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르코복음 12,35-37
사람들은 늘 자신이 기대하는 모습대로 하느님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면 나라를 강하게 만들고, 억압하는 세력을 몰아내고, 다윗 왕국의 영광을 다시 세워 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이라 불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기대를 넘어서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칼과 권력으로 세상을 바꾸러 오지 않으셨습니다. 원수를 무너뜨리기보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고, 왕좌가 아니라 십자가를 선택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강한 왕을 기다렸지만, 하느님께서는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아~ 이를 알아듣고 받아들이기 얼마나 어려운지요! 받아들인다함은 나도 그 길을 걷겠다는 뜻이니까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을 내 기대 안에 가두려 할 때가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는 문제를 즉시 해결해 주시는 분으로, 억울할 때는 내 편을 들어 주시는 분으로, 불안할 때는 원하는 결과를 가져다주시는 분으로만 바라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의 기대보다 더 크신 분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길이 아니라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는 길을 보여 주시고, 우리가 꿈꾸는 성공이 아니라 참된 사랑과 자유를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예수님의 질문은 우리에게도 들려옵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내가 만들어 놓은 작은 틀 안의 예수님입니까? 아니면 나의 생각과 기대를 넘어서는 주님이십니까?
참된 신앙은 내가 원하는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주님을 만나고 그분을 따라가는 데서 시작됩니다.
때로는 이해되지 않아도, 기대와 달라도, 그분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 때 우리의 믿음은 한 걸음 더 깊어집니다.
(천 사비나 수녀님)
6월5일 [연중 제9주간 금요일]
마르코 12,35-37
나에겐 왜 하.사.시.가 기쁜 소식이었을까?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 (마르 12,37)
찬미 예수님! 오늘은 연중 제9주간 금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을 가만히 묵상하다 보면 우리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아주 신비로운 대목이 하나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율법 학자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십니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다윗 스스로 성령의 바탕에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마르 12,35-37 참조).
예수님의 이 날카로운 성서 해석이 끝나자, 성경은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고 기록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실존적인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수많은 군중은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기뻤을까요?
예수님이 성경 퀴즈 대회에서 율법 학자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주었기 때문에 그저 통쾌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군중이 환호하며 기뻐했던 진짜 이유는, 예수님의 그 한마디가 밑바닥을 기어 다니던 그들의 '자존감'을 단숨에 우주 끝까지 끌어올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율법 학자들이 가르치던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이다"라는 교리는 철저히 혈통과 행위, 그리고 세상적 권력을 중심에 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 잣대 안에서 가난하고 못 배운 군중은 영원히 구원의 변두리에 머무는 쓸모없는 존재들에 불과했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백성들에게 613가지나 되는 복잡한 규정을 들이밀며 "이것을 해야 한다, 저것을 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라고 끊임없이 '행위'만을 강요했습니다.
이처럼 행위의 굴레에 얽매인 율법은 인간에게 어떤 희망도, 기쁨도 주지 못하는 무거운 감옥일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메시아는 단순한 다윗의 핏줄이 아니라, 다윗조차 우러러보는 창조주 하느님 본인이시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치하러만 오신 것이 아니라,
친히 인간의 자리까지 내려오시어 우리를 당신의 생명 안으로 끌어올리러 오셨다는 위대한 복음이
선포된 것입니다.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은 사람에게 먼저 "너 왜 그것도 못 하니?"라고 행위를 따지지 않습니다.
복음은 가장 먼저 "너는 하느님께서 친히 목숨을 걸고 찾아오실 만큼 우주에서 가장 귀한 존재다"라고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해 줍니다. 사람은 딱 자신이 가진 자존감만큼만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을 먼저 주지 않고 행위부터 요구하면, 복음은 짐이 되고 신앙은 기쁨이 아니라 얽매임이 됩니다.
오늘 군중이 느꼈던 이 '복음의 기쁨'을 생각할 때마다, 저는 대학교 1학년 때 제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던 강렬한 체험 하나를 떠올리게 됩니다.
저는 원래 활자 매체, 즉 책을 읽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즘처럼 유튜브 쇼츠가 있던 시절도 아니었지만, 저는 빠르고 자극적인 쾌감을 즐기는 평범하고
세속적인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제가, 무려 10권짜리나 되는 방대한 책을 장장 5년에 걸쳐 끝까지, 그것도 너무나 기쁘고 가슴 벅차게 읽어낸 적이 있습니다.
바로 이탈리아의 신비가 마리아 발토르타가 쓴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원제: 내게 계시된 대로의 복음)라는 책이었습니다.
책 읽기를 그토록 싫어하던 제가 왜 이 방대한 책에 푹 빠져들었을까요?
그 책 속에서 저는, 제가 그동안 머리로만 알고 있던 '무섭고 명령만 하시는 심판관' 예수님이 아니라, '진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책 속의 주님은 너무나 자주 눈물을 흘리셨고,
한없이 온유하고 겸손하셨으며, 보잘것없는 죄인들을 위해 당신의 심장을 다 쏟아내시는
지극한 사랑의 결정체였습니다.
제가 영원히 함께 살아야 할 분이 그토록 따뜻하고 아름다운 분이라는 사실을 하나씩 알아가는 과정이 제게는 숨이 멎을 듯한 기쁨이었습니다.
저는 책을 읽으며 그 따뜻한 예수님과 함께
흙먼지를 마시며 걸어 다니는 제자들이 미치도록 부러워졌습니다.
"나도 저분과 더 가까이 머물고 싶다.
저분의 곁에서 영원히 떨어지지 않고 싶다."
이 간절한 갈망과 기쁨이, 세속의 쾌락을 좇던 저를 신학교로 이끌었고 결국 사제의 길을 걷게 만들었습니다.
복음은 이렇게 기뻐야 합니다.
나를 심판하는 규칙서가 아니라, 나를 미치도록 사랑하는 분의 정체성을 깨달아 그분 곁에 찰싹 달라붙어 머물고 싶게 만드는 거룩한 자석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여전히 "미사에 빠지면 대죄다", "십일조를 내야 한다", "봉사를 해야 축복받는다"라는 행동 강령에만 매달려 있지 않습니까?
주님의 아름다우심을 전하여 신자들의 가슴을 뛰게 하기보다는, 율법의 채찍으로 영혼을 닦달하며 "해야 한다"는 무거운 짐만 지워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반성하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의 참모습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주님과 성모님의 진짜 정체성을 온전히 마주할 때, 우리 영혼이 얼마나 압도적인 경외감과 마주하게 되는지 보여주는 또 다른 체험이 있습니다.
제가 사제 성소에 대해 깊이 갈등하며 고뇌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송탄성당에 홀로 올라가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성당 마당에 세워진 성모님 상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차가운 돌로 만들어진 성모님 상이 마치 살아 숨 쉬는 진짜 사람처럼 변하더니, 온몸에서 푸르고 눈부신 빛을 뿜어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 압도적이고 거룩한 빛 앞에서, 저는 온몸이 굳어버렸습니다.
두려움과 경외심이 밀려와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감히 눈을 들어 성모님을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성모님을 아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분들의 진짜 위대하고 거룩한 정체성을 티끌만큼도 모르고 있었구나.'
최근에 제가 진행했던 '요한복음 8주 강좌'를 들으신 어느 형제자매님의 후기 글은, 이 '머무름의 신비'가 우리 영혼을 어떻게 부활시키는지 완벽하게 증명해 줍니다.
그분은 이렇게 적어주셨습니다.
"오랜 냉담과 방황의 고독 속에서 고아처럼 헤매던 나를 따뜻한 말씀의 빛으로 이끌어 주신
신학적 통찰과 다정한 강의에 깊이 감사드린다. 이번 강좌가 내게 준 것은 새로운 지식도, 신앙의 무지를 단숨에 깨부순 것도 아니라, '그 문이 어디 있는지를 처음으로 제대로 알게 된 것'이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처럼 내가 대단한 무언가를 이루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분 곁에 다시 붙어 있기로 했기 때문에' 이제 조금씩 살아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8주의 여정 동안 말씀의 표징들을 따르는 사이, 나는 언제부턴가 다시 걷고 있었다.
거창한 결심이나 극적인 순간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강의를 열고 말씀을 듣고 잠시 멈추어 생각하는 시간들이 쌓이면서, 오래 닫혀 있던 문이 아주 조금씩 열리는 느낌이었다.
그 걸음이 어느새 내가 광야를 벗어나 그분 옆에 서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렇습니다. 이분은 아주 정확하게 복음의 핵심을 꿰뚫으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이유는 대단한 업적이나 거창한 결심을 이루어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분처럼 그저 주님의 곁에 "다시 붙어 있기로"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모실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도 오직 하나뿐입니다.
우리의 모든 복음 선포는, 주님이 나무이심을 알게 하고 우리가 가지임을 깨달아 그분께 기쁘게
붙어있게 만드는 생명의 초대장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통해 나를 끔찍이도 사랑하시는 그분의
정체성을 깊이 묵상하며, 주님의 품 안에 찰싹 달라붙어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가장 벅찬 기쁨을 누리는 복된 가지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9주간 금요일 강론>
(2026. 6. 5. 금)(마르 12,35-37)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율법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마르 12,35-37)>
1)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다윗 왕실의 후손 중에서 이스라엘 왕국을 재건할 왕이(메시아가) 태어날 것이라는 믿음을 나타내는 호칭입니다.
그 믿음은 다음 예언들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유다에게 조공을 바치고, 민족들이 그에게 순종할 때까지, 왕홀이 유다에게서, 지휘봉이 그의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않으리라(창세 49,10).”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미카 5,1).”
36절의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에서
앞의 ‘주님’은 ‘야훼 하느님’이고, 뒤의 ‘주님’은
‘구세주(메시아)’입니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는, “메시아는 적대자들을 굴복시키고 세상의 통치권을 장악할 것이며 하느님의 오른쪽 자리로 높임을 받게 될 것이다.” 라는 예언입니다.
이 예언은, 메시아를 지상적인 왕으로만 생각했던
유대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메시아는 지상적인 왕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왕’이라는 예언입니다.
37절의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는, “다윗 자신이 메시아를 하느님 오른쪽에 앉아 계시는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고백했는데”입니다.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라는 말씀은,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다.” 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혈통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사실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다윗이 ‘주님’이라고 부른 분이기 때문에, 다윗보다 더 높은(초월적인) 분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메시아는 인성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신성으로는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께서는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로마 1,3-4).”
2) 예수님의 말씀에는 “메시아는 이스라엘만을 구원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온 세상 모든 민족들을 구원하는 메시아”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민족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민족들의 하느님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보내신 메시아께서 온 세상 모든 민족들을 구원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여기서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였다.” 라는 말은, “메시아는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똑같이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예수님 말씀의 뜻을 군중이 바로 알아들었음을 나타냅니다.
만일에 다윗 왕실을 재건하는 일만 하는 것으로 그치는 메시아라면, 메시아 덕분에 로마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정치적인 독립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일반 서민들에게는 별로 좋을 것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당시 서민들의 입장에서는 다윗 왕실의 지배를 받는 것이나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는 것이나 그다지 차이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들어가기를 희망하는 하느님 나라는 지배 계층도, 기득권층도, 계급도, 신분도 없는 나라입니다.
만일에 이쪽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그 나라에서도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이쪽 세상에서 낮은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 그 나라에서도 낮은 위치에 있어야 한다면, 그런 나라는 하느님 나라가 아닙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이렇게 찬양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1-53).”
물론 기득권층 사람들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기득권을 모두 내려놓고 빈손이 된다면...... 그런데 그것은 죽은 다음이 아니라 지금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3)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관해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3-5).”
이 말씀에서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다.’ 라는 말은,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온 삶으로’ 어린이가 되라는 뜻이고, ‘버림’과 ‘비움’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학식이나 명예나 지위나 재산이나 권력 같은 것은,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고, 하느님 나라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6월5일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복음: 마르 12,35-37
나도 사랑하지만 나와 맞지 않는 그도 사랑하시는 하느님!
언젠가 공동체 아침 미사를 집전하고 있는데, 살짝 늦게 일어난 한 청소년이 성전 문 앞에서 쭈볏쭈볏, 들어올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저는 활짝 웃으면서 어서 들어오라고 크게 손짓했습니다.
그제야 안심이 된 청소년은 뒷좌석에 앉아 열심히 미사에 참여했습니다.
야행성인지라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었을 텐데, 늦게라도 미사에 나와준 것이 감사해서 강론 시간에 크게 칭찬했습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 자주 묵상합니다. 우리의 주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크신 분, 너그럽고 관대한 분이십니다.
미사 좀 늦었다고 대노하고 격분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전 6시, 9시에 포도밭에 일하러 온 부지런한 일꾼들에게도 잘 왔다고 칭찬하시며, 넉넉한 하루 품삯을 건네시지만, 게을러터져서 정오, 오후 3시, 5시에 와서 딱 한 시간만 일한 일꾼들도 어여삐 보시며 똑같은 품삯을 건네시는 편안하고 따뜻한 분이십니다.
오늘 에수님께서는 하느님, 인류를 구원하러 이 땅에 내려오신 메시아 예수님을 크게 오해하고 있는 율법 학자들을 책망하십니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마르 12,35)
사실 예수님께서 다윗 가문의 족보에 이름을 올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인식하는 것을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극진히 자신을 낮추셔서,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셨지만, 태어나신 메시아 예수님은
혈육을 취하신 인간인 동시에 하느님 그분 자체이십니다.
많은 경우 우리도 하느님을 너무 편협된 시선으로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온 세상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신데, 내 가정, 내 공동체, 나 자신의 사라사욕만을 끝도 없이 채워주시는 자판기같은 하느님으로 오해합니다.
전 세계, 모든 만민, 모든 생명체를 두루 보살피셔야 하는 크신 하느님이신데, 내 고장, 내 혈육, 내 가문, 내 나라만 애지중지하시고, 만사형통하게 하시고, 지속적으로 복을 베푸시는 편애하시는 하느님으로 착각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외침처럼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우리는 점점 작아져야 합니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좀 더 폭이 넓어져야 하겠습니다.
그분을 나만의 하느님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하느님으로 바라봐야 하겠습니다.
그분은 나도 사랑하시지만, 나와 철저하게 맞지 않는 그도 사랑하는 크신 하느님임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