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오복음 19,23-30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16-22)과 한단락으로 다시 한번 함께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이 단락은 세부분으로 나눌수 있습니다.
- 젊은이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16-22)
- 부가 가지고 있는 위험.(23-26)
- 모든 것을 두고 예수님을 따른 이가 받는 보상.(27--29)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영원한 생명을 나의 노력으로 얻어내겠다는 뉘앙스가 느껴지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의 선하심을 보도록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라고 하시며 이미 잘 알려진 십계명의 일부로 답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생명에 들어가는 길이라 하십니다.
같은 내용의 병행구절을 보면
계명을 잘 지키고 그래도 뭔가 부족하다 여겨져 더 하겠다고 나선 젊은이를 예수님께서 대견하게 보십니다.(마르10,17-31)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이가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간(22) 것은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길과 마주하지 못한 까닭인듯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ᆢ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24)
하십니다.
富가 가진 위험은 하느님 자리를 넘어다 본다는데 있습니다.
재물은 내 마음자리를 차지하려 듭니다. 우리의 시선이 하느님께로 가 있지 않으면 우리 마음을 호시탐탐 앗아가려는 세력이 우리 곁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분 현존의식, 그분 사랑의 눈길을 알아차리는 것이 삶 안에서 맞닥뜨리는 유혹, 아픔, 끊음을 이겨낼 수 있는 비결입니다.
기도란 바로 예수님의 눈길과 마주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받는 일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들 "(29), 목숨까지 내어놓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26)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도가 예수님의 눈길과 마주하고 사랑을 받아먹는 시간이기를 청합니다.
(천 사비나 수녀님)
8월19일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마태오 19,23-30
낙타가 바늘귀 실처럼 가늘어지는 유일한 방법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안도하며 생각합니다.
‘나는 부자가 아니니 다행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오늘 우리는 이 ‘바늘귀’의 의미를 완전히 새롭게 보아야 합니다.
바늘귀는 재산 심판대가 아니라, 우리 영혼의 ‘자유도(自由度)’를 측정하는 문입니다.
그리고 바늘귀를 통과한다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언제든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는 ‘영적 자유’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의 ‘부자’란 누구일까요?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이 자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내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욕망에 묶여, 저 좁은 자유의 문을 통과하지 못하는 영혼이 바로 ‘낙타’와 같은 부자입니다.
19세기 미국에 ‘월스트리트의 마녀’라 불린 헤티 그린이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당대 세계 최고의 여성 갑부였습니다. 오늘날 가치로 수십조 원의 재산을 가졌지만,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 찬 오트밀을 먹었고, 닳아빠진 검은 옷 한 벌로 평생을 버텼습니다.
어느 날 그녀의 아들 네드가 다리를 심하게 다쳤습니다.
병원에 가면 될 일이었지만, 헤티는 병원비를
내지 않기 위해 몇 시간이나 아들을 데리고 무료 자선 병원을 찾아 헤맸습니다.
결국 치료의 ‘골든타임’을 놓친 아들의 다리는 괴사했고, 평생 다리를 절단한 채 살아야 했습니다.
수십조 원의 재산을 가졌지만, 아들의 다리 하나를 위해 돈을 쓸 자유가 없었던 어머니.
그녀는 역사상 가장 부유한 여인이었지만, 돈의 노예가 되어 아들을 향한 가장 기본적인 사랑의
의무마저 저버린,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영혼이었습니다.
헤티 그린은 왜 그렇게 비참해졌을까요? 그녀는 돈을 지키는 것이 자신과 가족을 지키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는 정반대입니다.
소유에 대한 집착은 우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옭아매는 쇠사슬이 됩니다.
그 쇠사슬에 묶인 영혼은,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결정적인 순간에 아무것도 내어놓지 못합니다.
여기, 그와는 정반대의 삶을 산 한 사람이 있습니다.
1976년, 구소련의 수영 챔피언이었던 샤바르슈 카라페티안. 어느 날 그의 눈앞에서 승객을 가득 태운 버스가 호수로 추락하는 끔찍한 사고가 벌어집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얼음물 속으로 뛰어들어, 수심 10미터 아래에서 20명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그 대가로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챔피언의 경력을 완전히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신문에는 장비 탓하며 한 명도 구하지 않은 구조대원들이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누가 구조한 게 뭐가 중요해요. 사람들이 산 게 중요하지.”라고 말했습니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자유롭게 했을까요?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늘 겸손했지만, 우리는 그의 뿌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세계 최초로 그리스도교를 국가 신앙으로 받아들인 아르메니아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조상들은 수많은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과 재산을 기꺼이 내어놓았던 순교자들의 후예였습니다.
샤바르슈의 할아버지 역시 ‘아르메니아 대학살’ 당시 터키인 이웃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분이었습니다.
‘이웃의 희생으로 내가 존재한다.’라는 이야기는 그의 가족 안에서 살아 숨 쉬는 신앙의 유산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그 순간 어떤 기도를 바쳤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의 몸이 기도가 되었습니다.
자신을 희생하여 이웃을 구원하는 위대한 사랑의 정신, 그의 핏줄과 영혼에 1,700년 넘게 새겨져 온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이 그의 온몸을 통해 드러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하는 힘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 답은 바로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팔라고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더 중요한 명령이 뒤따릅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우리의 자유는 ‘무엇을 버리는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따르는가’에서 옵니다.
어린아이들을 보십시오.
아이들은 자기 손에 쥔 과자를 옆의 친구에게 스스럼없이 나눠줍니다.
왜 그럴 수 있습니까? 자기 뒤에 과자 한 봉지를 통째로 들고 있는 엄마 아빠가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가진 부모와 함께 있기에, 아이는 결핍의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재물과 명예, 심지어 내 목숨까지도 내어놓는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까?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모든 것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따르고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온 세상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믿기에, 내 손에 쥔 작은 것을 더 이상 움켜쥘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더 이상 세상의 것에 묶인 낙타가 아니라, 언제든 저 자유의 바늘귀를 통과할 수 있는 바람과 같은 존재가 됩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는 27년간의 억울한 옥살이를 마치고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모두가 그가 복수심에 불탈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는 자신을 가두었던 백인들을 용서하고 함께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는 감옥이라는 가장 부자유한 공간에서, ‘미움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가장 위대한 자유를 얻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부르심 받은 자유는 바로 이 ‘만델라의 자유’입니다.
돈과 명예로부터의 자유뿐 아니라, 내 안의 미움과 원망, 이기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이 자유는 한순간에 얻어지지 않으며 평생에 걸친 영적 수련이 필요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끝까지 해보기 전까지는 늘 불가능해 보입니다.”, 또 말합니다.
“나는 잊지는 않지만, 용서합니다.”
그는 이 자유를 위해 끝까지 자신과 싸운 사람이었습니다.
결국엔 어제와 마찬가지 결론입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끊임없이 내가 가진 반죽과 기름을 조금씩 봉헌하는 것입니다.
그 연습을 매일 할 때 엘리야를 맞아들여 죽은 아들의 생명을 되찾은 사렙다 마을의 과부처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만델라는 말합니다.
“사랑도 배울 수 있습니다.” 이 작은 연습들이 쌓일 때, 우리는 마침내 저 좁은 바늘귀를 유유히 통과하는,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영혼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2코린 3,17)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19일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복음: 마태 19,23-30
부자로서 구원에 이르는 길!
예수님께서는 어제에 이어 또 다시 부자들을 향한 강력한 경고 말씀을 건네십니다.
듣고 있노라니 혹시 예수님께서 부자들로부터 큰 상처나 홀대를 당하셨나, 하는 의구심까지 들 정도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부자들을 싸잡아 신랄하게 공격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공생활 기간동안 예수님께서는 착한 부자들과 종종 어울리셨고, 그들의 관대한 나눔과 희사에
극찬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예리코의 세리이자 큰 부자였던 자캐오의 회개를 크게 기뻐하셨고, 새로운 삶에 대한 감사의 선물로 자신의 재물을 가난한 이웃과 나누겠다는 결심을 축복하셨습니다.
반면 거지 라자로의 비유를 통해 높이 쌓아 올린 막대한 부를 조금도 나누지 않고, 그저 자기 한 몸 호의호식하는 데만 사용한 부자의 비참한 결말을 우리에게 소개하셨습니다.
사목자로 살아오면서 참으로 관대하고 너그러운 부자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오랜 세월 애써 모은 소중한 재물인데, 정말 필요한 곳이라 확신이 서면 아낌없이 적극적인 나눔을 실천합니다.
그 덕분에 교회와 수도회가 운영되고 유지됩니다.
부족하고 가난한 저희라서 아무런 재물도 능력도 없는 존재이지만 그분들의 관대함으로 인해 선한 부자들과 가난한 이웃 사이의 가교역할을 해나가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분들인지 모릅니다.
부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강력한 경고 말씀 앞에 두려워할 일이 아닙니다.
그분 말씀의 진의를 파악하고, 부자로서 구원에 이르는 길을 찾아 나가야 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강론>
(2025. 8. 19. 화)(마태 19,23-30)
<예수님의 가르침을 완화시키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때에 베드로가 그 말씀을 받아 예수님께 물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그리고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태 19,23-30)”
1)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라는 말씀은,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은, ‘부자’ 라는 말을
여러 가지로 해석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든 완화하려고 애를 쓰고, 또 “재물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또는 “부자라는 것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다.” 라는 등의 말을 하면서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왜 그냥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그것은 ‘온 삶’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반성하고 고치는 것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약화시키는 것이 더 쉬운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라는 사도들의 질문은, “하느님의 복을 많이 받은 것으로 여겨지는 부자들이 내세에서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면, 누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이쪽 세상에서 누리고 있는 부유함과 풍요로움은 전부 다 하느님께서 주신 복이라는
잘못된 사고방식에서 나온 질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사도들이 부자였던 것은 아니고,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런 잘못된 사고방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2) 구약성경 잠언에 있는 유명한 기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당신께 두 가지를 간청합니다.
제가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여 주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 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 30,7-9).”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가난한 사람은 무조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 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 ‘무조건’이란 없습니다.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신앙인들이 모두 굶주리고 헐벗고 쪼들리면서 고생하기를 바라신 것도 아닙니다.
신앙인은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님께 청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고, 그것으로 그쳐야 합니다(1티모 6,8-9).
3) ‘재물’에는, 또는 ‘돈’에는 사람들을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마성(魔性)이 숨어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1티모 6,10).
그러니 재물 자체가 구원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걸림돌로 작용합니다.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이 많지만, 잘 피해서 넘어지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4)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전적으로 하느님께만 의지해야 한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마음속에 하느님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야 합니다.
5) 29절의 ‘백배의 보상’과 ‘영원한 생명’에 관한 말씀은, 신앙인들의 ‘버림’과 ‘따름’은 결코 ‘헛일’로 끝나지 않는다는 약속입니다.
신앙생활은 괜히 사서 고생하는 생활이 아니고,
헛고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반드시 그 대가와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대가와 보상에 대한 보증이신 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들과 예수님의 약속들을 믿는 것입니다.>
30절의 ‘그런데’는 ‘그래서’로 바꿔서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현세에서의 처지와 내세에서의 처지가 역전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부자들에게는 경고 말씀이 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약속의 말씀이 됩니다.
루카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라자로’가 좋은 예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