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는 곳마다 진여실상(眞如實相)이요 해탈입니다.
풀잎마다 도솔천 내원궁이요,
돌멩이마다 구품연화대(九品蓮華臺)입니다.”
이쯤 되면 모든 질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계속되는 스님의 말씀.
“삶 자체, 사는 모습 그대로가 수행이요 본분사를 실현하고
누리는 것이지만 확실한 돈오에 이르기까지는
‘본래의 나가 무엇인가?’ 하는 화두를 잃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게 쉼 없이 나아가다 보면 생과 사, 부처와 중생 등
일체를 초월한 본래의 나, 그리고 그 ‘나’마저도 초월하여
있는 그대로의 ‘나’와 동일시가 이뤄질 때 양변과 단견이 하나가 되어
자유자재로 본성을 쓰고 누리는 입장이 됩니다.”
스님의 법문을 듣다 보면 조그만 견처에 안주하여
편안한 마음으로 사는 데 만족하거나,
인과를 무시하고 막행막식하거나, 도인을 자처하여
스승 노릇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늘 머무는 바 없는 자리에서 끝없이
초월하는 불퇴전의 자세가 수행자의 마음가짐이 아닐까.
스님은 공부에 힘을 얻은 수행자들은
“꿈도 없고 생각도 없고 잠이 꽉 들었을 때,
어떤 것이 나인고?” 하는 공안을 들어보라고 권한다.
수행과정에서 광명을 본다든지 하는 이러 저러한 체험이나,
화두가 타파된 듯한 느낌이 들 때는
이와 같은 공안으로 스스로 점검해 보아야 한다는 것.
즉 성철 스님이 강조했던 숙면일여(熟眠一如)의 관문을 실제로든,
공안으로든 해결해야만 확철대오하여 참된 자유를 얻는다는 설명이다.
역사상 수많은 도인들이 ‘이치를 깨친(理入)’ 후에
‘언행일치의 부처행(行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깨달음에 안주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선 수행에 있어 ‘나는 얻은 바가 있다’는 생각으로
정진을 중단하고 머무는 순간,
향상일로(向上一路:끝없이 초월하는 깨달음의 길)는 종언을 고하고 만다.
그래서 스님은 견성(見性) 이후 깨달음을 보호하고
지켜가는 공부인 보임이 매우 중요하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깨칠 때는 일체 공부가 다 된 것이지만,
계속 여여부동하게 지키고 쓰고 누려야 되는 것입니다.
견처(見處)와 견행(見行)이 한 치도 어긋나지 않고 어묵동정,
꿈속에서나, 잠속에서나, 죽음에서나,
삶에서나 영겁도록 자유자재하게 꼭 맞아야 합니다.
구경각을 이루고 견성성불이 되고 견성본불(見性本佛)이 되어
이를 지키고 쓰고 누린다 해도 정진을 놓아서는,
공부를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화날 때는 ‘화난 것이 뭐꼬?’하면 화가 사라집니다.
답답할 때는 답답한 것이 뭐꼬?
차 마실 때는 차 마시는 게 뭐꼬?
욕심낼 때는 욕심내는 게 뭐꼬?
나무아미타불을 염할 때는 염불하는 이것이 뭐꼬?
공부가 잘 안될 때는 안되는 게 뭐꼬? 하다 보면
나중에는 ‘이뭣고?’ 화두로 의단이 뭉쳐지게 됩니다.”
일생 생활 중에 이렇게 화두를 챙기다 보면,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뭣고?’가 심중에 가득한 날이 올 것이다
그나저나, 눈을 통해 이렇게 신문을 보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