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8일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마태오 5,1-12ㄴ
참행복: 존재 가치 상승 욕구의 충족
연봉 100억이 넘는 정승제 수학 강사는 “강남 아파트 살면 행복할 거 같아?”라고 아이들에게 묻습니다.
그리고 “절대, 절대, 절대 행복하지 않아!”라고 말합니다.
왠지 약을 올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진심이 묻어납니다.
40~50억짜리 한강 경치가 보이는 강남 아파트에 아마도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제일 행복할 때는 아파트를 사기 위해 처음 갔을 때. 그다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잔금을 낼 때.
막상 들어가 살면 전혀 행복하지 않아.
더 올라갈 데가 없으니까!”
무엇이든 배울 때가 제일 재미있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당구도 80이 젤 재밌다고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임영웅, BTS 절대 행복하지 않아.
올라갈 데가 없으니까.
대학도 마찬가지야.
들어갈 때가 제일 행복하고 그다음부터는 행복하지 않아.
그 안에 갇혀버린 거니까. 더 갈 곳이 없어.”
이 말 안에서 ‘희망’이 행복에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행복하여지려면 끊임없이 희망해야 하고 그 희망이 끊임없이 달성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이 결코 완전히 달성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희망은 무엇입니까?
돈, 명예, 쾌락입니까?
사실 그런 모든 욕망을 아우르는 욕망이 하나 있습니다.
‘존재 상승 욕구’
그냥 인정받으려는 욕구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강남 아파트를 살 때 처음 그 집을 보았을 때, 그리고 잔금을 치를 때 느끼는 맛은 ‘내가 이런 사람이야!’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존재 상승 욕구가 있고 그것이 충족될 때 가장 행복합니다.
왜 돈이 있는 것을 자랑할까요?
그것은 돈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으려 하는 것입니다.
존재 상승 욕구를 추구하는 우리는 모두 두 종류로 나뉩니다.
나의 창조자, 부모를 닮아가며 존재 상승의 기쁨을 경험하거나, 아니면 소유와 경쟁을 통해 타인보다 높은 존재임을 증명받으려는 사람입니다.
이는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비가 되어 존재가 상승하려는 노랑 애벌레와 애벌레 기둥을 기어올라 더 높아지려는 줄무늬 애벌레의 차이입니다.
저는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읽으며 경쟁이 아닌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닮아가는 행복을 추구하려고 신학교에 늦게나마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회를 한 적이 없습니다.
존재가 향상됨이 자주 느껴지고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산상설교, 예수님 가르침의 시작이고 첫 주제는 ‘행복’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해지는 방법은 마음이 가난해져야 하고, 슬퍼해야 하고, 온유해야 하며,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야 하고, 자비로워야 하며, 마음이 깨끗해야 하고, 평화를 이루려고 해야 하며, 의로움 때문에 박해도 받아야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떠올리면 됩니다.
그리스도를 닮으면 부활의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과정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행복은 당신을 닮아가는 데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저로 말하자면 이전의 세속-육신-마귀의 행복을 좇던 것에서 지금은 주님을 닮는 것이 목적이니
마음이 조금은 가난해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의 성공을 좇을 때보다 분명 행복합니다.
하지만 하느님 사랑을 모르고 여전히 자기 스스로 행복해지려 노력하는 이들을 보면 슬픕니다.
아기보다 어머니가 행복한 것처럼 그래도 슬퍼질 줄 아는 사람이 된 것이 더 행복합니다.
가끔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우울증에 시달리는 이들을 봅니다.
그러나 저는 화가 날 일이 별로 없습니다.
다 주님 뜻이라 여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온유는 내가 죽는 데서 나옵니다.
그것 자체가 행복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피로 하늘을 향해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되려고 했고 조금씩 죄책감에서 벗어나지는 것도 행복입니다.
또한 이런 것 때문에 사실 박해도 없지 않은데, 가장 짜릿한 이상한 행복이 그때 옵니다.
그리스도와 매우 닮아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를 닮아감의 과정은 끝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처럼 되기에는 한없이 모자라는 자신을 봅니다.
이것이 슬프기도 하지만 또한 끝이 아니기에 행복이 거기서 멈추지도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행복은 부모를 닮아감입니다.
더는 부모처럼 살고 싶지 않을 때 행복을 잃습니다.
부모처럼 말을 하고 부모처럼 두 발로 걸으며 얼마나 큰 기쁨을 누리겠습니까?
물 위를 걸은 베드로는 그때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유튜브에 보니 아기가 처음 “엄마!”라는 말을 했을 때 엄마가 기뻐서 계속 “엄마, 엄마, 엄마?”라고 하고 그러면 아기도 “엄마, 음마, 암마…”라고 하며 웃는 동영상이 있습니다.
엄마도 기쁘고 아기도 기쁩니다.
이것이 최고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일 수 없습니다.
우리도 하느님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가는 일이 최고의 행복입니다.
그러니 나의 변화하는 모습을 행복의 이유로 삼아봅시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재미를 들여봅시다.
그러면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진정 행복의 길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
(2026. 6. 8. 월)(마태 5,1-1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마태 5,1-12)>
1) 예수님의 ‘참 행복 선언’ 말씀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위로와 격려 말씀이 되고,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회개를 촉구하는 경고 말씀이 됩니다.
그래서 “행복하여라.” 라는 말씀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행복하게 될 것이다.” 라는 약속이 되고,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행복하기를 바란다면”이라는 말씀이 됩니다.
여기서 ‘행복’이라는 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 행복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되는 기쁨, 평화, 안식 등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약속은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지 알 수 없는 막연한 약속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실현되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나중에 하늘나라를 차지하고 행복하게 될 테니, 가난해도 참고 살아라.”가 아니라, “지금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니 가난에 굴복하지도 말고, 가난을 부끄러워하지도 말고, 가난 극복을 위해서
노력하여라.”입니다.
가난에 굴복한다는 말은, 하느님을 등지고 돈을 따라간다는 뜻입니다.
가난을 부끄러워한다는 말은, 가난을 ‘하느님의 복을 받지 못한’ 상태로 오해한다는 뜻입니다.
가난은 우리가 힘을 합쳐서 극복해야 할 고통입니다.
누구에게나 가난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가난 때문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다가 결국 중단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상황에 공동체가 무관심하다면, 그 무관심은 큰 죄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일은,
대부분 공동체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전하는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사도 4,34).
이 말은, ‘남들보다 더’ 궁핍한 사람도 없었고,
‘남들보다 더’ 부유한 사람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도 없었다.’ 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먹을 때 함께 먹고 굶을 때 함께 굶는다면, 모두가 똑같이 그렇게 한다면, 가난함이 고통이 되지 않고, 그런 공동체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금방 체험할 수 있습니다.
2) “행복하여라.”를 “행복하기를(구원받기를) 바란다면”으로 읽으면,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라는 말씀은,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재물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하늘나라만 추구하여라.” 라는 가르침이 됩니다.
이 가르침은 ‘낙타와 바늘구멍’에 관한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3-24).”
이 말씀에서 ‘부자’는, 하느님은 섬기지 않고 재물을 섬기는 사람을 가리킵니다(마태 6,24).
부자가 되기만을 바라는 사람도 포함됩니다(1티모 6,9).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만 섬기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3) 그리스도교는 가난한 이들만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종교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는 분이고,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 나라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합당한 자격을 갖춘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데,
‘참 행복 선언’ 말씀은 그 자격을 얻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이 됩니다.
지금 현세에서 누리고 있는 것들이 너무 좋고, 너무 행복해서,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 등은 생각하지도 않고, 하느님을 잊은 채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자격을 얻을 수 없고, 그냥 그렇게 살다가 허무하게 끝날 것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 16,26)”
이 가르침은, 지금 부유하든지 가난하든지 간에
‘모든 사람’을 향한 가르침입니다.
누구든지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구원받을 수 있도록 살아야 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6월8일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복음: 마태 5,1-12
만 원 짜리의 행복!
나이를 조금 먹어가면서 행복에 대한 기준이 대폭 수정되었습니다.
젊은 시절, 더 높이 올라가고, 더 많이 벌고, 더 인기를 얻고, 더 대박을 내고...그러면 더 행복해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느끼는 바도 참 많습니다.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재산과 부동산을 보유하게 된 거부들, 행복할 줄 알았는데, 반대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유산 상속 때문에 벌어지는 부모 자식, 형제자매 사이에 벌어지는 볼썽사나운 광경 앞에 입을 다물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토록 많은 재산을 지니고 있지만, 이제 나이가 들고 병고에 시달리게 되니, 먹고 싶은 것도 제대로 못 먹고, 쓰고 싶어도 걸어다니지를 못하니,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죽기 살기로 노력해서 하늘 높이 금자탑을 쌓았지만, 결국 열심히 죽 쒀서 개 주는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났습니다.
재산이 행복 불행의 절대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참 행복은 소소한 일상 안에 담겨있음을 자주 체험합니다.
저같은 경우 행복한 시간을 꼽으라면, 그 일이 아무리 작은 일이든 뭔가에 열심히 몰입할 때입니다.
몰입의 대상이 좀 더 큰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보다 복음적이고 생산적일 때, 느끼는 기쁨은 더욱 큽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같은 맥락의 말씀, 참된 행복, 진복팔단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한 대목 한 대목 읽고 묵상하면서 우리 같이 작고, 보잘것없고, 상처투성이뿐이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참으로 큰 위로와 기쁨을 선사하는 말씀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행복과 관련해서 지금에야 깨닫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네 삶 가운데 행복의 순간은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의 씨앗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행복은 결핍 가운데, 부족함 가운데, 시련이나 역경 가운데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 지역을 방문할 때였습니다.
감사하지만 부담스러운 극진한 환대가 매일 계속되었습니다.
매 끼니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였습니다.
매일 저녁 밤늦은 시간까지 성대한 파티가 계속되었습니다.
먹고 또 먹고, 마시고 또 마시고...그 대신 운동량은 지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한 일주일 정도 반복되니 세상에 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반대로 사는게 너무 바빠 본의 아니게 몇 끼니를 건너뛰었습니다.
이윽고 촉각을 다투는 일들을 대충 마무리 짓고 나니 너무나 배가 고파 눈이 핑핑 돌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만 원짜리 순대국밥을 한 그릇 마주 대하니 너무나 행복해서
눈물이 다 나왔습니다.
우리가 매일 느끼는 결핍, 갈증, 배고픔, 부족함, 피곤함, 외로움, 슬픔...이런 요소들이 사실은 행복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