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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타리 불자회 7월의 성지순례지 안내 2.

작성자보명|작성시간26.06.18|조회수0 목록 댓글 0

로타리 불자회 7월의 성지순례지 안내 2.

 

신륵사와 중흥조 나옹선사 이야기.  

 

절이름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이야기 두 가지
신륵사를 찾아 남한강변의 낯선 도시 여주에 도착하였다. 
신륵사가 있는 곳은 해발 856m의 봉미산(鳳尾山) 자락, 남한강으로 흘러 내리는 봉의 꼬리 끝이다.  

대개의 사찰이 깊은 산중에 있는 것을 감안하면 신륵사는 위치가 강변이라는 것만으로도 특별하다.
절 안에 벽돌로 된 탑이 있어서 고려시대부터 '벽사(甓寺, 벽절)'로도 불려온 신륵사의 사명에는

재미있는 이야기 두 가지가 전해져 내려온다. 

첫째는,
신륵사 가는 길 남한강변에는 마암(馬巖)이란 바위가 있는데, 

그곳에 용마(龍馬)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것, 

그리고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로 말을 다스렸다는 전설이다 .

또 다른 하나는, 마을에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운 용마가 나타났다. 

사람들이 이를 붙잡을 수 없어 곤란에 처해있을 때에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서 말의 고삐를 잡으니 순해졌다. 

신력으로 제압했다하여 신력의 '신(神)'과 

제압의 '륵(勒)'을 합쳐 신륵사라고 하였다는 이야기이다.

남한강은 물길이 사나워 곧잘 범람했다. 
큰비가 오면 강물은 모든 것을 쓸어갔다. 용마(龍馬)는 여강(驪江)의 거센 물결이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큰 강을 끼고 있는 사찰인 신륵사는 

거센 물길을 잡기 위해 창건됐다는 의미이다.

마치 중국의 사천성의 려산에는 있는 낙산대불과 

같은 전설을 품고있지요.

신륵사라는 절과 인연이 깊은 스님으로는 나옹선사가 있다. 
신륵사가 대규모 사찰이 된 것은 나옹선사가 입적한 후 

나옹선사의 부도를 세우면서부터라고 한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이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여주(驪州)’라는 고을 이름을 갖게 되고, 

신륵사를 크게 확장하여 능의 보호를 맡은 원찰로 삼는다. 
이 또한 마암의 용마 전설과 이어져 있는 셈이다. ​

절은 불상을 모시고 승려들이 거주하면서 부처님의 말씀을 배우는 신성한 장소이다. 

그 절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이 바로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일주문이다. 
이렇게 절에 일주문을 세우는 것은 단순히 절의 영역표시를 하기 위함이 아니다. 

신성한 곳에 들어가기 전에 세상의 근심을 버리고 마음을 하나로 모으라는 뜻에서 세워진 문이다. 
즉 일심(一心)을 뜻하는 것이다. 

위령비와 조포나루터 표지석
일주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강변을 따라 동쪽으로 걷게 된다. 

보통 절은 산속에 있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 처럼 생각하는데, 

신륵사의 주변 환경은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사실 불교가 국교였던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는 평지에도 절이 많았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불교를 억압하는 숭유억불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절은 산속으로 옮겨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모든 절들이 산으로 간 것은 아니었나 보다. 

신륵사는 남한강가에 위치하고 있어서 특히 뱃길을 오가는 상인들이 

신륵사에 들러 무사안녕을 빌었으며 산과 강이 절묘한 경치를 이루어 

시인과 문인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강변에는 '황포돗배나루터'라는 커다란 표지석과 함께

정말 황포로 된 돛을 올린 나룻배가 보인다. 
그리고 길가에는 오석으로 된 위령비와 조포나루터 표지석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위령비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서기 1963년 10월 23일 경기도 안양시에 소재한 흥안초등학교

(현 안양남초등학교) 5,6학년 학생, 교사, 학부모 158명이 여주 신륵사 수학여행을 마치고

이곳 조포나루터에서 나룻배를 타고 귀가하던 중 배가 기울며 침몰하여

학생, 학부모, 선생님 49인이 회생되는 대참사가 있었다. 
이에 안양남초등학교 총동문회에서는 고인의 명복을 빌며 영혼을 위로하는 비를 세우게 되었다. 
고히 잠드소서. 
서기 2006년 4월 15일 안양남초등학교 총동문회"

또 조포나루터 표지석에는다음과 같은 글을 새겨 나란히 서있는 위령비와의 안타까운 인연을 말하고 있다.  
이곳은 삼국시대부터 서울 마포나루와 광나루 여주 이포나루와 함께 한강 4대나루로 불리던 곳으로 

충주에서 서울까지 수운의 이용이 번성할 시기에는 

이곳 신륵사 하류에 보제원(普濟院)이 설치되어 통행자의 숙박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1963년 10월 23일 안양흥안초등학교 학생이 신륵사 수행여행 차 이 나루를 건너다 

도선이 침몰되는 대참변이 일어나 49명이 익사한 후

 1964년 현재의 여주대교가 개통되어 유서깊은 이 나루는 자연히 폐쇄되었다."

신륵사 구룡루(九龍樓)
신륵사의 전면에 나선 건물은 앞쪽에 '九龍樓', 뛰쪽에는 '鳳尾山神勒寺'라는 현판을 걸고 있다. 
1858년에 중창하였다는 구룡루는 대웅보전을 해체하여 보수할 때 극락보전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특징이라면 보통의 사찰 누각과 달리 누대 아래의 공간을 매우 낮게 만들어 출입문의 기능보다 의식 집행 장소로서의 역할에 무게를 둔 것 같다는 것이다.  
극락보전,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하다.

신륵사 극락보전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원효대사에 의해 지어진 절이 바로 신륵사이다.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가 무덤의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신 후 깨달은 바가 있어 되돌아와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던 원효대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원효대사에 의해 지어졌다고 전해오는 절이 바로 이 신륵사이다. 

극락보전은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살아가면서 느끼는 절망들을 물리쳐 주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주존불로 모신 전각이다. 
보물 제1791호인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은 1610년(광해 2) 인일이라는 조각승이 만든 불상이라고 한다.

현재 신륵사의 중심법당인 저 극락보전은 원래는 구룡루(九龍樓)라는 곳이었다.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한 이야기가 담긴 이름이다. 
어느날 원효대사는 꿈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면서 

신성한 절이 설 곳이라고 일러준 후 사라졌다. 
그 말에 따라 원효대사는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이에 원효대사가 7일 동안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니 아홉 마리 용이 그 연못에서 나와 하늘로 승천했다. 

용이 승천한 후에야 그 곳에 절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이 곳에 절을 세우기가 그만큼 어려웠다는 것을 말해주는 전설인 듯…. 
그렇게 세워진 신륵사는 지금 '천년의 사찰'로 불리고 있다. ​

극락보전 좌우에는 심검당(尋劍堂)과 적묵당(寂默堂)이 배치되어 있고,
흰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신륵사다층석탑

신륵사 다층석탑 (보물 제225호)
이들 네 건물로 에워싸인 극락보전 앞뜰에는 다층석탑(多層石塔)이 독특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이름에 '다층(多層)'을 넣은 것은 현재의 탑신이 7층까지만 남아 있고, 

그 위층의 탑신과 상륜부는 없어져 원래의 모습이나 층수를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화강암이 아니라 흰색 대리석으로 세운 이 탑은 2층의 기단 위에 여러 층의 탑신(塔身)이 얹혀 있다. 

기단은 탑신에 비하면 매우 높은 편으로 바닥돌과 댓돌이 같은 돌에 새겨지고 연화문(蓮花紋)이 덮여 있다. 

그 위로 얹혀진 2층의 기단 중 밑기단에는 벽면에 파도 무늬가 새겨지고 우주(遇柱)는 꽃잎을 장식한 중간띠를 두르고 있다. 
덮개돌(蓋石)은 상하로 연꽃무늬가 돌려지고 옆면에는 돌출면이 띠를 두르고 있다. 
윗기단의 벽면에는 구름과 용을 새기고 있으며 덮개돌은 밑기단과 같으나 윗면에 연꽃무늬가 없다. 
탑신부는 각 층에 우주(遇柱)가 새겨지고 지붕은 경사가 완만하고 귀꽃은 위아래가 살짝 들리고 있다. 
각 층은 줄어드는 비율이 적어 길쭉하게 탑신이 솟은 모양은 하고 있다.
이 탑은 재료나 조각수법 등에서 원각사지십층석탑(圓覺寺址十層石塔)의 조형기법을 일부 본받고 있어 

원각사탑이 조성된 이후 멀지 않은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한다.

조사당(祖師堂)을 거쳐 절 뒤편 보제존자(菩提尊者_ 나옹선사) 석종부도(石鐘浮屠)가 있는 곳으로 가는 길에 다른 부도 둘을 만났다. 
여주 신륵사 원구형석조부도(圓球形石造浮屠)와 팔각원당형석조부도(八角圓堂形石造浮屠)이다.
조사당은 신륵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보물 제18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스승인 지공(指空)을 중심으로 좌우에 나옹과 나옹의 제자 무학(無學)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 
안타깝게도 조사당과 관련한 사진을 잃어버렸다.

보제존자 석종부도(普濟尊者 石鐘浮屠)
나옹화상의 승탑은 절의 서북쪽 언덕 위에 있었다.
보제존자(普濟尊者)는 1371년(공민왕 18)에 왕사(王師)가 되어  왕으로부터 받은 호이다. ​

보제존자석종(보물 제228호)
나옹선사(懶翁禪師)의 부도는 규모가 작고 화려함이 덜하지만 통도사나 금산사의 금강계단을 연상시킨다.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여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노력한 나옹의 업적이 반영된 것이리라. 
널찍하게 마련된 단층 기단(基壇) 위에 2단의 받침을 둔 후 종(鐘) 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돌을 쌓아 넓게 만들고 앞쪽과 양 옆으로 계단을 두었다. 
탑신은 아무런 꾸밈이 없고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불꽃무늬를 새긴 큼직한 보주(寶珠)가 솟아 있다.

이색과 나옹, 
두분이 태어난 곳은 경북 영덕이고 죽은 곳은 여주 여강이다. 

보제존자 석종비(石鐘碑,   보물 제229호)
탑비는 3단의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부분의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겨 두었다. 

대리석으로 다듬은 비몸은 양옆에 화강암 기둥을 세웠으며 

지붕돌은 목조건물의 기와지붕처럼 막새기와와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다. 

비의 앞면에는 끝부분에 글을 지은 사람과 쓴 사람의 직함 및 이름에 대해 적고 있는데, 글의 맨 앞에 적지 않는 것은 드문 예이라 한다.
우왕 5년(1379)에 세워진 비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이 짓고, 서예가인 한수(韓脩)가 글씨를 썼는데, 부드러운 필치의 해서체이다. 

나옹과 이색은 서로 특별한 인연이었던 모양이다. 
두 사람은 원나라 유학을 다녀왔다는 공통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공민왕과의 돈독한 친분을 가졌으며 당대의 선각자로 촉망 받았다  
그러나 생전에 교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옹의 명성이 하늘을 찌를 때에도 이색은 나옹을 찾지 않았다. 
입적했을 때도 왕명에 따라 그의 사리석종기(舍利石鐘記)를 썼을 뿐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길이 다르면 서로 꾀하지 않는다’는 공자의 가르침에 따랐던 것이다. 
불가와 유가는 확연히 다른 길이었다. 

나옹은 우왕과 집권세력의 견제로 먼 길을 떠나다 병을 얻어 신륵사 강월헌에서 세상을 떠났고, 

나옹의 사리석종기를 쓴 이색은 강월헌에서 멀지 않은 연자탄(燕子灘_ 제비여울)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태조가 보낸 독배를 마시고 배안에서 생을 마감했다. 
나옹이 죽은 지 20년 뒤이다. 

 

둘이 태어난 곳도 영덕이고 죽은 곳도 여주 여강(驪江)이다. 
그래서 영덕 장육사에 가면 나옹선사의 기념관이 있고
이색의 기념관은 영해 괴시리 마을 뒷산에 있다. 

※ 여강(驪江)_ 여주를 지나는 남한강

보제존자 석등(보물 제231호)
보제존자석종 바로 앞에 있는 석등은 석종부도를 장엄하기 위한 공양구(供養具)이다. 
사찰에서 석등을 밝히는 이유는 중생들의 어두운 마음(無明)을 밝히는 의미가 있다. 

화강암이 주재료로 사용되었고 화사석(火舍石)은 대리석재를 사용하여 조각이 용이하도록 하였다. 단순화되고 남성적인 느낌을 주는 석종형 부도에 비해 이 석등은 섬세하고 화려한 느낌을 풍기고 있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석등은 전형적인 8각형 석등의 전통을 이으면서도 세부적으로는 다양한 변형을 모색하여 화려하고 장식적인 면이 강조된 고려말기의 대표적 작품으로 평가받는다고 한다.

다층전탑, 
신륵사에 새로운 이름을
신륵사 다층석탑
신륵사는 ‘벽절’이라고도 불렸다고 하였던 것은 벽돌로 만들어진 저 탑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전탑(塼塔)은 점토로 벽돌 모양을 만든 다음 뜨거운 가마에 구워낸 후 한층 한층 쌓아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석탑이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반면 전탑은 일부지역에만 세워졌다.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고 만드는 것도 복잡하고 어려웠기 때문이다.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전탑이 신륵사에 있는 이 다층전탑이다.
이 탑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일부러 절의 중심에서 떨어진 곳에 세웠다고 하는데, 고려시대 유일의 전탑으로 높이 9.4m이며 보물 제225호로 지정되어 있다.
탑의 기단부는 화강암을 사용해 7개의 층단을 만들고, 탑신부는 여러 단의 벽돌을 쌓아서 만들었는데 몸돌에 비해 지붕돌은 매우 간략하게 꾸몄다.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다층전탑 근처에 비각 하나가 있다. 
비석은 크게 파손되어 겨우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라 전문의 판독은 불가하다고 한다.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는 장방형 복련대석(覆蓮臺石)과 옥개석(屋蓋石)으로 간단하게 변화된 모양인데, 비신(碑身)의 보호를 위하여 양쪽에 돌기둥을 붙여 단단히 지탱하고 있는 모습이 특징적이다. 이 같은 모양은 이후 조선시대 석비 조형의 한 형식이 되었다는데, 전에 합천 삼가에서 살펴 보았던 남명 선생의 부친 조언형(曺彦亨)의 묘갈이 떠오르게 한다.

원래 신륵사에는 극락보전(極樂寶殿) 서쪽 언덕에 대장각(大藏閣)이 있었는데, 그것은 고려 말의 이색(李穡)과 승려 나옹(懶翁)의 문도들이 발원하여 대장경(大藏經)을 인출(印出)하여·수장하던 곳이었고, 이 비는 대장각의 조성에 따른 여러 가지를 기록한 석비이다. 

이색은 선왕 공민왕과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복을 빌고자 나옹의 문도와 함께 발원하였다. 
비문은 해서(楷書)로서, 직제학 권주(權鑄)의 글씨이다. 
달은 부처이고 강은 중생이다. 

신륵사 강월헌(江月軒)
강월헌(江月軒)이 삼층석탑과 함께 남한강변의 가파른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동대(東臺)라고 불려지는 거대한 암반이다. 
문객들이 달밤에 동대에 올라 여강에 비친 달을 보며 시를 읊으며 풍유를 즐기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했을 정도로 명승지였던 모양이다. 

이색(李穡)이 시를 썼고, 권근(權近) 역시 이곳을 찾아 시를 남겼다. 

이식(李植), 김창협(金昌協), 정두경(鄭斗卿) 외에도 다산 정약용도 동대에 올라 시를 썼다고 한다.
현재의 강월헌이 있는 자리는 신륵사에서 입적한 나옹선사 혜근(惠勤)의 다비 장소였는데,
그의 문도들이 정자를 세우고 그의 호를 따서 강월헌이라고 당호를 붙인 것이다. 
그리고 그가 깨달음을 얻고 주지로 있었던 양주 회암사(檜巖寺)의 처소이기도 하다. 

본래의 누각은 혜근의 다비를 기념하여 세운 3층석탑과 거의 붙어 있었으나 1972년 홍수로 옛 건물이 떠내려가자 1974년 3층석탑보다 조금 더 아래쪽에 철근과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다시 지었다고 한다.

나옹화상이 신륵사에 입적하게 된 이유가 특별하다. 
나옹은 공민왕과 우왕으로부터 왕사로 추대됐다가 밀성군(密城郡_ 현 경남 밀양)으로 내쳐졌다. 그때 나옹은 회암사(檜巖寺)의 주지가 되어 절을 크게 중수하고 문수회(文隨會)를 베풀었다. 중앙과 지방의 남녀 노소, 귀한 사람 천한 사람 가릴 것 없이 구름 같이 몰려 포백과 과실 떡을 보시했다. 

하늘을 찌르는 인기는 우왕과 우왕을 둘러싼 집권세력에게 위협이 됐다. 유생들은 과도한 토목공사라며 나옹을 탄핵했다. 왕은 선사를 밀양의 영원사(瑩源寺)로 내쳤다. 
그가 떠나면 신도들이 잠잠해질 것이라 기대햐였을 것이다. 그러나 쫓겨나는 나옹을 보면서 백성들은 통곡했다. 

나옹은 길에서 병을 얻었고, 한강에 이르러자 병세는 더욱 심해졌다. 배를 타고 이레만에 신륵사에 도착했으나, 1376년 5월 15일 열반하였다. 세속 57세, 법납으로 37세였다. 

강월헌에 오르니 남한강의 청량한 물줄기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고,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은 서로 어루러져 절로 감회에 젖어 만든다. 
여주 사람들은 신륵사 앞을 가로 질러 여주를 관통하는 저 남한강을 여강(驪江)이라 부른다고 한다.

첫 구절이 입에 맴도는 나옹선사의 시 한 편을 옮겨 본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聊無愛而無憎兮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怒而無惜兮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로타리 불자회 지도법사 보명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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