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건너”, 제가 어렸을 때에 외갓집 앞에는 소양강이 있었습니다. 그 건너편은 저의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아침에 리어카나, 지게를 지고 그곳으로 사라져 갔고, 저녁 때 쯤 이면, 들어갔던 사람들이 돌아오고는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돌아오는 사람들의 손에는 다양한 것들이 들려 있었습니다. 여름에는 참외와 수박들이, 가을에는 밤과 감들이, 겨울에는 땔 나무들이 들려 있었습니다. 외할아버지께서는 그곳에 가시기만 하면 산딸기를 가져오셨습니다. 특별히 먹을 것이 없던 그 당시 저에게는 그곳은 먹을 것이 많은 보물창고였습니다.
제가 학교에 들어가고 조금 컸을 때에 방학을 이용하여 외갓집을 찾은 저에게 친구들이 강 건너가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들 나름대로 서울에서 오는 서울 놈을 위하여 별천지를 구경시켜 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신이 나서 친구들을 따라 나섰고, 아이들의 목표는 참외 밭이었습니다. 마침 참깨 밭 옆에 참외 밭이 있었고, 친구들은 그 참깨 밭으로 숨어 들어가서 참외를 따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들은 서울 놈인 저에게는 그저 참깨 밭에 숨어만 있으라고 했고 자신들이 참외 밭까지 가서 참외를 따서 그 속에서 막 먹으려는 순간 “이놈들”이라는 호통 소리가 들렸습니다. 마침 그곳에 진지 보소 중이던 군인들에게 발칵이 되고 우리는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20분정도 벌을 선 다음에 겨우 도망칠 수가 있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본 강 건너는 무서운 군인들이 있는 곳이요, 두 번 다시 가서는 안 되는 고통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건너편은 저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고, 새로운 세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그 건너편으로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그 건너편으로 가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 과정 가운데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그 날 저물 때에
날이 저물었습니다. 35절을 같이 볼까요?
[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그날 저물 때에”라고 하루가 마감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해가 지고, 해가 지면서 저녁놀도 엷어지고, 그렇게 대지에 어스름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얼마의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이미 해는 졌지만 아직도 예수님 곁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하루의 시작은 해가 지면서부터입니다. 그렇게 그곳에서 바쁜 하루의 여정을 마무리하셨습니다. 해가 새롭게 뜨는 내일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요청하십니다.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무슨 요청을 하시는지 35절을 보겠습니다.
[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35절)라고 요청하십니다. 우리가 가자고 요청하신 것은 그곳에서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곳 사람들을 만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곳에서 사역을 펼치시겠다는 것이지요. 미지의 땅, 새로운 땅을 향하여 함께 가자고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귀가에 계속 울립니다.
“우리가 가자. 우리가 가자.”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8장 19-20절을 같이 볼까요?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이제 제자들에게 요청하십니다. 건너편이 아니라 땅 끝까지, 모든 민족에게 가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입니다. 가라고 하시면서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자”는 말씀입니다. 세상을 향하여, 모든 민족을 향하여 “우리가 가자”는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땅 끝에 서있습니다. 에수님께서 말씀하신 가야할 모든 민족이라 통칭 될 수 있는 한 민족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얼굴을 맞대고 있습니다. 아침마다 보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가자” 우리 주님과 함께 가십시다.
저편은 새로운 세상입니다. 지금 있는 곳과는 전혀 다른 곳이지요. 새로운 곳이기에 낮 설 수 있지만 무엇인가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곳입니다. 무엇보다도 그곳은 내가 필요한 곳입니다. 복음이 필요한 곳입니다.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곳을 바라보시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건너가는 길이 힘들지만 우리가 가자고 요청하십니다.
저편에 한 번 가보신적 있습니까? 도전해 보신 적이 있냐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마을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놀고, 자고, 하는 그런 일들, 우리가 그들을 향하여 갈 수 있는 그런 일들이 선교위원회에서 계획 되었으면 합니다.
큰 광풍이 일어나며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계신 배를 몰고 건너편을 향하여 출발합니다. 36절입니다. 같이 보겠습니다.
[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이때에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갑니다. 다른 배들도 예수님을 따라 함께 가지요.
문제는 출발하고 얼마 가지 않아서 일어났습니다. 어떤 문제 인지 37절을 같이 볼까요?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큰 광풍이 일어났습니다. 말 그대로 광풍입니다. 오죽했으면 광풍이라고 이름을 붙였겠습니까? 작은 배에 탄 사람들이 얼마나 흔들리며 힘들었겠습니까?
물결이 배에 부딪히면서 물이 배안으로 들어 배 안에 가득 찼습니다. 그 배 안에 있는 사람 중에 몇 명은 전문가입니다. 처음에는 그들이 해결 하려고 노력했겠지요. 다른 제자들 앞에서 이런 일에는 우리가 전문가라고 뽐내고 해결하려고 나셨겠지요. 그러나 불가능했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서 지금의 상황이 심각한 상황인지를 알았습니다. 위급함을 알았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왜 우리의 삶은 무엇인가 도전해 보려고 하면, 무엇인가 가치 있는 하려고 하면 이런 방해꾼들을 만날까요? 가지 못하게 하고, 하지 못하게 하고, 학을 띠게 만들고, 질리게 만들고......, 그래서 다시는 시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요?
만일, 만일 말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다시 시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러기 위해서 질리게 만드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만 두어야할까요? 그렇게 귀찮은 일 그만 두어야할까요? 그렇게 해서, 조금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서 그만 둔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될까요? 건전한 상식을 가지신 여러분들에게 맡기겠습니다.
우리가 죽게 된 것을
이 상황 속에서 제자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38절입니다. 같이 보겠습니다.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우리의 죽게 된 것을...” 제자들은 지금 죽을 지경에 다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지금 고생하고 있는 제자들 중에 그곳에서 평생을 몸 담았던 전문가들의 판단이었습니다. 이렇게 죽을 지경이 되면 속상합니다.
처음 저편으로 가자고 하신 분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될 줄 몰랐겠지만 가자고 하신 분이 책임져야하는 것이지요. 시작한 사람이 책임지는 것이 공동체의 생리 아니겠습니까?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이제는 속상함을 지나서 화가 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가자고 하신분이 이 상황을 전혀 돌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자고 하신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고, 그래서 돌보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8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님인들 뾰족한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해결하실 수 없다고 하실지라도 가자고 하신 이상 무엇인가 책임 있는 행동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렇게 풍랑이 일고 있지만 배위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현 상황을 너무 무섭게 받아들이는 것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이 너무 무감각한 것일까요? 상황인식에 대하여 제나자, 예수님, 둘 중에 하나는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의 문제는 이런 것 아닐까요? 예수님은 평안하신데 우리가 지레 겁을 먹고 먼저 안달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아무 문제도 없는 것인데 우리가 스스로 판단해서 죽을 상황이라고 이야기하고 난리법석을 떤다는 것이지요.
잠잠하라 고요하라
제자들의 성황에 결국 일어 나신 예수님, 이렇게 외치시지요. 39절입니다. 같이 보겠습니다.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주무시다 일어나신 예수님은 바람을 향해 외치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성경은 꾸짖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졌습니다. 자연이 에수님의 말씀에, 예수님의 의지에 굴복하고 복종한다면 예수님의 의지에 굴복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실제로, 죽음도, 귀신들고, 병들도, 다 예수님의 말씀에 굴복했습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주님이 말씀하시면, 주님이 말씀하시면 모든 것이 해결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관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냐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주님께서, 예수님께서 그것에 대하여 말씀하시느냐 하는 것이지요.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주님이 말씀하시면 모든 것이 해결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레 겁을 먹고, 죽겠다고 소리치고, 악을 쓴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0절입니다. 같이 보겠습니다.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왜 믿음이 없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그렇게 건너편으로 가면서 예수님이 대하여, 신앙에 대하여, 믿음에 대하여 믿음의 새로운 땅으로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2014년도 건거가야 할 새로운 땅은 신앙의 새로운 영역입니다. 이 세상에 대하여 악 쓰지 않고 나와 함게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편이란 좀 더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신앙의 땅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로운 한해 신앙의 건너편으로 건너가 보시지 않겠습니까? 그 땅을 향하여 나아가시지 않겠습니까? 그곳에서 주님이 주시는 신앙의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며, 놀라며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을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