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음자 백대지과객(光陰者 百代之過客)
우리가 사는 동안의 세월이라는 것은
영원 가운데 잠시 지나는 나그네이다.
光 : 빛 광 陰 : 그늘 음
者 : 놈 자 百 : 일백 백
代 : 시대 대 之 : 갈 지
過 : 지날 과 客 : 손 객
출전 : 고문진보(古文眞寶)
이백(李白)의 춘야연도리원서
(春夜宴桃李園序)
이백이 친척과 형제와 함께
어느 봄날 도리(桃李)가 만발한 정원에서
잔치를 열어 놀면서 각자 시를 지었다.
이 작품은 시편(詩篇)들 앞에 지은 서문으로
자연에서 느낀 감상과 일의 경위를 밝힌
글로서 서발류(序跋類)에 속한다.
'春夜宴諸從弟桃李園序', '春夜宴從弟桃花園序'로
된 판본도 있다
이백(李白, 701 ~ 762)
중국 성당기(盛唐期)의 시인으로 자는 태백(太白)이고,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다.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는 중국 최대의 시인이며,
시선(詩仙)이라 불린다.
1,100여 편의 작품이 현존한다.
그의 생애는 분명하지 못한 점이 많아,
생년을 비롯하여 상당한 부분이 추정에 의존하고 있다.
그의 집안은 간쑤성(甘肅省) 룽시현(西縣)에 살았으며,
아버지는 서역(西域)의 호상이었다고 전한다.
출생지는 오늘날의 쓰촨성(四川省)인
촉(蜀)나라의 장밍현(彰明縣) 또는,
더 서쪽의 서역으로서,
어린 시절을 촉나라에서 보냈다.
남성적이고 용감한 것을 좋아한 그는
25세 때 촉나라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을 따라서,
장난(江南), 산둥(山東), 산시(山西) 등지를
편력하며 한평생을 보냈다.
젊어서 도교(道敎)에 심취했던 그는
산중에서 지낸 적도 많았다.
그의 시의 환상성은 대부분 도교적 발상에 의한 것이며,
산중은 그의 시적 세계의 중요한 무대이기도 하였다.
안릉(安陵; 湖南省), 남릉(南陵; 安徽省),
동로(東魯; 山東省)의 땅에 체류한 적도 있으나,
가정에 정착한 적은 드물었다.
맹호연(孟浩然)·원단구(元丹邱),
두보 등 많은 시인과 교류하며,
그의 발자취는 중국 각지에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불우한 생애를 보내었으나
43세경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아
창안(長安)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翰林供奉)이 되었던
1, 2년이 그의 영광의 시기였다.
도사(道士) 오균(吳筠)의 천거로
궁정에 들어간 그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의 실현을 기대하였으나,
한낱 궁정시인으로서
지위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는
궁정시인으로서의 그가 현종,
양귀비의 모란 향연에서 지은 시이다.
이것으로 그의 시명(詩名)은 장안을 떨쳤으나,
그의 분방한 성격은 결국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
이백은 그를 '적선인(謫仙人)'이라 평한
하지장(賀知章) 등과 술에 빠져
'술 속의 팔선(八仙)'으로 불렸고,
방약무인한 태도 때문에 현종의 총신
고력사(高力士)의 미움을 받아
마침내 궁정을 쫓겨나 창안을 떠났다.
창안을 떠난 그는 허난(河南)으로 향하여
뤄양(洛陽), 카이펑(開封) 사이를 유력하고,
뤄양에서는 두보와, 카이펑에서는
고적(高適)과 지기지교를 맺었다.
두보와 석문(石門; 陝西省)에서 헤어진 그는
산시(山西), 허베이(河北)의 각지를 방랑하고,
더 남하하여 광릉(廣陵; 현재의 揚州),
금릉(金陵; 南京)에서 노닐고,
다시 회계(會稽; 紹興)를 찾았으며,
55세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쉬안청(宣城; 安徽)에 있었다.
적군에 쫓긴 현종이 촉나라로 도망하고
그의 황자(皇子) 영왕(永王) 인(璘)이 거병,
동쪽으로 향하자 그의 막료로 발탁되었으나
새로 즉위한 황자 숙종과 대립하여 싸움에 패하였으므로
그도 심양(尋陽; 江西省九江縣)의 옥중에 갇히었다.
뒤이어 야랑(夜郞:貴州)으로 유배되었으나
도중에서 곽자의(郭子義)에 의하여
구명, 사면되었다(59세).
그 후 그는 금릉, 쉬안청 사이를 방랑하였으나
노쇠한 탓으로 당도(當塗:安徽)의 친척,
이양빙(李陽氷)에게 몸을 의지하다가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
청소년 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하고,
때로는 유협(遊俠)의 무리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쓰촨성 각지의 산천을 유력(遊歷)하기도 하였으며,
민산(岷山)에 숨어 선술(仙術)을 닦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방랑은 단순한 방랑이 아니고,
정신의 자유를 찾는 '대붕(大鵬)의 비상(飛翔)'이었다.
그의 본질은 세속을 높이 비상하는 대붕,
꿈과 정열에 사는 늠름한 로맨티시스트에 있었다.
또한 술에 취하여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익사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그에게도 현실 사회나 국가에 관한 강한 관심이 있고,
인생의 우수와 적막에 대한 절실한 응시가 있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는 방식과
응시의 양태는 두보와는 크게 달랐다.
두보가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 침잠하는 방향을 취한 데 대하여,
이백은 오히려 인간을 초월하고
인간의 자유를 비상하는 방향을 취하였다.
그는 인생의 고통이나 비수(悲愁)까지도
그것을 혼돈화(混沌化)하여,
그 곳으로부터 비상하려 하였다.
술이 그 혼돈화와 비상의
실천수단이었던 것은 말할것도 없다.
이백의 시를 밑바닥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협기(俠氣)와 신선(神仙)과 술이다.
젊은 시절에는 협기가 많았고,
만년에는 신선이 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술은 생애를 통하여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다.
두보의 시가 퇴고를 극하는 데 대하여,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詩風)이다.
두보의 오언율시(五言律詩)에 대하여,
악부(樂府)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장기로 한다.
성당(盛唐)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 시대, 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와 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와 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萬古)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그의 시문집은
송대(宋代)에 편집된 것이며,
주석으로는 원대(元代) 소사빈(蕭士)의
'분류보주 이태백시(分類補註李太白詩)',
청대(淸代) 왕기(王琦)의
'이태백전집(李太白全集)' 등이 있다.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는
이백이 봄날 밤에 형제와 친족(親族)들과 함께
복숭아와 오얏꽃이 만발(滿發)한 정원(庭園)에서,
연회(宴會)를 열고 각자 시를 지으며 놀 적에
그 시편(詩篇) 앞에 그 때의 감상(感想)과
일의 차제(次第)를 편 문장이다.
序는 사물의 차제(次第)를 순서를 세워서
서술(敍述)하는 글이다.
다시 보자.
夫天地者는 萬物之逆旅요 光陰者는 百代之過客이라
대저 천지라는 것은 만물의 여관과 같고
세월이라는 것은 영원한 나그네와 같다.
而浮生若夢한데 爲歡幾何오
뜬구름 같은 인생이 꿈과 같으니
즐거움을 누리는 바가 그 얼마나 되겠는가.
古人이 秉燭夜遊는 良有以也로다
옛 사람들이 촛불을 밝히고 밤에 노니는 것이
진실로 까닭이 있는 것 같구나.
況陽春召我以煙景하고 大塊假我以文章이라
하물며 양기가 왕성한 봄이 나를 안개 낀 경치로 불러주고
조물주가 나에게 자연의 아름다운 경치를 빌려 주었는데,
(조물주가 나에게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시문을 쓸 수 있는 재능을 부여해 주었는데),
會桃李之芳園하여 序天倫之樂事하니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핀 아름다운 정원에 모여서
형제간의 즐거운 일을 펼치게 되었다.
群季俊秀는 皆爲惠連이어늘
뭇 아우들은 모두 준수하여
모두 사혜련이 된 것 같다.
吾人詠歌는 獨慚康樂이리오
내가 시를 지어 노래하는 것이
어찌 사강락(사령운)에게 부끄러움이 있겠는가.
幽賞未已하고 高談轉淸이라
조용히 앉아 자연을 감상하는 것이 다함이 없고
고상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점차 정신이 맑아지네.
開瓊筵以坐花하고 飛羽觴而醉月하니
좋은 자리를 펼쳐 놓고서 꽃을 대하고 앉아
새 깃 모양의 술잔을 돌리며 달 아래 취해 보네.
不有佳作이면 何伸雅懷리오
좋은 작품을 짓지 못한다면
어찌 그윽한 마음을 펼쳐 볼 수 있겠는가.
如詩不成이면 罰依金谷酒數하리라
만약에 시를 짓지 못한다면
벌은 금곡의 술 숫자를 따르겠다.
이백은 복숭아꽃 오얏꽃 만발한 봄 밤의 동산에
친척과 동생들을 초대하여 주연을 베풀어
각기 시를 짓고서 그 시의 머리에 싣고자,
그때 경위를 서술했는데,
바로 '춘야연도리원서'다.
혜련(惠連)은 중국 6조(六朝) 때
남송의 시인 사영운(謝靈運)의 친족 동생이다.
사영운은 집안 동생들과 모여 시 짓기를 했는데,
막내인 혜련(惠連)이 그날 장원을 했다.
위 문장에서는 이백의 여러 동생이
그 옛날 사혜련처럼 시를 잘 짓는다는 말이다.
'吾人詠歌 獨慙康樂'은
내 노래만이 사씨 집안 형제 중 맏형이며
문장을 가장 잘한 사영운에게 부끄럽다며,
자신을 낮추어 동생들을 치켜세운다.
'康樂'은 사영운의 자(字)이다.
'金谷酒數'는 술 몇 잔일까?
3잔이다.
중국 서진 시대 문인 석숭(石崇)이
금곡(金谷) 수령일 때 고을 어르신들과 시회를 열었는데,
시를 못 짓는 사람에게 술 석 잔을 벌주로
마시게 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우리도 그곳을 말(시간)을 달려 지나간다.
선생이 자고 간 곳은 어디일까?
1500년 전, 동진(東晉)의 시인 도연명은
'자제문(自祭文)'에서 말한다.
"도(陶) 아무개는 임시로 몸담았던 객사(客舍)에서
물러나 바야흐로 영원한 본연의 집
(永歸於 本宅)으로 되돌아가고자 한다"고.
사람은 무(無)에서 와서 현상세계인 유(有)의 세계에
잠시 머물다가 다시 무로 돌아간다.
따라서 무의 세계를 영원한 본연으로 보고,
이승의 삶을 잠시 기우(寄寓)한 객사로 본 것이다.
'잡시(雜詩)' 7에서 그는 다시 말한다.
"집이란 한때 묵는 여관 같거늘,
나는 결국은 떠나야 할 나그네.
길 떠나되 어디로 갈 것이냐?
남산 기슭 옛집인 무덤이니라
(家爲逆旅舍, 我如當去客. 去去欲何之, 南山有舊宅)."
남산은 그가 태어난 여산이다.
옛집이란 태어나기 전의 무의 세계,
한 줌 흙이 아닐까 생각한다.
오래된 문명권에는 인생과 세월에 대한
통찰이 담긴 관습이나 시스템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인생 4단계설'이다.
인도의 관습에 따르면 태어나서
25세까지를 학습기(學習期)라고 했다.
학교에 다니면서 배우고 부모와 사회로부터
무언가를 익히고 연습하는 시기다.
26세부터 50세까지는 가주기(家住期)라고 붙였다.
집에 머무르면서 가족을 부양하고
사회적 의무를 다하는 기간이다.
51~75세는 임서기(林棲期)라고 불렀다.
어느 정도 사회적 의무를 다하고,
자식들도 다 키웠으니 이제 집을 떠나
자신의 영혼을 정화하고 구원하는 시기라는 뜻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집을 떠나야 한다.
동네 뒷산에다 허름한 토굴을 하나 지어놓고
명상하며 지내는 시기다.
두서너달에 한번씩 잠깐 집에 들러서
밑반찬 정도나 가져다 먹는 소박한 생활을 하면서 말이다.
그럼 75세가 넘으면 어떤 시기인가.
토굴에서 나와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얻어 먹다가,
죽는 유랑기(流浪期)라고 했다.
거지로 삶을 마감하는 것이다.
요즘 한국인은 보통 50대 초·중반에 직장을 그만둔다.
한마디로 백수가 된다.
이때부터가 문제다.
인도의 4단계설에 대입해 보면
임서기로 접어드는 것이다.
그래서 집을 떠나 산으로 들어가야 한다.
산에다 전원주택을 짓거나,
형편이 안되면 시골 빈집을 얻어서 고치거나,
그것마저 여의치 않으면 컨테이너 하나 갖다놓으면 된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는 모습처럼
비닐천막을 치고 사는 방법도 생각해봐야 한다.
아니면 아파트 경비원이나 택시기사 등으로 일하는 방법이 있다.
이렇게 50대가 되면 누구나 과객(過客) 생활로 접어드는 셈이다.
이태백은 어느 봄날 복숭아꽃이 만발한 정원에서
즐거움을 만끽하다가
'춘야도리원서(春夜桃李園序)'라는 글을 남겼다.
여기에서 이태백은 과객에 대해 이렇게 읊었다.
"부천지자 만물지역려(夫天地者 萬物之逆旅)
광음자 백대지과객(光陰者 百代之過客)이라"고.
'천지라고 하는 것은 만물의 여관이요,
세월은 백대과객처럼 영원히 지나가는 길손이다' 라고.
우리 모두는 잠깐 지나가는 과객이다.
이 세상에서 과객 아닌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지나가는 세월을 어떻게 막겠는가!
조선시대에 과객으로 유명했던 인물을 두사람만 꼽는다면
김삿갓과 '택리지(擇里志)'를 쓴 이중환이다.
우선 김삿갓은 지식인이었지만 전국을 떠돌았다.
특히 전라도를 자주 돌아다녔다.
그가 죽은 곳도 전남 화순이었다.
그 지역이 과객 생활하기가 좋았다는 징표로 보인다.
그래서 전라도에는 김삿갓 관련 일화가 많이 남아 있다.
그가 과객 생활을 하면서 그나마 밥을 얻어먹고
잠을 잘 수 있었던 비결은 시 짓는 능력이었다.
조선시대에는 한문 경전에 해박하고
시를 잘 지으면 문사로 대접받는 전통이 있었다.
김삿갓의 과객 생활 밑바탕은 시재(詩才)였던 것이다.
이중환은 김삿갓보다는 나은
대접을 받았지 않았나 여겨진다.
이름 있는 사대부 집안 후손이었지만
끈 떨어진 야당인 남인(南人)이라는 것이 약점이었다.
당시 기호지방에는 집권 여당인
노론이 대부분이었고,
남인들은 주로 영남에 모여 살았다.
이중환은 같은 당색인 영남을 돌아다니면서
그나마 과객 대접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조선시대 영남은 호남에 비해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형편이어서
영남에서 과객 생활은 어려움이 컸을 것이다.
어찌 됐든 이중환은 당시 사대부 집안 후손으로서
과객 생활을 한 덕분에 불후의 명작 '택리지'를 남겼다.
조선시대 과객의 최고수는 설 명절을 쇤 후
집을 나가서 과객질을 하다가 팔월 추석
전날에야 돌아오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옮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