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오복음 6,19-34
오늘 복음은 내일 복음 6,25-34과 이어서 읽고 묵상하는게 필요하다 싶어서 함께 묵상글을 써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너의 보물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많은 것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갑니다. 건강, 재산, 자녀, 인정받는 삶, 안정된 미래….
이런 것들은 물론 모두 소중한 것들이지요. 그러나 그것들이 우리 삶의 가장 깊은 자리를 차지할 때, 오히려 우리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다."(21)
마음은 보물을 따라갑니다.
돈을 보물로 삼으면 돈을 잃을까 봐 두렵고, 명예를 보물로 삼으면 사람들의 평가에 흔들리며, 건강을 보물로 삼으면 작은 병에도 마음이 무너집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더 많이 가져야 안전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더 많이 가질수록 걱정도 늘어납니다.
잃지 않으려는 마음이 우리를 점점 더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24)
재물이 악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디에서 삶의 안전과 행복을 찾느냐는 것입니다.
하느님보다 돈을 더 신뢰하고,
사랑보다 소유를 더 의지하며,
내일에 대한 걱정 때문에 오늘을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이미 재물을 섬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마라."(25)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열심히 일하되, 불안 속에서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 내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늘의 새를 보라고 하십니다.
들의 백합꽃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가지만, 그들의 삶을 돌보시는 분은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내일을 붙잡으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느님을 먼저 찾는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하느님을 첫자리에 모실 때,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 되지는 못할지라도
가장 중요한 것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참된 평화는 많이 가진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께서 내 삶을 이끌고 계신다는 믿음에서 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묻습니다.
내 마음이 머무는 곳은 어디인가?
내가 가장 잃고 싶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그곳에 내 보물이 있고,
그곳에 내 마음도 있기 때문입니다.
(천 사비나 수녀님)
6월20일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복음: 마태 6,24-34
근심 중에 성체 영하지 말기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신앙의 급소를 찌르는 말씀을 단호히 선포하신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마태 6,24.34 참조)
나는 오늘 이 말씀을 한 가지 초점으로 좁혀 묵상하려 한다.
곧, 근심하며 성체를 모시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일을 근심하는 그 마음이, 아버지께서 생명처럼 내어주시는 유산의 맛을 우리 입에서 앗아 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명백한 말씀을 교묘히 비틀며 산다.
"신부님, 돈이 있어야 하느님 일도 하고 이웃도 돕지요.
넉넉히 채워주시는 것도 축복 아닙니까?"
그럴듯하게 포장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하느님과 돈이라는 두 주인을 한 손에 움켜쥐려는 탐욕이다.
거룩한 성체를 모시고 돌아서기가 무섭게 주식 창을 열어 한숨짓고, 집값이 내려갈까 밤잠을 설친다.
온전히 의탁하라는 말씀은 현실 모르는 옛이야기로 치부하고, 제 입맛대로 "적당한 타협"이라는 덧칠을 해 버린다.
하느님의 법을 제 탐욕에 맞추어 뜯어고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가 이를 날카롭게 보여 준다.
농부 바흠은 "땅만 넉넉하면 악마도 두렵지 않다"는 탐욕에 사로잡힌다.
마침내 그는 한 부족에게서, 해 뜰 때 출발하여 해 지기 전에 제자리로 돌아온 만큼의 땅을 모두 주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규칙은 단 하나,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출발점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흠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욕심을 부리다 그 한계를 넘기고 만다.
지는 해를 보고 미친 듯이 달려 가까스로 출발점에 닿았으나,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져 죽는다.
탐욕의 대가로 그가 얻은 땅은, 시신을 묻을 두 평 무덤이 전부였다.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하신 그 선을 넘어 제 식대로 달리면, 영혼이 이렇게 피를 토하며 죽는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내일 걱정을 하지 말라 하셨는가. 탈출기의 만나 사건이 그 알레고리를 환히 밝혀 준다.
하느님께서는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날마다 만나를 내려 주시며 한 가지 율법을 주셨다.
"아무도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마라."(탈출 16,19 참조)
그러나 내일 굶을까 두려워진 사람들은 이를 어기고 만나를 몰래 숨겨 두었다.
그 결과를 성경은 이렇게 전한다.
거기에 구더기가 끓고 악취가 풍겼다(탈출 16,20 참조).
바로 여기에 오늘 묵상의 심장이 있다.
만나는 날마다 내려 주시는 아버지의 양식이요, 훗날 내어 주실 성체의 예표다.
내일을 걱정하여 만나를 움켜쥐는 행위는, 나를 먹이시는 아버지를 믿지 못하는 가장 지독한 불신이다.
그리고 그 불신은 양식을 썩혀 버린다.
어제의 만나는 더 이상 양식이 아니라 구더기였다.
이것이 곧 우리 이야기다.
근심을 품고 성체를 모시는 것은, 어제의 만나를 숨겨 두는 일과 같다.
성체는 본디 영혼의 양식, 아버지께서 오늘 내게 내려 주시는 하늘 만나다.
그런데 내일의 주식과 집값과 노후를 근심하며 그것을 모시면, 그 거룩한 양식의 맛을 우리는 도무지 느끼지 못한다.
근심이라는 구더기가 성체의 단맛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같은 성체를 모셔도, 어떤 이는 하늘의 생명을 맛보고 어떤 이는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한 채 돌아선다.
양식이 달라진 것이 아니다.
그것을 받는 마음에 근심이 끓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내가 예전에 본 한 영상이 그 마음을 절절히 보여 준다.
고등학교 삼 학년 수험생들에게 물었다.
"죽기 전에 꼭 이루고 싶은 꿈이 무엇이냐?"
아이들은 저마다 즐거운 꿈을 적어 냈다.
이어서 물었다. "네 수명이 딱 일 년 남았다면, 그 일 년 동안 꿈을 이루겠느냐, 아니면 오억 원을 받겠느냐?"
아이들은 하나같이 답했다.
"당연히 제 꿈이 중요하지요."
이번에는 그 아이들의 아버지들을 불러 똑같이 물었다.
아버지들의 꿈도 소박하고 아름다웠다.
가족과 떠나는 배낭여행, 시골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아내와 사는 것.
그런데 "당신의 수명이 일 년 남았다면, 꿈과 오억 원 중 무엇을 택하겠느냐?" 묻자, 아버지들은 한결같이 답했다.
"당연히 오억 원입니다.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 돈을 아내와 자식에게 남겨 주고 싶습니다."
보라, 바로 여기에 오늘 복음의 비밀이 있다.
아이들은 제 꿈을 근심한다.
그래서 아버지가 목숨과 맞바꾸어 남겨 주려는 그 유산을 가벼이 여긴다.
그러나 아버지는 제 꿈을 접고 제 목숨까지 팔아서라도 자식에게 유산을 물려주려 한다.
자식이 제 꿈만 바라보며 근심할 때, 아버지가 생명처럼 건네려는 그 유산의 값을 자식은 알지 못한다.
우리가 꼭 그러하다.
우리는 내일의 내 꿈, 내 안위, 내 계획을 근심하느라, 아버지께서 당신 외아드님의 목숨과 맞바꾸어 우리 손에 쥐여 주시는 유산 ― 곧 성체 ― 의 값을 알아보지 못한다.
세상의 죄 많은 아버지도 자식을 위해 제 꿈과 목숨을 돈과 바꾼다.
하물며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어떠하신가.
당신께서는 하나뿐인 아드님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그분의 살과 피를 성체로 먹여 주신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유산이다.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로마 8,32 참조)
아들까지 내어 주신 분께서 우리의 내일을 안 챙기시겠는가.
그러니 내일을 근심함은 단지 소심함이 아니라, 이 위대한 부성애를 짓밟는 교만이다.
근심하며 성체를 모심은, 아버지께서 목숨으로 물려주신 유산을 받으면서 "이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하고 외면하는 자식의 불효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참 일꾼들은 굶주림의 위협 앞에서도 이 유산을 끝까지 신뢰하였다.
콜카타의 마더 데레사 수녀의 일화가 그러하다.
어느 날 고아원의 쌀이 바닥나고 재정도 텅 비어, 당장 내일 아이들이 굶게 될 형편이었다.
사람들은 빚이라도 내자며 발을 굴렀지만, 수녀는 타협하지 않았다.
"걱정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먹이실 것입니다."
그러고는 성당에 들어가 도리어 감사의 기도를 바쳤다.
다음 날 아침, 도시의 파업으로 학교에 배달되지 못한 수천 인분의 빵과 우유가 수녀원 앞에 산더미처럼 쌓였다.
근심이라는 마귀의 속삭임에 한 치도 타협하지 않고 아버지의 약속에 우직하게 순명할 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온전한 섭리로 응답하신다.
근심을 내려놓은 손이라야, 아버지의 유산을 가득 받아 쥘 수 있다.
신앙은 내 현실에 맞추어 하느님의 말씀을 가위질하는 일이 아니다.
돈과 하느님을 한꺼번에 섬기려는 영적 간음을 이제 그만두어라.
성체를 모시러 나아갈 때, 내일의 주식과 집값과 노후의 모든 불안을 그 자리에 내려놓아라.
근심을 품은 채로는, 아버지께서 생명으로 빚어 주신 그 유산의 단맛을 결코 맛볼 수 없다.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하신 그 말씀에 목숨을 걸어라.
나를 위해 아드님의 목숨까지 내어주신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을 믿고 우직하게 순명할 때, 비로소 우리의 빈손은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풍요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강론>
(2026. 6. 20. 토) (마태 6,24-34)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24-34).”
1)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라는 말씀을, 하느님과 재물이라는 두 주인이 있다는 말씀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 재물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닌’ 그것을 하느님 위치에 올려놓고, 하느님처럼 섬기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재물을 섬긴다는 말은, 하느님보다 재물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아닌 것을 하느님 위치에 올려놓고
섬기는 것은 모두 우상숭배입니다.
따라서 하느님보다 재물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우상숭배입니다.
신앙인들 가운데에도 신앙생활보다 세속 생활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신앙생활을 마치 시간이 날 때 하는 취미생활처럼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도 재물을 섬기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세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살 수는 없기 때문에 사회생활도 하긴 해야 하는데, 그래도 신앙인은 세속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신앙인은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신앙인으로서 살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2) “걱정하지 마라.”는, “집착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살다보면 어떤 걱정스러운 일이 생길 때가 있고,
그럴 때에 걱정하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지만,
걱정이 지나쳐서 숨이 막힐 정도라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마태 13,22).”
우리는 어떤 걱정거리가 생겨서 어쩔 수 없이 걱정하더라도 하느님을 믿어야 합니다.
<걱정되니까 더욱더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걱정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나를 걱정하실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하며 걱정하는 것을, 눈앞에 놓인 많은 음식들 가운데에서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걱정하는 것과 먹을 것이 너무 많아서 고민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만일에 먹을 것이 없어서 걱정하는 이웃이 옆에 있는데도, 그 이웃을 외면한 채, 음식이 너무 많아서 무엇을 먹을지 고민한다면, 그것은 ‘죄악’입니다.
3) 26절의 “너희는 그것들(새들)보다 더 귀하다.” 라는 말씀은, 우리 입장에서는 “너희는 솔로몬보다 더 귀하다.”로 생각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솔로몬 왕보다 나를 더 귀하게
여기신다.” 라고 믿는 것이 우리 모두의 믿음입니다.
27절의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라는 말씀과 34절의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야고보서에 있는,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 4,14).”에 연결됩니다.
한 줄기 연기처럼 사라지지 않을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 뜻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그 방법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썩어 없어지는 씨앗이 아니라 썩어 없어지지않는 씨앗, 곧 살아 계시며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 태어났습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 계신다.’
바로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1베드 1,23-25).”
허무한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으면 그것들과 함께 허무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6월20일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복음: 마태 6,24-34
주님 나라는 그분의 힘, 그분의 자비와 사랑으로 건설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걱정의 바탕에 어떤 감정이 존재하는지 묵상해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먹을 양식이 떨어지면 어떡하지?
마실 음료가 없으면 어쩌나?
내 편안한 안식처가 사라지면 어떡하지?
내가 더 나이 들어가면서 병고가 찾아오면 어쩌지?
내가 지금 버티고 있는 무대에서 밀려나면 어쩌나?
결국 우리가 느끼고 있는 두려움, 그 가장 근저에는 나란 존재의 소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수시로 등장하는 하느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런데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과 반드시 쌍으로 붙어 다니는 표현이 있습니다.
내가 항상 함께 하겠다!
정녕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세상 재물이 사라지는 것,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지상의 평화와 안녕이 붕괴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두려워할 것은 우리 영혼 구원과 관련된 두려움입니다.
하느님과 멀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인간의 근심과 걱정,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 그분의 자비와 사랑으로 건설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공포심이나 불안한 마음과 더불어 찾고 추구해서도 안됩니다.
진심으로 하느님을 찾는 사람의 마음 안에는 이미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시기에, 그는 이미 하느님 나라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육체와 재물 자체를 단죄하거나 의식주의 필요성을 부인하신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분께서 제자들과 오늘 우리 각자를 향해 특별히 경고하시는 바는 목숨과 재물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요 탐욕입니다.
매일의 안정적인 의식주 해결을 위한 경제적 기반은 더없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나침입니다.
미래를 위한 재물의 축척도 어느 정도여야지, 너무 지나칠 때 인간은 재물의 노예가 되고,
언젠가 그 지나친 재물이 오히려 큰 재앙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결국 최종적으로, 진정으로 추구할 보물은 하느님이요, 하느님의 나라요, 그분의 다스림입니다.
내일에 대한 지나친 근심 걱정을 모두 말끔히 내려놓으면 좋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하고 나머지는 한없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두 손에 우리들 인생을 몽땅 맡겨드리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자체 해결해 버리고자 기를 쓰면, 그분께서 활동하실 여지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