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의 내밀한 심사가 주조(主調)를 이루는 소설이나 희곡을 영화로 만드는 일은 어렵다. <토르: 천둥의 신>(2011)을 연출한 케네스 브래너의 <햄릿> (1996) 정도가 예외일 것이다. 238분의 상영시간이 말해주듯 브래너의 <햄릿>은 원작에 충실하다. 그는 영화장르의 강점을 십분 (十分) 살려서 새로운 장면을 도입하여 관객의 흥미와 이해도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영화는 흔치 않다. 예컨대 데이비드 진 감독의 <닥터 지바고>(1965)나, 버나드 로즈의 <안나 카레니나> (1997) 혹은 미카엘 카코야니스 감독의 <그리스인 조르바> (1964) 등은 주인공들의 복잡다단한 내면세계나 의식의 흐름을 온전하게 포착하지 못한다. 그들은 장편소설의 관계와 사건을 허둥지둥 추적하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상업성과 가까운 곳에서 생애를 시작한 영화의 불가피한 운명이 근본 원인일지도 모르겠다. 관객들의 동의가 매표구에서 즉시 현금화하는 20세기 대표적인 예술형식인 영화의 속성에 원죄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희곡이나 소설을 원작으로 둔 걸출한 영화의 출현을 기대한다. 아마도 그것은 전율할 내공이나 도저한 천재성을 요구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조제가 사라진 조제의 영화
다나베 세이코의 원작소설은 조제에서 시작하여 조제로 끝난다. 서사와 관계와 사유와 감정은 모두 조제에게 집중돼 있다. 주지하는 것처럼 조제는 하반신 마비로 휠체어에 의지해 살아간다. 뇌성마비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조제의 일상은 언제나 고요하다. 동선(動線)이 지극히 제약돼 있는 탓에 조제는 언제나 자신과 타인들의 내면을 응시한다.
조제는 세상을 모르고 존재감이 엷으며, 인적 교류가 미약한 스물다섯 처녀다. 그녀는 여럿이 하는 일을 싫어하여 데모나 집회에 참여하지 않고,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살아간다. 성치 못한 몸 때문에 지금껏 학교를 다닌 적도 없는 조제. 그러나 아버지에게서 조제는 기초적인 일본어와 한자를 익혔고, 동화책을 보면서 초보수준의 영어도 알고 있다.
이런 조제가 영화 첫머리에 츠네오를 향해 식칼을 휘두른다. 그녀는 노숙자 분위기를 풍기는 할머니가 주워온 숱한 책을 읽고 기억하여 대학교 졸업반인 츠네오를 놀라게 한다. 식중독의 주요원인인 살모넬라균이라든가, 형사범죄 현장에서 쓰인다는 루미놀반응 같은 전문지식을 불쑥 들이대는 조제의 내면은 공격적이고 자기 과시적이다.
조제의 여린 면면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할머니 사후에 맺어지는 츠네오와 조제의 애정관계는 설득력이 약하다. 츠네오 같은 남자를 오래 기다려온 조제의 수동성과 나약성이 절망과 탄식과 결합하여 츠네오를 붙잡는 장면 아닌가! 텔레비전도 없고 라디오도 고장 나고 할머니는 돌아가셔서 세상에 홀로 남겨진 조제의 완전고독을 붙잡지 못하는 영화.
츠네오가 주인공이 돼버린 영화
히로시마를 고향으로 둔 순응적이고 가난한 대학생 츠네오. 그는 우연하게 조제의 휠체어를 구원함으로써 인연을 맺는다. 조제보다 두 살 어리지만, 영화에서 우리는 츠네오의 나이를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매우 활동적이고 바람둥이라는 것은 안다. 노리코와 사귀면서 어느새 카나에와 어렵지 않게 관계를 맺는다. 그러면서도 조제를 생각하는 츠네오.
장애는 영화의 적일지 모르겠다. 시각과 청각을 자극하면서 역동성과 상상력을 무한히 확장시키는 장르가 영화니까 말이다. 따라서 걷지 못하는 조제가 아니라, 정상인 츠네오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은 자연스런 일인 듯하다. 휠체어에 스케이트보드를 연결하여 조제를 싣고 달리는 장면은 츠네오의 성격과 내면을 적실(的實)하게 보여준다.
언제부턴가 츠네오는 조제를 업고 다닌다. 휠체어를 대신하는 츠네오의 튼튼한 두 다리와 넓은 등판은 조제의 든든한 의지이자 버팀목이다. 뒤에서 밀어주는 휠체어에 앉아서 세상을 보는 것과 누군가의 등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다르다. 등과 가슴의 밀착이 전해주는 심장의 고동소리와 호흡은 두 사람의 관계를 깊고도 가깝게 인도한다.
영화는 시종일관 츠네오의 관계와 서사가 중심이 돼서 진행된다. 그의 여자들과 거기 부속되는 조제, 그의 대학시절과 졸업이후 행적 (行蹟), 그의 동생 다카시와 후배 카나이 하루키도 모두 츠네오의 관계와 사건의 범주에 들어있다. 그래서 원작소설에 그려진 조제의 깊이 있는 성찰과 감성과 사유가 영화에서 실종돼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못내 아쉽다.
차고 넘치는 관계들의 향연
영화에서 우리는 츠네오가 벌이는 애정행각과 여러 번 만난다. 조제는 노리코와 카나에 이후에 츠네오의 가슴에 안긴다. 노리코 – 츠네오 – 카나에의 삼각관계가 카나에 – 츠네오 – 조제의 삼각관계로 변한다. 영화는 후자의 삼각관계가 어떤 변화양상을 취하는지 보여주는데 집중한다. 하지만 우리는 변해가는 츠네오의 심리나 내면에 대한 정보가 없다.
조제의 관계를 확장시키는 인물로 코지가 등장한다. 자신을 버린 엄마를 증오하는 소년 코지와 시설에서 함께 살았던 조제. 조제는 언제나 코지를 아들로 부르고, 자신을 엄마라고 부른다. 버려진 아동들의 세계를 잠시나마 드러내는 영화의 사회성. 코지는 영화에서 제외시킨 조제의 아버지와 의붓어미 그리고 배다른 동생을 대신하는 희극적인 인물이다.
츠네오의 가족이 재연하는 히로시마의 제사풍경은 현대일본의 풍속도 가운데 하나를 드러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바다마을 다이어리>에서 그려지듯 일본에 여적 남아있는 집단적인 장례와 제례는 마음 따뜻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할머니의 유골을 간직한 채 일상을 살아가는 조제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제사는 일본의 대사(大事)로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가장 희극적인 인물로 묘사되는 카나이 하루키. 쉬운 한자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성인잡지 에스엠에 정신 줄 놓아버린 철부지 카나이. 영화가 만들어낸 인물 카나이는 츠네오에게 잊힌 조제를 떠올리게 한다. 객석의 웃음확장을 위해 너스레와 장난기를 총동원하는 카나이는 조제의 다면적이고 입체적이며 깊은 울림을 상실케 하는 광대 (廣大) 같은 인물이다.
조제와 함께 사라진 호랑이와 물고기들
휠체어의 장애인에게 너무나 넓은 동물원. 그러하되 조제는 호랑이를 보고자 한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걸 보고 싶었어.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면 안길 수 있으니까.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호랑이를 보겠다고! 만일 그런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진짜 호랑이는 평생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어!”
츠네오와 함께 호랑이를 본 조제의 심사가 어떠했을까?! 우리 안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포효하는 호랑이에 놀란 조제가 츠네오의 팔을 잡으며 무서워하고, 그런 조제를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는 츠네오. 그들의 다음 여정(旅程)은 물고기를 보는 것이다. 삶은 달걀을 준비하여 후쿠오카의 나카미치 수족관을 찾아가는 조제와 츠네오. 하지만 수족관은 휴관이다.
“깊은 밤에 조제는 눈을 뜨고 커튼을 열어젖혔다. 달빛이 방 안 가득 쏟아져 들어와 해저동굴의 수족관 같았다. 조제도 츠네오도 물고기가 되었다. 죽음의 세계라 생각했다.”
수족관을 보고 난 다음 조제가 경험하는 밤중의 달빛과 느낌을 전하는 원작이다. 하지만 영화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장면을 포착한다. 거대한 조가비 모양의 침대에서 성애장면을 연출하는 조제와 츠네오. 조제에게 완벽한 행복을 의미하는 물고기와 죽음의 세계 대신 육체의 향연과 형광(螢光)으로 재연된 물고기들의 날카로운 유영(遊泳)이 있을 뿐이다.
글을 마치면서
섬세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하고 고집스러운 조제의 모순적인 내면세계를 잡아내는 장면이 영화에도 있다. 그것은 츠네오가 조제에게 산보하면서 무엇을 보는지 묻고 답하는 장면이다. 꽃과 구름과 고양이를 보고 싶다는 조제. 그 대답에 환하게 웃으며 어처구니없어 하는 츠네오. 그들은 그만큼 서로가 서로를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츠네오한테 조제는 그저 스치듯 만난 여러 여자들 가운데 하나로 남는다. 하지만 조제에게 츠네오는 처음이자 마지막 남자일 가능성이 농후(濃厚)하다. 조제가 다시 호랑이를 보러 동물원에 가거나, 수족관을 유영하는 물고기들을 만나러 장거리 여행길에 오를 가능성은 별로 커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이제 전동차(電動車)로 이동하는 자유를 얻었다.
츠네오가 조제에게 다가간 것은 이웃남자가 조제에게 탐하는 육욕(肉慾)과 다르지 않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카나에를 찾아서 츠네오는 조제와 작별하는 것이다. 어쩌면 가슴 시릴 법한 장면에서 조제는 성인잡지 에스엠과 관련된 책을 선물한다. 카나이와 별로 다르지 않은 츠네오의 내면을 독서한 까닭이 아닐까, 생각한다.
보통사람들과 조금은 다른 장애인의 심리와 내면을 웃음으로 버무린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울림이 작다. 카나에와 길을 가다가 거리에 주저앉아 크게 울어대는 츠네오의 슬픔이 흉중(胸中)을 아프게 하지 않음은 현대일본 청년들의 손쉬운 만남과 이별 탓이리라. 상업성과 제휴해야 하는 영화의 속성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산뜻해 뵈지만 경박하고 부박(浮薄)한 세태가 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비단 나만의 상념(想念)인지, 그것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