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0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작성자막달레나|작성시간26.06.10|조회수25 목록 댓글 0

✠ 마태오복음 5,17-19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나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17)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동안 끊임없이 율법을 어긴다는 비난을 받으셨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고, 죄인들과 식탁을 함께하시며, 때로는 당시 율법학자들의 해석에 정면으로 도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무너뜨리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뜻밖입니다.
“나는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그렇다면 율법의 완성이란 무엇일까요?
어느 날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가장 큰 계명을 물었습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주저 없이 대답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40)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율법의 완성은 조항을 더 많이 지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율법의 글자 뒤에 담긴 하느님의 마음을 발견하는 데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율법은 차가운 규칙이 되지만, 사랑이 있는 율법은 생명을 살리는 길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의 한 자 한 획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글자 자체를 절대화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랑 안에서 그 깊은 뜻이 온전히 실현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랑할 때 비로소 율법의 한 자 한 획이 살아나고, 사랑하지 않을 때는 아무리 많은 규정을 지켜도 율법의 참뜻은 놓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랑에도 질서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하느님 사랑을 말씀하시고, 그 다음에 이웃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두 계명은 떼어놓을 수 없지만, 그 순서는 중요합니다.

하느님보다 사람을 더 앞세우기 시작하면 사랑은 쉽게 감정이 되고 집착이 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 내 기준대로 상대를 바꾸고 싶은 마음이 사랑의 이름으로 숨어들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느님을 먼저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더 자유롭고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사랑받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미 사랑받고 있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무엇인가를 더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도, 기도할 때도,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끊임없이 찾아야 하는 것은 바로 그 사랑입니다.

실패한 날에도, 기도가 잘되지 않는 날에도, 내가 스스로에게 실망하는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사랑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시작은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끝없이 사랑하고 계심을 믿는 데 있습니다.
그 사랑을 믿는 사람은 율법을 의무로 지키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기쁘게 해 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때 율법은 더 이상 무거운 짐이 아니라, 사랑하는 분과 함께 걷는 길이 됩니다.

(천 사비나 수녀님)



6월10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마태오 5,17-19

완벽에 덧칠하는 사람들

 
찬미 예수님! 하루도 또 잘 지내셨죠?
오늘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복음 묵상 함께 나누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생활의 본질을 뒤흔드는 아주 엄중한 선언을 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요즘 현대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조차 자기 입맛에 맞게 편집하고 조작하는 아주 위험한 풍조에 빠져 있습니다.
귀에 쓴 약은 뱉고 달콤한 사탕만 삼키려는 것이죠.
많은 이들이 고해소 안팎에서 이렇게 속삭입니다.
"신부님, 시대가 어느 때인데 지옥 이야기를 하십니까?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설마 사람을 그런 곳에 던지시겠어요? 지옥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 팍팍한 세상에 십일조가 웬 말입니까?
마음이 중요하지 꼭 물질을 바쳐야 하나요?
화가 날 때는 참지 말고 터뜨려야 정신 건강에 좋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즘 유행하는 가짜 복음의 실체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하느님의 법을 교묘하게
지워버리는 것 말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내가 판관이 되어 하느님의 법을 재판하고 있는 꼴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조작 성향이 초래하는 영적 파국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문학적 알레고리가 있습니다.
바로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입니다. 독재를 권력을 잡은 돼지들은 자신들의 편의와 탐욕을 채우기 위해, 동물들이 처음에 피로 써 내렸던 위대한 칠계명을 하나씩 교묘하게 수정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라는 법을 어기고 자기들이 침대에서 자고 싶어지자, 밤중에 슬그머니 글자 몇 개를 덧붙여 고칩니다.
"어떤 동물도 시트를 깔고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 라고 말이죠.
술을 마시고 싶어지자 "어떤 동물도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라는 조항 뒤에 "지나치게"라는 말을 슬쩍 끼워 넣습니다.
마침내 그들이 도달한 최종 수정안은 무엇이었습니까?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욱 평등하다."라는 기괴한 법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글자 한두 개를 고친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타협과 조작이 결국 농장 전체를 처참한 노예 지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우리 영혼도 똑같습니다.
"이 정도 화는 내도 되겠지.", "이 정도 십일조는 안 바쳐도 하느님이 봐주시겠지."라며 한 자 한 획을 고치기 시작하면, 우리 영혼의 법전은 순식간에 사탄이 지배하는 동물농장으로 변질되고 맙니다.

이것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완벽한 설계도에 인간의 속된 손을 댈 때 어떤 비극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역사 속의 한 사건을 통해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바로 스페인 보르하 성당에서 일어난 예수님 벽화 복원 사건입니다.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의 고귀한 얼굴을 담은 19세기의 명작 『에체 호모』가 세월이 흘러
조금씩 떨어져 나가자, 히메네스라는 이름의 할머니가 좋은 의도로 붓을 들었습니다.
자기가 직접 예쁘게 고쳐놓겠다는 생각이었죠. 결과가 어땠습니까?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원숭이를 닮은 우스꽝스러운 괴물이 탄생하고 말았습니다.

할머니의 마음은 선의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이 위대한 작품에 손을 대어 더 낫게 고칠 수 있다'는 무서운 교만이 명작을 처참하게 파괴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율법을 내 입맛대로 수정하려 드는 행위가 정확히 이와 같습니다.
자비라는 이름으로 지옥을 지우고, 형편이라는 이름으로 십일조를 빼버리는 순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얼굴을 원숭이 모양으로 짓밟는 영적 히메네스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율법의 한 자 한 획도 결코 없어져서는 안 되는 것일까요?
율법은 단순한 규칙의 모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본성이자 사랑의 설계도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에서 가장 작은 글자인 '요드'는 아주 작은 점 하나처럼 보입니다.
획 하나가 삐져나오고 안 나오고에 따라 단어의 뜻이 '하느님'에서 '우상'으로 완전히 바뀌어버립니다.

하느님의 법은 우리를 하느님의 완벽한 모상으로 빚어내기 위한 신성한 틀입니다.
이 틀을 내 육신의 편안함에 맞추기 위해 찌그러뜨리면, 우리는 결코 하느님을 닮은 빛과 소금이 될 수 없습니다.
율법을 조작하는 것은 하느님보다 내가 더 지혜롭다고 믿는 영적 교만이며, 스스로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 혹은 아예 들어가지도 못하는 자로 낙인찍는 자해 행위입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법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작고 지키기 고통스러울지라도, 한 자 한 획도 타협하지 않고 철저하게 순명하여 영원한 승리를 거둔 위대한 인간이 있습니다.
바로 영국의 대법관이었던 성 토머스 모어입니다. 국왕 헨리 8세가 가톨릭교회의 결혼 인연을 전면 부인하고 스스로 교회의 수장이 되려 했을 때, 영국의 모든 권력자와 주교들까지 국왕의 뜻에 맞추어 교회의 법을 적당히 수정하고 타협했습니다.
"왕의 결혼 하나 눈감아 준다고 나라가 망하겠느냐, 왕이 교회의 머리가 된다는 서약서에 서명 한 줄만 하면 만사가 편하다."라며 모두가 한 획을 지우고 타협의 붓질을 했습니다.

그러나 토머스 모어는 단 한 줄의 서약도, 단 한 자의 타협도 거부했습니다.
하느님의 법은 인간이 손댈 수 없는 절대적인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단두대 위에서 목이 잘리는 참수를 당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융통성 없고 미련하기 짝이 없는 죽음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권력 앞에서 하느님의 율법을
단 한 획도 조작하지 않았기에, 인류 역사상 가장 빛나는 양심의 성인으로 영원히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신앙은 내 삶의 형편에 맞추어 하느님의 말씀을 편집하는 뷔페가 아닙니다.
율법의 완벽한 설계도에 내 핑계와 타협이라는 인간의 가짜 붓칠을 더하지 마십시오.
영혼이 침몰할 뿐입니다.

비록 우리가 약해서 자주 넘어지고 다 지키지 못해 피눈물을 흘릴지언정, 말씀의 한 자 한 획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주님, 제가 부족하지만 이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은총을 주십시오." 하고 처절하게 매달려야 합니다.
그 순명과 경외심을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완전한 자녀로 변화시켜 주시며, 마침내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으로 영광스럽게 안아 주실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강론>

(2026. 6. 10. 수)(마태 5,17-19)

<예수님과 율법>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7-19).”

1) 여기서 “완성하러 왔다.” 라는 말씀은, 계명들과 율법들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뜻’을
완성하려고(또는 이루려고) 오셨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 구원이고,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구원을 바라시는 것은 곧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이 사람들에게서 완성되게 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유대인들은, 특히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유대교를 망치고 있다고 오해했고, 유대교 중심의 사회 질서를 무너뜨린다고 오해했습니다.>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라는 말씀에는, “유대교를 망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너희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철저하고 엄격하게 율법을 지킨 것은, 겉으로만 철저한 것, 즉 ‘위선’이었을 뿐입니다.
바로 그 위선이 유대교를 망친 주원인이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일에
철저하셨던 분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일이 ‘성전 정화’입니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 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요한 2,13-17).”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리고 그들 뒤에 있는 사제들에게는, ‘파스카 축제’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대목’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파스카 축제를 잘 지내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서, 또 하느님을 잘 섬기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서 제사용품들을 판매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사실은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일이었을 뿐입니다.
그런 위선이 파스카 축제를 망치고 있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에게 ‘하느님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면, 현실과 적당히 타협했거나 그저 몇 마디 말로 비판하는 것으로 그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충 적당히 넘어가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정화에서 보여주신 그 열정과 철저함과 단호함은 파스카 축제 실행과 하느님의 뜻 실천을 완성시키신 일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마태 23,23).”

위선자들은 눈에 보이는 십일조는 잘 냈습니다.
그러나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은 무시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기준으로 하면,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은 전부 다 똑같이 중요합니다.
그런데도 위선자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큰 것과 작은 것을 나누고, 작은 것은 무시하면서 안 지킵니다.
19절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는 “하늘나라에 못 들어간다.”이고,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는 “하늘나라에 들어간다.”입니다.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계명들과 율법들 가운데 하나라도 자기 마음대로 작은 것이라고 분류해서 무시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무시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에
못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3) 바오로 사도는 율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로마 3,21ㄱ.22).”
“그러니 자랑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무슨 법으로 그리되었습니까? 행위의 법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법입니다.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 3,27-28).”

율법주의자들은(위선자들은) 외적인 율법 준수만 강조하다가 하느님을 잊어버리는 자들이고, 하느님 없이 율법만 지키다가 하느님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려고 오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을 통해서 율법 실천의 완성에, 즉 구원의 완성에 도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구원의 완성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는 ‘생명의 빛’입니다(요한 12,46).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6월10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복음: 마태 5,17-19

작은 것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 작은 것을 소홀히 하지 않으시고, 작은 사람들을 어여삐 보시고, 우리의 작은 신음소리 하나 놓치지 않고 귀여겨 들으신다는 것,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엄청나고 대단한 것보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시고 애틋하게 여기심을 잘 드러내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사실 그렇지도 않은데, 세상 사람들 시선에 작은 사람으로 비춰지는 사람들, 어린이들, 장애인들, 환자들, 노인들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그렇지도 않은데, 사람들 눈에 별것 아닌 작은 것으로 여겨지는 작은 직무들, 일상의 작은 봉사, 설거지, 쓰레기 분리 수거, 배수로 청소, 담당 구역 청소...등등을 별것 아닌 일, 보잘것없는 일로 여기고 적당적당히 넘겨버리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입니다.

살아보니 확실히 느끼겠습니다.
이 세상에 큰 일 작은 일이 따로 없습니다.
모든 일이 다 소중합니다.
작은 일이 모여서 큰 일을 이룹니다.
큰 일은 작은 일들이 모여야 가능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엄청 큰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대통령이나 대도시 시장, 교구장이나 관구장이 해내는 일들을 홀로 해낼 수 있겠습니까?
사실 그분들은 큰 틀만 짜고, 방향한 제시합니다. 지지하고 격려하고 고무만 할 뿐입니다.

실제적인 일은 작은 사람들이 해냅니다.
그들의 협조와 헌신이 없다면 그 어떤 결과물도 창출해낼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헌신하고 있는 작은 일, 결코 작은 일이 아님을 굳게 믿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내가 일상 안에서 자주 만나는 작은 사람들, 결코 작은 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위대한 조력자요, 하느님의 협력자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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