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3일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작성자막달레나|작성시간26.06.13|조회수32 목록 댓글 0

연중 제11주일
✠ 마태오 복음 9,36-10,8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36)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마음을 가장 잘 보여 주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둘러싼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처럼 지쳐 있었고, 삶의 무게에 눌려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부족함이나 잘못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의 상처와 고통, 외로움과 지친 마음을 먼저 보십니다.

복음서에서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는 말은 단순한 동정심이 아닙니다. 상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느끼고 함께 짊어지는 깊은 사랑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언제나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해 열려 있었고, 그분의 시선은 늘 상처 입은 이들을 찾아갔습니다.

당신의 이 일을 계속 이어가도록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세상으로 파견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명을 맡기시는데 그 사명을 여섯 개의 동사로 설명하십니다.
“선포하여라. 고쳐 주어라. 죽은 이를 일으켜라.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여라. 마귀를 쫓아내어라. 그리고 거저 주어라.”
여기에는 선포의 직무도 있지만, 자비의 직무가 훨씬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비율로 말하자면 하나에 다섯입니다.
무엇보다도 연민의 직무를 맡기신 것이지요.

연민이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나는 자비입니다.
함께 울어 줄 수 있는 마음, 다른 이의 짐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질 수 있는 마음 말입니다.
연민은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시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를 들을 때 흔히 사제성소나 수도성소를 위한 기도로만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좁은 해석입니다.

이 말씀은 사실 이렇게 기도하라는 초대입니다.
“주님, 저를 연민의 일꾼으로 보내 주십시오. 저를 자비의 노동자로 보내 주십시오.
울고 있는 이와 함께 눈물의 빵을 나누어 먹게 하시고, 고통받는 이와 함께 고난의 잔을 마시게 하시며, 악이 승리하지 못하도록 싸우는 이들과 함께 싸우게 하소서.

붙들어 줄 줄 알고, 어루만질 줄 알며, 눈물을 닦아 줄 줄 알고, 힘을 전해 줄 수 있는 손을 가진 사람으로 저를 보내 주소서.”

사실 우리는 누군가의 문제를 해결해 줄 능력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병을 대신 앓아 줄 수도 없고, 그가 겪는 슬픔을 완전히 없애 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곁에 머물 수는 있습니다. 함께 울어 줄 수는 있습니다. 손을 잡아 줄 수는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주님께서 바라시는 가장 큰 사랑인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그들 곁으로 갈 일꾼을 찾고 계십니다. 특별히 뛰어난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완벽한 사람을 찾으시는 것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 주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닮고 싶은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복음에 나오는 열두 사도 역시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두려움이 있었고, 부족함이 있었으며, 넘어질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을 부르시고 보내셨습니다.

오늘 그 부르심은 우리에게도 들려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것이 얼마나 많은지보다, 우리 마음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랑이 있는지를 바라보십니다. 우리의 능력보다 우리의 연민을 먼저 바라보십니다.

오늘 하루, 누군가의 아픔 앞에서 잠시 멈추어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위로의 말 한마디, 따뜻한 미소 하나, 조용한 기도 한 번이 누군가에게는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표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사야 예언자의 고백을 마음에 담아 봅시다.
"주님,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십시오."(이사야6,8 참조)

주님의 연민이 우리의 마음이 되고,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손길이 되어, 지치고 상처 입은 이들에게 하느님의 가까우심을 전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에르메스 롱키신부님의 글을 참고하였습니다.

(천 사비나 수녀님)




6월13일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루카 2,41-51

성모 성심 : 다 봉헌하고도 죄송한 마음

 
어제는 사제 성화의 날이기도 하면서 예수 성심 대축일이었습니다. 
사제는 아버지의 마음과 어머니의 마음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다 내어주시고도 미안한 아버지의 마음’을 지니셨습니다. 
그러면 성모님의 마음은 어떠실까요? 
‘다 봉헌하고도 죄송한 마음’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예수님께서 성전에 계시며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하신 말씀을 듣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분명 봉헌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이제 아버지의 소유임을 잠깐은 망각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십자가 밑에서까지 예수님을 따라가시며 아버지의 뜻에 봉헌하십니다.
그러나 완전히 봉헌하지 못하고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라고 하시며 어머니로서의 아주 미소한 집착을 내비치셨습니다. 

부모를 잃은 자녀를 고아라 하고, 남편을 잃은 여인을 과부라 하며, 아내를 잃은 남자를 홀아비라 하는데, 자녀를 잃은 부모는 너무 슬퍼서 부르는 이름조차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잃어본 사람만 알 것입니다.

그러나 맡기셨던 것을 다시 찾아가시는 것에 불과한 일이 그런 고통을 가지는 것조차 죄스러운 마음이 성모 마리아의 마음이 아니셨을까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아내와 자녀들에게 더 못 줘서 미안하고
어머니는 남편에게 더 못 돌려드려서 죄송한 마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수녀님께서 감사하게도 당신이 수녀가 되게 된 이유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허락은 받았지만, 누구신지 짐작이 갈 것 같은 내용은 조금 수정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 봉헌하면서도 죄송하고, 그래서 행복한 성모님의 마음과 닮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심하게 자아와 인생에 대해서 고민하고 방황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대학교를 철학과로 들어갔는데 3학년 때 또다시 제 영혼이 ‘삶이란 무엇인가?’의 딜레마에 빠져 방황하였어요. 

그러던 중 형이상학 교수님이 개인적으로 저에게 철학 공부를 해보라고 하셨고 저의 정신적 멘토가 되어주셨어요. 
그런데  교수님께서 급성 간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교수님은 어떤 신부님과 친구셔서 신부님께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으로 대세를 받고 선종하셨어요. 
그때 성당에서 하는 미사라는 것에 처음 참석했죠'.

교수님께서 마지막에 돌아가시기 전 제게 하신 말씀은 “내가 사제가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였습니다.
그러시며 저에게 『천국의 열쇠』를 읽어 보라고 하셨죠
(‘천국의 열쇠’는 헌신적으로 가난한 이웃을 돌보고 종교의 굴레보다는 사랑의 실천을 목적으로 살았던 치셤 신부와 고위 성직자가 되기만을 바라며 살아온 안셀름 주교의 두 삶이 대비되면서 하늘 나라는 누구의 것인가를 묻는 내용입니다). 

교수님의 죽음으로 저는 또 길을 잃고 죽음에 대한 사유로 가득했습니다.
도대체 진리란 무엇인가,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휩싸여 캠퍼스를 돌며 도서관에서 수많은 철학자가 제시하는 해답을 읽으면서 방황했어요. 

『천국의 열쇠』 책을 사러 가톨릭 서점을 다니면서 신학과 신앙 책을 읽게 되었고 제 영혼을 가장 강력하게 붙잡아주는 말씀이 저를 교회로 이끌었어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저는 그 후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교리 반을 다니면서도 자살 충동이 계속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울증이 심했지 않았을까?’, 아니면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렸던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원했던 대학원 진학도 할 수 없었어요.
다만 성모님 기적 메달, 묵주, 성수 등에 매달리며 예비자 때도 매일 성당에 갔어요.
성체만 영하면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빨리 세례받기만을 기다렸죠. 

그리고 길이 없는 저에게 예수님께서 내가 길이다.
진리를 찾는 저에게 예수님께서 내가 진리다.
죽음으로 가득한 저에게 예수님께서 내가 생명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며 제 영혼을 구원해 주셨어요.

세례받고 제가 엄청나게 밝아 졌어요.
자연스럽게 신앙 서적과 성경을 읽으면서 마더 데레사 수녀님처럼 수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예수님을 만나니 나에게서 철학은 끝났다고 정리했어요. 
마더 데레사 수녀님처럼 내가 그렇게 살 수 있을지 저 자신을 테스트해 보기 위해서 수녀원 입회 전에 가톨릭 장애인 시설에서 숙식하면서 일했는데 매일 매우 피곤했음에도 그때 성당에 가서 밤에 2시간 정도 성체조배를 했어요.

그때 예수님 환시 체험을 했어요.
십자가에 계시는 예수님이 살아서 몸을 비틀거리면서 너무 고통스러워하셨어요.
이런 환시는 수많은 날 오랫동안 계속되었지만,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혼자서 2시간 “예수님 사랑해요.”라고 기도하면서 그 고통스러운 예수님 바라보다가 성당에서 졸기도, 잠들기도 하고, 나중에는 예수님께 “예수님 죄송해요. 저 너무 피곤해서 갈게요.”
그러면서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살아 움직이며 몸을 비틀면서 못 박힌 손과 발, 계속 힘들어하시는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숨소리를 들으며 나와야 했어요.

고통스러워하시는 예수님을 홀로 남겨두고 성당에서 나오는 마음이 너무나도 무거웠어요.
이 환시 체험은 계속되다가 종신서원 후에는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때 그 시설에 신학생 2명이 파견받아 봉사하고 있었는데 두 명 모두 저에게 결혼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농담이든 진담이든 저는 밤마다 예수님과 깊은 관계를 이루고 있었기에 수녀원 갈 것이고
결혼할 마음이 없다고 말했어요.

저를 사랑하기에 받으시는 예수님의 고통에 저 자신을 바치는 것도 부족하다 여겼기 때문에
당연히 그 멋진 신학생들에게는 마음이 갈 수 없었어요.
지금도 저는 너무 행복하고 예수님 성체를 매일 모시면 너무 흡족하고 바랄 것이 없는데 성당에서 조배하고 예수님과 함께 하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만족스러운데 천국에 가면 얼마나 행복할까요...아멘."

저는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제가 버리고 온 것에 비해 주님께서 저에게 왜 더 주시지 않느냐고 불평을 가졌었습니다.
그런데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예수님의 한 마디로 오히려 죄송스러운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성모님의 마음은 이렇듯 주님께 당신 자신을 다 봉헌하여 구원자의 어머니가 되셨음에도 주님의 은혜에 다 보답할 수 없는 마음에 미안하셨을 것입니다. 

수녀님이 삶의 길과 참 진리와 생명을 찾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것을 주신 것에 비해 당신은 그분의 곁을 떠나있는 것에 너무나 죄송스러운 마음을 가졌던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내가 가진 것, 나의 사랑스러운 사람들, 그리고 나 자신을 주님께 바친다고 주님께서 주신 것보다 더 바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바친다고 생각하는 것도 다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성모님은 십일조가 아니라 당신의 온 존재와 당신의 아드님을 바치시고도 항상 죄송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미안함과 인간의 이 미안한 마음이 합쳐질 때 둘은 하나가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강론>

(2026. 6. 13. 토)(루카 2,41-51)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41-51)>

1) 우리 교회가 ‘성모 성심 기념일’을 지내면서
‘성모 성심’을 공경하는 것은, 우리를 향한 성모님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이기 때문이고, 또 예수님의 마음을 잘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는
마음인데, 성모님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라는 성모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루카 13,34).”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루카 19,41-42)”

잃은 아들을 애타게 찾으신 성모님의 마음과 죄인들을 애타게 찾으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같은 마음’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죄인들을(나를)
애타게 찾고 계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2) 성모님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늘 함께 계셨기 때문이고, 또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성모님도 함께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오직 하나,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입니다.
성모님께서 바라시는 것도 그것 하나뿐입니다.

그 마음과 사랑에 응답하려면, 회개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 노력은 예수님과 성모님의 마음에 나의 마음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이기도 합니다.

3)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관해서 이런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나무가 좋으면 그 열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그 열매도 나쁘다.
나무는 그 열매를 보면 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악한데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겠느냐?
사실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선한 사람은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꺼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꺼낸다(마태 12,33-35).”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데 바로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이 나온다.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
그러나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마태 15,18-20).”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
성모님은 ‘마음의 깨끗함’에서 모든 사람의 모범이신 분입니다.
우리 교회는 성모님의 마음을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이라고 표현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진심으로 회개해야 하고, 마음속의 나쁜 것들을 억누르는 의지와 노력도 중요하고, 오직 마음의 깨끗함만을 희망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4)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 7,18-19).”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24-25ㄱ).”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마귀를 쫓아낼 수 없는 것처럼(마르 9,29), 마음을 다스리는 일도 ‘기도’가 유일한 방법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께 기도해야 하고,
또 성모님께 기도를 부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나쁜 것들이 마음을 지배하지 않도록 좋은 생각과 말들로만 마음을 채우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6월13일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루카 2,41-51

잔소리와 조언을 구분하셨던 성모님!


한 그룹의 아이들이 2박 3일간 피정을 끝내고 돌아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런 게 좋았다, 저런 게 좋았다, 재잘재잘 말들이 많았습니다.
한 아이가 그랬습니다.
“엄마 아빠 잔소리 안 들으니, 처음에는 너무 이상했지만, 정말 좋았다.”

생각해보니, 우리는 이 짧은 세상 살아가면서 쉼 없이 누군가에게 잔소리를 퍼붓고, 또 반대로 잔소리를 듣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나이 먹어감에 상관없이 말입니다.

우리는 잔소리와 진심 어린 조언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도 잔소리 듣는 것 엄청 싫어하는 데, 어린 자녀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것이 잔소리입니다.

이런 면에서 성모님 역시 아들 예수님을 잘 동반하신 것으로 추정됩니다.
성경 안에서 우리는 성모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어떻게 동반하셨는지 부족한 자료를 통해서나마
어느 정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성모님의 동반은 신중하고 사려 깊은 동반이었습니다.
예수님이 12살 무렵,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갔다가, 귀갓길에 소년 예수를 잃어 버렸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길을 거슬러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율법 학자들 사이에 끼어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당혹스러웠던 성모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세게가 아니라 넌지시 나무랐습니다.
“애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이 특별한 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방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 나이 또래 소년에게 필요한 교육을 시키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12살 무렵 부터 메시아로서 탁월한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셨습니다.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의 언변이 얼마나 뛰어났던지 경탄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아들 예수님의 어머니를 향한 답변이 엄청 강도가 높았습니다. 아주 세게 나온 것입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 순간, 성모님께서는 직감했습니다.
아, 예수님께서 서서히 준비를 하고 계시는구나. 하고 거기다 더 이상 또 다른 잔소리를 퍼붓지 않으십니다.
침묵 속에 예수님 말씀의 진의를 찾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그런 성모님의 노력에 대해 루카 복음사가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을 향해 할 말씀을 하셨지만, 듣기 싫은 잔소리로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강약 조절을 하신 것입니다.
어린 예수님을 위해 방관하지 않으시고, 적절히 개입하시고, 그러나 지나치지 않으시고, 그렇게 균형잡힌 동반을 하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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