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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순례 자료.

[스크랩] 신륵사 성보문화재

작성자보명|작성시간26.06.20|조회수1 목록 댓글 0

극락보전

조선 후기의 불전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

신륵사는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의 원찰(願刹)로 지정되어

1472년(성종 3) 대규모의 중창불사를 시작하여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는데,

극락보전 역시 왕릉 원찰로 지정되면서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존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1800년(정조 24)에 다시 중창한 것이다.

극락보전은 비록 규모는 크지 않지만, 왕실의 원찰답게 부연(浮椽)을 달아 겹처마 지붕을 만들었고,

기둥 사이에도 공간포(空間包)를 올린 다포계(多包系) 구조의 화려한 건물이다.

공포(栱包)는 내4출목 외3출목 구성으로 집 규모에 비하여 과도할 정도이고,

쇠서[牛舌] 위에 연꽃봉오리들을 조각하는 등 화려한 모습이다.

 

다층석탑

극락보전 앞에 있는 탑으로,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한 후, 그 위로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각 부분의 세부적인 조형방법은 전혀 달라서,

기단에서부터 탑신부까지 전부 한 장씩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바닥돌 윗면에는 연꽃을 돌려 새겼고 아래층 기단의 네 모서리에 새겨진 기둥조각은 형식적이나,

특이하게도 물결무늬를 돋을새김해 두어 눈길을 끈다.

아래층 기단의 맨윗돌을 두껍게 얹어놓아 탑의 안정감을 높이고 있으며,

위층 기단의 모서리에 꽃 모양을 새긴 기둥을 두고

 각 면마다 용무늬를 깊이 판 모습은 능숙한 석공의 솜씨를 드러낸다.

탑신부의 각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얇은 한 단이며,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치켜올려져 있다.

8층 몸돌 위에 지붕돌 하나와 몸돌 일부분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층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8층 탑신의 아래까지만 옛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각 부분 아래에 괴임을 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 석탑 양식을 일부분 남기고 있으나,

세부적인 조각양식 등에서 고려 양식을 벗어나려는 여러가지 표현이 돋보인다.

하얀 대리석이 주는 질감은 탑을 한층 우아하게 보이게끔 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국보 제2호)과 돌의 재질, 조각양식이 비슷하다.

신륵사는 조선 성종 3년(1472)에 대규모로 새 단장을 하였는데, 이 탑도 이 때에 함께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향나무

조선 태조 이성계가 심었다고 전해지며, 신륵사와 역사를 같이한 희귀 수목으로

1982년 10월 15일 신륵사 은행나무와 함께 경기도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수령은 약 500년이고, 나무 높이 5m·나무 둘레 1.3m·나무가 차지하는 면적은 25㎡이다.

 

보제존자 탑비

보제존자 나옹의 탑비이며 보제존자 나옹은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여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하였던 승려로,

양주 회암사의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을 받아 밀양으로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이후 그를 따르던 문도들이 절안에 터를 마련하여 사리를 안치한 석종과 석비를 세워두었다.

비는 3단의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며 받침부분의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겨 두었다.

대리석으로 다듬은 비몸은 양옆에 화강암 기둥을 세웠으며,

지붕돌은 목조건물의 기와지붕처럼 막새기와와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다.

비의 앞면에는 끝부분에 글을 지은 사람과 쓴 사람의 직함 및 이름에 대해 적고 있는데

글의 맨 앞에 적지 않는 것은 드문 예이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워진 비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이 짓고,

유명한 서예가인 한수가 글씨를 썼는데 부드러운 필치의 해서체이다.

전체적으로 고려 후기의 간략화된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신라 말부터 건립된 승려의 사리를 봉안하는 승탑(일명 부도)과 탑비가 유행한 것은

선종은 깨달음을 얻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보았고

깨달음을 얻은 승려는 부처와 동격이 될 수 있었기에

부처의 사리를 모시듯이 승려의 사리를 모신 승탑이 건립된 것이라고 합니다.

 

보제존자 석종

고려 말 왕사 나옹(懶翁)의 사리를 봉안한 부도로서

신라시대 정형적인 팔각원당형부도(八角圓堂型浮屠)의 범주에서 벗어나

라마탑(喇嘛塔)계에 속하는 특유의 탑이다.

공민왕의 왕사였던 나옹의 부도는 나옹이

1376년(우왕 2)에 경기도 양주 회암사(檜巖寺)에서 경상남도 밀양으로 가던 중

신륵사에서 입적하자, 1379년에 각신(覺信)·각주(覺珠) 등의 주선으로 절을 크게 중창하고

절 뒤 명당자리를 택해 묘역을 마련하였다.

 

금강계단형(金剛戒壇型)의 기단 중앙에 안치한 석종형부도를 중심으로 묘역 전면에 박석을 깔았으며,

낮은 방형의 넓은 기단 윗면에도 박석을 깐 중앙부에 2단의 받침대를 마련하여 석종형 탑신을 안치하였다.

기단의 정면과 좌우면 중간에 2단의 계단을 마련했으며,

기단 우각에는 간략한 종대(縱帶)의 조각을 남기고 있다.

장중한 석종형의 탑신은 위로 갈수록 완만한 타원형을 이루다가

어깨부분에서는 보주(寶珠)를 묘사하기 위하여 잘라진 포탄형(砲彈形)으로 조각하였다.

탑의 정상부를 장식한 보주는 사면으로 구획하여 모각하였다.

석종형의 부도는 통도사·금산사·용연사·봉암사 등에서 찾아볼 수 있으나,

이 부도는 특히 통도사와 금산사와 같이 일종의 계단탑 형식을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

조선시대의 석종형부도의 선구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조사당

정면 1칸, 측면 2칸의 다포식(多包式) 팔작지붕건물. 보물 제180호.

처마는 부연(浮椽 : 처마 끝에 덧 얹어진 짤막한 서까래)이 있는 겹처마이고, 내부는 통간(通間)으로 되어 있다.

 

내부의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우물천장이며, 팔작기와지붕을 이루고 있다.

정면에는 여섯짝의 띠살창호를 달고, 양측면과 후면은 모두 벽체로 마감하였는데,

측면의 한칸만은 외짝의 정자살문을 달아 따로 출입구를 만들어놓았다.

 

건물의 평면에서는 소규모의 건축물인만큼

앞뒷면을 각각 1칸식으로 처리하여 가운데 기둥을 세우지 않았으므로

대들보를 볼 수 없는 것이 이 건물의 특색이다.

 

 

 

 

 

다층전탑

아래로 한강이 굽어보이고 강 건너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경치좋은 바위 위에 이 전탑이 세워져 있다.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이르며,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지역에서 몇 기가 남아 있다.

탑은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하고,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탑신부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다시 몸돌 하나를 올려놓고 있어 7층같아 보이기도 하는 애매한 구조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전탑과 달리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매우 얇아 전체가 주는 인상이 사뭇 독특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3층이 2단, 4층 이상은 1단이며,

지붕돌 위로도 1층은 4단, 2층 이상은 2단씩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 또한 특이한 형태이다.

꼭대기에 머리장식이 있기는 하나 얇다.

 

 

탑의 북쪽으로는 수리할 때 세운 비가 전해오는데,

거기서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崇情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이라는 연대가 있다.

조선 영조 2년(1726)을 뜻하지만 이 때 다시 세워진 것이므로,

지금 탑의 형태는 만들 당시의 원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벽돌에 새겨진 무늬로 보아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처음 세워진 이후 여러 차례 수리되는 과정에서 벽돌의 반원 무늬 배열상태가 어지럽혀지고,

전체 형태가 다소 변형된 것으로 보여진다.

 

전탑이란 흙을 구워 벽돌을 만들어 쌓은 탑으로

작업이 어려워 많이 세우지는 않았는데

인도나 중국은 인력과 황토가 풍부하여 대형 전탑이 많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경주의 분황사 석탑은 돌을 벽돌처럼 깎아서 쌓아올린 모전탑이랍니다

 

 

 

삼층석탑

평면방형의 3층 석탑으로, 다층전탑(多層塼塔) 부근 강변 암반에 위치해 있다.

석탑 양식으로 미루어 고려시대 후기에 건립되었으며,

〈신륵사동대탑수리비(神勒寺東臺塔修理碑)〉에 있는 기록을 볼 때

현재 탑이 위치한 장소에서 고려시대 말의 고승 나옹 혜근을 다비(茶毘)한 후

그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넓은 1매 판석으로 구성된 지대석의 외곽에 높은 1단의 각형 받침이 있고,

 중앙의 호각형 2단 받침에 1매로 된 기단이 있다.

1매의 석재로 된 갑석의 각 면과 모서리에는 각각 3구와 1구씩 복련(復蓮)으로 장식했다.

탑신석과 옥개석(屋蓋石)은 각각 1석으로 이루어졌으며

1층 탑신은 2층에 비해 3배 정도 높으며 3층 탑신석은 사라졌다.

옥개석은 모두 남아 있는데, 낙수면 길이가 짧고 경사가 급해 둔중한 느낌을 주고 있다.

탑 하면의 1·2층은 각형 3단, 3층은 각형 2단의 받침이 있고 상면에는 각형 2단의 탑신받침이 있다.

상륜부는 모두 결실되었다.

 

 

 

 

 

강월헌

6각형의 정자로 남한강변에 가파른 바위 위에 세워져 있으며

주변 경치가 뛰어나 남한강의 물줄기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인다.

현재 위치는 신륵사에서 입적한 고려 말의 고승 혜근(惠勤, 1320~1376)의 다비 장소였는데,

그의 문도들이 정자를 세우고 혜근 생전의 당호인 강월헌이라고 이름 붙였다.

본래의 누각은 혜근의 다비를 기념하여 세운 3층석탑과 거의 붙어 있었으나

1972년 홍수로 옛 건물이 떠내려가자

1974년 3층석탑보다 조금 더 아래쪽에 철근과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다시 지었다.

 

 

요강 한번 크다~

 

 

조선시대에는 배불정책으로 이 절 또한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광주의 대모산(大母山)에 있던 영릉(英陵 : 세종의 능)이 여주로 이장된 1469년(예종 1)부터

왕실에서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願刹)로 삼을 것을 결정하였고,

1472년(성종 3) 2월에 대규모 중창불사가 시작되어

8개월 만에 200여 칸의 건물을 보수 또는 신축하였다.

그 뒤 이 절은 사대부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전락했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병화로 폐허가 되었다.

 

1671년(현종 12)에는 계헌(戒軒)이 중건하였고,

1700년(숙종 26)에는 위학(偉學)과 그의 제자 우안(宇眼)·천심(天心) 등이 삼존상을 중수했으며,

이어서 1702년에도 중수하였다.

1726년(영조 2)에는 영순(英淳) 등이 동대에 있는 전탑을 중수했는데,

당시에 세웠던 비가 지금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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