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희망을 주시는 예수님을 삶, 그 희망을 찾아오는 사람들로 인하여 바쁘셨습니다. 세상에서 자신의 이익을 의하여 뛰는 사람은 많아도 세상 사람들의 희망을 주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 주변은 희망을 찾는 사람들로 인하여 항상 붐볐습니다.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예수님이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다시 예수님에게 모여 들었습니다. 20절을 같이 볼까요?
[20]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라고 말씀합니다(20절). 다시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끊임없이 모이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을 모우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 쓰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예수님에게는 사람들이 스스로 모여 들었습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을 모우기 싫은 교회는 없겠지요. 많은 교회들이 사람들을 모우기 위하여 다양한 것들을 준비하지요. 좋은 목사님도 모시고, 연예인도 모시고, 사람들을 모우기 위하여 어떤 한 날을 정하여 선물을 주기도하고......,
어떻습니까? 사람을 모우기 위해서 뭐 좋은 방법 없습니까? 있다면 저에게도 좀 가르쳐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이 자신을 홍보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몰려 왔습니다. 선물을 주지 않아도 몰려 왔습니다. 막아도 막아지지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적어도 우리가 예수님이 그렇게 시작한 모임을 우리도 동일하게 하는 사람들이라면, 예수님이 시작한 그 모임을 이어가는 사람들이라면 우리의 방법이 주님의 방법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사람들이 몰려 온 이유는 단 하나겠지요.
그것은 예수님에게는 그 당시 그곳에서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이 예수님 외에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외에 희망이 없으니까 사람들은 당연히 그들의 희망이 되시는 예수님 에게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겠지요.
사람이 모이는 곳은 희망이 있는 곳입니다. 희망이 있으면, 그곳에서 무엇인가 미래를 보면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아름다운 교회에 희망이 있으면 사람이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줄 수 없는 희망을 주면 사람들이 희망을 얻기 위하여 모여 들게 되어 있는 것이지요.
아니 우리 사람들에게 모든 시대의 소망이 되시는 예수님이 우리 교회의 주인으로 계시다면 아름다운 교회가 세상의 소망이 되고, 이 소망을 따라 예수님을 만나기 원하는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아십니까? 우리가 어떤 싸움을 해야 하는 지를 보여 주는 것이지요. 허공을 향하여 헛손질하는 그런 싸움은 하지 말아야겠지요. 우리ㅣ의 삶 속에서, 우리 교회의 모습 속에서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삶과 행동들과 그런 일들이 보여 질 때에, 사람들은 그 교회를 찾게 되는 것이지요.
식사할 겨를도 없는 지라
그렇게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은 식사도 제대로 하실 수 없었습니다. 20절을 다시 한 번 볼까요?
[20]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라고 말씀합니다(20절).
식사할 겨를이 없었다는 것은 그들의 요구에 일일이 응답하셨다는 것입니다. 만일 무시 했다면 뭐 특별한 문제가 있었겠습니다. 귀찮아서 자신이 들어가신 집의 문을 닫으시고, 잠그셨다면 뭐가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들을 막으셨다면, 제자들의 인의 장벽을 속에 거하셨다면 뭐가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아픔을 그냥 두실 수가 없었습니다.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다가가셨고, 그들의 아픔을 만지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식사할 겨를도 없었던 것이지요.
식사할 겨를이 없었다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을 먼저 돌아보셨습니다. 지금 자신의 필요보다도 자신 앞에 있는 사람들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자신을 위하여 움직이시는 것 보다 자신에게 오는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다가가시며 그들을 안으셨습니다. 자신의 기본적인 욕구인 곡기조차도 뒤로 미루시고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식사할 겨를도 없었다는 것은 그러한 예수님의 헌신된 모습을 보는 것이지요. 자신보다 상대를 더 존중하며 그들의 위하여 사시는 것이지요.
자신을 위하여 밥 한 끼도 제대로 하실 수 없었던 예수님,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셨던 예수님을 보면 부끄러워집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멀리하면서도 나를 위하여 살기 때문입니다. 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내가 살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소중한 일을 멀리하면서라도 나의 하찮은 일이 더 우선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먹자고 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먹는 것도 포기하고, 때로는 먹는 것도 뒤로하고 해야 할 중요한 일들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우리가 그렇게 내 이익에 몰입하는 순간, 세상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위하여 우리의 시간을 내려놓을 때에, 내가 누리고 있는 것, 소유한 것들을 내려놓고, 세상을 향하여 나아갈 때에 비로써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바로 바라보겠지요. 내 할 일 다 하고, 내가 쓸 것 다 쓰고, 다른 사람을 돌아본다는 것은 가치 없는 일이겠지요.
미쳤다 함일러라
예수님께서 그렇게 자신을 버리시면서 헌신하시며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소문이 났을까요? 우리 한번 21절을 보겠습니다. 어떤 소문이 났는지 말입니다.
[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가장 악한 귀신이 들렸다는 것입니다. 제일 큰 귀신이 들린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미쳤다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누가 그런 말을 합니까? 누구입니까?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은 그 시대 사회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엘리트들입니다. 최고의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을 위하여 밥 한 끼 굶어 본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아픔을 위하여 한 번도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소외 당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한 번도 다가가 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헌신을 왜곡합니다.
그런데요. 우리 21절을 볼까요? 같이 보겠습니다.
[21]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예수님의 친족들이 예수님에게 왔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그를 미쳤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친족들이 그 소문을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이 아니라면 왜 붙들러 나왔겠습니까?
얼마나 주도면밀하게 움직였으면 그 소문이 진실처럼 퍼졌을까요? 얼마나 그럴 뜻하게 이야기 했으면 사실처럼 치부가 되었을까요?
설명이 그럴 뜻했을까요? 아니면 서기관이라는 지도자의 신분이 믿게 했을까요? 예수님의 가족들이 그 소문을 믿었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 소문을 다 믿는 것 아니겠습니까?
소문은 말 그대로 소문입니다. 아니 땐 굴뚝에도 연기 납니다. 이 소문을 듣고 고지식하게 믿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손해 입니까? 소문낸 사람이 손해 입니까? 그가 손해 될 일이 없겠지요. 믿어 주면 도리어 고맙지요. 예수님이 손해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본래 사람들을 통하여 어떤 이익을 챙기려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도리어 자신을 희생하는 분이 사람이 오지 않는다고 손해 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손해는 그 소문을 듣고 그대로 믿는 사람들만이 손해입니다. 자신이 얻어야 할 진리의 길을 그 소문 때문에 못 간다면 그 손해를 누가 보겠습니까? 잘 못된 정보로 다른 사람에 대하여 선입견을 가지게 되었다면 누가 손해르 보겠습니까? 계속 손해를 보려면 그대로 믿으시면 됩니다.
혹시 말입니다. 저나 제 아내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여러분을 화나게 하는 말을 전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저의 어이없는 행동을 전하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저와 제 아내의 나쁜 점을 이야기 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화내지 마시고 저나 제 아내에게 확인해 주십시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렇게 말 할 수 밖 없는 이유가 있었지 않겠습니까?
저와 제 아내는 괜찮습니다. 여러분들이 조금 서운 한 눈빛을 보여도, 여러분들이 저를 멀리해도 괜찮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통하여 무엇인가 얻으려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다만 여러분이 그 일로 상처 받을 것는 걱정이 됩니다.
소문 그대로 믿지 마십시오. 소문은 말 그대로 소문입니다. 소문은 소문이지 진실이 아닙니다. 진실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소문에 특별하게 반응하시지 않았습니다. 현혹되지 않으셨습니다. 설명을 하시며 풀어 주셨습니다. 그 소문에도 예수님은 그 행동을 계속하십니다.
일하는 사람은 일하면 됩니다. 소문을 만들어 내고, 뒤에서 남의 말하는 사람은 그렇게 남의 말만합니다. 일하는 사람은 소문을 무시합니다. 그런 소문 때문에 멈출 수 없기 때문이지요. 남의 말을 하는 사람은 그 일을 못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이 이렇게 움직였다는 것은 이미 이런 일들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 아겠습니까?
지난 일 년을 돌아보며
지난 일 년 여러분들은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식사할 겨를도 없었는지요?
아니면 식사만 하셨는지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눈을 가지고 내 앞에 있는 사람을 돌아보며 내가 보아 주어야 할 부분을 발견할 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가 본 그 사람을 향하여 내게 주신 발을 가지고, 그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는 분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 다가가 하나님께서 주신 팔로 그 사람을 안아 줄 수있는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위하여 주신 물질을 가지고, 그 사람을 위하여 나눌 수있는 분은 최고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납니다.
성경책을 옆에 끼었다고 향기가 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위하여, 식사할 겨를도 없이 지낸 다는 것이 행복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는지요?
2014년, 내년 한 해는 우리가 희망을 빛을 더 밝게 비추이기를 소망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