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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시장에서 만난 어린 나

작성자엄영아|작성시간26.06.23|조회수19 목록 댓글 0

광장시장에서 만난 어린 나

 

엄영아

 

오래전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 있었다. 종로의 오래된 지붕들이 이어진 광장시장이다. 한국을 다녀온 이들은 그곳을 두고 "옛 정취가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반세기 넘게 타국에서 살아온 내게 그 말은 단순한 여행 정보가 아니었다. 오래 묻어 두었던 그리움을 불러내는 초대장이었다.

 

시장 입구에 들어서자 걸음이 저절로 느려졌다. 사람들로 가득한 골목,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상인들의 목소리, 전 부치는 냄새와 김치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떡을 빚는 손길과 김을 뿜어내는 찜통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지금의 광장시장이 아니라 오래전 기억 속 시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어린 시절 나는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잡고 시장을 따라다녔다. 그 시절의 시장은 생계의 현장이었다. 지금처럼 먹거리가 넘치기보다 국수와 백반, 채소 노점이 사람들의 허기를 달래주었다. 시장 바닥에 떨어진 배추 우거지를 주워 담던 노인의 굽은 등도 떠올랐다. 가난했지만 성실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내가 고국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간 1970년대, 시장도 변해갔다. 허기를 채우던 노점 자리에 순대와 빈대떡이 들어서고, 먹거리 골목이 형성되었다. 내가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살아가는 동안 시장도 저마다의 시간을 지나며 오늘의 모습을 만들어온 것이다.

 

불판 위에서는 빈대떡이 익어가고, 사람들은 나란히 앉아 순대와 전을 나누어 먹고 있었다. 시장 한편의 생선 냄새와 채소 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스쳤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기억은 흐려져도 냄새와 소리는 몸속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미국에서 오십 년이 넘는 세월을 살며 서구의 음식과 문화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장 골목에서 맡은 김치 냄새와 기름 냄새, 사람 사는 냄새는 한 번도 내 안에서 사라진 적이 없었다.

 

평소 길거리 음식을 꺼리는 남편과 함께 오래된 대구탕집 줄에 섰다. 처음에는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짓던 남편도 뜨거운 국물을 몇 숟갈 떠먹은 뒤에는 말없이 숟가락만 움직였다. 김이 오르는 양은 냄비 앞에서 국물을 들이켜는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시장의 맛은 음식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 안에는 오랜 세월과 사람들의 이야기가 함께 녹아 있다.

 

며칠 뒤에는 나를 친언니처럼 아껴주는 영란과 다시 시장을 찾았다. 영란은 꼬마김밥과 새우만두를 사서 내 앞에 놓아주었다. 음식을 건네는 손길과 따뜻한 눈빛 속에서 나는 어머니를 떠올렸다. 그날 내가 받은 것은 만두 한 접시가 아니라 오래 잊고 지냈던 정이었다.

 

생각해 보면 시장은 사람들의 삶이 모이는 곳이다. 여유로운 사람도 있고, 하루를 버티기 위해 애쓰는 사람도 있다. 웃음도 있고 한숨도 있다. 시장 골목에는 서로 다른 삶이 뒤섞여 흐른다.

 

우거지를 줍던 노인도, 생닭을 팔던 상인도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삶의 흔적은 시장 곳곳에 남아 있다. 오래된 가게의 문짝에도, 사람들이 오가는 골목에도 세월이 켜켜이 쌓여 있다.

 

광장시장은 내게 단순한 시장이 아니었다. 반세기의 시간을 건너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하는 통로였다. 그곳에서 나는 음식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역사와 삶을 만났고, 잊고 지냈던 내 모습을 다시 만났다.

 

나이가 들수록 그리움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머물지 않는다. 어느 골목의 풍경이 되고, 익숙한 냄새가 되고, 오래된 소리가 된다.

 

그날 광장시장의 연기와 소란 속에서 내가 만난 것은 특별한 풍경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시장을 따라다니며 세상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어린 시절의 나였다. 그리고 그 아이는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내 안에 그대로 살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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