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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림 수필 모음

사랑이 지나간 자리

작성자이경림|작성시간26.06.23|조회수31 목록 댓글 0

사랑이 지나간 자리

 

김경림

 

   책상 서랍에서 쵸코렛 선물카드를 꺼냈다. 부채 모양으로 펼쳐 세어보니 다섯 장이다. 얕은 숨이 입가에 머물다 이내 입 꼬리가 올라갔다. 초밥 가게를 하면서 단골손님에게 받은 선물이다, 식당을 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데 유독 마음의 그물에 머무는 존재가 있다. 문득 떠올리면 미소를 짓게 하는 고마운 존재이다.

   “네가 최고야. 우리 손자에게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만들어 줘서 감사해.” 언제나 밝은 미소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좋아했다. 그녀는 91세의 나이에도 활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발바닥에 작은 공이 있어 콩콩 튀면서 걷는 걸음새는 즐거움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듯하다. 작은 체구에 꽃무늬 옷을 즐겨 입었다. 내게 군인처럼 짧은 경례를 하곤 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손주가 먹을 점심을 사러 왔다. 그때마다 자주 손에 쥐어 주던 쵸코렛 선물카드가 여유롭게 사용하고도 다섯 장이 남아있다.

   한 달 정도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전화를 해볼까도 생각했지만 연락하는 것이 한편 부담을 주겠다 싶어 궁금증만 키워가고 있었다. 어느 날 그녀의 딸 애나가 왔다. 왠지 기운이 없이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엄마의 안부를 물었다. 애나의 얼굴이 붉어지며 먼 길 여행을 떠났다 했다. 나는 처음에 무슨 말인지 몰라 못 해 멍하니 서 있었다. 건강하던 분이 갑자기 유명을 달리했다니 믿기지 않았다. 평소 규칙적인 생활 습관으로 건강을 잘 유지하였다고 했다.

“이층 방에서 쓰러져 바로 병원으로 갔어. 중환자실에서 한 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말 한마디 없이 우리 곁을 떠났어.”라고 말하는 애나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푸른 눈동자 깊은 호수에 물이 고였다. 마주한 나의 검은 눈동자 그늘 막에 샘이 솟아올랐다. 어떠한 말로도 위로를 대신할 수 없어 끌어안고 등을 가만히 토닥여 주었다.

   일생을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각자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 주어진 시간만큼 한 생을 살아낸다. 내 몫을 불사르고 무대 뒤로 사라진다. 커튼이 쳐진 빈자리에 또 다른 무대가 세워지고 새로운 서사가 시작된다. 스치듯 맺어진 인연 속에 반짝이던 순간을 기억하는 것은 남아 있는 사람의 몫이다.

   애나는 아들만 넷이다. 첫째가 고등학생이고 몇 살 터울로 막내는 초등학생이라 한다. 학교가 다르다 보니 학교 등하교 시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 그동안 비키의 도움을 많이 받아 왔다. 지금은 모든 일을 하려니 엄마의 부재가 상실감으로 크게 왔나 보다. 마음이 허허롭고 외롭다는 생각이 들면 나를 찾아온다고 했다. 엄마 생전에 자주 왔던 곳을 찾으며 위안을 얻는 것 같다. 보이지 않는 그림자를 쫓는 그녀의 텅 빈 동공엔 가을이 담겨 있다.

   비키는 대만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오래 살아 고향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고 했다. 딸 애나는 아빠가 백인이어서인지 동서양의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다. 외모는 백인에 가까운데 동양의 정서를 어머니에게 받아서 행동은 동양적 감성이 느껴졌다. 올 때마다 빈손으로 온 적이 없다. 뭔가를 손에 들고 나타나 불쑥 내밀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간다. 아마도 비싼 물건이었다면 받는 내가 부담스러웠을 텐데 그 마음도 헤아려서일까 받고 나면 빙긋 웃게 하는 것들이다.

   견과류를 병에 담아 건네주며 출출할 때 먹으란다. 아로마 오일을 주기도 했다. 직접 만든 거라며 건네는 작은 병들이 이름표를 달고 주머니 안에 있다. 오일이 담긴 병 안에 작은 덩어리가 가라앉아 있다. 각기 다른 재료가 독특한 아로마 향으로 후각을 부드럽게 자극했다. 기억에 남는 선물은 컬러링 노트다. 고양이 그림이 있는 노트와 12색 색연필이 담겨 있는 쇼핑백을 받아 들고 당황했다. 이게 뭐지 다른 사람에게 줄 것이 나에게 잘못 온 걸까.

   곰곰이 생각하니 그녀의 행동이 이해되었다. 생각이 흩어지고 어지러울 때 혹은 울적할 때 컬러링을 하고 나면 기분 전환이 되나 보다. 그래서 내게 주고 싶었던 마음이겠지. 때론 순수하고 꾸밈없는 모습이 상대방을 무장해제 시킨다. 눈높이를 낮춰 수평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 평소 느끼지 못했던 엉뚱하고 발랄한 모습이 내 시야에 들어온다.

   남아 있는 다섯 장의 쵸코렛 선물카드. 다 사용하고 나면 비키의 그림자가 지워져 버릴 것 같아 한동안 내 책상 서랍에 보관해야겠다. 짧은 인연으로 식혜앙금 같은 여운은 사랑이고 축복이다. 어쩌지 못하는 이별 속에서 추억할 수 있는 공간은 선물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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