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8일 [주의 공현 대축일]
주의 공현 대축일은 제2의 성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주님의 탄생 신비에 대한 몰이해를 더 강조하면서 동시에 주님의 탄생을 세상에 선포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유다인들 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한 몸의 지체가 되도록 불림을 받은 이방인들을 위해서도 오신 분이라는 것이다.
이사야서는 귀양살이에서 돌아오는 유다인들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을 이끌어줄 미래의 예루살렘의 광채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 이 성경말씀을 주님의 공현 신비에 적용하고 있다. 오늘 박사들에게 나타난 별은 그들의 대화에 있어서 주인공 역할을 한다. 그 별은 그들 여행의 안내자 역할 외에 더 나아가 그들을 꼼짝 못 하게 이끄는 자석과 같아 보인다. 오늘의 전례는 이 예루살렘 대신에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들인다. 이제 이렇게 예수를 중심으로 모든 일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땅 극변까지 쏟아부어야 할 새로운 예루살렘은 교회이다. 교회의 기본적 사명은 복음 선포와 교회 각 지체의 삶을 통해 세상에 그리스도의 공현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하느님께서 당신의 심오한 계획을 알리는 사절이 되게 하셨다고 하면서 자신에 의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 복음의 조명을 통해 주님의 공현은 더욱 확대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방인의 세계를 대표했던 동방박사들은 완전한 자격으로 교회에 들어왔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불행히도 교회 밖에 머물러 있다. 예루살렘의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베들레헴이 메시아의 탄생지라는 것은 가르쳐 줄 줄은 알았지만, 그 메시아께 경배를 드리러 가지는 않았다.
복음: 마태 2,1-12: 우리는 동방에서 임금님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복음에 보면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을 찾고 있다. 이때 헤로데가 당황하고 예루살렘이 온통 술렁거렸다고 한다. 여기서 헤로데는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을 다 모아놓고 그리스도가 탄생할 곳이 어딘가를 알아본 뒤 그를 죽일 계획을 세웠고, 박사들은 베들레헴에서 예수를 만나 경배한다(마태 2,4-12 참조). 오늘 복음은 너무나도 놀라운 역사적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누구이며, 몇 명이고 어떤 나라에서 왔는지가 아니다. 복음은 가까이 있다고 하는 이들, 즉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헤로데처럼 그를 해칠 계략을 짜지만 멀리 있는 이들, 즉 이방인들은 신앙의 빛의 자극을 받아 예수께서 비록 가난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지만, 그분을 찾고 알아본다는 것이다.
복음에서 별은 동방박사들을 예루살렘에까지 인도한 후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서 “아기가 있는 곳 위에”(9절) 머물게 된다. 그 별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로 그 별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신앙의 내적 빛일 뿐이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시지 않으면(요한 6,44 참조) 우리는 그분을 알아볼 수도 만날 수도 없다. 둘째로는 마태오는 별의 표징 아래 나타날 메시아를 예언했던 발람의 예언이 실현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민수 24,17). 이제 구약의 계약이 나자렛 예수를 통해 실현되고, 그분의 빛은 이미 온 세상에 빛난다. 왜냐하면 이교도들도 신앙을 통해 그분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박사들이 길을 떠났을 때, 동방에서 본 별이 다시 나타나 아기가 있는 집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고 그들은 대단히 기뻐하였다(9-10절)고 한다. 그들이 기뻐한 이유는 그것이 대단한 수고를 치르고 얻은 기쁨이고, 오랜 싸움 끝에 얻은 기쁨이며, 때로는 실망과 좌절을 겪으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얻은 기쁨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우리가 신앙 안에서 갖는 여러 가지 체험들이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쉽게 이루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계시하신 뒤 감추심으로써 당신을 다시 찾도록 하신다. 그러므로 공현축일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빛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빛나는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을 찾기 위해 동방박사들처럼 오랫동안의 고달픈 때로는 실망을 가져다주기까지 하는 여정을 끝내 달릴 용기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서만 밝게 빛나시는 분이시다.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하느님의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12절). 그들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그 빛을 받아 널리 퍼져나가게 하는 역할을 한다. 헤로데에게 돌아간다는 것은 폭군에게 그리스도를 살해할 구실을 마련해줄 뿐만 아니라 다시 어두움 속에 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예루살렘에서는 그 별이 사라지지 않았던가! 헤로데와 예루살렘에는 그리스도의 빛이 스며들 수가 없다. 만일 빛이 스며든다면 모든 것이 붕괴한다. 왜냐하면 숨은 생각들을(루카 2,35) 드러내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사들의 나라 동방에서는 사람들의 마음에 이미 빛이 스며들어 그 빛을 더욱더 널리 확산시켜나갈 수 있다. 예루살렘보다도 동방에서 그 빛이 더 강하게 퍼져나간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이러한 빛에서 빛으로(2코린 3,18) 옮아간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의 밝은 빛처럼 변화시켜 더욱더 깊게 그리스도의 빛을 받을 수 있게 함으로써 또한 영원한 영광중에 결정적으로 드러내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뵙기 갈망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주님을 직접 뵙게 되는 그곳에서 주님의 공현은 영원히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항상 찾아 만나 뵙게 되는 것은 주의 공현의 의미를 사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기쁨을 가지기 위해서는 많은 대가를 치러야 가능함을 잊지 않고 순간의 삶을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1월8일 [주님 공현 대축일]
마태오 2,1-12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봉헌, 순수한 마음으로 바치는 사랑의 헌신!
태안 와서 산 지 벌써 만 3년이 다 되어갑니다.
도심에서 살 때도 좋았지만, 시골 와서 사니 참 좋은 게 많습니다.
아담한 3층 소성당 밖으로 찬란한 일출도 볼 수 있습니다.
앞바다에서 펼쳐지는 황홀한 일몰도 원 없이 구경할 수 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밤만 되면 셀 수도 없이 수많은 별들이 잔치를 벌입니다.
도심에서 올려다보는 하늘과는 천지차이입니다.
시골의 하늘은 도심의 하늘보다 별들의 수효가 더 많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도심이건 시골이건 별의 숫자와 밝기는 동일합니다.
도심의 밤은 전깃불로 밝혀져 있는 화려한 밤이기에 별들의 수효가 적게 보입니다.
산골의 밤은 아무런 빛이 없는 어두운 밤이기에 별들의 수효가 많아 보입니다.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아름다운 밤을 느끼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전깃불이 없는 어두운 곳으로 가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오신 찬란한 별이자, 구세주 하느님을 뵙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휘황찬란한 곳, 화려한 곳이 아니라 소박하고 가난한 곳으로 내려가야만 합니다.
주변 빛이 화려한 예루살렘에서는 사람들이 구세주의 별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늘 별빛을 예의주시하면서 어둡고 한적한 곳으로 내려간 동방박사들이었기에 구세주의 별빛을
늘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일상 한가운데서도 희망을 상징하는 구원의 별이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인도합니다.
그러나 그 별은 우리가 화려한 불빛 속에 머무를 때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만나고 싶다면, 정녕 구세주 하느님을 뵙고 싶다면 화려한 불빛을 떠나서 고요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가난함을 선택해야 합니다.
휘황찬란한 샹들리에가 드리워진 화려한 연회 홀에서 멋진 음악을 들으면서 식사를 하는 사람은
결코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밤하늘의 감동을 맛볼 수 없을 것입니다.
구세주 하느님의 별빛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기 위해 좀 더 내려가고, 좀 더 비우고,
좀 더 겸손해지는 주님 공현대축일이 되면 좋겠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구유 바로 그 옆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성탄은 빛의 축제입니다.
당연히 기쁨과 환희의 축제입니다.
그러나 그 빛, 기쁨, 환희는 영혼을 위한 것이지 단지 우리의 육체적인 기분을 흥겹게 하기 위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일 년에 단 한 번 휘황찬란하게 잘 꾸며진 구유 앞에 무릎 꿇는 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성탄절이 주는 외적인 매력에 휩싸이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이제 성탄의 기쁨을 우리 마음 깊이 간직하고, 또 다시 골고타 언덕이란 신앙의 정점을 향해,
예수님께서 지셨던 십자가란 우리 인생의 최종의미를 향해 다시금 먼 길을 떠날 순간입니다.
언제까지나, 한없이 구유 앞에서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이제 구세주를 뵌 기쁨을 가슴에 담고 또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 공현’은 우리에게 또 다른 떠남을 요구합니다.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께서는 앙증맞은 작은 두 손을 벌리고 우리의 선물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구세주 하느님께 드릴 선물 중에 가장 좋은 선물은 어떤 것일까요?
세속적인 모든 재물에서 벗어난 깨끗한 마음의 순수한 황금, 예수님의 삶과 고난에 참여하기 위한 대가로 지불하게 될 이 세상의 모든 행복에 대한 포기로서의 몰약,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내맡기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위로 향해 곧게 솟아오르는 의지의 유황...이런 것들이 아닐까요?
순수한 마음으로 바치는 사랑의 헌신보다 그분 마음에 드는 봉헌은 다시 또 없습니다.
순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우리 가운데 매일 태어나시는 구세주 하느님을 뵐 수 있을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분의 별>
2023. 01. 08 주님 공현 대축일
마태오 2,1-12 (동방 박사들의 방문)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헤로데는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그들이 헤로데에게 말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그분의 별>
땅의 사람들은
외면하는
그분의 별을
좇아서
먼 길 나선
사람들이
그분을 만나
별이 되어
세상 깊숙이
스민다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