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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에서

일어나서 가자

작성자거창학사|작성시간22.03.06|조회수62 목록 댓글 0

37.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보시니,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느냐?

38.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여라.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39. 예수께서 다시 떠나가서,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40. 다시 와서 보시니, 그들은 자고 있었다. 그들은 졸려서 눈을 뜰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 무슨 말로 대답해야 할지를 몰랐다.

41. 예수께서 세 번째 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남은 시간을 자고 쉬어라. 그 정도면 넉넉하다. 때가 왔다. 보아라, 인자는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42. 일어나서 가자. 보아라, 나를 넘겨 줄 자가 가까이 왔다."(막14:37-42)

37 Then he returned and found the three disciples asleep. He said to Peter, “Simon, are you asleep? Weren't you able to stay awake for even one hour?” 38 And he said to them, “Keep watch, and pray that you will not fall into temptation. The spirit is willing, but the flesh is weak.”

39 He went away once more and prayed, saying the same words. 40 Then he came back to the disciples and found them asleep; they could not keep their eyes open. And they did not know what to say to him.

41 When he came back the third time, he said to them, “Are you still sleeping and resting? Enough! The hour has come! Look, the Son of Man is now being handed over to the power of sinners. 42 Get up, let us go. Look, here is the man who is betraying me!”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을 다시 새롭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사돈네 팔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일은 바로 나를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그 일이 왜 내 일이냐고 물을 것입니다.

미국에는 많은 기러기 엄마들이 있습니다.

남편만 한국에 홀로 남아서 공부하는 아들과 아내를 위해 미국에 돈을 보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부가 떨어져서 사는 것은 아이들 공부 때문입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이런 한국 사람을 이해하지 못 한다고 합니다.

아이들 때문에 부부가 떨어져서 산다고!

한국의 부부들은 아이들을 위해 서로 떨어져 살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을 살리시기 위해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죄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사람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그들에게 천국을 허락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실까요?

죽음에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그 죄의 값을 지불하신 것입니다.

백화점에 300만 원짜리 밍크코트가 걸려있는데 300원을 내고 그것을 가져올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반드시 제 값을 지불해야 그것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너무 귀해서 무엇으로도 그 죄값을 대신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을 내어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위해 하나님으로써 사람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우리를 죽음에서 구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죽으심을 앞두시고 겟세마네에 가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죽음에 대해 간단히 말 할 수 없습니다.

주먹을 쓰고 사람을 죽인 사형수도 형틀로 끌려갈 때는 바지에 오줌을 질질 싸면서 끌려간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입니다.

성경은 죽음을 앞에 두신 예수님의 심리 상태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다. 예수께서는 두려워하며, 괴로워하셨다.(막14:33)

 

물론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믿고 소망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를 의심해 본 적이 없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병정이 회초리질을 하고, 고문하고, 모욕하고.......

그 파괴력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완전한 사람이십니다.

주님은 사람으로서 십자가를 지실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위해 바로 그 고통 앞에 서신 것입니다.

자녀 교육을 위해 부부가 서로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 사는데 막상 아들들이 공부는 멀리하고 컴퓨터에 중독이 돼서 밤을 새우면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주님께서 사람들을 위해 죽음의 고통을 경험하셨을 때에 사람들은 무엇을 했을까요?

 

37.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보시니,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느냐?

37 Then he returned and found the three disciples asleep. He said to Peter, “Simon, are you asleep? Weren't you able to stay awake for even one hour?”

 

*시몬아, 자고 있느냐?

 

누구 때문에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는 것입니까?

죄인 된 우리들과 물론 제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 고통으로 인해서 땀이 피가 되는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와 보니 그 당사자들은 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제대로 상황 판단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로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인 것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암이 치명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을 초기에 알면 쉽게 치료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암의 문제는 그것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을 키우고 만다는 것입니다.

결국 치료할 수 있는 시기를 놓치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이 암의 증상이 느껴지지 않아도 정해두고 미리 검사를 하는 것입니다.

죄는 마치 암과 같습니다.

사람 스스로에게 죄의 자각 증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죄를 알려주시지 않으면 사람들은 자신이 죄가 없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주님은 사람들의 죄를 잘 아시고 그래서 사람 대신 십자가의 죽으심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사람들은 주님의 죽으심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죽으심을 두고 저 사람은 무슨 죄가 저리 많아서 저런 비참한 죽임을 당할까 생각 했습니다.

 

4.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사53:4b)

 

그런 상황이다 보니 겟세마네에서 제자들이 잠자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모든 상황을 읽고 계셨고 잠을 주무시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신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셨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주님은 이 십자가의 죽음을 수용하시므로 궁극적으로 죄인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여실 것입니다.

 

12.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요1:12)

 

다시 이르지만 구원의 대안은 유일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주님께서 죽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 분의 죽으심입니다.

그 죽음을 수용할 수 있는 유일의 길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앞두시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수시로 자신의 죽으심을 예언하셨으니 제자들도 예수님의 죽으심을 알고 는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상황에서 주님과 같이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대속의 죽으심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에 사람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도 말도 코끼리도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만 그들과 특별히 구별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습니다.

 

26.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창1:26,27)

 

그런데 동물에게는 없는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을 이르는 것일까요?

서서 걸어 다니는 것?

도구를 사용하는 것?

말하는 것?

죄로 희석되고 말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그 하나님의 형상을 뚜렷이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죽으심을 앞에 두고 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사람의 죽음 두고 자신이 십자가에 대신 죽기로 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차이입니다.

본 훼퍼의 지적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목적을 죄인 된 사람의 생명에 두신 것입니다.

타인을 위한 존재로써의 가치의 중심을 죄인의 생명에 두신 것입니다.

 

14.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내 양을 알고, 내 양은 나를 안다.

15. 그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린다.(요10:14,15)

 

그런데 내 생명을 양을 위해서 버리는 가치의 무게중심을 이동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웠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일로 겟세마네를 찾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진정한 목자가 되신 것입니다.

진정한 목자를 분별하는 기준은 너무나 명백한 것입니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지의 여부입니다.

그 이타성을 두고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사랑을 인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께서는 죽으심 앞두시고 엄청난 갈등을 고백하셨던 것입니다.

 

35. 그러고서 조금 나아가서 땅에 엎드려서, 될 수만 있으면 이 시간이 자기에게서 비껴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36.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막14:35,36)

 

주님께 부활에 대한 소망이 없으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죽어도 사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께서도 우리와 같이 갈등으로 괴로워하셨느냐고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완전한 인성과 완전한 신성을 동시에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시몬에게 자고 있느냐는 예수님의 지적은 실은 예수님 자신에 대한 문제제기 일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이란 갈등이 없는 상황을 이르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극복한 상황을 이르는 것입니다.

1. 자신의 죄의 현실을 모르며 죽음을 택하고 있는 안타까운 사람들입니다.

2. 주님께서 이 죄인들을 구하려 하실 때에 저들은 자신들을 구원하시는 자를 대적했던 것입니다.

어이없은 일이었습니다.

3. 거기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적대자들을 위해서 기꺼이 죽음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죽으심의 고통은 단순히 주님을 못 박아 십자가를 지운 로마 병사들의 고문만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희생의 은혜에 감격하는 자들을 위해 주님께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반항하는 자를 구원하시려는 그 입장에 서시는 일입니다.

주님의 혼란이 얼마나 크시겠습니까?

그 무지함을 눈앞에서 목격하시며 십자가를 지시는 일이셨습니다.

 

34. 세 시에 예수께서 큰소리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그것은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뜻이다.(막15:34)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전적으로 타자의 입장에 서시는 일입니다.

제자 중 한 명은 칼을 들어서 종의 귀를 자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용기가 아니었습니다.

 

38.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여라.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38 And he said to them, “Keep watch, and pray that you will not fall into temptation. The spirit is willing, but the flesh is weak.”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사람들은 자신들 앞에 유혹들이 널려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고 있는 그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기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유혹 앞에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야 처음 알았을지도 모릅니다.

유물론적 세상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도 또 이 사실을 꼭 염두 해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유혹하는 자들이 허다하다는 것입니다.

 

1. 뱀은, 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서 가장 간교하였다.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창3:1)

 

이 간교한 자가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간교한 자가 다루는 딱 한가지의 소재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거역하도록 유혹하는 일입니다.

 

*깨어서 기도 하여라

 

큰 일이 닥쳤는데 대안이 없는 사람만큼 불행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무슨 일에도 대안이 있습니다.

그 유혹은 강력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유혹이 아무리 강력해도 유혹을 피할 방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구체적입니다.

깨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내용은 원수가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오히려 나의 영혼을 두고 하는 일입니다.

내 영혼이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그 희생을 감당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내용은 그렇게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우리 갈 길 모르니 그 길을 알려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 갈 길은 십자가이니 그 십자가를 잘 감당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원수가 아닌 나의 의지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브는 이렇게 말 했습니다.

 

2.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동산 안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

3. 그러나 하나님은,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어기면, 우리가 죽는다고 하셨다."(창3:2,3)

 

그 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녀에게 부족했던 것은 뱀의 유혹을 부인할 의지였습니다.

그 녀의 문제는 뱀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는 의지의 결핍이었습니다.

그래서 복 된 사람은 부정의지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함께 앉지 아니하며,(시1:1)

Happy are those

who reject the advice of evil people,

who do not follow the example of sinners

or join those who have no use for God.

 

복이 있는 사람은 따르지 않고(reject), 들어서지 않고(do not follow), 앉지 아니하는(do not join) 자입니다.

술집 가자하면 따라가고

2차 가자면 거기 들어서고

노름판에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 있고

그런 자들이 불행한 자들입니다.

사업에 망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 유혹을 역행하는 부정의지의 실천은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 가능하며 그 통로가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도를 소홀히 함으로 자신들을 유혹에 방관함 셈입니다.

그들은 겟세마네에서의 잠자는 것을 통해서 골고다의 존재를 스스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위기 상황을 깨어서 기도하심으로 대처하셨습니다.

세 사람은 복음의 사역을 감당하시는 주님을 눈으로 보도록 선택된 사람들이었습니다.

 

39. 예수께서 다시 떠나가서,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39 He went away once more and prayed, saying the same words.

 

*떠나가서

 

주님은 자고 있는 그들의 한계를 확인시켜주셨을 뿐입니다.

그 문제를 교정하시려고 나사를 틀어놓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그대로 남기고 떠나신 것입니다.

그들은 홀로 남겨진 채로 계속 잠을 잘 것입니다.

그들은 시행착오를 할 것입니다.

신앙은 자신이 자신을 책임져야하는 개인적인 일입니다.

그 일은 냉정한 일입니다.

가족조차 도움을 줄 수 없는 개인적인 일입니다.

 

21. 형제가 형제를 죽음에 넘겨 주고, 아버지가 자식을 또한 그렇게 하고, 자식이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서 부모를 죽일 것이다.(마10:21)

 

주님은 주님의 자리에서 주님의 일에 최선을 다 하실 것입니다.

 

*같은 말씀으로

 

제자들이 겟세마네에서 발견한 것은 주님의 기도에 달라진 것이 없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것입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위쪽에 못을 박을 것인지 아래쪽에 못을 박을 것인지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은 하나님께 그 못을 박을 위치를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위치는 정해졌습니다.

거기에 박힌 못을 망치로 두 번 세 번 내리쳐서 그 못을 더 단단하게 박는 일인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죽으심의 뜻을 충분히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엄청난 고통의 수용을 위해서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 내부적 갈등을 기도를 통해 극복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기도를 통해서 이미 정해진 십자가의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겟세마네에서 골고다의 승리를 결정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예언입니다.

예언이란 미래를 현재의 실체를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은 겟세마네에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그 겟세마네의 기도는 골고다의 십자가의 승리를 미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언이란 특별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종교 기술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충분히 예언을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겟세마네를 보면서 골고다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예언은 미래를 말할 현재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육체로 패할 수 있는 전쟁을 주님은 영으로 방어하신 것입니다.

 

40. 다시 와서 보시니, 그들은 자고 있었다. 그들은 졸려서 눈을 뜰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 무슨 말로 대답해야 할지를 몰랐다.

40 Then he came back to the disciples and found them asleep; they could not keep their eyes open. And they did not know what to say to him.

 

*다시 와서 보시니

 

주님은 가셨다가 오시고 또 다시 오십니다.

3번을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반복해서 교육하신 것입니다.

물론 당시의 주님은 죽음의 고통을 코앞에 두시고 기도에 전념하시기도 바쁜 상황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는 다른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들의 십자가를 지어야할 것입니다.

그들을 교육하시는 일입니다.

주님의 교육 방식은 아무소리 없이 3번을 오셔서 그들의 실패를 확인하시는 일입니다.

 

"시몬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느냐?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여라.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성경의 본문을 보면 주님은 두 번째에는 충고조차 하지 않으시고 눈으로 확인만 하신 것입니다.

그 때에 제자들은 난감해 했습니다.

대답조차 못 했습니다.

우리 집 가스레인지에는 작은 그릴이 달려있습니다.

그 동안 그것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라고 여겨왔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거기에 작은 생선을 굽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때에 가장 작은 불을 켜서 몇 분 굽다가 뒤집기를 두세 번 해야 합니다.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나야 속까지 익기 때문입니다.

성급하게 큰 불을 켰다가는 속은 익지도 않고 겉만 홀랑 타버리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문제란 껍데기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주 깊은 내면의 문제를 이르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향해 단번에 큰소리라도 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코앞에 두신 주님은 그러시는 법이 없으셨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속까지 변화시키기 위해 많은 시간을 소요하신 것입니다.

지적도 똑 같은 내용으로 두 번 이상 하면 사람들이 짜증을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에는 주님께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미안한 나머지 버벅거리며 말을 제대로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께 무슨 말로 대답해야 할지를 몰랐다.(40절)

And they did not know what to say to him.

 

세 번째는 주님은 이제는 됐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성급하게 확 소리를 지르는 일입니다.

 

1. 그러므로 남을 심판하는 사람은, 그가 누구이든지, 죄가 없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남을 심판하면서 똑같은 일을 하고 있으니, 결국 남을 심판하는 것은 바로 자기 스스로를 정죄하는 것입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공정하게 내리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3.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심판하면서, 스스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을 줄로 생각합니까?

4. 더구나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을 베푸셔서 사람을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풍성하신 인자하심과 관용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업신여기기까지 한다니, 될 말입니까?(롬2:1-4)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내면의 변화를 위해서 자고 있는 모습을 들키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런 인내의 이유는 사람들의 회개를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탕자의 회개를 위해서 하신 일이 있습니다.

아버지를 멀리 떠나서 돼지우리에서 돼지 밥으로 제 양식을 삼게 하는 일입니다.

주인에게 걷어차이자 탕자에게 회개의 기미가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집으로 실실 기어 들어온 것입니다.

탕자의 형은 동생의 잘못을 지적해댔습니다.

아버지가 하신 일은 인내 입니다.

제자들은 일생동안 그 곤란한 3번의 경험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41. 예수께서 세 번째 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남은 시간을 자고 쉬어라. 그 정도면 넉넉하다. 때가 왔다. 보아라, 인자는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41 When he came back the third time, he said to them, “Are you still sleeping and resting? Enough! The hour has come! Look, the Son of Man is now being handed over to the power of sinners.

 

*자고 쉬어라.

 

이미 제자들의 골고다는 결정지어진 것입니다.

기차는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주님을 부인할 것입니다.

또 주님의 골고다의 승리는 이미 결정지어진 것입니다.

사람들의 육의 눈은 많은 경우 영적 방해물이 됩니다.

로마 병정들이 십자가에 주님을 못 박을 때입니다.

쾅 쾅 쾅

그들은 눈으로 이를 꽉 다문 주님의 끔찍한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인내심을 육의 눈으로 확인한 것입니다.

또 사람의 육적인 귀는 많은 경우 영적 방해물이 됩니다.

그들은 주님의 신음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육적인 인내심을 찬양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다 인 줄 안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를 가능하게 하신 힘은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였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일을 겟세마네에서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 정도면 넉넉하다.

 

그러면 제자들은 겟세마네에서 헛된 시간을 보낸 것인가?

그들에게 겟세마네의 실패의 경험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실수를 통해서 자신의 한계를 확인 했습니다.

그 한계를 경험하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자신의 주먹을 두고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더 이상 의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3번의 실패를 통해서 자신은 의지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반역 행위가 그의 사역의 추진력이 되었을 것입니다.

첫째로 자신의 한계를 경험함으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했다면 둘째로 그들을 인내하시는 주님을 겟세마네에서 목격한 것입니다.

주님의 그 인내하심으로 제자들은 성령을 초청할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성령 하나님의 초청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겟세마네에서의 그 실패의 경험으로 넉넉한 것입니다.

과연 그들은 오순절의 성령님을 경험한 후에 전혀 다른 자신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오순절을 기다리면서 육신을 쉴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억지로 잠을 자지 않고 육체를 괴롭힐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육적 억지를 부린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그 변화의 관건은 오직 성령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3.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3:3)

3 Jesus answered, “I am telling you the truth: no one can see the Kingdom of God without being born again.”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공에 대한 칭찬이 아닙니다.

상대의 실패를 인내하는 일입니다.

사람 내면의 변화에서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다시 이릅니다.

사람의 변화에 있어서 빨리 빨리는 치명적인 적입니다.

또 정의를 내세운 칼질은 치명적인 적입니다.

 

4. 더구나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을 베푸셔서 사람을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풍성하신 인자하심과 관용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업신여기기까지 한다니, 될 말입니까?(롬2:4)

 

세 번의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신 주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세 번의 실패를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3번의 인내하심을 목격한 것입니다.

주님은 가장 약한 불로 긴 시간을 그 일을 하신 것입니다.

 

42. 일어나서 가자. 보아라, 나를 넘겨 줄 자가 가까이 왔다."

42 Get up, let us go. Look, here is the man who is betraying me!”

 

*일어나서 가자

 

겟세마네에서 기도를 하신 주님의 방향은 정해졌습니다.

골고다의 죽음입니다.

여러분들은 기독교와 무속의 차이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무속은 바다에 재앙이 있으면 산으로 가라고 합니다.

주님은 생명의 사랑과 정의가 있으면 재앙을 향해 걸어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예수님의 길에는 반드시 세상이 피하는 고통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길을 형통의 길이라고 부르지 않고 십자가의 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탄은 그 길을 선택하는 자들을 가장 싫어하기 때문에 사탄은 빠짐없이 그 짓을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약한 육신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그 일을 감당하시기 위해 골고다에 가시기 전 겟세마네를 찾으신 것입니다.

일어나서 가자, 그 십자가를 향해서!

 

*보아라

 

그들은 이미 겟세마네에서 골고다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골고다의 승리에서 겟세마네의 기도를 확인할 것입니다.

이제 그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와서 예수님께 입을 맞추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아야합니다.

그 분이 어떤 방식으로 죄인들을 사랑하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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