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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설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16-12-25 성탄절 설교

작성자안홍기|작성시간16.12.25|조회수5,759 목록 댓글 0

16-12-25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마태복음 1 18-25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1928년의 겨울에 캔서스 시티의 어느 교회에 허름한 옷차림의 한 청년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배 시간 내내 눈물을 흘리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예배를 인도했던 목사님은 예배 후에 그를 불러 이야기를 들어 보았습니다.

그는 19살부터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회사에서도 관심을 갖지 않아서 이리저리 헤매게 되었답니다. 그러다가 이곳 캔서스 시티까지 오게 되었는데,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돈이 없어서 기차 정거장에서 잠을 자고, 여기저기를 방황하면서 그림을 그린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정을 들은 목사님은 너무도 딱한 생각이 들어서 “교회 창고가 있으니 그곳을 정리해서 지내고, 교회 청소를 하면서 그림공부를 계속하라.”고 제안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청년은 이 교회의 창고에서 수 개월 동안 묵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창고에 지내면서 뜻밖의 친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창고 안의 수많은 쥐들이었습니다.

이 쥐들은 처음에는 청년을 보자 도망쳤지만 계속해서 먹을 것을 주니까 나중에는 서둘러서 도망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청년은 이렇게 쥐들을 가까이에서 관찰하게 되었고 쥐들의 행동을 만화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청년은 월트 디즈니였고, 여기서 그 유명한 미키 마우스가 탄생이 된 것입니다. 목사님은 월트 군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창고에 사는 쥐 한 마리까지도 사랑하신다네, 그리고 자네는 더욱 사랑하시지 않겠나? 그러니 언제나 자네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낙심하지 말고 열심히 만화를 그리기 바라네.

그러므로 월트 디즈니에게 미키 마우스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신념의 상징이었습니다. 이토록 하나님께서는 이름 없는 청년과 창고 속에서도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외로운 청년을 혼자 버려두지 않으시고, 생쥐를 보내어서라도 친구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 어느 곳에서, 어떤 형편에 있던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예언자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증언하면서 이사야서 7 14절을 인용하였습니다.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어로 ‘임마누엘’의 뜻은 무엇입니까?

23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 역사 속에 나타나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 곁에 계심을 보여 주신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실제로 나타내신 증거라는 말씀입니다.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서의 예언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천국에 가만히 앉아 우리에게만 와서 머리를 조아리라고 하신 것이 아니고, 친히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은 그만큼 우리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를 찾아오셔서 ‘임마누엘’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21절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라고 천사가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우리들의 죄에서 구원하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에서 말씀하시듯 ‘우리들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오신 목적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미국 선교사 리처드슨(Don Richardson) 부부가 인도네시아에 선교의 사명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자야 섬에 식인종이 있을 때였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부족 간의 싸움이 치열했습니다. 그런데 다행인 것은 이렇게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다가 만일 어느 한 쪽이 화해를 청할 때에는 자기 마을의 간난 아기 하나를 상대편에 갖다 주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 아기를 ‘평화의 아기’라고 불렀습니다.

그 후 리처드슨 선교사가 이 섬에 도착한지 2년째 되는 해에 큰 부족 간에 엄청난 싸움이 시작되었고, 그 싸움은 너무도 치열하여 화해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양 쪽 모두 너무도 많은 사람이 죽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부부가 아기를 안고 이 언덕에 나타난 것입니다. 자기 아기를 ‘평화의 아기’로 내 놓겠다는 것입니다. 그 광경을 잔뜩 긴장하며 대치하고 있던 양 편 부족들이 놀라움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 부부는 누구입니까? 바로 리처드슨 선교사 부부였던 것입니다. 그 부부는 한 살 난 자기 아들을 ‘평화의 아기’로 식인종들 사이에 내 놓은 것이었습니다. 이 감동스런 광경을 말없이 바라보던 양쪽 진영의 식인종들 사이에서 엄청난 함성이 터졌습니다. 그러나 서로 사생결단을 하기 위한 증오의 함성이 아니라 평화를 기약하는 기쁨의 함성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무식하고 본능적인 식인종들이었지만 그들 간에 평화를 원하는 백인 부부의 사랑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의 문이 닫혀 있던 인도네시아 자야 족(Irian Jaya)에게 복음이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신들이 저지른 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했던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평화의 아기’로 오신 것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화의 아기’로 오시지 않았다면 결코 우리의 구원은 있을 수없는 일이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이 아기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로 오심을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여야 할 것입니다. 구원자로 오신 주님을 찬양합시다.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의 아기’로 오신 구원자이십니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2 10절과 11절입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예수께서 나시던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던 목자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하시던 말씀이었습니다.

천사가 전한 말은 “온 세상 사람들에게 아주 기쁜 소식을 전하겠는데, 그것은 다윗의 동네에 너희들을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그리스도이다.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와 ‘주’라는 말씀의 의미는 어떤 것입니까?

먼저 헬라어인 ‘그리스도’구원자, 기름 부은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주’라는 단어의 뜻은 우리의 왕이며,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단어를 합친다면 예수는 나의 구원자 나의 왕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아기 예수로 오신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구원을 하셨으며, 영원토록 우리들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우리들의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커다란 기쁨입니다.

 

종교 영화로 잊을 수없는 대작은 율 부린너 주연의 ‘왕 중 왕’(King of King)입니다.

이 영화를 촬영할 때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의 감독인 세실 드밀(Cecil DeMille)예수 그리스도를 골고다의 언덕의 십자가에 매다는 장면을 촬영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LA에서 가난하고 피곤한 엑스트라를 모았습니다. 왜냐하면 화난 얼굴들을 카메라에 담아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촬영 준비가 늦어져서 골고다 언덕의 촬영이 성탄절을 하루 앞둔 날에 강행하게 되었습니다.

수백 명이 각자 맡은 배역대로 분장을 하고 세 개의 십자가 앞에 늘어섰습니다. 이 중요한 장면을 촬영하려던 세실 드밀 감독은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 모두에게 외치기를 “2분간 묵상을 하고 촬영을 시작합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전체가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그 순간 감독은 ‘아차 실수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유는 촬영하려는 장면이 화가 나고 소리 지르는 군중의 모습을 찍어야 하므로 조용하게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늦었습니다. 이때 마침 어느 구석에선가 ‘기쁘다 구주 오셨네.’가 시작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백 명이 합창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그 다음에는 ‘참 반가운 신도여’가 계속해서 울려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성탄을 축하하는 합창이 울려 퍼질 때, 거칠고 피곤한 그들의 얼굴에 눈물이 흐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눈물을 흘리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성탄에 그들은 비록 촬영장의 세트에 불과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달리신 십자가라고 생각하면서 각자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날 촬영은 대 성공이었습니다. 신이 난 군중들은 배우 못지않게 연기들을 잘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실 드밀 감독은 ‘그날이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라고 술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심은 피곤하고 지친 자에게, 걱정 많고 번뇌하는 자에게 기쁨이 되고, 용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기쁨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나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고, 우리의 왕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1 44절에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이 우리에게 오심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들어도 기뻐서 태중에서도 뛰놀았던 세례 요한처럼 우리들도 예수님의 이름만 들어도 기뻐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고는 견딜 수없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놀라운 기쁨을 주신 구원자이시고,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2 14절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라고 천군 천사들이 찬양하였습니다.

‘아기 예수가 이 땅에 태어나신 것은 하나님께는 영광이며, 아기 예수가 우리에게 오심을 기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를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이 서부 영화를 통해서 보셨듯이 서부개척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 될 때 이름 하여 부르기를 California Gold Rush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수많은 남자들이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서부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몰려든 광산의 Camp즉 광부들의 숙소는 너무나 거칠고, 주먹질, , 총질 등으로 날마다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소란하기가 말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 Camp에서 아기가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산모는 아기를 낳자마자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졸지에 엄마를 잃은 아기가 너무나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그 난폭한 광부들이 부모 없는 아이들 기르게 되었습니다.

광부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 했습니다. 당번을 정하고, 시간표를 짜서 아기를 돌보고, 우유를 먹이고....이렇게 아기를 돌보고 기르는 동안에 이 캠프 안에서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아기를 돌보기 위해 술이 적어지고, 고함지르며 싸우는 일이 적어지고, 말소리도 아기가 있을 때에는 조용하고 차분하게 되었습니다. 오직 금 때문에 서로 경쟁하며 싸우던 사람들이 협력을 배우고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한 아기 때문에 지옥이 천국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Roaring Camp(으르렁거리는 집)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이 광부 숙소가 Camp of Luck(행운의 집)이란 이름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평화의 집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칠고, 소란하고, 싸움과 죽음이 난무하면서 서로 으르렁거리던 사람들이 예수께서 찾아오시면, 협력을 배우고, 나중에는 서로 사랑하는 것을 배우게 되어 아름다운 사람들로 변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중에 거칠고, 소란하고, 싸움과 죽음의 죄 중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우리에게 오신 아기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이하여 자신의 마음을 지옥에서 천국으로 바꾸는 대 변화의 역사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변화가 이웃과 세상까지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오실 때,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으로 이 모든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지금 현재의 신앙은 어디까지 와 계신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아는 정도입니까?

아니면 세계의 3대 성자 중에서 한 분으로 알고 계신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 부모님이나, 내 남편과 아내가 믿는 분으로 여기고 계신 것입니까?

아니면 나를 구원하시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나를 위하여 부활하셔서 나와 함께 하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으시는 것입니까?

 

이제는 확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들어서 아는 예수님이 아니라, 나의 구원자, 나의 왕으로 영접하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멀리 계신 분으로 여기시지 마시고,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모습에 있더라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최고의 신앙은 어떤 신앙입니까?

바로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자신감 있는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어떤 상황이던지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나를 위해 죽기까지 하시고,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고,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은 우리에게 놀라운 힘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하지만 강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힘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아기 예수로 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기쁨의 좋은 소식을 가지고,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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