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 요한복음 6,51-58
사람은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먹을지, 어떻게 먹어야 건강하게 살 수 있을지 늘 관심을 기울입니다. 좋은 음식이라면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 나서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영혼의 양식에는 얼마나 마음을 쓰고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놀라게 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이 말씀을 처음 들었던 유다인들은 당황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이 말씀은 너무 거칠다. 누가 듣고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사실 우리도 이 말씀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면 비슷한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빵을 먹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파스카 신비, 곧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를 기념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기념’이란 단순히 과거의 일을 떠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기념)이라는 말은 과거의 일을 회상하고 기억하는 것뿐만 아니라, 과거의 일을 현재의 일로 재현하고 체험하는 <찌카론>(Zikkaron)이란 히브리어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과거의 구원 사건이 지금 여기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하신 말씀과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사랑이 오늘도 우리 가운데 현존하는 것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성체는 바로 그 사랑의 현재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 자신을 음식으로 내어주셨습니다. 우리와 더욱 가까이 계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당신 안에 머물고, 당신도 우리 안에 머무르시기 위해서입니다.
음식은 먹는 사람 안으로 들어와 그 사람의 생명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성체를 받아 모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스며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우리는 혼자의 힘으로 사랑할 수 없고, 혼자의 힘으로 용서할 수도 없으며, 혼자의 힘으로 끝까지 희망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당신 자신이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의 사랑이 되어 주시고, 우리의 인내가 되어 주시며, 우리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성체성사는 또한 말씀과 함께 이루어집니다.
빵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있습니다.
“받아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말씀은 사랑의 뜻을 알려 주고 관계를 만들어 줍니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밥을 먹이며 말을 건네듯,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듯,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위해 나 자신을 내어주었다.”
“나는 네 곁을 떠나지 않겠다.”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그 빵을 받아 모십니다.
그리고 조금씩 예수님을 닮아 갑니다.
성체를 받아 모시기 위해 제단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우리는 완전한 사람이어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부족하고 용서가 부족하며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성체가 필요합니다.
성체는 착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이 아니라 약한 사람을 위한 양식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빵을 쪼개어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십니다.
이 사랑을 받아 모신 사람은 언젠가 자신도 누군가를 위해 시간을 내어주고, 마음을 내어주고, 용서를 내어주며 살아가게 됩니다.
성체 앞에서 우리는 깨닫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 안에 들어오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란 죽은 뒤에만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부터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삶이라는 것을.
오늘 성체를 받아 모시며 이렇게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주님, 저를 사랑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제가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시듯, 저 또한 누군가에게 작은 양식이 되게 하소서.
주님께서 제 안에 머무시니, 저도 주님 안에 머물게 하소서.”
(천 사비나 수녀님)
6월7일 [성체성혈 대축일]
요한 6,51-58
성체가 신앙의 본질이 되게 하려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요한 6,53.56)
찬미 예수님!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 신앙의 가장 핵심적이고도 무서운 진리를 선포하십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생명' 자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 가톨릭교회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참으로 뼈아픈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분명 "성체가 아니면 구원이 없다, 생명이 없다"라고 목숨을 걸고 말씀하셨는데,
수많은 신앙인에게 성체성사는 그저 미사 중간에 치르는 하나의 거룩한 예식, 혹은 내 신앙생활을
치장하는 '액세서리' 정도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성체를 안 모신다고 해서 당장 내 삶이 죽을 것처럼 애통해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도대체 왜 성체성사의 의미가 이토록 축소되고 힘을 잃어버린 것일까요?
왜 우리는 생명의 양식을 먹으면서도 영적으로 굶어 죽어가고 있을까요?
오늘 우리는 이 치명적인 영적 질병의 원인을 파헤치고, 성체가 어떻게 우리를 완벽한 행복으로
이끄는지 깊이 묵상해 보겠습니다.
1940년대, 오스트리아 출신의 정신과 의사 르네 스피츠(Rene Spitz) 박사는 당시 고아원과 보육원에 수용된 아기들을 대상으로 생존과 발달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당시 시설의 환경은 위생적으로 완벽했습니다. 아기들에게는 매일 정확한 시간에 칼로리와 영양소가 완벽하게 계산된 최고급 우유와 이유식이 공급되었습니다.
병균이 옮을까 봐 간호사들은 아기들을 안아주지 않고, 요람 옆에 우유병을 고정해두어 아기들이 스스로 빨아먹게 했습니다.
육체적인 생존에 필요한 '양식'은 100퍼센트 완벽하게 제공된 것입니다.
그런데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이 완벽한 양식을 먹고 자란 아기들의 무려 37퍼센트가 2년 안에 원인 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한 것입니다.
살아남은 아기들조차 신체 발달과 지능이 심각하게 지연되었고, 허공을 보며 무의미한 몸짓만 반복하는 정서적 마비 상태에 빠졌습니다. 의학계는 이 병을 '호스피탈리즘(Hospitalism, 시설병)'이라고 불렀습니다.
스피츠 박사는 원인을 찾기 위해 또 다른 집단을 관찰했습니다.
바로 여성 교도소에서 엄마와 함께 지내는 아기들이었습니다.
환경은 고아원보다 훨씬 비위생적이었고, 영양분도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의 아기들은 단 한 명도 죽지 않고 튼튼하고 명랑하게 자라났습니다.
차이가 무엇이었을까요? 고아원의 아기들은 차가운 유리병에서 '음식(칼로리)'만 먹었지만,
교도소의 아기들은 엄마의 품에 안겨 엄마의 심장 박동을 들으며, 눈을 맞추고 체온을 나누며 양식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실험은 인류에게 아주 명확한 진리를 선포합니다.
어머니가 아기에게 주는 양식은 단순한 영양분이
아니라 '어머니의 생명' 그 자체입니다.
아기가 엄마의 젖을 갈구하는 진짜 이유는 단순히 배가 고파서가 아닙니다.
그 젖을 통해 엄마의 따뜻한 품을 느끼고, '엄마와 완벽하게 하나가 되는 관계'를 확인하며 그 사랑 안에 '머물고 싶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입으로 들어오는 칼로리가 아니라, 나를 품어주는 거대한 사랑과의 '연결(머무름)'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성체성사의 효과를 느끼지 못하는지,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느 가정에 중학생 아들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사랑해서 매일 저녁 정성껏 따뜻한 밥상을 차립니다.
어머니의 유일한 바람은 아들이 밥을 먹으며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재잘거리며 이야기하고, 엄마와 눈을 맞추며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들의 머릿속에는 온통 엄마가 내일 사주기로 약속한 '최신형 스마트폰' 생각뿐입니다.
아들은 식탁에 앉자마자 스마트폰 모델을 검색하며 밥을 마시듯 욱여넣습니다.
엄마가 "밥 맛있니?" 하고 물어도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일 뿐, 마음은 온통 대리점에 가 있습니다. 밥투정까지 부립니다.
이 아들에게 엄마가 차려준 정성스러운 밥상이 무슨 생명의 의미가 있겠습니까?
밥은 그저 스마트폰을 얻어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하는 통과 의례요, 엄마의 식탁은 지루한 대기실에 불과합니다.
사랑이 빠져버린 양식은 의미를 상실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 교회의 민낯입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미사에 나와 성체를 모시면서도, 정작 예수님이라는 분 자체를 사랑하고 그분과 머무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온통 주님이 주실 수 있는 '스마트폰', 즉 내 사업의 성공, 내 자녀의 명문대 합격, 아프지 않고 오래 사는 건강, 벼락부자가 되는 로또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세상에서 얻어낼 세속적인 축복이 더 우선순위가 되었을 때,
성체성사는 자연스럽게 귀찮은 액세서리로 전락하고 맙니다. 빵을 주시는 하느님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내 탐욕의 배를 채워줄 기적만을 구걸하니 우리 영혼이 시설에 수용된 고아들처럼
영적 아사(餓死) 상태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주님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고 세상의 썩어 없어질 것들에만
미친 듯이 매달리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 '나는 누구인가?'라는 영혼의 본질적인 정체성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면 인간은 절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욕구는 자신의 정체성에서 출발합니다.
거리를 떠도는 고아를 생각해 보십시오.
고아는 늘 불안합니다.
오늘 밤에 잘 곳이 있을지, 내일 먹을 빵이 있을지 스스로 책임져야 합니다.
그래서 고아의 본능은 항상 주변의 것을
'긁어모으고 소유하는 것'을 향합니다.
내가 많이 가져야만 안전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주를 창조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상속자, 곧 '하느님의 친자녀'라는 정체성을 완벽하게 깨달은 사람을 상상해 보십시오.
내 아버지가 우주의 주인이신데, 내가 내일 먹을 빵 걱정을 하겠습니까?
하느님이 내 아버지임을 진짜로 믿는다면, 그는 더 이상 세상의 얄팍한 돈이나 성공, 타인의 평가에 목매달지 않습니다.
우리가 엉뚱한 스마트폰(세상의 욕망)에만 집착하며 성체성사를 무시하는 이유는, 내가 '하느님의 자녀'요 '또 다른 그리스도'라는 이 압도적인 정체성을 아직 믿지 못하고, 여전히 내 힘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세상의 고아'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누구인가'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구하는 모든 은총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키시며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만나는 그들이 하느님의 특별한 돌봄을 받는 '선택된 자녀'임을 증명하는 거룩한 하늘의 양식이었습니다.
엄마의 젖과 같은 것이었지요.
그런데 민수기 11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끔찍한 불평을 쏟아냅니다.
"아, 고기 좀 먹어 보았으면!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공짜로 먹던 생선이며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지금 우리 눈에는 이 만나밖에 없으니 기운이 다 빠져버렸구나." (민수 11,4-6 참조).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만나)을 먹으면서도, 그들의 영혼은 여전히 '이집트의 노예'라는 비참한
정체성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거부하니, 하느님이 주신 거룩한 양식이 입에 맞을 리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유인의 양식인 만나를 버리고, 노예 시절에 채찍을 맞으며 주워 먹던 파와 마늘(세상의 자극적인 욕망)을 달라고 울부짖었습니다.
결국 그 영적 이식증에 걸린 자들은 약속의 땅에 단 한 명도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의 모래 무덤 속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출처: 『주석 성경』 민수기 11장)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강론>
(2026. 6. 7.)(요한 6,51-58)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1-58)>
1) ‘먹는 일’은 살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살아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중요한 말입니다.
죽은 사람은 먹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성체성사에도 적용됩니다.
성체를 받아먹는 일은 예수님의 생명력을 받기 위해서 하는 일이고, 그 일은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생명력을 받아먹을 수 없습니다.
물론 성체를 받아먹는 행위는 할 수 있지만,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이 받아먹는 성체는 성체가 아닙니다.
좋은 예가 배반자 유다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다음에(루카 22,14-20),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당신을 배반할 것이라고 예고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루카 22,21).
루카복음을 기준으로 하면,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한 뒤에(루카 22,3-6), 최후의 만찬에 참석했고, 성체를 받아먹고 나서, 예수님과 사도들이 겟세마니로 가기 전에 먼저 떠나간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이미 배반한 것을 알고 계셨으면서도 왜 그에게 성체를 주셨을까?
<요한복음에는 성체성사 제정 이야기가 없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일만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이미 배반한 것을 알고 계셨으면서도 왜 그의 발을 씻어 주셨을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답은, “유다도 사랑했기 때문에”, 또 “유다가 회개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에”입니다.
어떻든 우리는 결과를 알고 있습니다.
유다는 회개하기를 거부했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성체를 주신 일도, 그의 발을 씻어 주신 일도 모두 다 그 자신이 스스로 헛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믿음을 버리고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받아먹는 성체는 더 이상 성체가 아니게 되는 것은, 성체 쪽의 문제가 아니라 받아먹는 사람 쪽의 문제, 즉 자신에게 주어지는 생명력을 스스로 차단하는 문제입니다.
오늘날에는 성체 모독의 위험성 때문에 비신자들의 영성체가 금지되어 있는데, 신자라고 해도 마음과 믿음이 이미 예수님을 떠났으면서도 안 그런 척 하면서 영성체를 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2) “나를 먹는 사람”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먹는다.’ 라는 말은, ‘믿는다.’를 강하게 표현한 말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신다.”는 “나를 먹는다.”를 더욱 강하게 표현한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단순히 상징적인 말로만 그치지 않고, 성체성사를 통해서 ‘실제 일’로 이루어지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먹는다는 말은, 또는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말은, 당시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요한 6,60),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듣기 거북한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누가 들어도 듣기가 거북한 표현을 사용하셨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먹는다는 말은, 예수님과 완전한 결합과 일치를 나타내는 말이고, 예수님께서는 신앙인들이 당신과 완전한 하나가 되기를 바라셨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사실, 잘 생각해 보면, 그렇게 거북한 말은 아닙니다.
엄마의 태중에 있는 태아는 엄마의 생명력을 받아먹는데, 사실상 엄마를 먹는 것과 같습니다.
엄마의 젖을 받아먹는 갓난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엄마는 아기에게 자기 자신을 먹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엄마들처럼 당신 자신을
먹이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성체성사는 ‘예수님을 먹는’ 성사입니다.
인간이 땅에서 생산되는 온갖 곡식과 채소와 과일 등을 먹는 것은, 땅의 생명력을 받아먹는 일이고, 땅을 먹는 일입니다.
<생존을 위해서 먹는 일은 다 그렇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의 생명력을 받아먹는 일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먹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는 생명력입니다.
우리는 그 힘으로 살아가고, 그 힘을 받아서 영원한 생명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체성사는 우리를 살게 하는 사랑의 성사입니다.
예수님의 생명력을 제대로 받아먹으려면 우리 쪽에서도 능동적으로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음도 없고 사랑도 없으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을 받을 힘도 없고, 영원한 생명에 도달하지 못하게 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6월7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복음: 요한 6,51-58: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
1. 성체의 신비: 하느님의 말씀으로 생명을 얻는 백성
오늘은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이다. 이 대축일은 단순히 성체의 신앙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교회의 중심인 성체성사의 신비를 새롭게 깨닫고 그 생명 안에 살도록 부름을 받는 날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 그들을 살린 것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신명 8,3)라는 말씀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들의 배고픔을 채운 것은 만나였지만, 그 만나는 말씀의 표징이었다. 그 말씀은 하느님의 약속이었고, 그 약속은 하느님의 충실함 안에서 성취되었다. 이제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요한 1,14) 그리고 그분은 더 이상 하늘에서 떨어지는 음식이 아니라, 직접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내어주셨다. 이것이 바로 성체성사의 신비다.
2.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 생명의 실재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51절)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드러나는 계시의 핵심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을 ‘아멘’이라 응답하며 받는다. 그러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는 것은, 너희 자신이 그분이 되기 위함이다.”(Sermo 272 요약) 즉, 성체는 그리스도의 실제적 현존이며, 그분을 받아 모신다는 것은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는 실제적 친교를 뜻한다.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는 교리 교육서에서 이렇게 가르친다. “빵과 포도주가 단순한 상징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간구로 인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 너는 단순히 감각으로 보지 말고, 믿음으로 받아들여라.”(Catecheses Mystagogicae IV, 3–6)
3. 그리스도의 몸과 피: 완전한 자기 증여
유다인들은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52절)라며 놀란다. 이는 인간의 이해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신비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히 말씀하신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55절) 이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신 사랑의 절정을 뜻한다. 유다 율법에서는 피가 생명이라고 하여(레위 17,11), 피를 마시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당신의 피, 곧 생명 자체를 우리에게 내어주심으로써, 하느님의 생명에 우리를 참여시키신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성체성사는 십자가의 희생을 현재화(現在化)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완전히 전달하는 표징이다. 이는 인간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가장 완전한 길이다.”(Summa Theologiae III, q.73, a.3) 이 피는 용서의 피이며, 생명의 피다. 우리는 그분의 피를 마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고, 그분 안에 머무르게 된다.
4. 성체의 생명: 영원한 생명에의 참여
예수님께서는 세 번이나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51,54,58절)라고 강조하신다. 이는 단순한 내세적 약속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부활 생명의 참여를 뜻한다. 성체를 모실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에 실제로 참여하고, 그분의 사랑과 일치를 살아간다.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가 그분의 피와 살을 받아먹음으로써, 우리 육체도 부활할 것이다. 성체성사는 썩지 않는 생명을 우리 안에 심는 씨앗이다.”(Adversus Haereses, IV,18,5) 이처럼 성체는 우리 몸의 부활과 하느님의 생명에의 참여를 약속하는 구원의 성사다.
5. 성체와 교회의 일치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7) 성체성사는 단지 하느님과의 일치만이 아니라, 서로 간의 일치와 형제적 사랑의 원천이다. 성체는 교회를 하나로 만들고, 교회는 성체 안에서 자신을 인식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교회는 성체로 산다: Ecclesia de Eucharistia”에서 이렇게 가르친다. “성체성사는 교회를 세우며, 교회는 성체성사를 세운다. 교회가 성체를 거행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새로운 인류가 태어난다.”(21항) 그러므로 성체 안에서의 일치는 단순한 감정적 유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우리를 묶는 신적 일치의 실재다.
6. 성체의 목적: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도록
성 아우구스티노는 성체의 신비를 이렇게 요약한다. “그대는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아멘’이라 대답한다. 그대의 ‘아멘’은 ‘나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응답이다.”(Sermo 272 의역) 성체성사는 우리를 단순히 은총 상태로 머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가 되어 세상 안에서 사랑의 도구가 되게 하는 성사다. 이것이 바로 성체성사의 존재론적 목적이며, 신화(神化, theosis)의 길이다.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1요한 3,2) 성체를 모신다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살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7. 결론: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절정이자, 교회의 생명 중심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일치하고, 형제들과 일치하며, 부활의 생명에 참여한다. 따라서 성체성사는 단순한 전례의식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하느님 현존의 신비다. 성체이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미사 때마다 이렇게 고백하자. “주님, 제 안에 오시기를 원하시는 당신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제 삶이 당신의 몸이 되어 세상에 당신을 전하게 하소서.”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