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학의 한국산사 목조각 걸작 14. 1100년 역사 담은 쌍둥이 목불
14. 해인사 법보전·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목조불상 제작편년 9세기로 끌어올려
고려시대 복장납입은 사씨 집안 발원
조각보 3점 조각보 역사 600년 실증
지권인은 만유가 하나인 위대한 선언
883년에 제작한 쌍둥이 비로자나불
법신 비로자나불은 진리 그 자체다. 우주만유에 깃든 근본원리로서 형상이나 소리로 찾을 수 없다. 〈금강경〉 제26 ‘법신비상분’에서는 몸의 형상으로나 음성으로 부처님을 구하면 그것은 사도행이라 여래를 보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왜 교설에도 어긋나게 법신의 형상을 만드는 것일까? 2005년 화마로 소실된 양양 낙산사 동종(1469년) 명문에 그 구절이 있었다. ‘이인중생지목시 이생기신(以因衆生之目視 而生其信)’, “중생은 눈으로 직접 봐야만 믿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불상은 흙으로도, 돌로도, 금동이나 쇠로도, 나무로도 만들고, 옻칠한 삼베를 겹겹이 입혀 만들기도 한다. 목조불상은 유기물 재료가 지닌 물리적 한계로 시간의 한계치를 가진다. 목조건축처럼 중수되기도 하고 부분 보수의 과정도 거친다. 목조건축이나 목조각이 온전한 상태로 천 년의 시간을 간직한다는 것은 경이로운 장면이다. 전란과 정치사회적 변동이 심했던 우리나라에서 천 년이 넘는 시간을 간직한 목조 문화유산은 더더욱 희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1100여 년 전의 목조각이 현존한다. 그것도 쌍둥이처럼 닮은 한 쌍의 목조불상이다. 해인사 법보전·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이 그 주인공이다.
두 불상은 법보전과 대적광전에 각각 모셨다. 지금은 2007년에 새로 지은 대비로전에 함께 봉안하고 있다. 그 동안 두 구의 불상은 15세기 조선전기 목조각으로 여겨왔다. 2005년 7월에 법보전 비로자나불 개금 과정에서 불상 내부 등판에서 놀라운 묵서가 확인됐다. “서원대각간주등신사미 우좌비주등신찖/ 중화삼년계묘차상하절칠금착성(誓願大角干主燈身賜彌 右座妃主燈身찖/ 中和三年癸卯此像夏節柒金着成)”이라는 31자로 구성된 두 줄의 명문이 발견되었다. 한 줄엔 발원 내용을, 다른 줄엔 제작연도와 제작방식을 기록했다. 앞줄의 17자는 해석에 있어 여전히 논란 중이다. 앞줄은 기록처럼 서원, 혹은 발원을 담고 있다. 왕실발원의 경우 통상 ‘주상전하수만세’를 앞세운다. 법보전 불상 묵서에선 왕과 왕비 대신 ‘대각간’과 ‘우좌비’가 등장한다. 대각간은 신라 골품제 관등에 해당한다. 신라 관등의 제1등이 각간이다. 대각간은 특정한 인물에 대한 특별관등으로 이해된다. 김유신이나 불상 제작시기의 각간 위홍에 대한 관등호칭이 그런 사례다. ‘대각간(大角干)’은 당대 권력의 실세로 추정된다. 관등 뒤에 붙은 ‘주(主)’는 ‘님’과 같은 쓰임의 존칭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우좌비(右座妃)’ 칭호는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오른쪽에 앉은 비이니 아마도 그의 부인일 것이다. ‘비(妃)’라는 예사롭지 않은 호칭을 고려할 때 당대 왕족 중의 여성 실권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묵서 기록 속의 두 남녀를 당대 권력 실세였던 각간 위홍과 왕 즉위를 앞둔 진성여왕으로 보는 시각도 터무니없지는 않다. 두 사람은 삼촌-조카 관계로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염문설을 장식한 주인공들이다. 두 사람이 누구이든 묵서에서는 “두 사람이 두루 빛나기를 도와주시길(燈身賜彌) 바라며, 이 불상을 중화 3년 여름에 옻칠을 하고 금을 입혀 완성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화 3년은 신라 제49대 헌강왕 재위 9년 해인 883년에 해당한다. 그로부터 4년 후 887년에 진성여왕이 왕위에 오른다. 제작연도 기록 중에서 여름철 ‘하절(夏節)’의 문장 속 위치가 기이하다. 그것은 ‘칠(柒)’과의 긴밀한 연관성 때문으로 보인다. 칠은 ‘옻칠’의 의미다. 옻칠은 칠과 건조 등을 고려할 때 장마가 낀 여름철이 가장 적합한 것으로 알려진다. ‘칠금착성(柒金着成)’은 “옻칠을 하고 금을 입혀 완성했다”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해인사 대비로전에 봉안한 쌍둥이 목조비로자나불(향좌측 법보전 비로자나불, 향우측 대적광전 비로자나불)
1167년에 봉안한 전적류 복장물. 위에서부터 〈반야심경〉, 〈화엄경〉, 〈약사여래본원공덕경〉사진자료=문화재청
1490년에 봉안한 복장물. 위에서부터 후령통, 중수발원문, 조각보사진자료=문화재청
1167년 고려 때 중수는 사 씨 집안 발원
묵서 기록은 그 동안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불상으로 여겨오던 12, 13세기 고려중기 혹은 고려말기의 불상, 이를테면 안동 봉정사 목조관음보살좌상(1199년), 서울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1239년), 서산 개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1280년) 등의 고려시대 제작시기를 훌쩍 뛰어넘어 목조불상 편년을 통일신라시대까지 끌어올리는 확고부동한 실증이 됐다. 두 불상은 형상과 크기, 조형원리 등에서 마치 서로의 거울 같이 빼닮았다. 높이 125cm, 어깨 폭 64cm, 무릎 폭 95.5cm로 거의 동일하다. 높이에서 1cm정도의 미세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도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9세기 후반 제작한 것으로 본다. 쌍둥이는 누가 뭐라 해도 같은 날 태어난다. 해인사 두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은 신라 9세기 때 제작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불상의 위상을 갖게 됐다. 그 모습은 어제 제작한 불상만큼이나 생생하고 현대적이다. 무릇 예술의 명작들은 피땀이 밴 장인정신과 함께 시대를 뛰어넘어 현재에도 그 미적 가치가 빛나는 현재성을 갖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런데 의아하다. 9세기 통일신라 불상인데 어째서 조선시대 조형양식인 머리에 반원형 중간계주가 있고, 정수리엔 원통형 정상계주인 보주가 솟구치고 있는가? 그 의문은 두 불상 내부에서 나온 복장유물을 통해 해소된다. 2005년 두 불상에 대한 개금불사 과정에서 불상 내부에 납입한 복장을 확인했다. 두 불상에서 거의 동일한 경전과 다라니 등의 전적류, 후령통과 직물류 등이 대거 쏟아져 나왔다. 불상에서 나온 복장유물은 두 시대의 층위를 뚜렷이 보여준다. 불상은 두 차례 뚜렷한 중수, 혹은 보수 과정을 거쳤다. 한번은 12세기 고려 때, 또 한 차례는 15세기 조선전기 때 중수가 이뤄졌다. 고려시대 중수과정에선 경전 등 전적류가 불복장물의 중심이었고, 조선시대 중수에선 저고리를 비롯한 직물류가 복장물의 중심을 이뤘다. 불상도 중수, 혹은 보수가 가능한가? 목조불상은 통상 접목조기법으로 제작한다. 신체 부위를 따로 조각해서 결합하는 원리다. 머리, 몸통, 손 등을 따로 조각하여 끼워 맞춘다. 실제로 두 불상의 경우에도 X선 광학조사 결과 머리와 몸통, 하반신 무릎을 따로 제작하여 결합한 후, 팔과 손도 접합해서 완성했음이 밝혀졌다. 그럴 때 부처님의 머리카락 장엄형식인 나발 사이에 반원형 중간계주, 혹은 원통형 정상계주를 새로 만들어 시대 경향에 맞게 보수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통일신라 목조불상에 조선시대 불상 양식이 나타나는 배경에는 그 같은 불상중수 과정이 있다.
두 불상의 고려시대 중수는 합천 인근의 거창 가조지역 유력 세력가였던 사 씨(史氏) 집안의 발원으로 이뤄졌다. 법보전 비로자나불에서 나온 전적류는 12종 이었다.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에서는 19종의 전적류가 나왔다. 전적류 중에서 불교경전은 〈반야바라밀다심경〉, 〈대방광불화엄경〉, 〈약사여래본원공덕경〉 등이 확인된다. 그 중에서 〈반야심경〉이 주목을 끈다. 반야심경은 4면에 인쇄한 절첩 형식으로 펴냈다. 뒷부분에 발원문을 새겼다. 법보전 〈반야심경〉의 발원문은 붉은색으로, 대적광전 반야심경 발원문은 먹으로 찍어냈다. 둘 다 사 씨 집안의 발원문이지만 내용은 다르다. 법보전의 〈반야심경〉 복장납입은 “국자진사 사겸광이 정해년(1167년)에 돌아가신 백부의 극락왕생을 위하여”, 대적광전의 복장납입은 “국자학생 사유직이 친부의 무병장수를 위하여” 〈반야심경〉을 인출하여 복장납입 한다고 밝혀뒀다.
15세기 조선시대 중수는 왕실 발원
15세기 조선시대 두 불상의 중수는 왕실발원으로 이뤄졌다. 그 같은 사실은 두 불상에서 나온 똑같은 내용의 〈해인사 중수원문〉에 근거한다. 중수원문은 남색 비단에 붉은 글씨로 썼다. 원문은 홍치 3년(1490년)에 당대 최고의 선사 학조대사가 적었다. 중수원문에 의하면 인수대비와 인혜대비가 선대 왕실의 뜻에 따라 1488년부터 1490년까지 왕실 내수사의 쌀, 면포를 풀고 노역승 300여 명을 지원하여 해인사의 판당(장경판전) 등의 여러 전각을 중수하고 법당의 주불과 문수, 보현보살을 보수 개금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불상 보수 때 납입한 복장물은 후령통 장엄을 비롯하여 홑적삼 저고리, 조각보 등 직물류가 중심을 이룬다. 1490년에 납입한 복장유물과 안치방식은 약 100년 뒤 16세기에 정립한 불복장 의례서 〈조상경〉의 정형을 앞서 보여줘서 놀랍다. 직물에 짠 넝쿨연화문, 구름영기문, 보상화문 등은 현대의 디자인에 못지않게 세련되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직물류 복장물 중에서 조각보는 특별한 눈길을 끈다. 조각보는 대적광전 불상에서 1점, 법보전 불상에서 2점, 모두 세 점이 나왔다. 내소사 조각보(1415년)에 이어 한국의 조각보 역사가 600년이 넘은 뿌리 깊은 내력을 대변한다. 면 분할과 색채 구성이 대단히 세련되고 현대적이다. 명작 불상 속에 명작이 있다.
통일신라시대는 우리나라 불교문화가 꽃을 활짝 피운 시기다. 8세기엔 불국사와 석굴암 불상 등 신라 불국정토의 이상화를 이뤄냈다. 두 불상엔 신라 불교문화 전성기에 이룬 불상의 이상화 경지가 뱄다. 법보전의 비로자나불에선 석굴암 불상의 근엄함이 흐르고, 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불에선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의 인자한 미소가 흐른다. 닮음 속에 차이가 있고, 차이 속에 통일이 있다. 대칭 속에 비대칭을 경영하고, 비대칭 속에 조화를 경영한다. 만물은 대칭의 깨짐을 통해 생명원리를 작동시킨다. 두 불상의 형상은 부드럽고 풍만하며 곡선의 선율이 유려하다.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싼 지권인의 독특한 수인이 범접키 어려운 아우라를 극대화한다. 지권인엔 고귀하며 위대한 선언이 담겨있다. 만유는 둘이 아니다! 단순한 심벌에 담긴 위대한 선언이다. 그것은 대방광불화엄의 표징에 다름없다. 광명변조 비로자나 불상의 부드러움 너머에 성스러움을 갖췄다. 그것은 목조불상 걸작이 가진 절대적인 미다.
▶ 한줄 요약
해인사 법보전·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은 쌍둥이처럼 닮은 한 쌍의 목조불상으로, 조성 시기가 천 년이 넘은 가장 오래된 목조불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