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사회’의 출범과 함께 ‘관점’이라는 말이 사회과교육계에서 주목받는 키워드가 되었습니다. ‘통합사회’는 인간의 삶과 사회현상을 지리적, 사회적, 역사적, 윤리적 관점을 모두 고려한 통합적 관점에서 이해하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요구는 교과교육의 가치와 기능을 근본적으로 의심하는 매우 불편한 요구이기도 합니다. 교과를 가르치는 이유가 그 교과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안목을 길러주는 일이라고 할 때, 통합은 다양한 교과를 배운 결과로서 학습자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온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시대의 조급함은 통합을 개별 교과의 가치와 기능을 존중하는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발현물로 위치시키기보다는 동일한 교과서의 지면을 두고 벌이는 경합과 분할이라는 기괴한 영역으로 내쳐 버렸습니다.
지금 우리는 ‘통합사회’의 학교 현장 안착과 함께 ‘관점’이라는 명사 앞에 붙은 ‘공간적’ 또는 ‘지리적’이라는 형용사의 의미를 웅변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이에 현장에 계신 많은 선생님들께서 ‘통합사회’ 내에서의 지리교과의 영토를 지키고 확장하기 위해 효과적인 교수․학습 전략을 구안하고 실행하느라 여념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잠시 숨을 고르고 ‘관점’이라는 명사 안에 내포된 공간적, 혹은 지리적 속성을 살펴보는 일도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니, 이것은 필요합니다. 그리고 중요하게 간주되어야 합니다. 관점이란 말 자체가 특정한 공간에 처한 인간의 존재론적 상황에서 비롯된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답사를 가면 카메라에 담고 싶은 인상적인 대상들을 마주합니다. 그것은 명확한 형상을 지닌 건축물일 때도 있고, 사람과 장소가 함께 빚어내는 역동적인 경관일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의 많은 부분을 담아내기 위해 자신의 위치를 바꾸어 가며 여기저기서 바라봅니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 잘 드러나는 순간 다른 한쪽이 가려지게 됩니다. 몸을 움직이면 카메라에 담고자 하는 대상 전체를 둘러볼 수 있지만, 정지한 상태에서 바라보게 되면 어느 한 면만을 마주하게 됩니다. 애석하게도 인간의 시야는 사물을 모든 면에서 동시에 바라볼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들은 우리가 취한 시점에 따라 필연적으로 어느 한 면만이 부각되기 마련입니다.
인간은 항상 특정한 시점에 묶여 사물의 일면만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시점과 무관하게 사물을 ‘그 자체’로 인식하기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시점이 제약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점은 특정한 공간 안에 인간을 묶지만, 그러한 묶임 덕분에 무한한 공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시점은 제약이자 지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점은 또한 동일한 대상을 서로 다르게 보이도록 하여 인간의 해석과 이해가 설 자리를 허락합니다. 시점은 인간의 주관성이 존중받기 위한 전제 조건입니다. 만약 시점이 없다면, 인간은 결코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형체를 지닌 사물뿐만 아니라 무형의 사건과 현상도 특정한 세계관, 즉 관점을 통해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유한한 인식은 필연적으로 특정한 관점에 기대기 마련입니다. 국어사전에서 ‘시점(視點)’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사물을 바라보는 특정한 방향이나 관점”을 뜻하는 말로 나옵니다. 그리고 ‘관점(觀點)’은 “사물을 관찰하거나 고찰할 때, 그것을 바라보는 방향이나 생각하는 입장”으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영어사전을 보면, 시점과 관점 모두 ‘viewpoint’, ‘perspective’ 등의 단어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시점과 관점은 서로 중첩되는 부분이 많아 혼용되어 사용됩니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공간 안에서 인간과 대상들이 관계를 맺는 양상을 표현할 때 사용되던 ‘시점’이라는 말이 추상적인 영역으로 확장되어 ‘관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공간적 관점이 다른 역사적, 사회적, 윤리적 관점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역사적, 사회적, 윤리적 존재로 성장하기 이전에 먼저 공간 속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계에는 상이한 공간에 따라 상이한 역사와 사회와 윤리를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공간에 따라 역사가 달라지는 것은 멀리 갈 필요도 없습니다. 한, 중, 일 3국은 모두 그들의 변방에서 독자적으로 진행된 역사를 자국의 국사에 포섭하려 합니다. ‘누구의 역사인가?’에 관한 문제는 필연적으로 그 역사를 규정하는 사람들의 위치성을 반영하기 마련입니다. 이 시대의 일상을 짓누르는 가장 큰 사회문제라고 할 수 있는 거주문제를 바라보는 양상 또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적 맥락에 따라 달라집니다. 강남의 자가소유자들에게 있어 주택이란 가치가 하락해서는 안되는 부동의 실물자산이자 더 큰 가치를 뽑아낼 수 있는 금융자본이며, 자신의 정체성을 과시할 수 있는 상징자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에 있는 대학가의 지하방과 고시원을 전전하는 고달픈 청춘들에게는 다른 세상의 야기입니다. 그들은 ‘방’을 넘어서는 ‘주택’의 개념을 상상조차 하기 힘듭니다. ‘거주’를 꿈꾸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누울 ‘자리’가 걱정입니다.
저는 배구경기를 보면서 경계가 만들어내는 위력에 놀란 적이 있습니다. 배구경기에는 유독 터치아웃과 관련된 비디오 판독 요청이 많습니다. 공이 손에 닿은 선수는 결과를 미리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선수가 스스로 나서서 ‘제 손을 맞고 나갔어요’ 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진실이 지탄이 되는 애매한 상황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선의의 거짓말인가요? 그 선의란 누가 결정하며 어디까지 적용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코트를 사이에 두고 동일한 행동이 완전히 다르게 해석됩니다. 터치아웃을 두고 배구장에서 벌어지는 논란은 국가나 지역 등 경계를 지닌 모든 공간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 지역의 발전을 위해, 국가의 이익을 위해’ 등과 같이 ‘~을 위해 참아 달라’는 요구 앞에는 공간적 범주가 따라다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도덕과 윤리가 작동하는 범위에는 경계와 스케일이 깊이 개입합니다.
우리 모두는 인식의 한계를 지닌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한계의 많은 부분은 우리가 처한 공간을 매개로 작동하는 관계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공간이 만드는 한계가 늘 제약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관점, 즉 공간이 규정한 인식의 방향성과 한계는 결속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동일한 관점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통합합니다. 대한민국이란 공간에서 우리는 많은 생각을 공유하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소통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와 말이 통한다는 것은 그와 생각이 비슷하다는 이야기이며, 이는 관점을 공유하면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관점은 삶의 진로를 탐색해나가는 지침이자, 더 큰 사고를 위한 출발점으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교육은 이를 위해 이루어지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통합사회’를 배우는 학생들에게 ‘공간적’, ‘지리적’이라는 형용사를 강조하기에 앞서 먼저 ‘관점’에 내포된 공간성을 언급하고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요? 우리가 인간의 삶과 사회현상을 통합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사회적, 역사적, 윤리적이라는 다양한 관점을 취할지라도 우리가 처한 공간이 규정하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출발하는 것은 어떨까요? 그래서 지리를 배우면, 완전하게 ‘그들’이 될 수는 없어도 ‘그들’의 입장에 다가설 수 있다는 약간의 이기심을 공유하는 것은 어떨까요? 결국 공간에 ‘의해’ 굴절된 세계는 다시 공간을 ‘통해’ 풀어주어야 할 테니까요.
오토 프리드리히 볼노의 <인간과 공간>을 읽다가 스치는 생각을 잡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