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29 내 아버지의 집
요한복음 2장 13절-22절
여러분들 중에 사시던 집을 다른 사람에게 세를 주신분이 계십니까?
사람들이 먼 곳에 가면서 자기 집을 다른 분에게 빌려 주었다가 후에 돌아와서 남이 사는 것을 보면 기분이 이상할 것 같아요. 내 집을 어떻게 사용할까? 잘 사용할까? 아무렇게나 사용할까? 두말 할 것 없이 자기 집처럼 깔끔하게 사용한다면 기분이 참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북경에 있을 때 생각해 보면 깨끗하게 사용하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우리 한국인들에게 집을 잘 빌려 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만일 아무렇게나 사용했다면 참 속상할 것 같아요. 당장 내 쫓고 싶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다가오면 의례히 예루살렘 반경 20마일 이내의 사람들은 12살 이상이면 모두 예루살렘 성전에 누구나 올라와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도 이때는 모이게 되어 있는데, 그 때 운집한 인파가 무려 220만 명을 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창조주 그분,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도 자기 성전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셨을 때 맨 먼저 찾아가신 곳이 바로 성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눈에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이 어떻게 비쳤을까요?
이 성전은 그분을 예배하기 위하여 세워진 집이고, 그분을 섬기기 위하여 세운 사람들이 모여 일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예루살렘 성전에 오시자마자 아무 말 없이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시고, 그 채찍을 휘두르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루살렘 성전 뜰의 넓이는 약 14에이커, 우리나라 평수로 18,000평, 즉 59.400평방미터가 됩니다.
성전은 몇 개의 연결된 뜰이 있습니다.
첫째 뜰은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들어올 수 있는 이방인의 뜰이 있습니다.
이방인은 거기서 더 깊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방인들은 거기서 기도하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둘째 뜰은 여인들의 뜰입니다.
희생 제사를 드리는 여인 이외의 여인은 이 뜰을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셋째 뜰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뜰이 있습니다.
이 울타리의 가름대에서 예배 자들의 제물이 제사장에게로 넘겨졌습니다.
다음엔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제사장들의 뜰이 있습니다.
거기에 번제를 드리는 제단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성전 서쪽 밑 거리에 상점들이 죽 늘어서 있었으며, 그곳에서 양이나 비둘기를 팔고, 돈을 바꾸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분이 성전에 와서 놀라고 화가 난 것은, 바로 이방인이 기도하고 예배하는 이 이방인의 뜰이 성전으로 들어가는 입구라기보다는 장사들로 득실거리는 시끄러운 시장바닥이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용되던 로마인의 돈인 데나리온(denarii)이나, 고대 아테네 사람들이 사용하는 드라크마(drachmas) 같은 돈은 성전에 헌금으로 바칠 수가 없도록 되어있어서 성전에서 사용되는 세겔로 환전소에서 바꿔서 헌금을 드려야 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성전에 예배드리러 들어가는 소위 입장료는 성전에서 통용되는 화폐로 반 세겔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반 세겔은 어느 정도의 값어치입니까?
바로 당시 노동자의 이틀분의 품삯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데나리온이나 드라크마를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서 성전 화폐인 세겔로 환전하면 겨우 반 밖에 쳐 주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틀 인건비만 주면 될 것을 나흘 인건비 즉 두 배를 지불하고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추가로 부가된 이틀 분의 인건비에 해당하는 돈은 어디로 가게 되는 것입니까?
바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 환전상들의 기름진 배를 채우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예배 자들이 고향에서 고생, 고생하면서 양이나 비둘기를 가져 왔어도 멀쩡한 동물을 더럽고 병들었으니 성전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트집을 잡아 들여보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자기들이 파는 것들을 사도록 했는데, 정작 그것들이 병들고, 온전하지 못한 것이란 말씀입니다. 이렇게 돈에 눈이 뒤집힌 장사치들이 이방인의 뜰로 올라온 것입니다. 그것도 양 한 마리나 비둘기 한 마리의 값을 어떤 장사들은 무려 16배 이상씩을 부쳐서 팔고, 환전도 몇 배의 차익을 남기며 환전해주기 때문에 예배하는 자들은 몇 배의 손해를 보면서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가지고 예배를 드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은 이미 예배 자들을 돕는 곳이 아니고, 종교 지도자들과 장사치들의 배를 채우는 소굴, 강도의 굴혈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율법인 미시나(Mishnah)에 보면 성전에 대한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성전 언덕을 물건을 지니고, 신을 신고, 또는 그의 발의 먼지를 묻힌 채로 들어가지 말 것이며, 이곳을 지름길로 삼아도 안 되며 더욱이 침을 뱉는 것을 금한다.”
이렇게 보면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이미 자기들의 율법을 깨뜨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잘못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은 절대 권력을 가지고 절대 부패한 사람들의 표본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신 주님은 몹시 분노하였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채찍을 휘두르시고, 상을 엎으시고, 돈 상자를 집어서 돈을 모조리 쏟아버리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켰다”는 시편 69편 9절 말씀을 머리에 떠올렸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나를 삼켰다.’는 말씀은 어떤 뜻입니까?
‘불태운다.’ ‘망하게 한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지극한 마음 때문에 자기 생명을 내 놓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분이 이 성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확실히 본 것입니다. 성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 성전을 깨끗이 하기 위하여 자기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는 열정적인 모습을 본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주의 집을 위한 열정”이라고 번역했습니다만 사실은 “당신의 집을 위한 열심”입니다. 그분이 당신의 집을 위한 열정이 이렇게 불처럼 타올랐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분은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이 성전의 주인인 것을 확실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교부였던 제롬은 이 본문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타오르는 불빛과 같은, 그리고 반짝이는 별빛과 같은 빛이 그의 두 눈에서 쏟아져 나왔으며, 하나님의 위엄이 그의 얼굴에서 빛나고 있었다.”
이 분의 행동이 이처럼 과격했지만 그분의 행동에 아무도 화를 내거나 그분에게 달려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조차 반항하지 못하고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분의 위엄에 다 놀라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궁금한 것은 이 분이 누구기에 이처럼 성전을 자기 집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다시 말하면 당신이 이 집의 주인이란 표적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왜 그분은 자기 몸인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성전의 의미를 찾고 참된 예배를 회복시키려고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도록 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의 완성은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 후부터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그분이 찾아간 한 교회 이야기가 나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부자 교회였습니다. 모든 것이 화려했습니다. 사람들의 옷은 값비싼 것으로 치장 되었습니다. 자기들은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란 자랑이 교회에 가득 찼습니다. 요즈음 이런 교회를 그들 스스로가 ‘명품교회’라고 한다더군요. 그런데 정작 주인은 그 안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어디에 계셨어요? 어떻게 하고 계셨어요? 요한 계시록 3장 20절입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서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정작 성전의 참 주인이신 주님께서 성전 밖에서 행여 문을 열어 줄까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신답니다. 깊이 생각해 보면 오늘 우리의 현실과 무관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분이 성전에서 그처럼 분노하신 근본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기들이 경배해야 할 집 주인인 하나님은 잃어버리고 자기들의 배만 채우는 종교지도자들의 타락상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종교 지도자들이 물질에 현혹되어 장사치가 되어 버린 것은 결과적으로 무엇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미 물질을 하나님보다 더 중히 여기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돈에 자기 신앙과 영혼을 팔아먹은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내 아버지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진실한 기도를 하지 않고 또 거기에다 예배와 기도를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깊은 견책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일반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을 때 그것을 방해하는 자들에 대한 견책의 소리입니다. 이방인의 뜰은 모든 민족, 모든 사람들이 들어오는 장소입니다. 장차 모든 민족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게 될 것을 상징하는 땅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곳에 오는 것을 방해하므로 영적으로 이기주의가 팽배해 있다는 데 주님은 분노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2000년 전 주님께서 이 땅에 사시던 그 때에 성전을 정화한 이 사건을 새삼스럽게 오늘 우리에게 그리고 오늘 한국교회에 주시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해답을 주님의 말씀 속에서 찾아보십시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주님은 자신의 몸을 성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몸만 성전입니까?
사도 바울은 우리들 자신을 가리켜 뭐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까?
고린도 전서 3장 16절 말씀을 통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린도 전서 6장 19절에는 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니라.”
바울 사도는 바로 우리를 가리켜, 그리고 우리 몸을 가리켜 ‘하나님의 성령이 계신 성전’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 한국 교회에게 주시는 이유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속을 우리들 자신이 솔직하게 들여다보십시다. 우리들 자신이 하나님의 성령이 계신 성전임에도 불구하고 물질에 현혹되어 물질이 하나님보다 더 중한 것으로 여기며, 돈만을 위해 살고 있다면 지금 당장 그런 속된 생각을 주님처럼 단호하게 내 몰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들 자신이 하나님의 성령이 계신 성령의 전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가치관과 기준으로 살아가는 나 중심적인 마음이 있다면 오늘 이 시간 그것들을 즉시 내 몰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들 자신이 하나님의 성령이 계신 성령의 전임에도 불구하고 나만 구원 받고, 우리 가족만 복 받으면 된다는 영적 이기심도 반드시 내 몰아야 할 것입니다.
정결한 마음과 정직한 영으로 회복되기를 기도하십시오.
성령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전인 내 몸과 마음과 영혼에 가득 차 있다면, 그리하여 성전을 더럽히고 있다면 이 시간 그것들을 “당장 내몰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바로 들으실 수 있는 복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교회에 대해서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이사야 56장 7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하나님 아버지의 집, 주님의 몸 된 교회, 주의 피 값으로 산 교회는 어떤 곳이 되어야 합니까?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주님은 교회가 어떤 곳인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나 자신이 날마다 거룩해지기 위해서 기도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 위해서 기도해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기도할 것은 많은 데, 교회에 와서조차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도하지 않는 교회, 기도하지 않는 신앙인이 좋은 교회와 좋은 신앙인이라 생각하십니까?
이제 우리 모두 코를 땅에 데고 엎드립시다. 그분만 높아지도록…….
무슨 일을 하던지 그분을 생각하며 하십시다. 그분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예배에 참석할 때 그분께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모두 집중시킵시다,
책임을 받고, 봉사할 때도 그분에게만 충성하며 시선을 집중시키십시다.
헌금하거나, 무슨 일을 계획할 때도 오직 그분의 은혜만을 생각하십시다.
교회에 모여서 세상 이야기, 인간들의 이야기만 주고받지 말고,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나누십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가 그분을 섬기는 종들이라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이사야 42장 1절에서 4절 말씀에는 하나님 앞에서 섬기는 종의 모습이 나옵니다.
새 번역 성경으로 읽습니다.
“나의 종을 보아라.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사람이다. 내가 택한 사람, 내 마음이 기뻐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가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소리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거리에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실 것이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쇠하지 않으며, 낙담하지 않으며, 끝내 세상에 공의를 세울 것이니, 먼 나라에서도 그의 가르침을 받기를 간절히 기다릴 것이다.”
이 말씀은 그분이 세상에 오셔서 모범을 보여주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의 제자라면 그분의 자세를 따라 가야 할 것입니다.
그분이 오늘 우리 교회에 오신다면 어떻게 하실까?
그분이 오늘 나에게 오신다면 어떻게 하실까?
이 말씀을 늘 생각하며 그분께 영으로 진실하게 마음과 정성을 모아 예배드리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