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5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작성자막달레나|작성시간26.06.15|조회수31 목록 댓글 0

✠ 마태오복음 5,38-42

오늘 복음은 우리의 상식을 뒤흔드는 말씀으로 가득합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주어라.”

솔직히 이 말씀은 쉽지 않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화가 나거나, 상처받았을 때 되갚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38)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탈출기의 전체 구절은 이렇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21,24-25).
동태 복수법이라 일컫는 이 규정은 잔인한 보복을 강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법의 취지는 지나친 보복 행위를 제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적당히 복수하라.”가 아니라
“아예 복수하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복수는 상처를 되돌려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상처를 끊어 내는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미워했다고 나도 미워하면,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고, 상처는 더 큰 상처를 남깁니다.
그러나 누군가 미워할 때 사랑하고, 빼앗으려 할 때 내어주며, 억지로 천 걸음을 가게 할 때 이천 걸음을 함께 간다면,
그 순간 악순환은 멈추게 됩니다.
더 강한 사랑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은 우리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에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외면했을 때에도 사랑하셨고,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사랑을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십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다시 흘려보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세상은 때때로
“왜 그렇게까지 양보하느냐?”
“왜 그렇게 손해 보며 사느냐?”
하고 묻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물으십니다.
“너는 나에게서 받은 사랑을 어디에 쓰느냐? 누구를 다시 살리는 데 쓰느냐?”

복수는 순간의 통쾌함을 줄지 모르지만, 사랑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꿉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옳은 사람이 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언제나
한 번 더 이해하고,
한 번 더 용서하며,
한 번 더 사랑하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천 사비나 수녀님)



6월15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1열왕기 21,1ㄴ-16    마태오 5,38-42

살아가면서 자주 발끈한다면?

 
우리 ‘영성의 수준’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요?
저는 제가 발끈할 때를 돌아봅니다.
타인으로부터 받는, 혹은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반응하고 발끈한다면 딱 저의 수준이 거기까지입니다.

발끈한다는 말은 공격받는 것에 대해 나의 ‘자아’가 반응한다는 뜻입니다.
큰 개나 큰 물고기와 같은 동물들은 작은 물고기나 고양이가 괴롭혀도 별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수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싸우겠다고 으르렁거리면 비슷한 수준이란 뜻입니다.
만약 우리가 자전거를 배우고 있다면 뒤에서 아버지가 자전거를 잡아주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거센 바람에 두려워하고 길이 울퉁불퉁해서 소리를 지른다면 뒤에서 잡아주시는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자신을 버리고 주님께 신뢰를 두는 사람은 세상 것에 두려워 반응하거나 발끈하지 않습니다.

유튜브로만 보았지만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 중의 한 분이 박보영 목사입니다.
그분은 의사를 하다가 모든 재산을 다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길거리 아이들을 키우며 목회를 시작했던 분입니다.

그분을 제가 존경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 사건 때문입니다.

한 번은 자신이 키우는 여자아이가 길거리 생활을 다시 하기 위해 가출했습니다.
몇 주 뒤에 아이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통사정하고 다시 다니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목사님을 부르더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이가 임신한 상태인데 그 아버지가 목사님이라고 아이가 말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집으로 데려올 때 등 뒤에서 선생님들의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아이에게도 뭐라 하지도 않았습니다.

아이는 죄책감을 견딜 수 없어 목사님의 아이가 아니라 가출했을 때 만난 오빠의 아이라고 실토하였습니다.

어떻게 자신을 흉악한 범죄자 취급을 하며 욕을 하는데 반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자신을 그렇게 만든 은혜를 원수로 갚는 아이에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자기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아는 반응하지 않습니다.

영성은 자아를 얼마나 죽이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저는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발끈하면 나의 영성은 거기까지입니다.

비오 신부님은 사제 서품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몸에 오상을 받으셨습니다.
신자들은 성인 신부님으로 좋아했지만 몇몇 고위 성직자들은 그것을 마귀의 장난으로 여겼고 그렇게 보고하여 교회는 신부님이 신자들과 함께 하는 미사를 금지했습니다.

신부님은 아무 반응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순종하여 혼자 몇 년 동안 미사를 드렸습니다.
이런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지만 신부님은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를 받을 때 그분의 자아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분 영성의 수준입니다.
내가 어떤 일에 자주 발끈한다면 나의 수준이 거기까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자주 꾸던 꿈이 슈퍼맨이 되어 하늘을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높이 날아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계속 건물과 산에 부딪혀서 떨어졌습니다.

우리 영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위로 오르는 방법은 그리스도처럼 못 박히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실 때 참지 못하시고 발끈하셨다면 이 지구상에 어떤 생명체도 생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눈 한 번 깜빡이는 것으로 모든 인간을 재로 만들어버리실 수도 있으십니다.
만약 그러하시다면 그분은 하느님이 아니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되시기 위해 그분은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는 인간들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 못들에 의지하여 하늘로 높이 들리우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처럼 지상의 어떠한 것에도 반응하는 수준이 되지 말라고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강론>

(2026. 6. 15. 월)(마태 5,38-42)

<자비보다 정의를 먼저 말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38-42)>

1) 이 말씀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과 사랑으로 악을 굴복시켜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19-21).”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라는 말에 대해서, “악인에게 천벌이 내릴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인가? 아니면 최후의 심판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인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지배자는 그대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는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그러나 그대가 악을 행할 경우에는 두려워하십시오.
그들은 공연히 칼을 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악을 저지르는 자에게 하느님의 진노를
집행하는 그분의 일꾼입니다(로마 13,4).”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어떤 악행과 범죄를 당했을 때, 그 일의 심판과 처벌을 사법제도에 맡기는 것은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경찰과 사법부와 교도소는 선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이고, 하느님의 뜻을 집행하는 제도입니다.

2) 그런데 권력이 부패하고 타락할 때 사법제도가 제 기능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침 제1독서에 왕비 이제벨의 악행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제벨은 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단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의 첫 자리에 앉히시오.
그런 다음, 불량배 두 사람을 그 맞은쪽에 앉히고 나봇에게, ′너는 하느님과 임금님을 저주하였다.‵ 하며 그를 고발하게 하시오.
그러고 나서 그를 끌어내어 돌을 던져 죽이시오.’ 그 성읍 사람들, 곧 나봇이 사는 성읍의 원로들과 귀족들은 이제벨이 보낸 전갈 그대로, 그 여자가 편지에 써 보낸 그대로 하였다(1열왕 21,9-11).”
바로 그런 상황에서 누가 감히 나봇에게 가서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다른 뺨마저 돌려대라.”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왕비 이제벨과 원로들과 귀족들과 불량배들이 모두 한 통속이 되어서, 아무 잘못도 없고 힘도 없는 나봇을 죽인 그 일은, 사랑과 자비보다
‘선과 정의’를 먼저 말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일에 대해서,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셔서 심판과 처벌을 예고하셨습니다.
“개들이 이즈르엘 들판에서 이제벨을 뜯어 먹을 것이다(1열왕 21,23).”
나중에 왕비 이제벨은 하느님께서 예고하신 대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2열왕 9,30-37).

착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나봇처럼 억울하고 원통하게 죽는 일이 오늘날에도 일어나는데, 가해자의 힘이 너무 커서 개인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공동체가 함께 나서야 합니다.

3) 예수님께서 재판 받으실 때,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친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곁에 서 있던 성전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치며, ‘대사제께 그따위로 대답하느냐?’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잘못 이야기하였다면 그 잘못의 증거를 대 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요한 18,22-23)”

그 일과 비슷한 일이 바오로 사도에게도 있었습니다.
“바오로가 최고의회 의원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나는 이날까지 하느님 앞에서
온전히 바른 양심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러자 하나니아스 대사제가 그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바오로의 입을 치라고 명령하였다. 그때에 바오로가 그에게 말하였다.
‘회칠한 벽 같은 자, 하느님께서 당신을 치실 것이오!
율법에 따라 나를 심판하려고 앉아 있으면서, 도리어 율법을 거슬러 나를 치라고 명령한단 말이오?’(사도 23,1-3)”

만일에 악행에 대해서 침묵을 지킨다면?
그 침묵 때문에 더 큰 악행이 계속 저질러진다면?
과연 그것이 하느님의 뜻일까?
다른 뺨마저 돌려대고, 겉옷까지 내주고, 이천 걸음을 가 주는 것은, 선과 사랑으로 악을 굴복시키는 일, 즉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일입니다.
그런데 회개시키기는커녕 악을 더 큰 악으로 키우는 일이 된다면, 그것은 악행에 동조하는 일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루카 17,3ㄴ).
꾸짖어야 할 때 꾸짖는 것도 선과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뺨을 친 경비병을 꾸짖으신 일에 대해서, “가르침과 행동이 다르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자체가 다른 뺨마저 돌려대신 일이고, 당신의 목숨을 내주신 일입니다.

따라서 경비병을 꾸짖으신 일은, 그 사람을 회개시키기 위한 사랑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대사제를 꾸짖은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의’가 제대로 실현될 때에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기쁨과 평화를 누리면서 살 수 있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6월15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복음: 마태 5,38-42

언제나 역설적인 그리스도교 진리!


예나 지금이나 인류 역사가 지속되는 현장에는 언제나 사악한 지도자들이 존재하고, 그의 뒤에는 그에 못지않은 사악한 여인들이 존재해왔습니다.

사악함과 교활함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왕비가 있었으니 사마리아 임금 아합의 아내 이제벨이었습니다.
부창부수(夫唱婦隨)라고 둘은 합세해서 힘없는 백성들을 괴롭혔습니다.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은 나봇이었습니다.
하필 나봇은 아합 임금 궁 바로 옆에 좋은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나봇이 싫다는데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아합은 나봇 소유의 포도밭을 팔라고 압력을 넣었습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유산이기에 이를 거부하자, 부부는 의기투합해서 간계를 꾸밉니다.
신들의 사리사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위해 요즘으로 치면 뒷골목 조폭들까지 동원하고,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을 만드는 참으로 악랄한 부부입니다.

마침내 그리도 원하던 포도밭을 손에 넣은 아합 임금은 회심의 미소를 짓지만, 그 기쁨은 잠시뿐입니다.
부부가 합심해서 저지른 악행은 수천년이 흘러도 계속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사악함과 권모술수가 철철 넘쳐흐르는 아합 임금과 이제벨 왕비 부부를 보니 한 비슷한 부부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사악함에 있어서 어찌 그리도 유사한지...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지금이라도 진정으로 참회하고 반성하면 참 좋을 텐데, 그럴 기색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세월이 흘렀지만 아합 왕과 이제벨 왕비가 풍기던 악취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눈에 즉시 포착된 것이 백성들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을뿐 악행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사악한 왕과 왕비요 끄나풀들이었습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습니다.
윗물이 탁하면 아랫물도 탁하기 마련입니다.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악행과 타락의 전문가들이며 권모술수와 착취의 달인이다 보니,
그런 분위기는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퍼져나갔습니다.

최상위층에서 강탈해가니, 피해를 본 그 다음 층에서는 아랫 층에 화풀이라도 하듯이 강탈해가고, 강탈당한 사람들은 울분은 못 참고 폭력으로 대응을 하고...이런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를 눈여겨보신 예수님이셨기에 정반대의 가르침을 백성들에게 건네신 것입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 39~42)

예수님 말씀 언뜻 들으니 참으로 거부감이 느껴집니다.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으로서 그게 가능한 일일까? 하는 의구심도 듭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이며, 위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진리의 핵심은 언제나 수용하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그러나 기꺼이 수용하고 받아들일때, 그 순간부터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누릴 수 없는 대자유가 선물로 주어집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핵심 진리는 언제나 역설적입니다.
죽는 것이 곧 사는 길입니다.
지는 것이 곧 이기는 길입니다.
내려서는 것이 곧 올라가는 길입니다.
작아지는 것이 곧 커지는 길입니다.

오른뺨을 제대로 한 대 맞고 나서 강펀치로 대응하지 않고 왼뺨을 내미는 일,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주는 일, 천 걸음을 가자는 사람에게 이천 걸음을 가주는 일,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가능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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