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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벽화이야기

이야기가 있는 조선시대 불상 - <17> 남양주 수종사 불상군

작성자보명|작성시간26.06.20|조회수0 목록 댓글 0

 

이야기가 있는 조선시대 불상 - <17> 남양주 수종사 불상군

 


“오직 중생 구제를 위해서” 조성된 23존 불상

성종 후궁들 불보살상 탑 봉안인목대비 발원 담은 불상 유명1493년 1628년 오층석탑 봉안

▲수종사 5층석탑(왼쪽)에서 발견된 불교조각. 상단 왼쪽은 1493년 성종의 후궁들에 의해 봉안된 불감과 불상, 오른쪽은 1628년 비로자나불상 명문. 중단과 하단은 1628년 인목대비에 의해 조성된 불상 가운데 20구, 불교중앙박물관 소장.

 

수종사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운길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25교구 봉선사의 말사로 강물과 산세가 어우러져 조선 후기 문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조선후기 학자이자 문인이었던 다산 정약용은 수종사에서 어려서 독서를 하였고 부근 풍광을 좋아해 수종사와 관련된 여러 편의 글을 남기고 있다. 1457년 세조는 병 치유를 위해 금강산 유람을 마치고 오대산 상원사 낙성식에 참여하였다.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양주 양수강에서 하룻 밤을 보냈는데 그때 운길산에서 나는 종소리를 들었다. 다음 날 종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가 보니 바위 틈에서 물이 떨어지는 동굴 속에 18나한상이 모셔져 있어 이곳에 절을 짓고 수종사(水鍾寺)라 했다고 한다.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세조의 귀에는 종소리로 들렸나보다.

 

수종사는 창건은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 왕실과 인연이 깊다. 태종의 딸 정혜옹주의 사리탑 1439년에 세워졌고, 1459년(세조 5)에는 세조가 수종사를 크게 중창했다. 세조의 며느리이며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는 1469년에 범종을 만들어 수종사에 시주하였다. 1493년에는 성종의 여러 후궁들과 자손들이 5층석탑을 세우고 석가여래상과 관음보살상 등을 조성해 불감(佛龕)에 넣어 탑 안에 봉안하였다. 1628년에는 비운의 삶을 살았던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가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의 극락왕생을 위해 23구의 불보살상을 조성해 5층석탑을 열고 다시 그 안에 봉안하였다.

 

남양주 수종사에는 1493년에 세워진 5층석탑이 있는데 1957년과 1970년 두 차례의 해체 과정에서 금동불상 27구와 목조상 3구 등 총 30구가 탑 안에서 발견되었다. 이 불상들은 1493년과 1628년으로 조성 시기가 다른데, 전자는 성종(1457-1495, 재위 1469-1494)의 후궁인 숙용 홍씨, 숙용 정씨, 숙원 김씨가 발원한 불상들로 석탑의 1층 탑신에 봉안되었다. 후자는 선조(1552-1608, 재위 1567-1608)의 계비인 인목대비(1584-1632)가 발원한 금동불상들로 같은 탑 기단 중대석, 1층에서 3층의 지붕돌 등 네 곳에 나뉘어서 모셔져 있었다.

 

1493년과 1628년에 수종사의 오층석탑 안에 불상들이 봉안된 것일까. 먼저 수종사 5층석탑 1층 탑신에서 발견된 1493년에 조성된 불교조각과 불감의 조성 목적은 무엇일까. 1493년 수종사 5층석탑을 건립하고 불상을 봉안한 것은 성종의 치병을 위한 것으로 짐작된다. 성종은 1493년 6월에 아팠다는 기록이 있고 1494년 12월에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아 왕실의 가장 큰 근심은 성종의 병환과 어린 자식들의 안위였을 것이다.

 

성종은 여러 명의 부인과 28명의 자식(16남 12녀)을 두었다. 그의 첫부인 공혜왕후가 18세에 요절하자 후궁 숙의윤씨를 왕비로 간택하였다. 이 분이 바로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이며 신숙주의 조카로 성종보다 2살 연상이었다. 그 후 중종의 생모인 정현왕후를 계비로 맞아들였다. 성종의 여러 후궁들은 어린 자식들을 위해서는 성종이 오래사는 것이 가장 중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1493년 6월 성종이 아프자 후궁들은 부랴부랴 그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탑과 불상을 조성한 것이다.

수종사 5층석탑 1층 탑신에서 발견된 것은 금동으로 된 불감과 금동석가여래상·금동지장보살상·금동관세음보살상과, 나무로 만든 관세음보살상·지장보살상·비사문천상 등 총 6구의 상이다. 또한 금동석가여래상의 대좌 바닥면에는 태종의 후궁이었던 명빈김씨(?-1479)가 시주한다는 기록이 있고, 청색 바탕천에 붉은 글자로 1493년에 쓰여진 발원문이 발견되었다. 명빈 김씨는 1479년에 세상을 하직했기 때문에 생전에 모셨던 불상으로 짐작된다.

 

발원문에 ‘홍치 6년(1493년) 계축년 6월 7일에 숙용홍씨, 숙용정씨, 숙원김씨가 주상전하가 만세를 누리고 자식들이 복을 받고 오래살기를 바라면서 석가여래상 1구와 관세음보살상 1구를 조성한다.’ ‘각자 능력대로 희사하여 오랜 옛 불상을 중수하고 장엄하게 장식하여 탑 안에 안전하게 모셨으니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작은 소원도 꼭 이루어지길 바란다. 국왕의 수명이 천지와 같이 영원하고 두 분의 대비마마와 중전마마, 세자저하가 큰 복을 받아 나셨으니 모두 장수하기를 바란다. 또한 모든 자식과 사위들이 복과 수명이 늘어나서 머무는 곳 어디에서나 성상의 은택을 받아 몇 번을 환생하더라도 항상 주인을 따르겠다’는 내용이다.

 

1628년에 선조의 계비이자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는 왜 23구의 불보살상을 조성해서 수종사 5층석탑을 열고 다시 그 안에 불상을 모시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광해군에게 목숨을 잃은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기 위한 것으로 짐작된다.

▲인수대비가 1469년에 조성한 작은 종(국립중앙박물관 소장)과 정혜옹주 극락왕생을 위해 1439년에 조성한 사리탑(수종사) .

 

수종사 5층석탑은 크기가 3.3미터에 지나지 않는 불탑으로 작은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493년과 1628년에 30여 구의 불교조각이 모셔졌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수종사 5층석탑에 이처럼 많은 불·보살상을 모신 이유는 왕실의 절박한 사연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1493년에는 나이 어린 자식을 둔 후궁들이 남편 성종의 병이 하루빨리 치유되어 장수하기를 바랬다면, 1628년 인목대비에게는 비명으로 목숨을 잃은 아버지와 아들의 명복을 기원하는 일이 간절했을 것이다.

 

1493년 불상 조성 발원문이 자세히 남아있다면 1628년 23구에 달하는 불사에는 발원문이 남아있지 않다. 총 23구 가운데 유일하게 대좌를 갖춘 비로자나불상의 바닥면에 ‘숭정 원년(1628년)인 무진년에 소성정의대왕대비께서 발원하여 23존을 상으로 주조하여 보탑에 봉안하니 후세에 전하여 중생을 구제하여 주시옵소서. 화원 성인(性仁)’ 이라는 내용이 있을 뿐이다.

 

즉 1628년에 인목대비가 발원하여 23구의 불상을 탑에 안치했는데 이를 화원 성인이 조성했다는 것이다. 선조의 계비 ‘소성정의대왕대비(昭聖貞懿大王大妃)’는 우리에게 사후에 내려진 시호인 ‘인목대비’로 잘 알려져 있다. 비로자나 불상을 만든 분은 성인스님인데 혼자서 23구의 불상을 모두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왕실과 관련이 깊은 인물로 추정되는데 1622년 왕실에서 발원한 서울 지장암 비로자나불상 조성에도 참여하고 있다.

 

인목대비는 19세에 선조의 계비가 되어 영창대군을 낳았지만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을 잃고 폐서인이 되었다. 1618년에는 그의 딸 정명공주와 함께 서궁에 갇혀 비운의 삶을 살았으며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복위되었다. 광해군에 의한 핍박으로 한 많은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그녀에게 불교는 커다란 의지처였다. 죽은 아버지와 아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장수하기를 바라며 불교의 힘을 빌어 극복하고자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인목대비는 왜 수종사에 23구에 달하는 불상을 조성하게 되었을까. 비로자나불상에는 간략하게 ‘중생을 위해서’라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수종사 탑에 불상이 봉안되기 1년 전인 1627년에는 대외적으로 정묘호란으로 인해 왕실이 어수선한 상태였고, 1628년 1월에는 민대와 유효립 등이 선조의 아들 인성군(1588-1628)을 옹립하려는 역모사건이 일어났다. 인목대비는 역모 사건에 자신이 언급되자 인성군을 처벌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광해군 때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 때문에 혹독한 시련을 겪었던 인목대비는 인성군 역모 사건에 생존의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여러 상황은 그녀로 하여금 수종사 탑에 불상을 안치할 불사를 계획하게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인목대비가 수종사와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1628년에 불상을 봉안한 이후 1629년 수종사에 내원당(內願堂) 신설이 추진된 사실로 보아 17세기까지 수종사는 왕실과 깊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수종사 불상의 미소를 띤 얼굴 표정은 조선 전기 불상의 근엄하거나 조선 후기 불상의 딱딱한 이미지와는 다르다.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는 이 불상들은 머리가 신체에 비해 유난히 크고 어깨와 하체는 좁고 낮아 신체 비례의 균형이 맞지 않는 어린 아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가슴에 묻어둔 영창대군의 모습을 불보살상에 반영하도록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수종사 금동불상군은 모두 10cm 내외의 소형불로 자세와 얼굴, 착의법 등이 유사하다. 5층석탑 발견 불상군은 17세기 대형 불상들이 조성되기 이전에 왕실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 탑 안에 봉안하기 위한 작은 크기의 불상이지만 왕실 발원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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