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4일 [연중 제11주일]
마태오 9,36-10,8
착한 목자 되기: 행복한 성체 되기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마태 9,36)
찬미 예수님! 연중 제11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을 바라보시며 깊은 연민을 느끼십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기가 꺾여 있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원어 '에르리메노이'는 단순히 의기소침한 상태가 아니라, 맹수에게 갈기갈기 찢겨 길가에 내동댕이쳐진 채 스스로 일어설 힘조차 없는 처참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상처받고 길을 잃어 쓰러진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채찍질도, 훌륭한 설교도 아닙니다.
그들의 찢어진 상처를 보듬고 기를 살려 일으켜 세워 줄 '착한 목자'입니다.
구약의 엘리야 예언자를 보십시오.
그는 이세벨을 피해 광야로 도망쳐 싸리나무 아래 쓰러진 채 죽기를 청하였습니다.
"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1열왕 19,4 참조).
위대한 예언자도 기가 꺾이면 이렇게 됩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그를 야단치지 않으셨습니다.
천사를 보내시어 구운 빵과 물 한 병을 머리맡에 놓아 주시며 두 번이나 다정하게 깨우셨습니다.
"일어나 먹어라. 갈 길이 멀다." (1열왕 19,7 참조).
엘리야는 그 음식으로 힘을 얻어 사십 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에 이르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듯 기가 꺾인 이를 먼저 먹이시고, 완전히 회복시킨 다음에야 사명을 주어 보내시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선언하십니다.
"너희는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탈출 19,6).
그렇다면 세상을 살리는 사제, 즉 목자란 무엇이겠습니까?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성 그레고리오 나지안조 주교님의 말씀을 빌려 이렇게 가르칩니다.
"먼저 자신이 정화된 다음에 남을 정화시키고, 먼저 자신이 거룩해진 다음에 남을 거룩하게 하며, 먼저 자신이 하느님이 된 다음에 남을 하느님이 되게 하여야 한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589항 참조).
그렇습니다. 순서가 핵심입니다.
먼저 자신이, 그다음에 남입니다.
자신이 먼저 하느님의 사랑으로 행복해진 사람만이 타인에게 진정한 연민을 느끼고 그들을 행복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꺼진 초가 다른 초에 불을 붙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내 심지에 불이 활활 타고 있어야, 나는 내 불을 잃지 않으면서도 수백 개의 초에 빛을 옮겨 붙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감히 이 험한 세상에서 타인의 기를 살려주는 목자가 될 수 있을까요?
타인의 기를 살려주고 상처를 끌어안으려면, 아주 명확한 전제 조건이 하나 필요합니다.
바로 '내가 먼저 뼛속 깊이 사랑받고 있음을 깨달아, 내 기가 우주 끝까지 살아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데 어떻게 남을 일으켜 세울 수 있겠습니까?
이 원리를 가장 뼈저리게 증명해 주는 분이 계십니다.
얼굴의 절반을 덮은 붉은 모반과 상악동 암이라는
가혹한 시련을 이겨내고, 수많은 사람에게 희망의 목자가 된 방송인 김희아 씨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보육원에서 자라며 얼굴의 모반 때문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수없는 조롱과 괴물 취급을 받았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는 얼굴에 암까지 찾아와 뼈의 절반을 들어내는 대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세상을 원망하며 우울증이라는 깊은 어둠의 동굴에 자신을 가두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녀도 하느님께 제발 이 붉은 점을 없애달라고 피눈물을 흘리며 매달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기도 중에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흉측한 얼굴을 바라보시며, 자신보다 더 아프게, 더 많은 눈물을 흘리며 울고
계신 주님의 모습을 가슴 깊이 만난 것입니다.
그 순간 그녀의 영혼에 벼락같은 깨달음이 찾아왔습니다.
'아, 주님께서 나를 이토록 끔찍이 사랑하시는구나! 이 점은 흉터가 아니라, 주님이 나를 특별히 기억하시는 사랑의 표식이구나!'
자신이 우주의 창조주께 그토록 사무치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녀의 바닥났던 자존감은 하늘 꼭대기로 솟구쳐 올랐습니다.
그녀는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얼굴의 모반을 없애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어떻게 하면 나를 이토록 사랑하시는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릴까'만을 생각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내가 먼저 사랑받아 행복해지자, 그녀는 비로소 다른 이를 살리는 완벽한 '목자'가 되었습니다.
딸아이가 길을 걷다 넘어져 무릎에서 피가 날 때, 그녀는 호들갑을 떨며 야단치거나 불안해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아이를 안아주며 밝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아이고, 우리 딸! 이만하기 다행이네. 이것밖에 안 다쳐서 참 감사하네. 그치?"
처음에는 어리둥절해하던 아이도, 엄마의 그 굳건한 평화와 감사의 태도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아이가 먼저 넘어져 피가 나도 툭툭 털고 일어나며 말하게 되었습니다.
"엄마, 이것밖에 안 다쳤어요. 참 감사하지요?"
야단치고 걱정만 하는 세상의 보통 부모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입니다.
아이의 기가 꺾일 뻔한 두려움의 순간에, "우리는 이런 작은 일로 행복을 뺏길 시시한 존재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감사를 통해 증명함으로써 아이의 영혼을 강인하게 세워준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성 그레고리오 주교님의 가르침처럼, 이것은 사제뿐만 아니라 세상을 향해 파견되는 우리 모든 신앙인에게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내가 먼저 십자가의 피와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적 존재로 격상되고 그 압도적인 행복을 누려야만, 세상에서 기가 꺾인 이웃들에게 진정한 연민을 느끼고 그 행복을 전염시키는 '사제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슬픈 얼굴을 한 사람은 결코 기쁨의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내 안의 기를 살리고, 그 행복의 에너지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뇌과학과 심리학이 입증하고 모든 성인이 실천했던 가장 강력한 영적 무기가 있습니다. 바로 '감사'입니다.
인간의 뇌에는 망상활성계(RAS)라는 정보 필터링 시스템이 있습니다.
우리가 결핍과 불만에 집중하면, 뇌는 온 세상에서 불행한 증거들만 수집하여 우리를 지옥으로 밀어 넣습니다.
반대로 "이만해서 감사합니다" 라고 감사에 초점을 맞추면, 뇌는 즉시 내 삶에 숨겨진 하느님의 은총과 기적들을 찾아내어 우리를 천국으로 안내합니다.
말씀과 성체로 이미 감사의 조건은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 씨앗을 키우기만 합니다.
이 감사의 근육을 키우는 가장 훌륭한 훈련이 바로 '잠들기 전 감사 일기 쓰기'입니다.
인간의 뇌는 잠들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입력된 감정과 정보를 수면 기간 내내 장기 기억으로 저장하고 영혼의 무의식에 새겨넣습니다.
하루 종일 남을 흉보고 세상의 뉴스를 보며 분노하다가 잠이 들면, 우리 영혼은 밤새도록 독극물에 절여집니다.
하지만 잠자리에 누워, 오늘 하루 내 삶에 주어졌던 감사의 조건 5가지를 손가락을 꼽으며 찾아보십시오.
'오늘 아침 무사히 눈을 뜨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원한 물 한 잔을 마실 수 있어 감사합니다.
미운 사람을 향해 한 번 참을 수 있는 인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고 할 때, '가엾다(스플랑크니조마이)'라는
단어는 창자가 끊어질 듯한 극심한 고통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그냥 불쌍히 여기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창자를 끊어내듯 십자가에서 살과 피를 내어주심으로써 우리를 먹이셨습니다.
이 성체의 사랑을 매일 먹는 우리가, 어떻게 세상의 작은 상처에 기가 꺾여 주저앉을 수 있겠습니까?
감사는 이 성체의 사랑을 내 삶의 현실로 번역해 내는 가장 위대한 신앙의 언어입니다.
우리 자신이 행복한 성체가 되었음을 믿고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기운을 불어넣어 주고, 찢겨진 세상을 사랑으로 치유하는 거룩하고 행복한 목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행복한 성체로 살아가십시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11주일 강론>
(2026. 6. 14.)(마태 9,36-10,8)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9,36-10,8)>
1)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많은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루카 6,13).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따로 특별히 뽑으시고
그들을 사도로 삼으신 것은, 당신의 교회를 세우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조직과 제도를 만드신 것은,
당신이 승천하신 뒤에도 당신의 일을 신앙인들이 이어받아서 계속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 제도는 사실상 당신을 위해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구원 사업은 우리를 위한 일이고, 우리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일을 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도와드리는 협력자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것은,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또 스스로 구원을 위해서 일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구원 사업이 예수님 승천으로 마무리되는 일이었다면 교회라는 제도가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복음 선포가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1코린 3,7-9).”
2) 열두 사도는 ‘하느님의 건물’의 열두 주춧돌입니다.
신앙인들은 각자 맡은 직분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느님의 자녀로서, 또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사도 직무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자녀들은 상속자들이기 때문에(로마 8,17)
아버지의 일은 곧 자녀들 자신들의 일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아버지의 일꾼들이기도 합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가 다가오는데 아직도 믿고 회개하는 사람이 적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라는 말씀은, 더 많은 사람들이 믿고 회개해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사람들을 인도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선교활동은 잃은 자녀를 찾는 일이면서, 동시에 일꾼들을 모으는 일이기도 합니다.
<일꾼인 신앙인과 일꾼이 아닌 신앙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신앙인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선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 2,20-22).”
3)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라는 말씀은, ‘지금은’ 이방인들에게 가지 말고 ‘나중에’ 가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라는 뜻이기도 하고,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먼저, 또 가까운 곳에서부터 먼저 복음을 전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자기 식구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옳습니다.
식구들을 방치한 채로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자기 집안을 이끌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1티모 3,5)”
예수님께서는 승천 전에는 제자들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가라고 말씀하셨지만, 승천하실 때에는 ‘모든 민족들’에게 가라고 지시하셨습니다(마태 28,19).
그렇게 복음 선포 대상이 확대된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복음 선포가 완료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복음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마태 21,43).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라는 말씀은, 복음 선포는 하느님의 은총을 무상으로 나누어 주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하고, 교회는 ‘돈벌이’를 하는 장사꾼으로 전락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6월14일 [연중 제11주일]
복음: 마태 9,36–10,1-8
구원은 과거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늘 새롭게 일어나야 하는 현실!
100억을 가진 대부호가 100만원 밖에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내게 동업을 제안했다고 합시다.
누구라도 깜짝 놀라겠지요.
사업자금 든든하겠다,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프로젝트 역시 탄탄하겠다, 금상첨화인 것은 공동대표를 제안하면서 사업을 통해 창출되는 수익금의 절반씩을 나눠 갖자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제안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비슷한 제안을 하고 계십니다.
만왕이 왕이신 분께서, 어마어마한 분께서, 삼라만상을 다 소유하시고 다스리시는 분께서 자랑할 것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닌 제자들을 향해 인류 구원이란 큰 프로젝트를 들고 오셔서 동업하자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이란 대 명제 앞에 때로 거추장스럽고 별 도움도 되지 않는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과분하게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구상하는 위대한 사업에 별 효용 가치도 없는 우리를 끌어들이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초대요 너무나 분에 넘치는 초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열두 제자들에게 있어 부르심 그 자체가 구원에로의 초대였습니다.
그분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고 따라나서는 그 자체가 구원되는 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예수님을 통해 정점에 도달합니다.
용서하고 해방하며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참모습이 예수님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그러우시고 겸손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 여정에 우리를 참여하라고 부르십니다.
우리 같은 소자본 주주들 당신이 구상하는 큰 사업에 별 도움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파트너가 되어줄 것을 바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인간 본성을 취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신성하게 만드셨습니다.
필멸의 운명을 지닌 우리를 당신 나라의 영원한 생명의 문으로 인도하셨으며, 썩을 몸인 우리를 불변의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참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랜 세월 우리 인간이 지니고 온 고통과 죽음을 말끔히 가져가지 않으셨습니다.
당신 스스로 고통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당신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통해 고통과 죽음을 대하는 올바른 방법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뚫고 나아가시면서 고통을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그 옛날 의기소침해 있던 제자들을 부르셔서 당당한 당신 사업의 파트너로 부르셨듯이 오늘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에게 죽음을 대면하도록 부르시고, 죽음의 두려움 앞에 나를 세우기 위해 부르시고, 부활에 대한 신뢰로 두려움을 넘어서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할 일이 뭐가 뭔지, 돌아가는 분위기 파악도 제대로 못 하는 무책임한 제자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분의 삶 전체, 십자가 죽음 앞에 자신의 온 삶으로 응답하는 제자를 원하십니다.
구원은 과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늘 새롭게 일어나야 하는 현실입니다.
부르시는 주님의 초대에 시시각각으로 응답하는 일, 고통과 두려움을 딛고 일상적으로 일어서는 일이 오늘 내 하루를 구원합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하느님의 구원과 해방, 사랑의 힘이 우리 안에 자리 잡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 힘으로 내가 변화되고 성장해야 합니다.
분열과 방황, 죄와 타락의 세력 앞에 담대히 맞서 오늘 내가 구원되는 하루가 되길 빕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