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2일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작성자막달레나|작성시간26.06.12|조회수33 목록 댓글 0

예수 성심 대축일
✠ 마태오복음 11,25-30

예수 성심 대축일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마음을 바라보는 날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을 전능하신 분, 심판하시는 분, 높은 곳에 계신 분으로 생각하지만,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가장 깊은 마음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마음, 기다리는 마음, 그리고 지친 이들을 품어 주는 마음입니다.

제1독서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가 많아서가 아니다.”(신명기 7,7)

하느님의 선택은 인간의 능력이나 공로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마음이 이끄시는 대로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계산하지 않는 사랑이며, 조건을 따지지 않는 사랑입니다. 백성이 충실해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사랑하셨고, 그 사랑 때문에 끝까지 계약에 충실하셨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요한은 그 사랑의 본질을 더욱 분명하게 알려 줍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하느님께서 사랑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하지 않고, 사랑 자체이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그리고 십자가에서 열린 성심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참모습을 보게 됩니다.

바로 이 점을 오늘 복음이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께 감사드리며, 그 사랑의 신비가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아니라 작은 이들에게 드러났다고 말씀하십니다.
작은 이들이란 특별한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스스로를 의지하기보다 하느님께 기대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상처를 감추지 않고, 도움을 청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런 마음 안으로 들어옵니다.

사실 하느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머리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일 때가 많습니다. 자기 확신과 자만심, 자기 기준으로 가득 찬 마음에는 하느님께서 들어오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마음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공간을 남겨 둡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초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11,28)

참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많은 짐을 지우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이미 지쳐 있는 사람들을 쉬게 하러 오신 분입니다. 실패와 죄책감, 걱정과 두려움, 인간관계의 상처와 삶의 무게에 눌린 이들에게 당신의 마음을 열어 보이십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강한 힘으로 억누르는 마음이 아니라 품어 주는 마음, 심판보다 자비를 먼저 내어놓는 마음, 끝까지 기다려 주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공경하는 예수 성심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성심을 바라보며 묻게 됩니다.
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만큼 충분히 작은 사람인가? 나는 지친 마음을 안고 주님께 나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의 성심처럼 온유하고 따뜻한 마음을 보여 주고 있는가?

예수 성심은 단순한 신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해 언제나 열려 있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 안에 머무를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안식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요한1서4,16)

(천사비나 수녀님)


6월12일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신명기 7,6-11   요한 1서 4,7-16    
마태오 11,25-30

몸은 편안하나 마음 둘 곳이 없을 때

 
한 자매님이 저에게 상담한 적이 있습니다.
중년 자매님이었는데 집도 넉넉하게 잘 살고 자녀들도 말썽 안 부리고 성당 잘 다니며 남편도 가정에 충실하고 직장에서도 착실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는 무슨 일로 밤에 혼자 앉아 눈물을 자주 흘린다는 것입니다.
가슴이 허한 것 같은데 원인을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몸과 영혼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복합체입니다.
몸이 편하다고 다 편한 것이 아니고, 정신적으로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해서 다 편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까지 편해야 합니다.
몸은 잠을 자면 되고, 영혼은 자기 생각을 멈추고 주님 말씀 안에 머물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마음을 쉬게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마음도 쉬게 해 주어야 합니다.
마음도 안식처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몸은 물질로 되어 있어 물질적인 환경에서 쉴 수 있고, 영혼은 정신적이라 정신적인 환경 안에서 쉴 수 있지만, 마음은 영적이라 영적인 관계 안에서만 쉼이 가능합니다.

영은 사랑입니다.
나의 마음은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 안에서만 안식을 누립니다.

영국의 문인 부르크가 미국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부두에는 전송객으로 많은 사람이 북적거렸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한 전송객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서운함을 느낀 부르크는 부두에서 놀고 있는 한 어린아이에게 “얘야! 내가 네게 6실링을 줄 테니 내가 저 배를 타고 떠날 때 나를 보고 손을 흔들어 주렴” 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6실링을 받은 아이는 정말 열심히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부르크는 고백합니다.

“돈 받고 흔드는 손을 보고 나는 더욱 큰 고독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마음은 사랑 안에서만 쉴 수 있습니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 안에서만 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내가 먼저 누군가의 마음을 쉬게 해 주는 마음입니다.
내가 누군가의 마음의 쉼터가 되어주지 못했다면 누구도 나의 쉼터가 되어줄 수 없습니다.

뉴스에서 감동을 주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한 청년이 차 안에서 코로나바이러스로 호흡이 멈춘 할머니를 구 강대 구강 호흡법으로 살리려고 하는 장면이 찍힌 것입니다.

손자는 할머니를 차에 태우고 코로나 검사를 받으려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호흡의 어려움을 겪고 의식을 잃었던 것입니다.
할머니를 모시고 온 손자는 100% 자신도 바이러스에 전염될 것을 알면서도 구강 대 구강 호흡으로 할머니를 살리려고 한 것입니다.

할머니는 그렇게 운명하셨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래도 행복한 죽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그런 손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손자가 아무것도 받지 않았는데 그런 사랑을 베풀 줄 알았을까요?
그만큼 할머니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음이 틀림없습니다.
할머니도 손자를 위해 그렇게 할 것을 자신도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할머니는 하늘나라에서도 안식을 취하시겠지만,
이미 이 세상에서부터 안식처를 지니신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행복한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식처는 결국 할머니가 만들어놓으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다른 사람 마음 안에 자신의 안식처를 만들 수 있는지
그 해답을 알려주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의 스승이셨습니다.
온유함은 사람을 심판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화를 내지 않는 마음입니다.
겸손은 상대를 항상 자신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이고 상대가 더 영광을 받기를 바라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마음을 입으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서부터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세우신 교회에서 안식을 누리셨고, 우리는 또한 그렇게 새로 태어나는 영적인 자녀들 안에서 안식을 누립니다.

마음이 지치고 힘들다면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가, 아니면 화를 내고 심판하는 마음으로 대하는가.

내가 먼저 안식처가 되어주지 않으면 누구도 나에게 마음 쉴 곳을 내어놓지 않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강론>

(2026. 6. 12. 금)(마태 11,25-30)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5-30)>

1)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 일을, “우리를 대신해서 멍에를 짊어지심으로써 우리의 멍에를 없애 주셨다.” 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십자가는 멍에가 아닌가?” 라고 반박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멍에를 없애기 위해서 당신이 스스로 짊어지신 멍에이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또는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지고 가는 ‘나의 십자가’는, 멍에가 아니라
멍에를 벗기 위한 열쇠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받아들여서 지고 가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기 위한 일이다.” 라고 표현하는데, 정확하게 표현하면,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기 위한 일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라는 말씀은, “내가 너희의 멍에를 완전히 없애 주겠다.” 라는 약속입니다.
무거운 멍에를 벗기고 덜 무거운 멍에를 주겠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9절과 30절의 ‘내 멍에’ 라는 말과 ‘내 짐’이라는 말은 반어법적 표현일 뿐이고, 이 말의 진짜 뜻은 ‘우리의 멍에를 없애 주는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입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는, “멍에에서
완전히 해방되고 싶으면 내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실천하면서 살아라.”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는, “내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멍에도 아니고 짐도 아니다. 너희에게 참된 해방과 안식을 주는 열쇠다.”입니다.

<지금 ‘열쇠’ 라고 표현한 것은, 우리 쪽의 능동적인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해방과 안식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니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열쇠를 받아서 자물쇠를 열고, 스스로 멍에를 벗는 능동적인 응답을 해야 합니다.>

2)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 사랑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를 향해 가실 때, 예수님이 가엾다고 울었던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
푸른 나무가 이러한 일을 당하거든 마른나무야 어떻게 되겠느냐?(루카 23,28.31)”

이 말씀은, “나를 가엾게 여기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여라.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은 지금의 나보다 훨씬 더 비참한 처지가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내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묵상하고 공경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더욱더 노력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3) 25절의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라는 말씀은, “가난하고 힘없고 무식하고 못난 사람들도 빠짐없이 구원하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라는 뜻이고,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없음을 감사드린다는 뜻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라는 말씀은,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자들이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감추시고’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감추셨다는 뜻이 아니라, 그자들이 외면했다는 뜻입니다.
아무도 구원에서 배제되지 않습니다.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자들도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지면, 또 진심으로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감사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들도 모두 구원하려고 애쓰시는 분이고, 그런 자들이 구원에서 멀어져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는 분입니다.>

4) 신앙인은 예수님 덕분에 온갖 멍에와 짐에서 해방된 사람이고, 영원하고 참된 안식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속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한눈을 팔다가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고, 이미 벗어버린 짐과 멍에를 다시 짊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2베드 2,20-21).
예수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함없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 대한 우리 사랑도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끝까지 충실하게 노력해서 구원에 도달하는 것이
예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6월12일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복음: 마태 11,25-30

운명하시면서도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셨던 하느님!


또 다시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예수 성심 공경에 대한 근거는 요한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 금요일 오후 세시, 골고타 언덕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십니다.

십자가형은 형 집행 방법 중에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유명합니다.
체력이 좋은 사형수들은 십자가 위에서 이틀 사흘까지 견딥니다.
집행관들도 피비린내 나는 사형장에서 빨리 빠져나가고 싶겠죠.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사형수들의 얼굴을 유심히 봅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경우라 할지라도, 적당한 때가 되었다 싶으면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다리를 부러트립니다.
그럼 체중이 아래로 쏠리고 심장에 압박이 가해지면서 즉시 운명하게 됩니다.

마침 다음날이 안식일이어서, 유다인들이 군사들에게 빨리 좀 처리해달라고 청합니다.
집행관들이 먼저 좌도와 우도의 다리를 꺾고 난 다음, 예수님 다리도 꺾으려고 봤더니, 이미 운명하신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인 사살 차원에서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뭐가 나왔을까요?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34)

예수님의 옆구리, 곧 예수님의 심장, 예수 성심에서 흘러나온 물과 피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물은 죄로 인해 죽은 인간을 깨끗이 씻고 새 생명을 주는 세례의 물을 의미합니다.
피는 새로 태어난 백성을 양육하는 성체성사를 상징합니다.

많은 분이 사제인 제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미사 중 성찬의 전례 시작 때, 포도주에 물을 살짝 부으시던데, 무슨 의미가 있나요?
포도주가 너무 독해서 물로 희석시키는 의미인가요?”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요한복음 19장 34절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미사 때마다 사제들은 포도주잔에 물을 살짝 첨가하면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면서까지
우리를 위한 사랑의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미사 경문에 살짝 해설이 되어 있습니다.
미사 집전 사제는 포도주잔에 물을 넣으면서 마음 속으로 한 문장을 읽게 되어있습니다.
“이 물과 술이 하나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물은 인성을 상징합니다.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합니다.
결국 포도주에 물을 넣는 행위는 죄인인 우리의 인성이 거룩하신 하느님의 신성에 참여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를 향한 극진한 하느님 사랑의 마음, 곧 예수 성심이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 그분의 따뜻하고 자상한 마음을 온 몸과 마음으로 느끼며 감사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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