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7일[주님 부활 대축일]

작성자막달레나|작성시간22.04.17|조회수46 목록 댓글 0

4월17일 [주님 부활 대축일]

요한 20,1-9

부활을 믿지 않으면 착해질 수 없다


오늘은 주님 부활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우리에게 왜 중요할까요?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부활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1코린 15,16)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한 인간으로서 부활하실 수 있으셨다면 같은 하느님 자녀인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바오로 사도는 또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1코린 15,17)라고 말합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부활에 대한 믿음이 우리를 현세적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현세적 집착이 우리를 악인으로 만듭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모기와 예수로 나뉜다고 할 때, 모기가 되는 이유는 현세적 집착 때문입니다.
현세적 집착은 생존과 직결됩니다.
생존하려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종말’에 관한 영화를 보면 어떤 이들은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지만, 
어떤 이들은 자신만 살려고 기를 씁니다.
부활에 대한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 초 미국의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은 ‘2차 대전 당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나치의 명령에 복종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답을 찾고자 일반인을 대상으로 권력에 대한 복종 실험을 시행한 바 있습니다.

지원자들은 교사와 학생군으로 분류됐고, 교사가 낸 문제를 학생이 틀릴 때마다 전기충격기의 전압을 15볼트씩 올리도록 했습니다.
물론 충격기는 가짜였고, 지원자들은 이를 몰랐습니다.
또한 학습자(학생)는 밀그램이 섭외한 배우였습니다.

실험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밀그램의 불합리한 지시와 통제 속에 실험자의 65%가 최고수치인 450V까지 전기충격기를 올린 것입니다.
학습자(배우)가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면 즉각 실험을 포기할 것이란 예측은 빗나갔습니다.
살려달라는 학생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지겠다’라는 밀그램의 말에 피험자들은 사망에 이를 수 있는 전기를 흘려보냈습니다.
밀그램은 자신의 저서 『권위에 대한 복종』에서 ‘복종 실험’에 대해 이같이 말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피험자들이) 실험자의 지시에 너무나 기꺼이 따른다는 점이다.
실제로 실험의 결과는 놀랍고도 당혹스럽다.
많은 피험자가 스트레스를 느끼고 실험자에게 항의하지만, 상당수의 피험자가 전기충격기의 마지막 단계까지 계속한다.”

마찬가지로 1971년에 행해진 ‘스탠퍼드 감옥 실험’은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었습니다.
필립 짐바르도(Philip Zimbardo) 교수는 ‘교도소 실험’을 통해 강압적인 특수 환경에서 인간의 심리와 행동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관찰했습니다.

모의 감옥에서 피험자들은 교도관과 죄수로 나뉘었고, 각각의 역할을 수행토록 했습니다.
어색하던 분위기와 달리 교도관들은 죄수를 통제하기 시작했고, 점점 고압적으로 변해갔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교도관의 행위는 악랄해졌고, 통제 불능 상태가 돼버렸습니다.
실험 5일째에는 성적 고문까지 이어졌습니다.
강하게 저항하던 죄수들은 저항력을 상실했고, 간수들의 권위에 굴복하기 시작했습니다.
실험은 6일 만에 중단됐습니다.

인간이 동물적 본성을 통제할 능력이 없는 존재임을 보여준 충격적 결말입니다.
또 이 실험은 그리스도교적 전통에서 자란 독일인들이 어떻게 유대인들을 500만 명이나 비인간적으로 학살할 수 있었는지도 보여줍니다. 이 밖에도 인간 본성이 악하다는 증거는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유대인들을 언젠가는 부활하여 다시 만나게 된다고 한다면 그렇게 학살할 수 있었을까요? 또한 실험이 끝난 뒤에 교도관을 했던 사람들과 죄수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함께 며칠 동안 소풍 가는 프로그램이 계획되어 있었다면 교도관들이 그렇게 악랄하게 변할 수 있었을까요?
다시 만나야 함을 안다면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전기충격 실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전기충격을 죽기까지 준 그 사람을 나중에 문을 열고 만나는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다면 그렇게 끝까지 전기충격을 가할 수 있었을까요?
이 모든 것이 그것으로 끝난다는 생각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에 대한 희망이 있다면 이 세상 것에 집착할 필요가 없어서 죽음 앞에서도 누군가를 위해 희생할 수 있습니다.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영화 ‘리스타트’(2019)는 죽으면 매일 아침 7시에 똑같은 삶을 시작한다는 전제의 영화입니다.
아침 7시가 되자마자 킬러들이 들이닥칩니다. 이렇게 수십 번 죽고 나니까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잘 알게 됩니다.
본인도 왜 이런 삶이 반복되는지 모릅니다.
다만 이전의 기억들이 축적되어 킬러들을 소탕할 능력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집과 차와 생명까지도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주인공은 이혼한 아내가 있고 아들이 있습니다. 세상 것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기는 하지만
그들에 대한 마음은 점점 커집니다.
자신이 노력해서 그들에게 도달하는 시간을 단축하지 않으면 아내와 아이는 죽습니다.

결국 주인공은 200번 가까이 죽으며 그들이 죽기 전에 도달하여 아내와 아들을 죽지 않게 합니다.
죽었다 깨어남을 반복할 때 유일하게 가치 있게 남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가진 모든 것을 잃어도 어차피 죽고 부활하면 아무 상관 없지만 사랑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란 주제를 담고 있는 영화입니다. 

인간은 원죄의 영향으로 자기 악한 본성을 스스로의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습니다.
다만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이 자신들이 찌른 상처를 그대로 지니신 채 자신들 앞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어 나타나실 것을 믿었다면 그분을 그렇게 찌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착해지지 못한 이유는 부활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고 안 믿고는 자유입니다.
나의 선택입니다.
착해지고 싶은지, 그렇기를 원하지 않는지에 달렸습니다. 

다만 부활을 믿지 않으면 착해질 수 없다는 것은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집착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으면 내 죽음엔 무관심해지고 타인의 죽음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부활을 믿어야 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착해지기 위해서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4월17일 [주님 부활 대축일]

요한 20,1-9

부활의 아침, 설레는 마음

 
'초보신부' 시절,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위한 소규모 복지시설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기억해보니 요즘 같은 봄날이었습니다.
여러 꼬맹이들이 집단으로 가출해서 며칠째 행방이 묘연했습니다.
백방으로 수소문해보고, '검거'를 위한 안테나를 높이 올려보았지만 도무지 가닥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자꾸 흘러가고 정말 당혹스럽더군요.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순찰 중이던 한 경사님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아이들을 붙잡아놓았으니 데려가라고. 무사하다는 말 한마디에 그간의 모든 피로가 씻은 듯이 사라졌습니다. 
충만한 기쁨에 어쩔 줄 몰랐습니다.
전화를 내려놓기 무섭게 상상을 초월하는 '초스피드'로 달려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누군가를 위해 뛰어다닌 적이 있으십니까?
뛴다는 것은 그만큼 상황이 급박하다는 것, 또는 그만큼 대처해야할 사안이 중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족들 가운데 촌각을 다투는 응급환자가 발생하면 어떻게 대처합니까?
생명을 구하려 바람처럼 달려갈 것입니다.

꿈에 그리던 사랑하던 사람이 귀국해서 공항에 마중 나가는 길인데, 길이 막혀 공항에 늦게 도착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차에서 내리자마자 눈썹이 휘날릴 정도로 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 부활의 흔적을 목격한 예수님 제자들 역시 뛰어가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빈 무덤'을 확인한 마리아 막달레나를 보십시오.
그녀는 이 놀라운 사건을 전하려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갑니다.
너무나 중대한 일이기에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두 제자들 역시 엄청난 속도로 달립니다.

이윽고 그들 눈 앞에는 장엄한 예수님 부활 현장이 펼쳐집니다.
의혹으로 가득 찼던 제자들 얼굴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합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충만한 기쁨이 솟아올랐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제자들은 다시 뛰기 시작합니다.

이 기쁜 소식을 조금이라도 빨리 다른 제자들에게 전하려고. 예수님 죽음 이후, 삶이 온통 회색빛으로 변한 사람들, 눈물과 한숨 속에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이 꿈같은 소식을 전하려 있는 힘을 다해 달립니다.

예수님 부활의 흔적 앞에서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달려가는 제자들 모습을 바라보며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예수님 부활은 오늘 내게 과연 어떤 의미입니까?
예수님의 파스카 축제가 반복되는 매일미사는 내게 과연 무엇입니까?
예수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내 발걸음은 어떻습니까?

예수님 부활의 최초 목격자인 마리아 막달레나가 남겨준 모범을 묵상하며 제 부끄러운 신앙을 돌아봅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끌려가셔서 갖은 모욕을 다 당하실 때, 십자가형에 처해지기 위해 골고타 산을 오르실 때,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 위에 높이 매달리실 때, 한때 죽고 못 살겠다던 제자들이나 추종자들은 어땠습니까?

혹시라도 자신에게 미칠 후환이 두려워서 멀찌감치 피해 서있었습니다.
그도 아니라면 '일단 살고 보자'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리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겁도 없었습니다.
병사들이 가까이 다가서지 말라고 위협적으로 만류를 해도 막무가내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께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손이라도 한번 잡아볼 수 있을까?
혹시라도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라도 예수님을 살려낼 수 있을까? 안간힘을 다 썼습니다.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고 나서 가장 슬피 통곡했던 여인이 바로 마리아 막달레나였을 것입니다.
한동안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 정신이 아니었겠지요.
잠을 자려고 자리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토록 자신을 사랑해주시던 예수님, 자신에게 새 삶을 부여해주셨던 예수님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안 계시다고 생각하니 사는 맛이 나지 않았습니다.
눈을 붙이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새벽녘에 습관처럼 일어나 예수님 무덤으로 달려가던 마리아 막달레나였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마리아 막달레나의 사랑은 정녕 무조건적인 사랑, 막무가내의 사랑, 앞뒤 따지지 않는 용감한 사랑, 이 세상에서 가장 지고한 사랑, 순수한 사랑, 일편단심의 사랑이었습니다.

이런 그녀 사랑에 예수님께서도 기쁘게 응답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최초로 당신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을 향한 마리아 막달레나의 열렬한 사랑, 주님을 찾는 간절한 심정, 주님으로 설레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본받고 싶은 부활 아침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4월17일 [예수부활대축일]

복음: 요한 20,1-9: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주간 첫날”(1절), 오늘 우리가 주일이라고 부르는 날, 주님께서 부활하셨다. 당신의 탄생으로 인간의 탄생을 거룩하게 하신 분이 당신의 부활로 죽은 이들에게 생명을 주셨다. 이날, 부활하신 분과 함께 낙원이 열린다. 그 낙원으로 죽을 수밖에 없던 인간들이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아직 어두울 때 무덤에 갔다. 그곳에 분명히 주님께서 묻히셨는데, 돌은 치워져 있었고, 그 안에 시신은 없었다. 마리아는 깜짝 놀랐다.

마리아는 시신이 없자 누가 훔쳐 갔다고 생각한다. 마리아는 무덤에 왔을 때, 아직 어둠 속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2절)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꺼내 갔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참히 돌아가셨지만, 예수님께 대한 존경의 마음이 변하지 않고 있음을 보인다. 살아계실 때처럼 똑같이 ‘주님’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린다.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그 말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가 무덤을 살핀다.

그들이 무덤으로 달려가 본 때는 환할 때였다. 그들은 어둔 밤에 와서 그분의 시신을 훔쳐 갔다는 수석 사제들의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아무도 믿지 않게 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밤이나 아직 어두울 때가 아니라 환할 때 왔다. 유대인들이 무서워 한 집에 모여 문을 걸어 닫고 있었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용감하게 집 밖으로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마리아의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은 부리나케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아마포가 놓여있는 것을 본다. 그것이 부활의 표지이었다. 누가 시신을 훔쳐 갔다면, 시신과 함께 아마포까지 다 들고 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몰약을 바르면 아마포가 납처럼 시신에 달라붙지 않는다. 예수님의 얼굴을 싸매었던 수건이 아마포와 따로 잘 개켜져 놓여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분의 시신을 누가 훔쳐 갔다고 하는 사람들 말에 넘어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다. 처음에 막달라 마리아가 빈 무덤을 보았고,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보았는데 베드로는 수의가 흩어져 있고, 예수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따로 한 곳에 잘 개어져 있었음을 보았으나 그는 신앙의 눈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본다는 것’은 믿음을 일으키게도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부활이 빈 무덤이나, 예수님을 싸맸던 물건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는 것으로 추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2절)의 믿음은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나(blépein,1절), 베드로의 경우처럼(theoréin,6절) 시각적인 면에서 ‘보는 것’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차원, 즉 피상적인 차원을 넘어 내적인 의미를 파악함으로써 이해하는 그런 차원에서 ‘보는 것’(oràn)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보기 위해서는 자신이 파악하려고 하는 것에 감화되고 매료되어 자신을 그 현실에 동화시킴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랑, 연민, 다른 사람의 요구에 대한 개방성 등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보고 믿었던’ ‘다른 제자’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2절)라는 독특한 표현으로 소개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요한으로 하여금 아직 예수를 보지 않고서도-실제로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나타나심은 후에 나타난다(20,19-29)-그분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보고’ ‘믿게’ 해준 것은 바로 사랑이다. 이 사랑의 힘으로 요한만이 빈 무덤과 개켜져 있던 수건에 감추어진 의미를 이해했다.”(D. Mollat, La foi pascale selon le chapitre 20 de l'Evangile de Jean, in Resurrexit, Libreria Ed., Vaticana, Roma 1972, pp. 316-332).

참된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 구체적으로 성서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지, 빈 무덤이나 잘 개켜진 수건과 같은 어떤 구실이나 단서를 찾는 그런 것이 아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9절).

제2독서: 콜로 3,1-4: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부활의 은총으로 새로이 창조된 그리스도인은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계신 천상을 갈망하면서 부활을 숨 쉬며 살아야 한다. 부활을 숨 쉰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자신의 삶이 매 순간 부활을 체험하며, 부활 체험 안에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권고하고 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1-2절).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저 위에 있는 것들은 바로 우리 이웃이 필요로 하는 것을 보고 관심을 기울이는 사랑의 마음과 봉사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며, 이로써 부활하신 주님의 뜻에 맞게 사는 것이다. 그분이 바로 형제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바치시고 구원을 주실 수 있었던 한없는 사랑을 사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이 사랑에 대해 하느님을 향한 감사의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

이러한 삶은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천상의 삶을 이미 이 땅에 끌어내려 사는 삶이 될 것이다. 이 삶은 바로 예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며, 부활한 후의 삶은 바로 이런 모습이라고 그분이 우리에게 확실히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이제 우리가 부활을 확실히 체험하는 것이다. 천상의 것을 추구하면서 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이 세상에 대해서 죽는 연습, 아니 죽어야 한다.

죽는 삶을 통해 우리는 부활을 체험할 수 있으며, 우리는 사도들이 한 말과 같이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라고 한 것처럼 우리도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복음선포이며, 그리스도, 즉 구원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도 항상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전할 수 있어야 하겠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