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치아나 수녀님 엊그제 주일 저녁부터 40일 사막(피정)에 들어갔답니다.
기도해주세요.
복음묵상은 미리 제게 보내주었기에 제가 올립니다.
✠ 마태 5,43-48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율법의 최소 기준을 넘어 하느님 나라의 사랑을 선포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명령은 단순한 윤리적 이상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의 삶에 참여하라는 초대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공로에 대한 보상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비추십니다.
이는 하느님의 사랑이 조건 없는 은총임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사랑도 상대의 자격이나 감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받은 하느님의 사랑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완전함”은 도덕적 흠 없음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와 보편적 사랑을 닮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인간적인 능력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새 생명의 열매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용서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로 이 말씀의 완성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는듯 합니다.
나는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가 아니라, 누구를 통해서도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도록 살고 있는가?
지금 우리가 사랑하고 있는 모양은 어떠한가요?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5, 44-45)
(정 루치아나 수녀님)
6월16일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1열왕기 21,17-29 마태오 5,43-48
할 수 있었는데 할 수 없었다고 믿었다면
어느 회사의 입사 시험문제에 다음과 같은 문제가 출제되었습니다.
당신은 폭우가 거세게 몰아치는 밤에 운전하고 있습니다.
마침 버스정류장을 지나는데 그곳에는 세 사람이 있습니다.
1. 죽어가고 있는 듯한 할머니
2. 당신의 생명을 구해준 의사
3. 당신이 꿈에 그리던 이상형
당신의 스포츠카에는 단 한 명만을 태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태우겠습니까?
선택 후 설명하세요.
당신은 위독한 할머니를 태워 그의 목숨을 우선 구할 수도 있을 것이고, 의사를 태워 은혜를 갚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회가 지나고 나면 정말로 꿈에 그리던 이상형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200명의 경쟁을 제치고 1등으로 채용된 사람이 써낸 답은 이렇습니다.
“할머니를 병원에 모셔 가도록 의사 선생님께 차 키를 드리죠.
그리고 난 내 이상형과 함께 버스를 기다릴 겁니다.”
할 수 있다고 믿으면 답이 보이고 할 수 없다고 믿으면 답이 보이지 않습니다.
위와 같은 문제를 맞힐 수 있는 사람은 분명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일 것입니다.
거짓말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음란한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화를 절대 내지 않을 수 있을까요?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그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을까요?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없다면 하라고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10살을 갓 넘은 마리아 고레티 성녀도 자신을 죽어가면서 자신을 수십 차례 찌른 청년을 용서하고 같이 천국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할 수 있다고 믿으면 할 수 있고, 할 수 없다고 믿으면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고 하셨기에 우리는 그런 마음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시카고에 사는 한 부자가 소아마비를 앓고 있는 아들을 고치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전문의인 로렌스 박사를 초빙했습니다.
로렌스 박사가 정성스레 이 아들을 치료하여 건강이 회복되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같은 마을에 사는 한 소년도 부잣집 아들과 같은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신문을 보고 로렌스 박사가 시카고에 머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년의 어머니는 돈이 많지 않았기에 자신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그 저명한 의사를 초대한다는 것은 꿈을 꿀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로렌스 박사는 산책하다가 갑자기 비를 만나 그 소년의 집에 잠시 들러 쉬기를 청했습니다.
로렌스 박사인 줄 몰랐던 소년의 어머니가 냉대하며 거절하여 병을 고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이 어머니는 자신이 쫓아 보낸 사람이 로렌스 박사였음을 알고 후회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사제로 불러주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거부하려 했던 가장 큰 이유는
혼자 살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할 수 없었다고 믿었다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사제가 되어보니 혼자 사는 것이 더 편한 것 같고 오히려 결혼해서 사는 것이 더 힘들어 보입니다.
주님께서 불러주시는 길에 반드시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할 수 없다고 믿었던 것들은 영원한 후회를 남깁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으면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이 보이지만, 할 수 없다고 믿으면 주님께서 도와주시려 해도 알아보지 못하고 흘려보내고 맙니다.
사막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돌멩이를 주워 주머니에 넣는다면, 당신은 내일 기쁘면서 또 후회스러울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그 사람은 길에 떨어진 돌멩이 몇 개를 주워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다음날 주머니에 넣어 보니 그 돌멩이들이 다이아몬드, 루비, 사파이어 같은 보석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는 정말 어제의 그 목소리처럼 기쁘면서 후회스러웠습니다.
기쁜 것은 그 돌멩이들을 가져온 것이고, 후회스러운 것은 좀 더 많이 가져오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도 똑같을 것입니다.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만큼 기쁠 것이고, 할 수 없다고 믿었던 것들은 영원한 후회 거리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완전해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 앞에서 어떠한 것들은 불가능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강론>
(2026. 6. 16. 화)(마태 5,43-48)
<나 자신이 지금 누군가에게 원수일 수도 있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3-48).”
1)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보내기 전에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습니다(창세 3,21).
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카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려고 그에게 표를 찍어 주셨습니다(창세 4,15).
그 일들은 하느님께서 죄인들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좋은 예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죄인들도 사랑하시는 것은, 죄인들도 당신의 자녀들이기 때문이고, 그리고 당신의 자녀들이 모두 구원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그가 저지른 모든 죄악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고, 자기가 실천한 정의 때문에 살 것이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에제 18,21-23)”
“나는 누구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는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러니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에제 18,32).”
하느님께서 죄인들에게도 당신의 사랑을 주시는 것은, 죄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이고,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이미 받고 있으니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배반했음을 알고 계셨으면서도,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실 때 그의 발도 씻어 주셨습니다(요한 13,1-20).
배반자 유다도 당신이 사랑하는 제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반자의 이름을 끝까지 밝히지 않으신 채 똑같이 사랑하셨습니다.
배반자가 스스로 회개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그 사랑도 아버지의 사랑과 ‘같은 사랑’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의 사랑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왜 회개하지 않고 떠나버렸을까?
마음속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사랑 자체가 완전히 식어버리고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에게 주어지는 사랑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렇게 끝나버렸을 것입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를 생각하면,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은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다는 사랑하는 것도 거부하고 사랑받는 것도 거부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인데, 그 자신이 스스로 그렇게 되기를 선택한 것이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습니다.>
2)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묵상할 때, 사랑을 실천하는 입장에서만 묵상할 때가 많은데, 우리는 사랑을 받는 입장에서도 묵상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인 나’를 여전히 똑같이 사랑하신다.
이웃들은 ‘원수 같은 나’를 변함없이 사랑한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
답은, 회개와 보속, 그리고 사랑 실천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나는 죄인이 아니다.
또 나는 다른 사람에게 원수 같은 존재가 된 적이 없다.” 라고 생각하거나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모르는 것’과 ‘아닌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성인 성녀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회개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실제로 내가 무슨 잘못을 했든지 안 했든지 간에, 나를 싫어하고 미워하고 원수처럼 생각하는 이웃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또 그 이웃이 원수 같은 나에게 사랑을 주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 실천은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깨달을 때 시작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의 입장에서는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준 일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한 일이기도 하고, 원수인 유대인을 사랑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사마리아인이 베풀어 준 사랑을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은 것으로 생각해야 하는가?
그 사랑을 고마워한다면, 자기에게 사랑을 준
사마리아인에게만 보답하는 것으로 그쳐야 하는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을 해야 옳지 않은가?>
3)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여라.”입니다.
친한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죄인들이나 하는 짓,
즉 죄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을 쌓아 놓고 그 안에서 자기들끼리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단 이기심’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은 지금 우리 현실 속에 존재하는 그 높은 벽들을 없애라는 계명이기도 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6월16일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복음: 마태 5,43-48
비록 대죄를 지었어도...
아합왕과 그의 아내 이제벨이 합세해서 간계를 꾸며 아무 죄도 없는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밭을 차지하는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피가 솟구치는 느낌이 듭니다.
세상에 어떻게 한 나라의 왕이며 왕비란 자들이 그토록 비겁하고 옹졸하며 사악할 수 있는지?
인간이 얼마나 바닥으로 내려갈 수 있는지, 인간말종의 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느님은 정의롭고 공평하신 분, 악의 세력이 더 확장하고 활개를 치도록 마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위대한 예언자 엘리야를 통해 대죄인들에게 마치 철퇴처럼 강력한 펀치를 날리십니다.
”주님이 말한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던 바로 그 자리에서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오...
아합에게 딸린 사람으로서 성안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어 치우고, 들에서 죽은 자는 하늘의 새가 쪼아 먹을 것이다.“
엘리야 예언자의 강력한 경고에 아합은 다행히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고개를 숙입니다.
자신의 옷을 갈기갈기 찢고 맨몸에 자루 옷을 걸치고 단식에 들어갔습니다.
자루 옷을 입은 채 자리에 누웠고, 풀이 죽은 채 돌아다녔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참 묘한 분이십니다.
그토록 사악하고 악랄한 아합이었지만, 갑작스레 한풀 꺾인 그의 모습에 강한 연민과 측은지심을 느낍니다.
그의 뉘우치는 모습에 당신의 마음이 움직입니다.
“너는 아합이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춘 것을 보았느냐?
그가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으니,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가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
매일 밥 먹듯이 죄를 짓고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 참으로 큰 위로와 힘을 주는 하느님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잘못을 뉘우치고 가슴을 치는 우리를 보시고, 진노하시고 벌하시려는 당신 마음을 바꾸십니다.
인류 역사 안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부족하고 부실한 왕이었지만, 그래서 부인 이제벨의 꼬임에 넘어가 인간으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될 부끄러운 행동으로 하느님의 진노를 산 아합왕이었지만,
그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의 무게가 엄청납니다.
그는 비록 대죄를 지었지만, 예언자 엘리야의 경고에 즉시 행동을 바꾸었습니다.
하느님의 진노 앞에 크게 가슴을 치며 자신을 바짝 낮추었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의 진노는 그의 후대에게로 미뤄졌습니다.
우리의 악행으로 인해 크게 진노하시면서도, 가련하고 나약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자비를 거두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너그러운 마음 앞에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