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9일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작성자막달레나|작성시간26.06.09|조회수26 목록 댓글 0

✠ 마태 5,13-16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이 말씀은 "너희는 소금이 되어라", "빛이 되어라"라는 명령이 아니라,
먼저 "너희는 이미 소금이고 빛이다"라는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의 존재 자체가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소금은 흔하지만,
예수님 시대에는 매우 귀한 것이었습니다.
소금은 음식에 들어가면 자기 모습은 사라지지만 음식 전체의 맛을 살립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하신 것은,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다른 이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부패를 막고,
-생명을 보존하는 역할을 하라는 의미입니다.

소금은 음식 위에 따로 존재할 때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음식 속에 녹아들어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만 머무르는 신앙이 아니라,
-가정에서
-직장에서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복음의 향기를 스며들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어서 묻는 듯합니다.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하겠느냐?"
신앙인의 가장 큰 위기는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복음의 맛을 잃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지만 사랑이 없고,
-봉사는 하지만 기쁨이 없고,
-신앙은 있지만 자비가 없다면,
소금이 짠맛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등불은 등경 위에 놓는다."
고 말씀하십니다.
빛은 숨기기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적 가치와 양심을
세상 속에서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초대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예수님께서 "너희를 보게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빛의 목적은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인들의 삶이 감동을 주는 이유도 그들이 자신을 자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소금과 빛의 공통점은
흥미롭게도 소금과 빛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소금은 음식 때문에 존재하고,
빛은 다른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도 자신만의 구원과 평화를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에 전해지도록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이 기도했는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
를 먼저 묻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를 통해 누군가가 하느님의 선하심을 맛보았는가?"
"너를 통해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했는가?"
를 묻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대답은 어떠한가요?

(정 루치아나 수녀님)



6월9일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마태오 5,13-16

자신이 이미 빛과 소금인 줄 모른다면?

 
전쟁이 끝난 1945년 독일, 폐허 속에서 한 남자가 벽돌을 쌓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직 건축가였습니다.
폭격으로 무너진 마을을 보며 그는 재건을 시작했습니다.
보수도 없이,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습니다. 처음엔 혼자였지만, 한 달이 지나자 이웃 열 명이
함께했습니다.
반년이 지나자 마을 전체가 일어났습니다.
그 마을의 이름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지만,
그 남자의 행동은 역사가들이 '라인강의 기적'이 시작된 정신의 뿌리라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 것도 없었기에, 모두가 서로에게 빛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빛은 자신을 태워 어둠을 밝히고, 소금은 자신을 녹여 음식에 생명을 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명령이 아닌 선언으로 말씀하십니다.
"빛이 되어라"가 아니라 "너희는 빛이다"라고
하십니다.
세례로 이미 그 본성을 받은 우리에게, 이제 그것을 살아내라고 하십니다.
내가 빛이고 소금인 줄 모르면 내가 빛나야 하고 맛을 내야 하는 줄도 모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호주 근처 태평양 한가운데, 서울 용산구만 한 작은 섬나라 나우루 공화국이 있습니다.
1970년대, 섬 전체를 뒤덮은 인광석 덕분에 나우루는 갑자기 세계 최고 수준의 부자 나라가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 국민소득이 만 달러일 때, 나우루는 3만 달러를 넘었습니다.

병원비·교육비 무료, 세금 없음, 신혼부부에게 집 무상 제공, 매년 생활비 지급.
아무도 일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국민들은 기름이 떨어지면 차를 버리고 새 차를 샀고, 마트 앞에 차를 세우고 전화를 걸어 종업원이 짐을 실어주길 기다렸습니다.
공무원도, 노동자도 전부 외국인이었습니다. 나우루 사람들은 그저 누리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 인광석이 바닥나기 시작했습니다.
정부는 항구를 만들어 일자리를 만들었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농사짓는 법을 아는 사람도, 고기 잡는 법을 아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땅은 채굴로 황폐해져 있었습니다.
결국 나우루는 호주의 원조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게라사에서 치유하신 사람을 기억하십니까?
군대 마귀 들린 사람이었습니다.
그 마귀들은 예수님께 청합니다.
"저희를 돼지 떼에 들여보내 주십시오."
예수님은 허락하셨고, 돼지 떼는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마귀를 받아들인 돼지는 스스로 빛이 될 수도, 소금이 될 수도 없습니다.
무언가 그 안에 들어가 그 존재를 만듭니다.
우리 안엔 무엇이 들어오셨을까요?
빛과 소금 자체이신 분이 들어왔습니다.
그것만 믿으면 그대로 살 수 있습니다.
나우루의 이야기는 단순한 경제 실패가 아닙니다.
빛과 소금이기를 포기한 인간이 어디로 가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빛과 소금인 줄 아는 사람의 모습은 어떨까요? 
2022년 5월 10일, 미국 플로리다주 롤린스 칼리지 졸업식장이었습니다.
한 졸업생이 단상에 올랐습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5분 30초 동안 침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단상에서 내려오자, 졸업생 전원이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엘리자베스 봉커. 자폐로 인해 말을 할 수 없는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15개월까지 재잘재잘 말을 하던 아이였지만, 불과 일주일 사이에 모든 언어 능력을 잃었습니다.
이름을 불러도 반응이 없었고,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혼자 분노를 삼켰습니다.

여섯 살 때 타이핑을 배우기 시작했고, 다섯 달 만에 처음으로 표현한 단어는 'AGONY', 괴롭다는 말이었습니다.
말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지 묻자 그녀는 적었습니다.
"NOT TALKING."

그 침묵 속에서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4.0 만점에 4.0, 완벽한 학점으로 졸업했고,
타이핑으로 음성변환을 해 연설했습니다.
그 연설의 끝은 이렇습니다.

"전 세계 언어 장애 자폐인이 3,100만 명이나 됩니다.
그들은 침묵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그 고통에서 벗어나 스스로 길을 개척하도록 돕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목소리를 잘 활용하시길 바랍니다.
빛이 됩시다. '빛이 있으라!'"

하느님은 이미 목소리를 주셨습니다.
내가 빛임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처음엔 자신이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꼈던 사람이, 자기 삶 전체를 내어 3,100만 명에게 소금이 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 누군가 믿음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믿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우리에겐 그런 용기를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지금 여러분 곁에 누가 있습니까?
디팩 초프라는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먹고 사는 것은 내가 책임진다.
너희는 이웃에게 어떤 좋은 일을 할 수 있는지만 생각하며 살아라."
자녀를 이미 이웃에게 좋은 일을 할 자격이 있는 존재로 믿게 만든 것입니다.
그렇게 믿게 되면 이러한 사람이 탄생합니다. 일론 머스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돈 버는 방법을 고민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인류의 미래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만 생각합니다."

이것이 세상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2천 년 전에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빛과 소금이기를 거부하면 바로 버려져 쓸모없는 존재가 됩니다.
이러한 삶은 나우루가 증명했습니다.
반면 생명을 주는 삶은 엘리자베스가 증명했습니다.
우리는 어느 쪽을 살겠습니까?
빛이 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빛이 있습니다.
세상에 그 빛을 드러내기만 하면 됩니다.
세상에 맛을 더하는 소금의 역할이 무엇일까만 찾으면 됩니다.
빛과 소금이 되려 하지 말고 ‘내가 빛인데 어떻게 빛나야 하나?’,
‘내가 소금인데, 어디서 녹아야 하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미 되었으니 되려고 하지 말고 어떻게 증명할까만 생각하십시오.
그래야 세상은 물론 하느님께도 쓸모있는 존재로 남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강론>

(2026. 6. 9. 화)(마태 5,13-16)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3-16).”

1)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1) 신앙인이라면 신앙인답게 살아야 한다.
(2) 혼자서만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그치면 안 된다.
세상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따로 떼어서 구분할 수 없는 ‘하나’입니다.
신앙인이 신앙인답게 살면, 그 삶이 곧 신앙의 증언이 되고 복음 선포가 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려면 신앙인 자신이 먼저 신앙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복음 선포와 신앙의 증언은 ‘말’로 하기 전에 먼저
‘삶’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이,
나 혼자 착하게 살고 신앙생활 잘해서 구원받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면서 실제로 자기 혼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사정에 관심이 없는 것은, 사랑이 없는 것이고, 사랑이 없는 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그리하여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 2,14-15).”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은,
등불로 모든 사람을 비추라는 예수님 말씀을
설명한 것과 같은 말입니다.
신앙인은 동방박사들을 아기 예수님께로 인도했던 별처럼(마태 2,9)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인도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방인과 나그네로 사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움을 벌이는 육적인 욕망들을 멀리하십시오.
이교인들 가운데에 살면서 바르게 처신하십시오. 그래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여러분을 중상하는 그들도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지켜보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2,11-12).”

이 말은,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라는 말씀을 설명한 것과 같은 말입니다.
여기서 ‘착한 행실’이라는 말은 ‘신앙인다운 삶’을 뜻합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다.’는 신앙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3) 13절의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는 ‘탈렌트의 비유’에 연결됩니다.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물러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겼다(마태 25,18).”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25,28-30).”

여기서 ‘쓸모없다.’ 라는 말은,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도, 다른 사람들의 구원에도, 자기 자신의 구원에도 아무 쓸모가 없다는 뜻입니다.
‘밖에 버려진다.’ 라는 말은, ‘구원받지 못한다. 멸망한다.’ 라는 뜻입니다.
<실제 상황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는 사람들은
그냥 쓸모없는 것으로 그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일과 사람들이 구원받는 일을 방해하기만 하는 ‘걸림돌’이 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태도가 다른 사람들을 물들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라는 말씀은, 표현만 보면, “다시 짜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인데,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루카 1,37).
그래서 이 말씀은, “계속 그렇게 살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어쩔 수가 없다.” 라는 말씀일 뿐이고,
구원의 가능성이 모두 차단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진심으로 회개하면 ‘제 맛을 잃은 소금’에서 ‘본래의 맛을 찾은 소금’으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4) ‘쓸모없다.’ 라는 말을 루카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신앙인이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신앙인답게 살면서 ‘삶’으로 신앙을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
즉 신앙인의 본분이고 사명입니다.
생색낼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쓸모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한’ 존재로 높여 주실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6월9일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복음: 마태 5,13-16

나는 없어지지만, 그로 인해 이웃을 빛나게 하는 사람!


가만히 저를 돌아보니 제가 좀 싱거운 사람이라는 피드백을 많이 받았습니다.
말에 진실성이 없고 농담인 듯 진담인 듯 실없는 말, 애매한 말을 남발해서 주변 사람들을 햇갈리게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자주 다짐을 합니다.
이제는 나이에 걸맞게 좀 진중해지자고. 비록 우리 눈에 띄지는 않지만, 음식 속으로 완전히 녹아 들어가 음식을 맛갈지게 만드는 소금 같은 존재가 되자고.

맛에는 참 여러 가지 맛이 있습니다.
매운맛, 신맛, 단맛, 쓴맛...다양한 맛이 우리 미각을 즐겁게 합니다.
그런데 모든 맛의 배경이 되며, 다양한 맛을 조화시키고 어우르는 재료는 아무래도 소금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소금이 때로 보관이 잘못되거나, 지나치게 오래 방치해 놓으면, 소금 고유의 짠맛이 사라지게 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짠맛이 사라진 소금, 그거 어디에 쓰겠습니까?

눈이 내린 후 얼어붙은 빙판길에 뿌리면 도움이 되려나요?
예수님 말씀처럼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히게 될 것입니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쓸모없는 존재, 백성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공공단체, 도무지 존재의 이유를 모르겠는 모임,
세상과 담을 쌓고, 세상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으며, 자기들끼리만 희희낙락하는 공동체...
바로 예수님께서 강력히 경고하시는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의 모습입니다.

별것 아니지만, 몇 가지 간단한 요리를 하면서 새삼 소금의 위력을 실감합니다.
물 조절을 실패한 나머지 물에 퉁퉁 불어터진 밋밋하고 심심한 라면 먹는 것은 고문입니다.
간 조절이 안된 매운탕, 소금 없이 먹는 삶은 계란...참 고역입니다.
어떻게든 소금같은 존재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대단한 것 같고 요란스럽지만 실속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로는 뭐든 다 합니다만, 결실이 없습니다.
이웃들에게 주는 것이라곤 씁쓸함이요 쓴 맛입니다. 요란한 괭가리에 불과한 삶입니다.

그러나 소금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소금의 가치나 위력은 자신이 완전히 사라져야, 자신이 완전히 녹야 내려야 제대로 발휘됩니다.
비록 드러나지 않지만 공동체의 발전과 쇄신을 위해 ‘나’는 없어지지만, 그로 인해 이웃을 빛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고, 모든 것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 세상에 소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실제로 이 세상에 충만히 현존하고 계신다는 가장 확실한 징표입니다.

조용히, 묵묵히, 뒷전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그렇게 소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참 그리스도인이며 세상의 빛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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