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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설교

배에 함께 오르매 22-02-20 주일설교(창립9주년감사예배)

작성자안홍기|작성시간22.02.20|조회수388 목록 댓글 0

22-02-20 배에 함께 오르매

마태복음 14장 22절-33절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시험해 보았습니다.

미식 축구선수들이 힘이 좋으니 아기를 얼마나 안고 있을까? 3시간이었답니다.

그렇다면 아기 엄마는 아기를 얼마나 안고 있을 수 있을까요?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에 청계산을 올라가는데 여 집사님이 아이를 엎고 산에 올라야 하기에 제가 나서서 아이를 앞으로 안아 매고 안고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죽는 줄 알았습니다. 아이가 무거우면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제가 한참 보디빌딩 시합에 나가던 때였습니다. 청계산 정도는 그냥 뛰어서 올라갈 정도의 체력이었단 말씀입니다, 그런데 제가 호흡이 곤란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결국 아이를 데리고 산에 오른 것은 제가 아니고 아이 엄마였습니다. 제가 힘들어 하자 제게 아이를 맡겼지만 아이에게서 한시도 눈을 때지 않은 엄마가 달려 와서 아이를 안고 산을 올랐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십시오. 어떤 그림이 보이십니까?

첫째 장면예수님께서 서두시면서, 제자들을 재촉해서 배를 타고 벳세다란 동네로 가도록하는 장면입니다.

두 번째 장면그 후 백성들은 흩어지게 하시는 장면입니다.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던 것 같습니다. 남자만 5천명이 넘었으니까요.

그리고 세 번째 장면주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들어가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상한 장면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제자들을 배를 태워 보내시는 장면에서 ‘즉시’ ‘재촉하사’라는 단어를 중복되게 사용하면서까지 무엇 때문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벳세다로 서둘러서 보내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배타고 빨리 떠나시면 될 텐데 왜 그렇게 하셨는가 하는 말입니다.

 

이 문제의 답을 얻기 위해서는 이 사건 앞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4장 13절부터 21절까지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입니다. 바로 5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가르치신 후에, 저녁이 되자 굶주린 그들을 먹이신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오병이어" 사건에 이어지는 사건입니다. 5천명을 먹이신 후에 제자들을 먼저 배 태워 보내시고, 무리들을 주님께서 친히 흩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태여 그 군중들을 그렇게 흩어버릴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여기에 대하여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침묵합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요한복음은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요한복음 6장 15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예수님께서 보리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을 먹이신 후 백성들 사이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이대로 모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임금을 삼자는 움직임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전에도 광야에서 40일 기도가 끝난 후에 사단이 제안한 일이었는데, 주님은 단호히 그것을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유혹에 시달리셔야 했던 것입니다.

 

백성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벌어지자 가장 충격 받은 것은 어떤 사람들이었겠습니까? 제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이 왕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눈이 번쩍거리고, 가슴이 뛰기 시작했겠지요? 이제 "고생 끝, 행복시작이라"고 얼마나 좋아했겠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을 왕으로 옹위하려는 백성들과 힘을 합하려 하겠지요?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을 재촉해서 배를 태워 보내야 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무리들을 설득하여 흩어 보냅니다. 그리곤 다시 기도하러 산으로 혼자 올라가셨습니다.

 

이처럼 군중 속의 주님에게는 말 할 수없이 고독한 시간이었습니다.

죄 많은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준비하고 계신 주님의 고독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열광하는 군중들이 알았겠습니까? 아니면 제자들이 알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럴 때는 주님 혼자 아버지와 기도로 교통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4절 말씀을 보면 바로 이때가 언제였는지 밝혀 줍니다.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때는 유월절이 가까웠던 시기였습니다. 우리 달력으로 4월 중순, 그러므로 은은한 달빛이 예수 계신 곳을 비치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교통수단이 배였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가버나움 서쪽에서 배를 타고 벳세다로 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벳세다와 갈릴리 바다가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그 당시에는 갈릴리 바다가 지금보다 물이 많았을 것이고, 벳세다 마을 어귀까지 갈릴리 호수가 연결되어 있었고, 마을 어귀에서 배를 타고 곧 바로 갈릴리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제자들을 태운 배가 호수 가운데로 나가자, 바다가 본색을 드러냈는지 갑자기 바람이 매섭게 불어오고, 배는 조금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갈릴리는 바다라고 불릴 정도로 상당히 큰 호수입니다.

너비가 13km(8mile), 길이가 21km(13mile)이나 되어서 사람들이 큰 호수라고 부르기도 하고 바다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갈릴리는 해면보다 212m나 낮은 호수이기 때문에 북쪽에 헬몬 산에 눈이 녹아내리면서 바람이 불면, 해발 보다 깊은 갈릴리 호수로 내리 꽂힙니다. 더욱이 해질 녘이면 이런 풍랑이 가끔 일어난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도 해질 무렵 배를 타고 떠났으니까, 결국 풍랑이 일어날 시간에 맞춰서 떠난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밤 4경까지 바다에 떠 있었으니까, 무려 8-9시간 동안 풍랑과 싸우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좀 억지를 부린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풍랑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지요? 풍랑이 일 것을 뻔히 알면서 바다로 몰아넣었으니 풍랑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무엇 때문에 제자들을 그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을까요?

제자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은 주님께서는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기 일에만 열중하고 계셨던 것인가요? 마가복음 6장 48절 말씀을 보십시오.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젖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주님은 산에서 홀로 기도하고 계셨으나 사실은 줄곧 제자들을 바라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깊은 밤이고,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면 제자들이 보일 리 만 무입니다만, 주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그러므로 줄곧 그들을 보고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들의 모든 것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시며, 작은 신음까지도 놓치지 않고 다 듣고 계십니다.

결국 제자들을 8-9시간이나 고생시키시고 그 후에야 그들을 도우러 물 위를 걸어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왜 물 위로 걸어가신 것입니까?

마가복음 6장 48절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님께서 오셔서 무조건 그들을 도와준 것이 아닙니다.

"He wanted to pass by them."

그냥 지나가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자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바다에 주님께서 걸어오시니 제자들에게는 유령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파도에 놀라고, 주님께 놀란 제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비명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그 때에야 제자들이 예수님인 것을 알고 소리쳤겠지요?

“야, 주님이시다, 주님 저희를 도와주세요.”

그리하여 주님께서 배 위에 오르시니 거짓말처럼 바람이 그쳤습니다.

예수님은 바다도, 바람도, 그 어떤 것도 다 다스리신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또한 구원은 은혜로 되는 것이지만, 축복을 받으려면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고,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배에 태워 그 위험한 바닷길을 보내셨을까요?

위에서 언급한 대로,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의 충동에 영향 받지 못하도록 보냈습니다. 또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이 누구십니까? 자연을 다스리시고, 풍랑도 잔잔케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외에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 문제없고, 고통 없는 곳은 없습니다.

주님이 가르치고자 하셨던 것은 주님은 앞으로 제자들이나 교회에 문제가 일어났을 경우, 그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시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의 문제를 다루신 것입니다. 생활 속에서 진리를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 주님의 교육 방법입니다. 또 이처럼 진리를 경험한 사람들이어야 남을 인도하고 도와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들을 고통 가운데로 몰아넣으신 이유는 이렇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들의 고통 가운데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마가복음 저자도 그것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6장 48절에 정확하게 기록했습니다.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젖는 것을 보시고,”

주님께서 계속해서 바로 보고 계셨다는 것을 제자들이 알게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고통이 닥쳐왔을 때, 주님은 어디 계십니까? 무얼 하십니까?

주님이 허락하셨건 허락하지 않았던 간에 우리들의 고통 안에 주님이 항상 함께 계십니다. 그 풍랑이 주님의 가슴에 있다는 것입니다. 주의 자녀들이 고난을 당하면 주님이 그 고난 중에 함께 계십니다.

그런 면을 바울 사도는 "성령께서 우리보다 더 탄식 하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그 사건을 가슴에 품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사실에서 우리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이 사실은 어떤 사건이든지 그 문제를 주님이 가슴에 품고 계신다면, 그 문제의 해결점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고통 중에 주님이 함께 계신다면, 그 안에 뭔가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말도 됩니다.

그렇다면 그런 고통을 해결하는 길은 이것입니다.

먼저 그 안에 감춰진 주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그 문제를 풀어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단련도 받고, 훈련도 받아야 합니다. 때로는 회개도 하고, 때로는 버릴 것을 버리고, 마음을 씻어야 할 것은 씻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때가 되면 주님은 그 아픔을 치료하기 위하여 우리 곁으로 찾아오신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그러나 우리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그때도 주님은 내 곁으로 오시는 것이지 곧 바로 그 문제 안으로 들어와 해결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내가 주님을 반드시 내 배 안으로 모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부르짖지 않으면 우리 안에 오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 문제를 주님 앞에 내 놓고 초청해야 합니다. 즉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주님을 배 안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우리에게 오실 때, 우리 문제 속으로 들어오실 때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풍랑을 밟고 오셨다. 인생의 모든 소란함은 다 그의 발밑에 들 것이니, 기독교인이여, 왜 두려워하느냐?”

 

그러나 성경에는 문제 후에 그 문제를 반대로 해석한 안타까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입니다. 홍수 후에 그 사람들은 인간 비극의 원인이 하나님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니 바벨탑을 쌓자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벨탑을 쌓은 진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높이 탑을 쌓아서 흩어짐을 면하고, 또 이젠 비가와도 염려 없도록 하려고 탑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늘까지 탑을 쌓고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찾아 제거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 괘씸죄에 걸려 도리어 온 세계에 흩어져 고통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인간들이 몇 십 년 몇 백 년 동안 이뤄 놓은 것을 하나님은 하루아침에 해쳐버릴 수 있는 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그 이유가 무엇이냐? 즉 911 사건의 원인은 모슬렘 과격분자들이었다고 판단하고 그것만 해결하면 모든 것이 OK라는 식으로 해석한다면 문제를 그치지 않게 됩니다. 우리 개인 가정의 문제도 누구 때문이고, 무엇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고만 해석하면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배(ship)"입니다.

주님은 배 안에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배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배는 가정이요, 교회요, 사회, 즉 공동체를 말합니다. 또한 우리의 인생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은 가정, 교회, 그리고 사회의 주인이시란 말씀입니다. 내 삶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이런 기본 공동체를 평화로 인도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참된 인간의 평화는 개인으로부터 이뤄집니다만, 그러나 그런 평화를 더욱 확실하고 견고하게 해주는 것은 배입니다. 배가 부서지면 아무리 개인적인 결심이 단호하고 강하다 할지라도 그는 물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갈릴리 같은 세상을 살아갈 때, 큰일이나 작은 일을 앞에 놓고, “주님,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면서, 주님의 권능에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주신 주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외적인 것을 회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적 회복이 먼저 이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시면 어떤 문제도 해결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지금 당장, 우리들이 원하는 때는 아닐지라도 주님 안에서는 반드시 해결됩니다.

세상을 파멸에서 구원하고자 하는 주님이 우주의 중심에 서 계십니다. 그 주님이 이 세상에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무심하게 그냥 내 팽개쳐 놓지 않으시고,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사랑의 눈으로 언제나 바라보십니다. 심지어 우리의 작은 신음까지도 다 듣고 계십니다. 그러한 주님께서 우리들이 문제와 고통 속에서 신음할 때에 우리에게 다가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때 우리가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주님! 살려 주십시오. 주님! 도와주십시오."라고 간절히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배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러면 만사가 해결됩니다. 주님은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돕기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위하는 것이라면 자기 목숨도 내어 놓으신 분이십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주님께서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을 내 안에, 내 삶 안에, 내 배 안으로 모시여 들이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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