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부터 서둘러야 할 일들이 있었다. 지나치게 비싸게 산 물건을 UPS로 반품해야 했고 바닥을 드러낸 생필품도 사야 했다.
차 키를 집어 들고 돌아서는 순간 휴대폰이 진동했다. 워낙 마케팅 전화가 많이 걸려오는 탓에 내 휴대폰은 늘 무음 상태였다. 소리조차 나지 않는다고 해서 별명도 '용각산'으로 붙여놓았을 정도였다. 전화보다는 카톡으로 외부와 소통하는 데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주치의 전화번호였다. 나는 다시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아침부터 닥터 오피스에서 걸려온 전화가 반가울 리 없었다. 순간 망설임이 밀려왔다.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잠시 울리던 전화는 끊어질 기색이 없었다. 결국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주치의가 아니라 건강 상담을 맡아주던 전문간호사였다. 그제야 지난주에 받았던 혈액검사가 떠올랐다. 예상대로 그녀는 검사 결과를 알려주기 위해 전화를 한 것이었다. 간호사는 여러 수치를 차례로 읽어 내려갔다. 익숙하지 않은 의학 용어와 숫자들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알아듣는 척하며 듣고 있었지만 사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가 들려왔다.
"지난번보다는 많이 내려갔어요. 콜레스테롤도 그렇고 혈당 수치도요. 그래도 아직은 조심하셔야 해요. 식이요법과 운동을 꾸준히 하셔서 체중을 조금 더 줄여보세요.“
그녀는 전문가답게 환자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표현을 골라 썼다.
'그만 좀 먹고 운동해서 살부터 빼세요!'라고 말했다면 얼마나 민망했을까.
물론 그런 말을 들었다면 오히려 오기가 생겨 이를 악물고 살을 뺏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결론은 하나였다.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라는 것. 나는 3개월 후 혈액검사를 다시 받기로 한 뒤 전화를 끊었다.
지난 10여 년 동안 배드민턴을 해왔고, 최근 1~2년 전부터는 피클볼도 함께 즐기고 있다. 한때는 자다가도 배드민턴 셔틀콕이 라켓 줄에 맞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 정도였는데, 요즘은 그 자리를 피클볼이 대신하고 있다. 패들에 맞고 튀어 오르는 플라스틱 공 소리 역시 만만치 않다. 배드민턴 셔틀콕은 흰 거위나 오리의 깃털로 만들어지지만 피클볼은 색깔도, 종류도 다양하다. 체육관 운영 일정 때문에 매일 할 수는 없지만, 일주일에 두세 번은 꾸준히 운동하고 있다. 한번 코트에 들어서면 보통 네다섯 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게임이 이어질수록 이마에서는 땀이 흐르고 옷은 금세 젖어버린다.
그러니 적어도 운동을 안 해서 생긴 문제라는 말은 억울하게 들렸다.
'피클볼 레슨을 받으면 운동량도 늘고 실력도 더 좋아질 텐데...‘
지난 1년여 동안 피클볼 레슨을 두 차례 받았다. 한 번에 10회씩 진행되는 수업이었고, 현재 세 번째 레슨 과정에 등록되어 있으니 모두 합하면 25회 정도의 레슨을 받은 셈이다. 앞으로도 다섯 번이 남아 있다.
처음에는 별문제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레슨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늘어나면서 나와 지인의 수업 일정은 자꾸 뒤로 밀렸다. 한 번 연기된 레슨은 두 번, 세 번으로 이어졌고, 어느새 레슨은 언제 재개될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나는 이런 상황이 불편하다. 친분과 약속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같은 레슨비를 내고도 우리는 불평 한마디 하지 못한 채 차례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예약 손님이 아닌 대기 손님이 된 기분이었다.
얼마 전 코치는 우리를 따로 불러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다시 레슨을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믿고 기다렸다. 하지만 방학이 시작된 뒤에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같은 코트에서 게임을 하고 있어도 레슨을 받으라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결국 참다못한 지인이 코치에게 물었다. "언제쯤 레슨을 받을 수 있을까요?"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시간이 없어요." 그리고 한마디가 덧붙었다. "조만간 기회를 한번 만들어 볼게요.“
한 번 약속을 가볍게 여긴 사람은 두 번, 세 번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지인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더 이상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오기가 생겼다. 도대체 피클볼 코치가 뭐길래, 시간이 없어 레슨비를 먼저 받고도 수업을 진행하지 못할 정도로 사람이 몰리는 걸까.
내 전공 분야의 본능이 깨어났다. 리서치가 시작되었다. 자료를 찾고 비교하고 분석했다. 그리고 결론이 나오자마자 공부에 뛰어들었다. 낮에는 해야 할 일들이 많았기에 공부는 늦은 밤에 시작되었다. 졸음을 쫓아가며 몇 시간짜리 강의 영상을 보고 또 보았다. 동영상을 시청하며 필기를 했고, 시험도 치렀다. 처음에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이론과 실기가 포함된 긴 교육 과정을 마친 뒤 치른 첫 시험에서 나는 보기 좋게 떨어졌다. 만만하게 봤던 만큼 결과는 더 쓰라렸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다시 공부한 뒤 재시험에 응시했고 결국 피클볼 코치 자격증을 손에 넣었다.
주일학교 한국어 교사로 일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세 시간짜리 수업을 위해 그 몇 배의 시간을 준비에 쏟곤 했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아는 것을 전달하는 일이 아니라, 상대가 이해할 수 있도록 다시 배우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그때 이미 배웠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손 놓고 레슨 시간을 기다리는 것보다 직접 배우고 준비하는 편이 내 성격에 맞았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피클볼을 가르치게 된다면, 나는 다시 몇 배의 시간을 들여 공부할 것이다. 그 과정조차 즐거울 것 같다.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피클볼을 마음껏 하며 살고 싶다.
한편으로는 다짐도 생겼다. 회원이 많다는 이유로 약속한 수업을 뒤로 미루는 코치는 되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맡고, 약속한 시간은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다. 기회가 된다면 한인 노인회 회원들이 나의 첫 수강생이 되었으면 좋겠다. 함께 웃고 땀 흘리며 운동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벌써 마음이 설렌다.
무엇이든 한 번 궁금증이 생기면 끝까지 파고드는 성격 덕분에 또 하나의 자격증이 내 손에 들어왔다. 나는 이런 과정이 좋다. 목표가 생기면 배우게 되고, 배우다 보면 어느새 새로운 문 앞에 서 있게 된다.
생각해 보면 이번 도전도 혈액검사 결과 한 통의 전화에서 시작되었다. 앞으로 또 어떤 전화가, 어떤 계기가 되어 나를 새로운 길로 이끌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나의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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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봉희 작성시간 26.06.12 와우!!!
대단한 열정을 누가 쫒아갈 수 있을까요.
피클볼 코치를 기다리다 아예 자격증을 따다니 정말 놀라워요.
바쁘게 살아가며 쉴 시간도 부족할텐 데 밤늦게까지 공부해서 끝내
이루니 그 집념이 그저 부럽네요.
약속을 어기는 코치 덕분에 얻은 코치자격은 정말 귀하네요.
좋아하는 피클볼을 가르치며 마음껏 뛰어 건강도 챙기기를 응원합니다.
어깨만 아니면 하영샘의 첫 제자가 되고싶은 데 아쉽네요.
열심히 살아가며 주위에 좋은 기운을 나누며 전하는 하영샘은 귀한 사람이네요. -
작성자yek55 작성시간 26.06.20 와우!!!
저도 '정말 하영샘 답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글을 단숨에 읽어 내려갔답니다.
대단하셔요. 저도 무릎과 어깨만 성하면 "두번째' 제자가 됐을텐데요... 각종 운동을 좋아했는데...
부럽고 그 열정을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