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관법수행
관법수행은 존재의 세 특상(特相) *주15 인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를 직접적 통찰로써 깨닫는 것을 말한다. 이 세 특상은 과학이나 철학의 진실과 마찬가지로 지성적 사유를 통해서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유방식을 통한 깨달음으로는 그 자체가 지니는 한계성 때문에 이기심과 갈애라는 양대 장애를 없애기에는 불충분하다. 존재의 궁극적 실상은 이런 장애들을 완전히 극복하는 보다 높은 수준의 인식 즉 직접적 `직관'의 차원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으며, 그때 이들 세 특상은 심리적 사실로서 실제적 체험으로 생생하게 경험하게 된다.
이와 같이 본인이 직접 체험을 통해 확인하기 전까지는 감관적 인식계[육근과 육경] *주16 나 그에 따른 감관적 반응이 지성적 확신보다 더 큰 힘을 행사한다. 결국 서로 다른 두 수준의 의식이 병행하여 기능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보통 이 무대에서는 무명이 지배적으로 우세하여, 의지적 활동이란 형태로 줄곧 작용하면서 생의 진로를 주도해나간다.
자신의 철학에 따라 살아가는데 실패한 철학자야말로 이론과 실제의 불일치를 보여주는 가장 비근한 예일 것이다.
그러나 일단 직접적 인식을 얻게 되면, 지금까지는 최고의 지성단계일지라도 기껏 이론에만 머물고 있던 것이 이제는 마치 우리가 뜨겁거나 찬 것을 또는 배고프거나 목마른 줄 `알 듯' 그렇게 실제적인 지식으로 바뀌게 된다. 이처럼 직접적 인식에 도달한 마음은 진리 위에 굳건히 자리잡게 되어 미망 대신 반야[慧] *주17 가 자리잡도록 한다.
기독교의 기도와 같은 종류의 사념적 명상은 어디까지나 의식의 차원에 머무르고 있어 언제든지 누구라도 행할 수 있다. 거기에는 특별한 준비나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좀더 차원 높은 훈련인 지(止)와 관(觀)을 행하는데는 기본 도덕률인 계율의 엄격한 준수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그와 같은 수행을 위해서는 세속의 불결함을 떠나, 공부를 이룬 스승 밑에서 지도를 받을 수 있는 한거상태(閑居狀態)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좋다. 흔히들 이런 점에 대해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함부로 기술적인 연마에 뛰어들었다가 영적 손상을 입고마는 경우가 적지 않다.
따라서 누구든지 자신을 한갓 시험대상으로 삼는 경솔한 태도는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만일 믿을만한 스승의 지도 아래 들어갈 수 없는 형편일 때에는 공부를 오직 사념적 명상에 국한시키는 편이 최선책이다. 이 공부로선 깨침이라는 구극단계에까진 도덕적 면에서 많은 진전을 성취할 수 있으며 보다 본격적인 다음 단계를 위해 착실한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