를 사랑하였습니다.
아버지를 잃고 집으로 돌아온 테무진은 자기 부족 이인자의 반란으로 자기 목숨까지 위태롭게 됩니다.
수레바퀴보다 키가 작은 아이는 죽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행히 어린 테무진은 살아남게 됩니다. 그러나 항상 쫓겨 다니며 조금씩 성장합니다. 이때 테무진을 도와준 것은 이웃 족장 아들 쟈무카였습니다.
테무진은 쟈무카와 의형제를 맺습니다.
쟈무카 덕분으로 무사히 어른으로 성장한 테무진은 어렸을 때 결혼을 약속한 보르테를 찾아가 혼인을 청합니다.
하지만 복수의 씨를 없애려는 자신의 아버지를 배신한 이인자에게 보르테를 납치당합니다.
보르테는 화살에 맞은 테무진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대신 납치당한 것입니다.
테무진은 자신의 의형제이자 이젠 어엿한 한 부족의 수장이 된 쟈무카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합니다.
쟈무카는 한 여자 때문에 전쟁해 달라는 테무진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거의 조롱을 합니다.
그리고 보르테가 아니면 안 된다는 테무진을 도와주기로 합니다.
테무진은 보르테를 위해 자기를 낮추는 수모를 감수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하여 보르테를 찾은 테무진은 보르테가 원수의 아이를 배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테무진은 그동안의 보르테의 고통을 생각하고 원수의 아이도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입니다.
원수의 아이를 키워야 하는 테무진이지만 그냥 보르테가 자신의 아내가 된다는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쟈무카는 테무진을 이인자로 임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보르테는 한 우리에 두 이리가 살 수 없다고 테무진을 설득합니다.
테무진은 쟈무카에게서 벗어나 자신의 세를 늘립니다.
그래서 쟈무카와 이젠 원수지간이 됩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돌봐준 의형제와 갈라지게 했지만 테무진은 여전히 보르테를 사랑합니다.
쟈무카도 점점 세력이 커지는 테무진을 그대로 놓아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일으켜 테무진을 생포합니다.
테무진은 자신이 잡히는 대신 보르테와 가족들을 피신시켰습니다.
테무진에게 영예로운 죽음을 선사할 수 없었던 쟈무카는 테무진을 누구도 찾기 힘든 아주 먼 곳의 노예로 팔아버립니다.
감옥에 갇힌 테무진이 미래 세상을 통치할 인물이 될 것을 알아본 한 스님이 있었습니다.
테무진은 그 스님에게 보르테를 찾아가게 합니다.
멀리 달려온 스님은 보르테에게 테무진이 살아있음을 알리고 지쳐 죽습니다.
한 여자가 아이를 데리고 그 먼 길을 혼자 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이에 보르테는 테무진이 살아있는 곳으로 가는 상인 대열에 끼여 그들에게 몸을 팝니다.
덕분에 보르테는 또 테무진의 아이가 아닌 상인의 아이를 낳습니다.
테무진은 보르테의 기략 덕분으로 감옥에서 탈출합니다.
그리고 상인의 아이를 보며 보르테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생각합니다.
보르테도 테무진 때문에 순결을 잃고 남의 아이를 여러 차례 낳아야 했지만 불평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몽골의 통일을 두고 이제 테무진은 쟈무카와 격돌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쟈무카의 군대가 더 강력하였습니다. 그러나 때마침 천둥과 번개가 쳤습니다.
몽골인들은 번개를 무서워하여 번개가 치면 땅에 주저앉습니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던 테무진은 덕분에 땅에 웅크린 쟈무카의 군대를 일망타진합니다.
그렇게 몽골을 통일시키고 이제 세상을 정복하는 칭기즈 칸이 됩니다.
그는 끝까지 보르테를 존중했고 가장 사랑하고 아꼈으며 그녀의 조언을 귀담아들었다고 합니다.
사랑은 이토록 자신의 모든 것을 잃게 만듭니다. 우리 안에 들어오신 성령께서도 그러하십니다.
성령은 “가난해져도, 먹을 것이 없어도, 멸시를 당해도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사순 때 이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내 모든 것을 잃어도 상대의 존재만으로 행복할 수 있어야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17살 고등학생이 된 홍원기는 소아조로증을 앓고 있습니다.
국내에 유일한 프로제리아라는 이 조로증은
어린이에게 조기 노화 현상이 발생하는 유전질환입니다.
원기는 아빠에게 “오늘도 최고의 하루를 사는 거야. 한 번뿐인 인생 후회하지 않도록”이라고 말해줍니다.
하느님은 사탄을 시켜 의로운 욥의 재산, 자녀, 자신의 건강과 명예까지 다 빼앗으십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게 하십니다.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주께서 주셨던 것, 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지라.”(욥 1,20)
성령께서는 지금, 이 순간 충분히 감사하고 행복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기도, 자선, 단식하며 고통을 받는 것이 사순이 아닌, 그런 것을 통해 고통 가운데서도 행복할 수 있는 훈련하는 것이 사순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우리 자아를 죽이는 하느님이 보내신 불칼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6일 [사순 제1주일]
루카 4,1-13
세상 유혹 앞에 설 때마다 예수께서도 유혹을 받으셨음을 기억합시다!
심한 식중독에 걸려 호되게 고생하던 때가 기억납니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꼬박 일주일간 링거주사에만 의지한 채 단식을 했습니다.
담당 간호사님은 매정하게도 제 침대 앞쪽에 '절대 금식'이란 팻말을 달아놓았지요.
그리고 매서운 눈초리로 제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이틀간은 그런대로 견딜 만했습니다만 사흘이 지나면서 정말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매끼 식사 시간은 제게 그야말로 지옥이었습니다.
옆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분이 병원밥 투정을 하면서 딱 한 숟가락만 뜬 식판을 물리며
'그냥 내어가라' 할 때 저도 모르게 제 입에서는 '저런저런!'하는 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배가 출출해지는 9시 뉴스시간 때마다 통닭이다, 족발이다 몰래 야식을 즐기는 '날라리 환자'들이
얼마나 얄미웠는지 모릅니다.
어찌 그리도 야속한 사람들이 다 있던지요.
당시 제 머릿속은 온통 평소 제가 좋아하던 음식으로 가득 찼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떡라면, 푹 고아서 얼큰한 우럭찌개, 매콤한 갈치조림, 그리고 소주 한 잔. 닷새가 지나가면서 헛것이 다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 가져온 꽃바구니는 싱싱한 사과가 가득 담긴 과일바구니로 보이면서 입에 침이 다 돌았습니다.
창밖에 흘러가는 뭉게구름을 보니 달콤한 솜사탕 생각이 나더군요.
인간 생리구조상 하루 세끼 식사는 지극히 기본적인 것입니다.
단식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가장 기본적 욕구인 식욕에 통제를 가함으로써 나름대로 의미를 추구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다이어트나 건강진단, 질병 치료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단식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단식은 하나의 목적성을 지닙니다.
사순시기 동안 그리스도 신자들은 작은 몸짓이지만 단식을 통해서 예수님 수난에 상징적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40일간 단식해 오신 예수님께서 악마로부터 유혹받으시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성을 지니신 하느님이기도 하셨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와 똑같은 육체 조건을 지니셨던 인간이셨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고통과 배고픔을 똑같이 겪으셨던 참 인간이셨습니다.
휴가지에서 40일은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겠지만, 단식하면서 보내는 40일은 정말 지옥 같은 나날입니다.
허기가 져서 거의 탈진상태에 도달한 예수님 앞에 악마가 나타납니다.
갖은 감언이설과 달콤한 유혹거리를 미끼로 내세우며 예수님을 현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유혹들을 의연히 이겨내십니다.
허탈해진 악마는 힘을 잃고 떠나갑니다.
예수님께서 악마의 유혹 앞에 끝까지 굴하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아버지께 대한 항구한 충실성과 철저한 순명, 아버지를 향한 지속적 신뢰와 끊임없는 자아포기,
그 결과가 유혹의 극복이란 결실을 가져왔으리라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아버지와 연결된 끈을 끝까지 놓지 않음으로 인해 우리는 강합니다.
우리는 나약하지만 아버지 현존 안에 뿌리내림으로 인해 우리는 강합니다.
세상 유혹 앞에 설 때마다 예수께서도 유혹을 받으셨음을 기억합시다.
아버지께 대한 간절한 기도를 통해 그 모든 유혹들을 물리치셨음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걸어가는, 사순절이라는 광야 여정에는 악마에게서 유혹도 많겠지만 그 여정이 든든하신 우리 주님께서 언제나 동행하고 계심을 기억하는 은혜로운 나날이 되시길 빕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3월6일 [사순 제1주일]
우리 교회 안에 파스카 축일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 날은 없다. 파스카 축일이야말로 다른 모든 축일을 거룩하게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승리와 구원의 신비를 드러내는 파스카 축일의 신비에 합당하게 참여하기 위하여 40일간을 준비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즉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에 충만히 참여하는 데 필요한 기간으로 사순절을 살고 있다. 오늘의 성서 대목들은 이 파스카라고 하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피곤하지만 기쁨에 차 있는 우리 여정의 의미와 방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신명 26,9)에서 수확한 첫 결실을 봉헌하면서 하느님께 감격에 찬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그들은 첫 결실을 바치면서 자신들을 구원하신 역사를 고백하고 있다(참조: 신명 26,5-9).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기 위해 오랫동안 시험과 단련을 받았다. 우리도 약속의 땅인 파스카의 영광에 참여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을 이기고 거기에 도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사순절을 지내는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파스카의 신비는 약속의 땅보다 더 의미가 깊다.
복음: 루카 4,1-13: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예수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사순절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오늘 복음은 단순히 유혹의 내용이 아니라 이 사순절을 통하여 우리의 정신이 단련되고 또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따르게 하고 있다. 복음을 체험 중심으로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유혹은 예수님의 수난까지 계속된다. 즉 예수님의 전 생애에 걸쳐 계속되는 유혹이다. 즉 예수께서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1-2절) 하고 있고,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13절). 그 ‘다음 기회’란 ‘수난의 때’이다. 그 악마는 유다의 배반과(루카 22,3)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폭력으로 나타난다.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이 권세를 떨칠 때다.”(루카 22,53)라고 당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둘째, 이 유혹은 예수께서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포한(루카 3,22) 세례 후에 나타난다. 사탄은 아주 고도의 수법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사명을 세속적 권세와 명예와 영광에 결부시켜 세속주의적인 ‘메시아’로 만들려고 한다. 사탄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주장하면서 유혹을 한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3.9절).
이러한 유혹은 계속 예수님께 그분의 공생활 중에도 나타났던 것이었다. 군중들(14,15; 19,11)과 고향 사람들(4,23) 그리고 사도들(10,20)로부터도 나타났다. 십자가 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23,35). 사탄의 말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 같다. 이 유혹은 바로 예수께 하느님의 뜻에 맞는 메시아로서보다도 인간들이 바라고 원하는 그런 메시아가 되라는 무서운 유혹이다. 즉 현세적 메시아가 되라는 유혹이다. 이것이 또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동요시키는 유혹이다. 우리 신앙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이 보여주신 것을 통해 원하시는 것과는 달리, 즉 하느님의 뜻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나 눈치에 자신을 맞추라는 유혹이다.
이것이 예수님께는 성공하지 못하고 우리에게는 성공하는 영원한 유혹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의 표현인 ‘말씀’에 당신 자신을 완전히 일치시키고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께는 성공하지 못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4절)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8절)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12절). 즉 예수님은 ‘말씀’의 식별력에 따라 행동하고 판단하신다는 명확한 의지의 표명이다. 하느님만이 우리가 받들어 모셔야 하는 유일한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신앙이란 우리를 당신의 나라로 인도하시어 구원해주실 수 있는 그분께 도움을 청하며 의탁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신 것과 비교하여 그리스도의 구원행위를 말하고 있다. 그 구원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그리스도 자신과 모든 인류를 위해 죽음의 멍에까지도 없애셨다. 이제는 그 구원에 이르기 위해 그 구원을 갈망하며 하느님께 호소하여야 한다고 한다.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 10,13).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이 여정도 그리고 그 도착지도 모두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이 사순절은 파스카와 함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 주신 은총이다. 이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감으로써 말씀을 실현해 가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께 성공하지 못한 것처럼 하느님의 뜻보다는 사람들의 호감을 사라고 더 애쓰는(갈라 1,10) 예수님께서 공생활 전체를 통해 받으셨던 유혹을 우리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나를 하느님의 뜻으로부터 멀리하고 인간적인 원의를 이루도록 끊임없이 나를 붙들고 늘어지는 유혹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나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좀 더 나 자신을 이길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순절이 되도록 사순 오늘이 되도록 하여야 하겠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