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2026년 강동문학 원고

길 위에서(수필)

작성자강 라헬|작성시간26.06.23|조회수31 목록 댓글 2

길 위에서

강라헬

 

요양병원에 계신 언니를 뵙고 오는 길이다. 벌써 두 해째 그곳에 계신다. 매달 한 번씩 가는데 오늘은 다른 날과 달리 말을 못 붙일 정도로 짜증과 화가 대단하다. 늘 어렵고 무서운 언니지, 오늘은 그 정도가 매우 심해 예전의 그녀를 보는듯했다. 돌아오는 길에 언니와의 관계를 되돌아보았다.

 

언니가 대학생이었을 때 나는 유치원생이었다. 나는 팔 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태어났을 때부터 가족의 관심을 받지 못했던 나를 언니는 누구보다 더 못마땅해했다. 까닭인즉, 몸이 허약한 것도 모자라 사팔뜨기인 내가 부끄럽기 때문이었는지 내 외모 치장에 지나치리만큼 관심이 많았다

.

내 모든 기억은 유치원 다닐 때부터다. 무슨 일인지 그 전의 기억은 전혀 없다. 내 기억은 교통사고 난 이후의 기억뿐이다. 언니의 극성맞은 관심은 내 머릿속의 생각까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나 보다. 표정, 행동거지, 말투 그리고 옷매무새까지 당신을 빼닮길 원했다.

 

어린 나이에도 그렇게 해야만 내 마음이 편하다는 것을 일찍 터득했는지, 언니가 원하는 대로 했다. 하지만, 나에 대한 언니의 지나친 관심은 공포였다. 그것은 학대였으니까. 꽃 회초리를 휘두르며 나의 모든 것을 참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언니는 결혼과 함께 내 곁을 떠나갔다. 그날 어린 나는 만만세를 불렀고, 유인이 됐다. 그때 언니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아들만 다섯인 언니의 시댁은 을지로의 소문난 재력가다. 둘째언니 시댁의 중매로 마침 의대 졸업반인 장남과 언니의 결혼이 성사되었다. 군의관 제대 후 언니와 형부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로 했다. 모교 강단에 서는 것이 그녀의 꿈이었으니까. 졸업 후 군의관이 된 형부와 최전선인 강원도 원통에서 신접살이를 시작했다. 첫 임신을 한 언니가 먹고 싶다는 음식을 바리바리 마련해서 엄마와 함께 원통에 갔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마지막 근무지인 조치원에서 제대를 두 달 남긴 어느 날 형부에게 큰 사고가 났다. 김신조 간첩 사건으로 전국이 시끄러울 때다. 부상병 치료를 위해 앰뷸런스를 타고 가다 운전병의 실수로 차가 벼랑으로 전복되는 사고가 났다. 헬리콥터를 타고 서울대학병원으로 이송되었는데 언니는 얼마나 놀랐는지 백일 지난 둘째 딸을 거꾸로 업고 있다는 것을 병원에 도착해서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언니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때 언니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이런저런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 3년 후 형부는 돌아가셔서 지금 국립묘지에 계신다. 서른한 살, 청춘의 한복판에서 홀로 남겨진 언니는 자신과 조카들, 그리고 내게 서슬 퍼런 엄격함을 세웠다. 집 안에서도 의관을 정제하듯 옷과 양말을 갖춰 신어야 했던 그 숨 막히는 규율은 어쩌면 무너져 내리는 삶을 지탱하려는 언니만의 처절한 성벽이었으리라. 어찌어찌 교사가 된 언니는 교장선생님으로 퇴직했다.

그렇게 평생을 절제 속에 살았던 언니는 교직을 마무리하며 긴 여정을 끝마쳤다. 언니는 짧았던 결혼 생활의 회한을 보상받으려는 듯, 내게 지독한 열망을 쏟아부었다. 당신의 접힌 꿈이 나를 통해 교수라는 꽃으로 피어나길 바랐던 것이다. 재수까지 했지만, 지방 대학으로 가야만 했던 나를 기어코 서울 **대학에 청강생으로 입학시켰다. 열심히 공부만 하라고 종용하던 언니의 강권은 사실 비장함이 섞인 호소에 가까웠다.

 

그러나 사랑의 열병에 눈이 멀었던 나는 기대를 저버린 채 집안의 대단한 반대에도 결혼을 택했다. 그날 이후 언니의 시선은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 버렸다. 당신의 꿈을 짓밟은 나를 향한 원망이 얼마나 깊었을지, 이제야 그 서늘한 마음의 결을 짐작해 본다. 아마 나를 볼 때마다 교수의 꿈을 이뤄주지 못한 내가 미웠으리라.

 

언니를 뵙고 돌아오는 길에 이제껏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떠올랐다. 내게 그렇게 야박했던 것도, 그녀만의 지독한 사랑 표현이었을지 모른다는 의문이 생겼으니까. 한때 천호동의 뭇 청년들을 설레게 했던 미모와 지성을 갖추었던 그녀, 친구들의 선망이 되었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결혼 상대, 그리고 재벌 부럽지 않은 재력가인 그녀. 그런 그녀가 지금 요양병원에 누워있다.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언니는 고관절수술 후 재활을 위해 요양병원에 입원한 첫날부터 내가 왜 이런 곳에 있어야 하느냐며 눈을 감아 버렸다. 음식도 치료도 거부하며 스스로 시들어가는 길을 택했다. 이 년째 호스에 의지해 생명을 이어가는 언니를 마주할 때마다, 내 가슴엔 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과 안쓰러움이 차오른다.

 

냉정했던 훈육도, 억지스러웠던 입학 권유도, 고단했던 나의 결혼 생활을 외면하며 나를 미국으로 등 떠밀었던 그 매정함조차도, 실은 나를 향한 언니만의 치열한 사랑이었음을 돌아오는 길 위에서 비로소 깨닫는다. 언니의 그 깊은 속내를 이제야 조금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조차 오만일 테다.

 

가시밭에 한 송이~’ 언니가 사랑하던 가곡 <한 송이 흰 백합화>의 선율이 귓가를 맴돈다. 그 가사가 마치 가시 돋친 삶을 고결하게 버텨온 언니의 뒷모습 같아 목이 메어온다. 관계를 반추하며 도달한 마지막 정거장은 결국 사랑, 그리고 깊은 참회다. 다음번 면회 때는 야윈 언니의 귓가에 온기를 담아 속삭이리라. “언니 미안해요. 그리고 온 마음으로 사랑합니다.”라고.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전해주 | 작성시간 26.06.23 집안에서도 의관을 정제하듯 옷과 양말을 갖춰 신어야 했던 그 숨 막히는 규율은 어쩌면 무너져 내리는 삶을 지탱하려는 언니만의 처절한 성벽이었으리라. 어찌어찌 교사가 된 언니는 교장선생님으로 퇴직했다.ㅡㅡ
    언니의 얘기가 든 <길위에서> 를 읽고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우리 인생사 길 위에는
    참으로 알 수없는 일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묵묵히 걸어 교장선생님까지 되신 언니를 얼마나 안아 주어야 될까요. 언니가 세상을 안아 준 것처럼 저도 안아드리고 싶습니다.
    강라헬님, 건필 하시기를!
  • 작성자강 라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24 전해주작가님~~
    마음에 와닿는 댓글 감사합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