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이름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이야기 두 가지
신륵사를 찾아 남한강변의 낯선 도시 여주에 도착하였다.
신륵사가 있는 곳은 해발 856m의 봉미산(鳳尾山) 자락, 남한강으로 흘러 내리는 봉의 꼬리 끝이다.
대개의 사찰이 깊은 산중에 있는 것을 감안하면 신륵사는 위치가 강변이라는 것만으로도 특별하다.
절 안에 벽돌로 된 탑이 있어서 고려시대부터 '벽사(甓寺, 벽절)'로도 불려온 신륵사의 사명에는
재미있는 이야기 두 가지가 전해져 내려온다.
첫째는,
신륵사 가는 길 남한강변에는 마암(馬巖)이란 바위가 있는데,
그곳에 용마(龍馬)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것,
그리고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로 말을 다스렸다는 전설이다 .
또 다른 하나는, 마을에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운 용마가 나타났다.
사람들이 이를 붙잡을 수 없어 곤란에 처해있을 때에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서 말의 고삐를 잡으니 순해졌다.
신력으로 제압했다하여 신력의 '신(神)'과
제압의 '륵(勒)'을 합쳐 신륵사라고 하였다는 이야기이다.
남한강은 물길이 사나워 곧잘 범람했다.
큰비가 오면 강물은 모든 것을 쓸어갔다. 용마(龍馬)는 여강(驪江)의 거센 물결이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큰 강을 끼고 있는 사찰인 신륵사는
거센 물길을 잡기 위해 창건됐다는 의미이다.
마치 중국의 사천성의 려산에는 있는 낙산대불과
같은 전설을 품고있지요.
신륵사라는 절과 인연이 깊은 스님으로는 나옹선사가 있다.
신륵사가 대규모 사찰이 된 것은 나옹선사가 입적한 후
나옹선사의 부도를 세우면서부터라고 한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이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여주(驪州)’라는 고을 이름을 갖게 되고,
신륵사를 크게 확장하여 능의 보호를 맡은 원찰로 삼는다.
이 또한 마암의 용마 전설과 이어져 있는 셈이다.
절은 불상을 모시고 승려들이 거주하면서 부처님의 말씀을 배우는 신성한 장소이다.
그 절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이 바로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일주문이다.
이렇게 절에 일주문을 세우는 것은 단순히 절의 영역표시를 하기 위함이 아니다.
신성한 곳에 들어가기 전에 세상의 근심을 버리고 마음을 하나로 모으라는 뜻에서 세워진 문이다.
즉 일심(一心)을 뜻하는 것이다.
위령비와 조포나루터 표지석
일주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강변을 따라 동쪽으로 걷게 된다.
보통 절은 산속에 있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 처럼 생각하는데,
신륵사의 주변 환경은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사실 불교가 국교였던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는 평지에도 절이 많았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불교를 억압하는 숭유억불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절은 산속으로 옮겨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모든 절들이 산으로 간 것은 아니었나 보다.
신륵사는 남한강가에 위치하고 있어서 특히 뱃길을 오가는 상인들이
신륵사에 들러 무사안녕을 빌었으며 산과 강이 절묘한 경치를 이루어
시인과 문인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강변에는 '황포돗배나루터'라는 커다란 표지석과 함께
정말 황포로 된 돛을 올린 나룻배가 보인다.
그리고 길가에는 오석으로 된 위령비와 조포나루터 표지석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위령비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서기 1963년 10월 23일 경기도 안양시에 소재한 흥안초등학교
(현 안양남초등학교) 5,6학년 학생, 교사, 학부모 158명이 여주 신륵사 수학여행을 마치고
이곳 조포나루터에서 나룻배를 타고 귀가하던 중 배가 기울며 침몰하여
학생, 학부모, 선생님 49인이 회생되는 대참사가 있었다.
이에 안양남초등학교 총동문회에서는 고인의 명복을 빌며 영혼을 위로하는 비를 세우게 되었다.
고히 잠드소서.
서기 2006년 4월 15일 안양남초등학교 총동문회"
또 조포나루터 표지석에는다음과 같은 글을 새겨 나란히 서있는 위령비와의 안타까운 인연을 말하고 있다.
이곳은 삼국시대부터 서울 마포나루와 광나루 여주 이포나루와 함께 한강 4대나루로 불리던 곳으로
충주에서 서울까지 수운의 이용이 번성할 시기에는
이곳 신륵사 하류에 보제원(普濟院)이 설치되어 통행자의 숙박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1963년 10월 23일 안양흥안초등학교 학생이 신륵사 수행여행 차 이 나루를 건너다
도선이 침몰되는 대참변이 일어나 49명이 익사한 후
1964년 현재의 여주대교가 개통되어 유서깊은 이 나루는 자연히 폐쇄되었다."
신륵사 구룡루(九龍樓)
신륵사의 전면에 나선 건물은 앞쪽에 '九龍樓', 뛰쪽에는 '鳳尾山神勒寺'라는 현판을 걸고 있다.
1858년에 중창하였다는 구룡루는 대웅보전을 해체하여 보수할 때 극락보전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특징이라면 보통의 사찰 누각과 달리 누대 아래의 공간을 매우 낮게 만들어 출입문의 기능보다 의식 집행 장소로서의 역할에 무게를 둔 것 같다는 것이다.
극락보전,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하다.
신륵사 극락보전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원효대사에 의해 지어진 절이 바로 신륵사이다.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가 무덤의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신 후 깨달은 바가 있어 되돌아와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던 원효대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원효대사에 의해 지어졌다고 전해오는 절이 바로 이 신륵사이다.
극락보전은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살아가면서 느끼는 절망들을 물리쳐 주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주존불로 모신 전각이다.
보물 제1791호인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은 1610년(광해 2) 인일이라는 조각승이 만든 불상이라고 한다.
현재 신륵사의 중심법당인 저 극락보전은 원래는 구룡루(九龍樓)라는 곳이었다.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한 이야기가 담긴 이름이다.
어느날 원효대사는 꿈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면서
신성한 절이 설 곳이라고 일러준 후 사라졌다.
그 말에 따라 원효대사는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이에 원효대사가 7일 동안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니 아홉 마리 용이 그 연못에서 나와 하늘로 승천했다.
용이 승천한 후에야 그 곳에 절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이 곳에 절을 세우기가 그만큼 어려웠다는 것을 말해주는 전설인 듯….
그렇게 세워진 신륵사는 지금 '천년의 사찰'로 불리고 있다.
극락보전 좌우에는 심검당(尋劍堂)과 적묵당(寂默堂)이 배치되어 있고,
흰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신륵사다층석탑
신륵사 다층석탑 (보물 제225호)
이들 네 건물로 에워싸인 극락보전 앞뜰에는 다층석탑(多層石塔)이 독특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이름에 '다층(多層)'을 넣은 것은 현재의 탑신이 7층까지만 남아 있고,
그 위층의 탑신과 상륜부는 없어져 원래의 모습이나 층수를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화강암이 아니라 흰색 대리석으로 세운 이 탑은 2층의 기단 위에 여러 층의 탑신(塔身)이 얹혀 있다.
기단은 탑신에 비하면 매우 높은 편으로 바닥돌과 댓돌이 같은 돌에 새겨지고 연화문(蓮花紋)이 덮여 있다.
그 위로 얹혀진 2층의 기단 중 밑기단에는 벽면에 파도 무늬가 새겨지고 우주(遇柱)는 꽃잎을 장식한 중간띠를 두르고 있다.
덮개돌(蓋石)은 상하로 연꽃무늬가 돌려지고 옆면에는 돌출면이 띠를 두르고 있다.
윗기단의 벽면에는 구름과 용을 새기고 있으며 덮개돌은 밑기단과 같으나 윗면에 연꽃무늬가 없다.
탑신부는 각 층에 우주(遇柱)가 새겨지고 지붕은 경사가 완만하고 귀꽃은 위아래가 살짝 들리고 있다.
각 층은 줄어드는 비율이 적어 길쭉하게 탑신이 솟은 모양은 하고 있다.
이 탑은 재료나 조각수법 등에서 원각사지십층석탑(圓覺寺址十層石塔)의 조형기법을 일부 본받고 있어
원각사탑이 조성된 이후 멀지 않은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