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오복음 7,1-5
산상설교 후반부 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섯 가지 비유를 들어 가르침을 주십니다.
티와 들보, 돼지에게 던지는 진주, 물고기와 뱀, 좁은 문, 그리고 나무와 열매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들은 서로 직접 연결되어 있지는 않지만, 복음사가는 모두를 한자리에 모아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비유들이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참된 제자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설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그 첫번째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남의 잘못에는 예민하지요.
저 사람은 왜 저럴까,
왜 저렇게 이기적일까,
왜 저 말 한마디를 저렇게 함부로 할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기 자신에게는 관대합니다. 내가 한 말은 사정이 있어서였고, 내가 낸 화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으며, 내가 저지른 잘못은 누구나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때때로 하느님보다 더 엄격하고, 더 까다롭고, 더 참을성이 없을 수 있습니다.
어떤 바리사이들이 그러했지만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는 아무것도 미리 판단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어둠 속에 숨겨진 것들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들을 드러내실 것입니다.”(1코린 4,5)
심판은 하느님의 몫이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다른 이의 잘못에 예민한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아주 과장된 표현으로 말씀하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3)
사실 들보를 눈에 넣고는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은 잘 보고 있다고 믿습니다.
바로 그것이 가장 큰 문제이지요.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판단을 멈추라고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자신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왜 나는 그 사람의 잘못에 그렇게 화가 나는가?
왜 나는 그 사람을 쉽게 용서하지 못하는가?
혹시 내가 인정하기 싫은 내 모습이
그 사람 안에 비쳐 보이는 것은 아닌가?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은
다른 이를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내 안에도 약함이 있고, 나 역시 수없이 용서받으며 살아왔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비판하지 않는 무관심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분별입니다.
남을 바로잡기 전에 먼저 자신의 상처와 한계를 들여다보는 사람, 그래서 타인의 약함 앞에서 조금 더 기다려 주고,
조금 더 이해해 주며, 조금 더 기도해 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참된 제자입니다.
우리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서로의 약함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내 눈의 들보를 보시면서도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사랑을 기억하는 사람은 형제의 티를 발견했을 때 심판자가 아니라 자비로운 동반자가 됩니다.
오늘 나는 누구의 티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그리고 나는,
내 눈 속의 들보를 볼 용기가 있습니까?
(천 사비나 수녀님)
6월22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2열왕기 17,5-8.13-15ㄱ.18 마태오 7,1-5
자기 얼굴에 묻은 것을 거울에서 떼려고 하지는 않는가?
오늘 복음 말씀의 주제는 이웃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며 어떻게 이웃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은 사실 이런 개요, 돼지의 수준의 사람에겐 성체를 줘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태 7,6 참조).
그런데 사람이 남을 심판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그럴 처지가 아님을 알고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면 됩니다.
그런데 가장 어려운 것은 자신이 남을 판단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각자의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지금의 저의 모습은 사실 제가 주일학교 교사를 할 때나 신학생 때 사제를 비판했던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그때는 사제가 아니었기에 사제를 비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환경에 처하게 되니 내가 심판했던 사제의 모습으로 사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저는 본당 사제들이 성당에서 권위적인 모습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모습의 사제는 되지 말아야겠다고 굳게 결심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순간순간 찍은 저의 사진 속에는 교만한 사제가 한 명 있었습니다.
제가 비판했던 사제의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진에서는 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깊이 숙이고 90도로 인사하는데, 저는 한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악수를 받아주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 사진을 보지 못했다면 제가 그렇게 행동하고 있는지 저도 몰랐을 것입니다.
저는 사제들이 너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모습이 싫었습니다.
클러지 셔츠만 입겠다고 다짐했고 스마트폰도 사용하지 않고 자동차도 사지 않겠다고 결심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가 비판했던 사제들보다 더 부자로 살고 있습니다.
옷은 많아서 입지 않는 것이 더 많고, 스마트폰은 최신식이며, 차는 이천cc 중형차입니다.
그리고 그때 그렇게 비판했던 사제의 모습을 하고 있음을 까맣게 잊고, 또 내가 하고 있지 않은 것들을 하는 사제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서로를 심판하던 모습과 같습니다.
남을 심판하는 일은 결국 자신 안의 죄를 감추기 위함입니다. 지금은 죄를 짓지 않고 있을 수는
있지만 그 죄의 씨앗들이 들어있기 때문에 남을 심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지 않은 것으로 이웃을 심판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 안에 아름다움이 있으니 꽃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고, 더러움을 아니까 더러운 게 보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을 심판하는 이유는 백 퍼센트 내 죄를 합리화하기 위함입니다.
남을 교만하다 심판하면 반드시 그 사람도 교만하고 남을 이기적이라 심판하면 그 사람도
반드시 그렇습니다.
지금은 안 그래도 언젠가 그 교만과 이기심의 씨앗이 열매를 맺을 날이 올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생명나무를 먹을 자격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심판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생명나무인 성체를 영할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됩니다.
인간이 예수님이 되지 않는 이상 심판은 저절로 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합니다.
타산지석은 ‘다른 산의 나쁜 돌이라도 자신의 구슬을 가는데 유용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웃은 나의 거울입니다.
내가 이웃에게서 보는 단점은 반드시 내 안에 있는 죄입니다.
그러니 남에게 화가 난다면 그것으로 자신을 바꾸려 해야 합니다.
나의 얼굴에 묻은 것은 털어내려면 다른 사람들을 보아야 합니다.
그들에게서 보이는 단점들이 내 얼굴에 묻은 것들입니다.
그런데도 계속 다른 사람들의 단점만을 바꾸려 한다면, 이는 마치 자신의 얼굴에 묻은 것을 떼어내려고 계속 거울만 긁는 사람과 같습니다.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이웃이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거울을 보며 자신의 얼굴에 손을 대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들보’라고 번역된 단어는 건축에 쓰이는 큰 나무를 말합니다.
그리고 ‘티’라고 번역된 단어는 그것들을 잘게 쪼개면 나오는 작은 나뭇가지들입니다.
다시 말해 이웃들의 눈에서 보이는 작은 나뭇가지들을 다 모으면 내 눈의 들보가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이웃에게 보이는 모든 것들의 총합은 결국 내 눈에 있는 들보입니다.
남에게서 보이는 단점들을 다 모으면 나의 자아의 크기를 알 수 있습니다.
들보는 나 자신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완전히 죽기 전까지 이웃을 심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죽기 전 호흡이 열 번 정도 남았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런데 그 호흡으로 남을 심판하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완전히 죽기 전까지는 이웃에게 단점이 보일 것입니다.
그때 거울을 긁지 말고 그 손을 나의 얼굴로 향해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강론>
(2026. 6. 22. 월)(마태 7,1-5)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 7,1-5).”
1) “남을 심판하지 마라.” 라는 말씀에서, 요한복음 8장에 있는 이야기가 바로 연상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요한 8,3-5)”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요한 8,7.9).”
‘하느님의 뜻’은 죄인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시켜서 구원하는 것입니다(요한 3,17).
만일에 죄인 자신이 끝끝내 회개하기를 거부한다면, 심판을 받고 멸망하겠지만, 그 심판과 멸망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입니다.
<여자를 붙잡아 끌고 오긴 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돌을 던지지 않고 그냥 떠나간 사람들은 그래도 양심이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가 누구이기에 남의 종을 심판합니까?
그가 서 있든 넘어지든 그것은 그 주인의 소관입니다.
그러나 그는 서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서 있게 하실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로마 14,4).”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심판합니까?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가 한 일을 하느님께 사실대로 아뢰게 될 것입니다(로마 14,10.12).”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죽을죄가 아니면, 그를 위하여 청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이는 죽을죄가 아닌 죄를 짓는 이들에게 해당됩니다.
죽을죄가 있는데, 그러한 죄 때문에 간구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불의는 죄입니다.
그러나 죽을죄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1요한 5,16-17).”
<이 말에서 ‘죽을죄’는 ‘죄인 자신이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2) “남을 심판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다음 말씀들과 함께 묵상해야 합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3ㄴ-4).”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5-16ㄱ.17).”
죄 짓는 형제를 꾸짖고 타이르는 것은 ‘심판’이 아니라 ‘형제애 실천’입니다.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는 ‘파문’하라는 뜻인데, ‘파문’은 심판이 아니라, 회개할 기회를 주는 일입니다.
그래서 파문당한 사람이 진심으로 회개하면,
교회는 그를 다시 받아들입니다.
‘형제애 실천’은 ‘함께 가는 일’입니다.
나도 죄인이지만, 형제와 함께 가기 위해서, 함께 회개하자고 권고하는 일입니다.
3) 예수님의 말씀에 있는 ‘티’와 ‘들보’는 가르침을
더욱 생생하게 주기 위해서 사용한 표현일 뿐이고, 누구의 눈에 무엇이 있는지, 즉 누구의 죄가 더 큰 죄인지, 그것은 사람이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판단하실 일입니다.
그래서 ‘들보’와 ‘티’ 라는 표현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 다 똑같은 죄인들입니다.
어떻든 예수님의 말씀은, “너나 잘해라.”가 아니라, “너부터 잘해라.”입니다.
내가 회개하는 것이 ‘먼저’ 할 일인데, 내가 회개하는 것으로만 그치고 형제를 회개시키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사랑 없는 일, 이기적인 일이 됩니다.
우리는 함께 회개해서, 함께 구원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고, 그 다음에는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 주어라.”로 읽어야 합니다.
내 눈에서 들보를 빼내는 일과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는 일을 모두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순서는 ‘나의 회개가 먼저’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6월22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복음: 마태 7,1-5: 남을 심판하지 마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마태 7,1)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인간은 종종 선입견, 제한된 정보, 감정적 판단에 따라 타인을 평가한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1코린 4,5) 이는 심판이 오직 하느님의 고유 권한임을 명확히 보여 준다. 인간이 내리는 판단은 언제나 불완전하며, 하느님의 정의와 비교할 수 없다.
예수님은 형제의 눈에 있는 티와 자기 눈의 들보(3-5절)를 비유로 말씀하신다. 티는 작은 잘못이나 사소한 흠이며, 들보는 자신의 큰 잘못이나 죄악을 의미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사소한 잘못을 쉽게 판단할 때, 사실은 자신의 큰 잘못을 보지 못하는 위선에 빠진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자기 죄를 직시하지 못하면서 다른 이의 작은 죄를 꾸짖는 자는, 스스로 정의를 행한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자기 영혼을 해치는 죄를 짓는 것이다.”(Enarrationes in Psalmos, 30,1 요약) 먼저 자신의 내면을 살피고, 큰 잘못을 제거한 후에야 다른 이를 돕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자세이다.
인간은 자신의 내적 결함을 깨닫고 정화함으로써, 이웃에게 올바른 도움을 줄 수 있다. 이 성찰은 단순히 자기반성을 넘어서 영적 성장과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한다. “먼저 자기 마음을 정화하지 않고서는 타인을 바로잡을 수 없으며, 먼저 자기 영혼을 돌보는 이만이 형제를 사랑으로 바로잡을 수 있다.”(Homiliae in Matthaeum, 33,2 요약)
남을 심판하지 않는 것은 겸손과 사랑의 표현이다. 우리는 먼저 자기 삶과 영혼을 돌보는 일에 힘쓰고, 그 후에 주변 사람들을 진심 어린 관심으로 돕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5절)라는 말씀은 우리 삶의 모든 판단과 행동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오늘 복음은 단순히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도덕적 권고가 아니라, 자기 성찰과 겸손한 사랑을 통해 참된 영적 성숙에 이르는 길을 보여 준다. 타인을 판단하기 전에 자신의 마음과 행동을 돌아보고 정화하며, 겸손과 사랑으로 이웃에게 도움과 격려를 해주는 삶이 바로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일 것이다. 우리 모두, 자기 마음속 들보를 먼저 제거하고, 그 사랑과 겸손으로 이웃의 작은 티도 올바르게 도와줄 수 있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