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어릴 적 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참 좋은 교회에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좋은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그런 교회가 있다면 그런 교회 다니고 싶었습니다. 그런 교회가 쉼이 있고, 서로를 격려해 주고 위로해 주는, 용서해 주고 사랑해 주는 교회, 그런 교회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제가 다닌 교회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공등부가 그랬고, 대학부, 청년부가 그랬습니다. 어느 날 이임하시는 전도사님께서 우리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신싱당부하시며 교회를 떠나셨을 때, 우리는 몰랐습니다. 우리는 그냥 그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인원이 좀 많아지면서 혼란의 시절이 오고, 그것을 지나던 어느 날 저는 제가 목회자의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제가 그 길을 가게 된 것은, 아마도 꿈같은 그런 교회에 대한 소망이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꿈같은 교회, 참 좋은 교회......, 저는 담임 목사이기 이전에 예수 믿는 사람으로 그런 교회 다니고 싶습니다. 저의 소원입니다. 꿈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하고 싶고, 목회자인 지금 그런 교회를 목회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꿈이요, 그 꿈 때문에 목회의 길을 걸었습니다.
제가 목회의 길을 가는 동안, 아름다운 교회를 하는 동안 어느 곳에서도 제 사례, 생활비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관심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좋은 교회에 대한 관점입니다. 여러분들이 우리 목사님이 이랬으면 좋겠다라고 생각되는 것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도 압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는 목회의 관점이 차이가 있기 때문에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관에 대하여 제가 다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주십시오. 저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더 많이, 더 여러 번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뭐 이런 이야기로 여러분들의 불만을 막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불만이 있으면 언제든지 이야기 하십시오.
선교 많이 한다고 말씀하시며 칭찬하시는 분들 있습니다. 그러나 선교 많이 하고 싶은 생각 없습니다. 다만 하나 우리가 이곳에 살면서 눈에 보이는 일를, 우리가 만나는 일들만큼은 피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입니다. 선교는 잘 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제가 교회를 사임하고 선교의 현장에 나가면 그때는 그 생각을 하겠지요. 그러나 제가 지금 생각하는 것은 아름다운 교회가 참 좋은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것 하나입니다.
교회에 대한 여러분들의 꿈도 저와 같은지 모르겠습니다. 같습니까?
저는 여러분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이런 소망을 가집니다. 어느 날 문득 여러분들이 아름다운 교회가 생각이 날 때, 그 교회 참 좋았다라는 느낌이 들면 되는 것이지요. 사람은 흔적을 남기는데 저는 여러분들의 가슴에 흔적을 남기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의 꿈은 참 좋은 교회 다니는 것입니다. 물론 좋은 교회의 개념은 다 조금씩 다르고, 조금은 막역한 느낌도 있지요. 그러나 좋은 교회만큼은 꼭 다니고 싶습니다. 뭐 적당한 교회를 적당히 다닌다고 생각하는 것도 꼭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그래도 좋은 교회의 환상이 있습니다.
남들 보기에 아름다운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다른 분들의 의견이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관점이 중요하겠지요.
우리 몇 주간에 걸쳐서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를 접하며 우리 교회가 나아갈 길을 점검해 보고자 합니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예수님께서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시작하십니다. 2절입니다. 같이 볼까요?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내가 네 행위과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에베소교회를 보시면서 기억하신 것이 바로 에베소 교회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였습니다. 예베소교회는 행위와 수고와 인내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행위”, “수고”, “인내” 이 모든 것을 합하여 한 단어로 하면 “삶”입니다.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괜찮은 삶을 살았다는 것이지요.
행위라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어떤 기준에 대하여 벗어나지 아니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수고라는 것은 맡겨진 일들 회피하지 아나하고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감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참는 것입니다. 결과를 얻기 위하여 참는 것입니다. 진정한 내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하여 참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사람들로써 그들은 참았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삶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다운 삶이 있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다운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슴에 따라 살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그것을 위하여 조금 힘들고 어려운 것을 견디는 인내가 있습니다.
우리 아름다운 교회도 삶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 은혜를 누린다면 삶도 달라지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열매입니다. 그 열매로 믿음을, 그 열매로 우리가 받은 은헤를 보시는 것이지요. 그 열매라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입니다. 잘 사십시오. 본이 되도록 노력하십시오.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십니요. 세상에서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가십시오.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하나님이 이런 것들을 인정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악한 자와 거짓 된 것을
예수님께서는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것 또 하나입니다. 먼저 2절을 다시 한 번 볼가요?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악한 자를 용납하지 아니 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악한 자는 교회ㅣ를 파괴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하나의 부류가 있습니다.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드러낸 것”을 말씀하십니다. 자칭 사도라고 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것들로 자신의 욕심을 챙기는 사람들이요, 권위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거짓 사도들이 들어 오면 복음이 오염됩니다. 거짓된 삶을 가르칩니다.
이들에게서 교회를 지켰습니다. 복음의 순수함을 지켰습니다. 교회의 거룩함을 지켰습니다. 그렇다면 에베소 교회는 진리를 지키며, 복음을 사수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교회에는 항상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교회를 파괴합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그들을 방어했습니다. 그들의 악함을 드러내고, 그들의 거짓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시는 순간까지 우리는 정결함을 지켜야합니다. 교회를 지켜야 합니다. 성경공부하자고 하는 선교사님들이 있으면 조심하십시오. 제가 모르게 어떤 모임을 만들고 외부에서 목사님이나 강사를 불러서 성경 공부를 하고, 집회를 하는 것들이 있으면 조심하십시오.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정상적인 모임이면 왜 저 모르게 하고, 정상적인 선교사라면 지금 다니는 교회에서 은혜 받게 하는 것이지 왜 다른 교회 성도를 따로 불러서 성경공부를 하겠습니까? 과연 이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모임들이 발생하면 교회의 순수함에 깨지는 것입니다. 복음이 왜곡되는 것입니다. 지켜야하는 것입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
3절을 보면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에수님께서도 이런 말씀도 하십니다. 3절을 같이 볼까요?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않았다”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않았던 에베소 교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고마움이 묻어나는 말씀들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견디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게 견디고 난 그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옷을 다 헤지고 몸은 피투성이가 되고, 그러나 마음만큼은, 그러나 그들의 영혼은 기쁘지 않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견디는 삶, 우리가 가져야 하는 삶 아니겠습니까?
내가 아노라
2절과 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알고, 아노라”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수고를 아셨습니다. 얼마나 고생하고, 얼마나 노력하고, 얼마나 인내하고, 얼마나 열심히 사는지를 아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신다면 좋은 모습을 보여 드려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해서는 안되는 모습은 버리고, 진정 좋은 모습을, 진실한 모습을, 거짓 없는 모습을 보여 드려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처음 사랑을 버렸노라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잘 못을 하나 말씀하십니다. 그냥 넘어가는 되는 것이었다면 그냥 넘어갔겠지요. 그러나 그냥 넘어 갈 수 없는 부분이니까 말씀하시지 않겠습니까? 4절입니다. 같이 볼까요?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책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책망입니다. 책망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처음 사랑을 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너의 처음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 사랑을 가직하고 계신 뜻한 느낌입니다.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은 그들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마음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살면서 처음 사람을 잃어 버렸던 것입니다. 타성에 젖어들은 것이지요. 처음에는 사랑 때문에 합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하다 보면 사람은 사라지고 습관에 따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타성에 젖는 것입니다. 그 순수함을 잃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 열정을 잃었던 것입니다. 살면서 변했던 것입니다. 순수함은 이익으로 바뀌고, 타성으로 변하고,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처음처럼 이라는 단어에 그렇게 열광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처음과 다르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삶의 구조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누가 달라지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여러분도 달라졌을 것입니다. 저도 달라졌겠지요. 달라지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달라지는 제 자신이 안타깝고, 달라지는 여러분들이 안타깝습니다. 조금 힘들면 달라지고, 다른 이야기를 들으면 달라지고, 그렇게 달라지는 모습들이 안타깝습니다.
달라진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5절입니다. 같이 볼까요?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다음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교회를 옮기시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 사람을 회복하는 것, 그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그만인 그런 것이 아니라 반드시, 반드시 우리가 해내야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반드시 말입니다. 가치를 잃으면 더 이상 교회가 아닌데 어떻게 두고 보시겠습니까?
내가 하는 행동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빠지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형식만을 보는 사람들, 결과만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혹시 여러분들이 살면서 잃어버린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주워 담으시지 않겠습니까?
이기는 그에게는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7절입니다. 같이 볼까요?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이기는 그에게는”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긴다는 것은 어떻 것이겠습니까? 앞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의 첫 사람을 회복하는 것이겠지요. 지면 안되겠지요. 우리는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이기는 자만에 궁극적으로 그것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이 원천이 되는 삶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악한 무리들로부터 교회를 지키십시오. 우리의 이런 삶은 생명의 열매를 얻게 될 줄을 믿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교회 생활하기 위하여 교회 다니는 것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는 명칭을 듣기 위해서 다는 것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을 다 가져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가져야 하는 것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얻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