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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문학과 철학

한강의 말과 문체 (2026년 4월-6월) - 빛과 실 - X. 소중한 빛 모으기 ― 거울을 이용하는 지혜

작성자이동용|작성시간26.06.09|조회수56 목록 댓글 0

X. 소중한 빛 모으기 ― 거울을 이용하는 지혜

단단丹旦 이동용 (철학아카데미)

 

1. 깨달음의 순간과 깨달음의 내용

 

《빛과 실》은 인식의 순간들을 담았다. 《빛과 실》에는 깨달음의 순간들이 담겼다. 한강은 현재까지 15권의 책을 내놓았다. 《여수의 사랑》(1995), 《그대의 차가운 손》(2002), 《채식주의자》(2007), 《눈물상자》(2008), 《바람이 분다, 가라》(2010), 《희랍어시간》(2011), 《노랑무늬영원》(2012),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2013), 《소년이 온다》(2014), 《흰》(2016), 《검은 사슴》(2017), 《내 여자의 열매》(2018), 《작별하지 않는다》(2021), 《디 에센셜》(2022), 《빛과 실》(2025). 30년의 세월이 담겼다.

 

한강의 책들 속에 한강의 시간이 담겼다. 그녀가 발걸음을 멈추고서 바라본 것들, 그러면서 생각했던 것들, 생각하면서 기다린 시간들, 시간 속에 인식된 것들, 그 모든 것들을 깨달음이라는 개념 하나로 묶으며 살아왔다. 깨달음이 있었다. 빛을 받은 현상이 있었다. 시작 지점에도, 멈춘 지점에도 언제나 어김없이 바라본 것이 있었고 그에 따른 인식이 있었다.

 

여덟 살 때의 어느 날을 기억합니다. / 주산 학원의 오후 수업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맹렬한 기세여서, 이십여 명의 아이들이 현관 처마 아래 모여 서서 비가 그치길 기다렸습니다. 도로 맞은편에도 비슷한 건물이 있었는데, 마치 거울을 보는 듯 그 처마 아래에서도 수십 명의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쏟아지는 빗발을 보며, 팔과 종아리를 적시는 습기를 느끼며 기다리던 찰나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나의 어깨를 맞대고 선 사람들과 건너편의 저 모든 사람들이 ‘나’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저 비를 보듯 저 사람들 하나하나가 비를 보고 있다. 내가 얼굴에 느끼는 습기를 저들도 감각하고 있다. (빛, 33쪽)

 

1979년, 여덟 살, 이 년도와 나이에 대한 언급은 《빛과 실》 속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빛과 실’의 의미 속에 엮여든다. ‘기억합니다’에 엮인 동사들은 기억함과 깨달음의 관계를 보여준다. ‘시작했습니다’, ‘기다렸습니다’, ‘보였습니다’, ‘깨달았습니다’로 이어지는 동사의 고리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기억함에서 깨달음으로 이어지고 나아가는 생각의 내용들이다.

 

삶이란 무엇인가? 사이가 있어야 관계가 형성되고, 관계가 있어야 삶이 형성된다. 삶은 형식이고, 삶의 이야기는 내용이다. 사람은 형식이고, 사람의 여정은 내용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길이 보이고 풍경이 보이고 경치가 보인다. 눈에 보이는 것이 현상으로 불리며 내용을 담아낸다. 무엇을 보았는가? 무엇이 보이는가? 질문은 간단하지만 대답은 무궁무진해진다.

 

‘시작했습니다’에서 말하는 시작은 시간의 의미로 주어진 지점이다. ‘자, 지금부터다’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있다. 과거를 만드는 시점이기도 하고, 미래를 여는 순간이기도 하다. 과거와 미래의 한가운데에서 현재의 의미가 주어진다.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달라진 현상이 인식된다. 비가 오기 전의 상황과 비가 오고 있는 상황이 구별된다.

 

사람들이 비를 피해 특정 장소로 모였다. “현관 처마 아래 모여 서서 비가 그치길 기다렸습니다.” 어린 한강의 눈에는 사람들이 도로를 가운데 두고서 서로 거울 속의 형상을 보듯이 마주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처마 밑에 갇힌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 말은 나올 수 있는 존재를 전제하기도 하고, 나오는 것이 목적인 행위를 전제하기도 한다.

 

“기다리던 찰나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깨달음은 늘 순식간에 이뤄진다. 인식은 항상 번개처럼, 하늘의 뜻과 대지의 뜻을 이어놓는 것처럼 발생한다. 관계 형성은 이성의 힘에 의해서 실현된다. 무엇과 무엇이 연결되고 있는가? 우리의 가슴과 가슴이 연결되고 있는가? 여덟 살의 어린 한강이 지어놓은 시의 언어도 연결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줄 알았음을 밝혀준다.

 

깨달음의 내용은 ‘나’의 탄생으로 채워진다. “모든 사람들이 ‘나’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의 가슴’에서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로 의미의 공간을 확장했던 것처럼, 인식은 더 넓고 깊은 의미로 나아간다. 여덟 살의 어린 한강은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다는 사실을, 그 모두가 ‘나’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사실이 사실 그대로 인식의 그물 속에 걸려든다. 사실이 눈에 보인다. 사실이 현상의 의미로 보인다. 사실이 목격된다. 사실이 탄생한다. 나의 존재 형식이 사실의 형식으로 인식된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나’로 살아갈 뿐이라는 것이 사실로 인식된다. 참으로 놀라운 발견의 순간이다. 탄생의 순간이다. 누구에게나 ‘내’가 있다. 모두에게 ‘내’가 있다. 이것은 사실이다.

 

나의 나다움이 문제다. 밖으로 향했던 것이 안으로 들어와 자기가 된다. 문제의식을 위해서 거울이 동원된다. 거울의 등장은 이성의 의미와 연결된다. 거울을 보며 자신을 발견하는 존재는 인간뿐이다. 동물도 가끔 그런 상황을 보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경우와는 완전히 다르다. 인간에겐 ‘자의식’이 주어진다. ‘자아실현’은 인간의 존재론적 문제가 된다.

 

 

2. 빛이 부족한 북향 방에서 사는 법을 배운 북향의 사람

 

〈출간 후에〉는 건너뛴다. 이미 《디 에센셜》에서 읽었던 부분이기 때문에 충분히 허락해주리라 믿으며 책장을 빠르게 넘겨본다. 기차 여행을 할 때, 창가에서 바라보는 풍경처럼 사물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글쓰기가 나를 밀고 생명 쪽으로 갔을 뿐이다.”(빛, 57쪽) 스쳐지나가는 순간이지만 인상은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처럼 강렬하게 남는다. 뿐인데, 뿐만이 아니다.

 

살고 싶었다. 살고 싶어서 글을 썼다. ‘죽을래 살래’, 이런 말로 선택을 강요받으면 한강은 운명적인 선택을 했을 것이다. 글쓰기를 어김없이 손에 잡았을 것이다. 빠르게 책장을 넘기다가 새로운 글들이 발견된다. 〈작은 찻잔〉 속의 시들, 그것들 중의 〈북향 방〉이 시선을 끈다. 빛이 부족한 방이 현실인식을 가져다준다. 어두운 방의 상황이 밝은 인식을 제공한다.

 

북향 방 // 봄부터 북향 방에서 살았다 // 처음엔 외출할 때마다 놀랐다 / 이렇게 밝은 날이었구나 // 겨울까지 익혀왔다 / 이 방에서 지내는 법을 // 북향 창 블라인드를 오히려 내리고 / 책상 위 스탠드만 켠다 // 차츰 동공이 열리면 눈이 부시다 / 약간의 광선에도 // 눈이 내렸는지 알지 못한다 / 햇빛이 돌아왔는지 끝내 / 잿뱇인 채 저물었는지 // 어둠에 단어들이 녹지 않게 / 조금씩 사전을 읽는다 // 투명한 잉크로 일기를 쓰면 책상에 스며들지 않는다 / 날씨는 기록하지 않는다 // 밝은 방에서 사는 일은 어땠던가 / 기억나지 않고 / 돌아갈 마음도 없다 // 북향의 사람이 되었으니까 // 빛이 변하지 않는 (빛, 68쪽부터)

 

시적 언어라서 그런지, 인상이 더욱 강렬하게 남는다. 사족을 제거해놓은 말들이라서 그런지, 숨을 함부로 쉴 수도 없다. 호흡을 따라간다. 시인의 말을 좇아간다. 말로 지어놓은 집안에 발을 들여놓는 마음으로 다가선다. 남의 집을 들어설 때처럼 설램이 앞선다. 어떻게 꾸며 놓고 살까. 그러면서 존재의 집을 구경한다. 남의 집을 구경할 때는 늘 조심스럽다.

 

‘빛이 변하지 않는’이라는 말에서 시는 마감했다. 마침점이 없다. 말을 끝내지 않았지만 돌고 도는 말 속에서 말이 완성된다. 산울림처럼 소리가 전해진다. 그 앞의 말까지 읽으면 ‘빛이 변하지 않는 북향의 사람이 되었으니까’가 된다. 하지만 시의 제목은 ‘북향 방’이었으므로 ‘빛이 변하지 않는 북향 방’으로 읽어도 상관은 없다. 둘 다 맞는 말이니까.

 

한반도는 북반구에 위치해 있어서 남향이 좋다. 남쪽으로 향해 있어야 하루 종일 빛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은 북향 방에서 살아간다. 그냥 상황이 그렇게 주어졌다. 상황을 탓하지 않는다. 남향 방의 현상은 어땠을까, 시인은 궁금하지도 않고,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중요한 질문이 못 된다. ‘밝은 방에서 사는 일’은 ‘기억나지’도 않고 ‘돌아갈 마음’도 없다.

 

시인은 ‘책상에 스며들지 않는 투명한 잉크로 일기를’ 쓰고 싶지 않다. 스며듦이 없는 글쓰기는 욕망의 대상이 못 된다. 그런 부질없는 일기 쓰기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책상에 스며드는 글을 쓰고 싶다. 스며드는 글을 위해 색깔이 있는 잉크로 글을 쓰고 싶다. 어떤 색이든 상관없다. 투명하지만 않으면 된다. 어둠이 배어 있어야 글이 스며들 뿐이다.

 

‘날씨는 기록’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날이 흐렸는지 밝았는지, 구름이 꼈는지 해가 떴는지, 그런 외적 요인은 시인이 쓰고자 하는 일기의 내용이 되지 못한다. 시인이 훈련하는 단어는 ‘어둠에 녹지 않는’ 것이다. 어둠에 지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어둠을 밀어내는 단어로, 어둠을 밝히는 단어로, 추위에 견딜 수 있는 따뜻한 단어로 일기를 쓰고 있다.

 

“겨울까지 익혀왔다 / 이 방에서 지내는 법을.”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한 치열한 시간 보내기가 읽힌다. ‘봄부터 겨울까지’의 시간을 견뎠다. 북향 방의 추위는 예사롭지 않았을 것이다. 빛의 부족이 사람을 얼마나 위축시킬지도 충분히 예상된다. 하지만 시인은 글을 쓰며 자신을 생명 쪽으로 밀고 나갈 뿐이다. 그래서 어둠에 녹지 않는 단어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봄의 찬란한 햇살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그런 것을 동경하지도 않는다. 시인은 그저 시를, 색깔을 품은 잉크로 일기를, 어둠에 녹지 않는 단어로 단단한 글을, 활동을 준비하는 사전 속의 단어들을 읽으며 자신에게 필요한 운명적인 단어들을 만나서 자신을 구하는 눈부신 글을 쓰고 싶을 뿐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삶을 위한 최소한의 충분조건이다.

 

“처음엔 외출할 때마다 놀랐다 / 이렇게 밝은 날이었구나.” 이제는 놀랄 일도 못 된다. “인생은 아름다운 거야”(디, 322쪽), 스승이 가르쳐준 말도 기억난다. 날은 밝았다. 자신만 어두운 방 안에서 살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방 안에서 글을 쓴다. 세상을 밝히는 글을, 이육사가 들판을 밝혀 천고의 뒤에 초인이 올 길을 열어놓듯이, 그렇게 글을 쓰며 빛을 마련해놓는다.

 

 

3. 잠을 잘 때도 눕지 않는 새

 

새와 관련한 이야기는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정점을 이뤘다. 한강은 이 책에서 ‘새들은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공룡’(작별, 110쪽)이라고 평가한 기사의 내용을 소개해놓기도 했다. 긴 시간을 견뎌낸 존재, 자신의 삶을 살아낸 존재, 죽음과 맞서 싸우며 생존을 증명해온 존재, 끝까지 살아온 존재로 한강은 새를 설명해놓았다. 작은 존재에 위대한 의미를 담아놓는다.

 

새의 생존력은 그토록 강하지만 방심할 수 없는 예민한 존재다. “건강해 보여도 방심할 수 없어. / 아무리 아파도 새들은 아무렇지 않은 척 횃대에 앉아 있대. 포식자들에게 표적이 되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견디는 거야. 그러다 횃대에서 떨어지면 이미 늦은 거래.”(작별, 112쪽) 아무리 아파도 새는 눕지 않는다. 잘 때조차 눕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눕지 않는다.

 

새가 눕지 않는 이유는 포삭자들에게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해서다. 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새는 눕지 않는다. 살기 위한 발버둥이다. 새의 본능이다. 강하지만 약하다. 약하지만 강하다. 새에 대한 한강의 독특한 인식이고 특별한 이념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빛과 실》에서 한 편의 시로 형상화된다. 제목은 아직 결정하지 못했나보다. 괄호 속에 담아두었다.

 

(고통에 대한 명상) // 새를 잠들게 하려고 / 새장에 헝겊을 씌운다고 했다 // 검거나 / 짙은 회색의 헝겊을 / (밤 대신 얇은 헝겊을) // 밤 속에 하얀 가슴털이 자란다고 했다 솜처럼 / 부푼다고 했다 // 철망 바닥에 눕는 새는 죽은 새뿐 // 기다린다고 했다 / 횃대에 발을 오그리고 / 어둠 속에서 꼿꼿이 / 발가락을 오그려붙이고 암전 // 꿈 없이 / 암전 // 기억해, 제때 헝겊을 벗기는 걸 // (눈뜨고 싶었는지도 모르니까,) (빛, 70쪽부터)

 

‘고통에 대한 명상’은 주제에 해당한다. 이런 생각과 의도로 시를 지었다는 뜻이다. 이런 말이 시를 위한 제목의 자리를 지키기에는 부족한 것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고심의 시간은 지속되고 있는 듯하다. 끝나지 않는 망설임이라고 할까. 아니, 끝낼 수 없는 기다림이라고 할까. 이런 의미로 명상의 시간을 운운하는 것은 왠지 너무 가벼운 듯도 하다.

 

‘~고 했다’가 네 번 반복한다. 전해들은 내용이란 뜻이다. 원래는 남의 말이었지만 지금은 자신의 말이 되었다. 새를 키우는 사람의 지혜가 담겼다. 새를 재워야 한다. 그러려면 새장에 헝겊을 씌워야 한다. 완전한 암전이 이뤄지지 않으면 잠을 자지 못한다는 얘기다. 게다가 더 놀라운 사실은 잠을 자면서도 새는 횃대에서 내려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새는 서서 잔다.

 

‘철망 바닥에 눕는 새는 죽은 새뿐’이다. 죽어야 눕는다. 인상이 강렬하다. 하나의 행을 연으로 처리했다. 잊지 말라는 신호일까. 명심하라는 명령일까. 죽을 때까지 눕지 말라는 말 같다. 죽을 때까지 눕지 않으리라는 다짐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잠을 자지 않고 살 수는 없다. 그래서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헝겊을 씌워서 의도적으로 밤을 연출해야 한다고.

 

자신의 새장에 헝겊을 씌워서 밤을 만드는 지혜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밤이 되어야 ‘하얀 가슴털이 자라고 솜처럼 부풀기’ 때문이다. 암전은 성장의 기회다. 암전은 꿈도 꾸지 않는 휴식을 제공해준다. 하지만 새는 긴장을 풀지 않는다. 횃대에 발을 오그리고 빛이 도래해주기를 기다린다고 한다. ‘밤 속에’, ‘어둠 속에서’ 잠을 자면서도 치열하게 성장하고 기다린다.

 

하지만 새장에 헝겊을 씌워서 밤을 연출하는 지혜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기억해, 제때 헝겊을 벗기는 걸.” 시인은 이 글을 기울임체로 하여 돋보이게 해놓았다. 일종의 강조용법이다. 그리고 시의 제목에서처럼 마지막 구절도 괄호 속에 배치시켰다. 아직 시의 언어로 탄생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눈뜨고 싶었는지도 모르니까,)” 이 글도 기울임체로 강조해놓았다.

 

시의 마지막을 형성한 괄호 속의 글에는 콤마를 찍어놓았다. 마침점이 아니라는 데서 전해지는 것은 일종의 지속에 대한 집념이다. 아직 죽지 않았다, 아직 살아 있다, 살아 있는 한 시는 계속 지어질 것이다, 뭐 이런 주장까지 담겨 있다. 두 개의 기울임체로 편집된 연들은 시인의 정언명령처럼 읽힌다. 죽을 때까지 기억하라고, 그때까지 눈뜨고 버티며 살라고.

 

다시 제목으로 되돌아가보자. ‘고통에 대한 명상’을 쓰기 위해 새의 삶을 비유로 끌어들였고, 새에게서 배울 점은 횃대에서 발을 오그려 버티는 힘이며, 그토록 연약한 새를 키우는 자의 입장에서 배워야 할 점은 새를 제때 재우고 제때 깨우는 시점을 아는 것, 즉 헝겊의 덮음과 벗김의 시기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다. 이런 식으로 자신은 자기를 챙겨야 한다.

 

고통은 새와 같다. 고통이 지나치면 고통의 주인을 바닥에 쓰러뜨리고 만다. 고통은 어둠 속에서 성장을 거듭하고 회복한다. 고통을 이용하는 법을 배우라. 새를 키우려면 잘 키우라. 자신이 없으면 키우지 말라. 고통은 새와 다를 바가 없다. 지나치게 연약하지만, 그토록 연약한 것이 사람을 쓰러뜨린다. 조심하라, 그리고 기억하라, 제때 잠자고 눈뜨는 것을.

 

 

4. 삶을 만드는 순간순간 하루하루

 

이 세상은 저세상과 다르다. 이 세상은 차안이나 현세라 불리고, 저세상은 피안이나 내세라 불린다. 내세관은 종교관으로서 중세 천 년 동안 충분히 공부했지만 아직도 부족하다. 죽어 본 사람이 없으니 무슨 말을 해도 검증하거나 확인할 길이 없다. 세계의 문호 괴테는 파우스트를 통해 신앙으로 버텼지만 위기는 피해갈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보여주기도 했다.

 

“여태껏 아! 철학 / 법학 그리고 의학 / 하물며 유감스럽게도 신학까지도 / 두루두루, 뜨거운 열정으로 공부했지만 / 지금 여기 내가, 이 가련한 멍청이가 서 있노라 / 게다가 나의 영리함이란 예전과 똑같구나.” 중세는 지성의 시대다. 하나님을 알면 생존이 허락되었고, 모르면 생존의 위기를 초래했다. 하지만 천재는 ‘알아도 안 되는 이 세상’과 직면한다.

 

괴테가 인정했던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대표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이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는 말로 시작해서, “이 세계는 무다”라는 말로 마감했다. 이 세계는 나의 표상으로서만 존재하고, 표상의 범주로 머무는 한, 이 세계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을 무시하면 안 된다. 이 세상이 바로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살아야 한다. 살아 있어야 사람이다. 그래서 죽기 전에 제대로 살아봐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굳이 ‘너 자신을 알라’라는 아폴론 신의 명령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나에 대한 문제의식은 인간의 인간성과 함께 공존한다. 굳이 ‘운명을 사랑하라’라는 니체의 명령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너 자신을 알라’나 ‘운명을 사랑하라’라는 명령에서 깨달아야 할 점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을 제대로 알지도 못할뿐더러 운명을 사랑하기보다는 혐오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안 되니까 믿음으로 구원받기를 원하고, 못하니까 기적을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천재의 시선은 운명 앞에서 무릎을 꿇기보다 새로운 운명을 창조하려는 마음으로 충만해 있다.

 

‘고통에 대한 명상’ 다음에 〈소리(들)〉이라는 제목의 긴 시들이 포진되어 있다. ‘소리들’이란 제목 하에 자리 잡고 있는 시들은 모두 세 편이다. 첫 번째는 〈단성부〉이고, 두 번째는 〈2성부〉이며, 세 번째는 〈합창〉이다. 변증법적이다. 첫째는 하나의 목소리이고, 둘째는 두 개의 목소리이며, 셋째는 모두가 한 목소리로 불러대는 노랫소리가 된다. 첫 번째 시다.

 

나는 깨어난다 / 다시 눈을 뜬다 // 이 세상에서 하루를 더 산다 // 비명 소리 속에서 / 신음 속에서 / 피 흐르는 눈동자들 속에서 // 하루를 더 산다 // 기억하고 있다 / 우리의 체온을 // 미소 짓는 / 서로의 눈을 바라볼 때 / 손을 맞잡을 때 / 포옹하며 등을 쓸어내릴 때 / 햇빛 아래 고요히 마주 앉아 있을 때 /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 그러나 비명 소리 속에서 / 신음 속에서 / 울부짖음 속에서 // 다시 눈을 뜬다 // 이 세상에서 하루를 더 산다 (빛, 72쪽부터)

 

잠을 자고 깨어난다. 몰랐다가 깨닫는다. 알았어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다. 생각하는 존재는 생각으로 살아야 하기도 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명기 8:3) 이런 말이 중세의 이슈였다면, 이제는 이 세상을 주목하게 하는 말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죽어서 갈 내세는 그때 가서 고민하기로 하자. 죽기 전에 현세에서 주어진 시간을 최선을 다해 보내보자. 그런 말로 “나는 깨어난다 / 다시 눈을 뜬다”가 제격이 아닐까. 눈을 감고 눈을 뜬다. 감는 것도 기술이고 뜨는 것도 능력이다. 격물치지란 말도 있다. 사물에도 격이 있어서 그 격에 맞게 바라보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시간이 있다. 시간이 존재한다. 시간은 이 세상의 근본이고 삶의 근간이다. 시간에 대한 이해는 삶에 대한 이해와 떼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이 세상에서 하루를 더 산다.” 하루하루, 그 하루들이 모이고 모여 시간이 되고 삶이 된다. 매순간이 삶의 일부분이다. 순간에 몰두하여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며 산 인물이 괴테의 파우스트이다.

 

살다 보면 힘들 때도 있다. 살다 보면 “비명 소리 속에서 / 신음 속에서 / 피 흐르는 눈동자들 속에서” 깨어날 때도 있다. 깨어났지만 비명 소리 속에서 경악하고 피 흘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피 흐르는 눈동자를 들여다봐야 할 때다. 고통스러워도 외면할 수 없는 그런 때가 있다. 이 때는 어렵고 힘들어도 ‘하루를 더 산다’는 마음으로 주어진 하루를 대해야 한다.

 

하루의 일과를 생각하면 니체의 인간적인 말들이 떠오른다.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은 노예이다.” “하루의 길이. — 사람들이 집어넣을 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면, 하루는 백 개의 주머니도 가지고 있다.” 초인이 감당해야 할 하루의 숙제도 있다. ‘열 번 네 자신을 극복해야’ ‘열 번 네 자신과 화해해야’ ‘열 개의 진리를 찾아내야’ ‘열 번 웃고 즐겨야’ 한다. “모두 마흔 개다!” 숙제를 다 했는가? 대답은 우리의 몫이다.

 

하루를 더 산다는 것은 다시 ‘비명’과 ‘신음’과 ‘울부짖음’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고통과 직면한다는 뜻이다. 그런 순간에 사바세계가 보일 것이고, 그런 세계를 참고 견딜 때 고행이 실현될 것이며, 그런 고행을 통해서 정토淨土와 진여眞如의 세계가 열릴 것이다. 눈을 떠야 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내서 사물을 바라봐야 한다.

 

 

5. 나와 너가 만나는 삶의 의미

 

〈소리(들)〉의 두 번째 시는 〈2성부〉다. 두 개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두 가지의 소리가 시간과 공간을 채운다. 나와 너의 목소리가 한 데 어울린다. 내가 너를 만나고 너가 나를 만난다. 그런데 나의 나도 낯설고 너의 너도 새롭다. 살아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존재와 마주한다. 거울을 볼 줄 아는 존재, 자의식을 가진 존재의 신비로운 수수께끼가 따로 없다.

 

두 번째 시 〈2성부〉는 다시 세 단계의 구조로 형성된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별표*를 앞세워 구분해놓았다. 다름은 인식해야 한다. 세 개의 단계에서 모두 나와 너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나와 너의 대화가 시의 내용이다. 나의 존재와 너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담긴다. 모두가 각자의 ‘나’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잔잔히 흐르는 물처럼 보여준다.

 

희망이 있느냐고 / 너는 나에게 물었지 // 어쩌면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 // 그런 것도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 나에게도 희망은 있어 / * / 내가 나일 뿐이라면 / 나는 너를 만날 수 없지 // 너가 너일 뿐이라면 / 너는 나를 만날 수 없어 // 나는 결코 나로서만 살고 있지 않아, / 내가 느끼고 바라보는 모든 걸 나는 살아내니까 // 너는 결코 너로서만 살고 있지 않아, 너가 생각하고 사랑하는 모든 걸 너는 살아내니까 // 이상하지 않아? /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이 우리를 두껍게 만든다는 것 // 두렵지 않아? / 결코 통과한 적 없는 시공간의 겹들이 우리를 무겁게 만든다는 것 // 우리는 우리 키와 체중에 갇혀 있지 않으니까 // 수십억의 겹으로 / 부풀어 오르니까 // 수십억의 겹이 / 응축돼 단단해지니까 // * / 희망이 있느냐고 / 나는 너에게 묻는다 // 살아 있는 한 어쩔 수 없이 희망을 상상하는 일 // 그런 것을 희망이라고 불러도 된다면 희망은 있어 / 우리는 우리 키와 체중에 갇혀 있지 않으니까 (빛, 74쪽부터)

 

“우리는 우리 키와 체중에 갇혀 있지 않으니까”, 이 문장은 두 번이나 반복된다. 반복하는 행위 속에 강조의 의도가 담긴다. 반복할 때마다 선명한 나이테가 형성된다. 깊은 골이 형성되는 과정이 전제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지경이 연출된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만났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만났다. 만남이 없었더라면 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나로만 살 수 없고, 너도 너로만 살 수 없다. 자의식이 전제하는 것은 너의 존재다.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다. 사람이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키와 체중이 전부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인간은 몸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서 어렵고 힘든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믿음의 논리로 저세상이 주어진다는 말처럼, 그런 논리로 이 세상이 주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이 세상은 믿어도 안 된다. 이 세상을 원망한다고 해서 삶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오로지 이 세상뿐이다. 사람과 삶은 서로를 위한 조건이다. 시공간은 지금과 여기를 품고 있는 이 세상뿐이다. 나와 너는 이곳에서 만남을 실현한다. 내가 너를 만나 삶이 바뀐다. 너의 의미는 무궁무진해진다. 내가 만날 수 있는 대상은 가능성의 공간으로만 펼쳐질 뿐이다.

 

희망이 있다. 희망이 존재한다. 그 존재의 존재성을 알아보는 것은 사람뿐이다. 희망의 주인은 인간이다. 희망의 존재론을 깨닫게 해 주는 최고의 책으로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을 권하고 싶다. ‘나는 너의 희망이야’라는 말을 인식의 소리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책이다. 내가 너에게 희망이다. 너는 나에게 희망이다. 희망이 있어서 좋기만 하다.

 

신화에서는 희망을 원래 재앙으로 소개했다. 놀라운 반전이다. 판도라의 상자 속에 희망이 있었다. 희망은 ‘재앙 중에 재앙’이었다. 희망 때문에 헛된 삶을 속고 산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삶도 삶 나름이다. 푸시킨의 시어가 떠오른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 슬픈 날에는 참고 견디라 / 믿으라, 즐거운 날은 오고야 말리니.”

 

속고 사는 인생을 살지 말자고 공부하는 것이다. 공자의 ‘기쁜 공부’도 니체의 ‘즐거운 공부’도 다 인생 공부이다. 하루를 고행의 시간으로 받아들이고 노력하는 인생 이야기다. 희망을 포기하지 말라. 중요한 메시지다. “어쩌면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 // 그런 것도 희망이라고 부를 수 았다면 / 나에게도 희망은 있어.” 나에게도 희망이 있다.

 

희망이 있다, 희망이 없다, 둘 다 맞다. 희망이 있을 수도 있고, 희망이 없을 수도 있다. 희망이 있으면 문제가 없지만, 희망이 없으면 문제가 된다. 희망이 없으면 삶 자체가 힘들어진다. 희망이 없으면 삶이 처한 시공간의 의미가 보이지 않는다. 희망이 없으면 희망을 찾아야 한다. 눈을 뜨고 희망을 찾기도 해야 하고, 또 눈을 감고 희망을 찾기도 해야 한다.

 

사람마다 입장이 다르고 운명이 다르다. 나와 너, 너와 나, 두 사람만 모이면 진리를 문제삼으며 싸우기도 하지만 사랑이라는 기적이 발생하기도 한다. 사람은 삶을 책임져야 하고, 시간이 주어져 있는 한, 가능성의 공간은 충분히 제공된다. 지금 당장은 희망이 보이지 않을 수 있어도, 보이지 않던 그 희망이 언젠가는 눈에 띌 것임을 반드시 희망해야 한다.

 

“이상하지 않아? /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이 우리를 두껍게 만든다는 것 // 두렵지 않아? / 결코 통과한 적 없는 시공간의 겹들이 우리를 무겁게 만든다는 것.” 인식을 참으로 훌륭하게 담아낸 표현이다.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를 두껍게 만든다. 시공간을 통과하면서 우리는 무거워진다. 너와 내가 만나서 벌어진 현상이다. 만나며 발생한 변화들이다.

 

 

6. 순간이 온다

 

〈소리(들)〉의 세 번째 시는 〈합창〉이다. 실러의 〈합창〉도 떠오른다. 그것을 음악의 형식으로 담아낸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도 우렁차게 들려온다.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 넘어가는 정신의 찬란한 출현이 이런 식으로 구축된다. 견딘 자가 인식을 얻는다. 이제 우리는 한강을 바라본다. 세상이 주목하는 글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들여다봐야 할 글이다.

 

내 모국어의 안녕은 / 첫인사이자 마지막 인사 // 강세와 어조와 맥락으로 구별할 수 있다 // * / 안녕, 만나서 반가워. / 안녕, 잘 가. // 안녕, 다시 만났구나. / 안녕, 다시 만나자. // * / 그러나 구별할 수 없다, 어느 쪽인지 / 강세와 억양이 없다면 / 한 개의 단어도 곁에 없다면 / 맥락도 / 상황도 없다면 // 그저 ‘안녕’이라고 속삭이기만 한다면 / 오직 ‘안녕’이라고 소리치기만 한다면 // * / 최초로 유동하는 없음이 있었다 // 힘도 무게도 아니었던 그것이 / 비물질과 물질 사이의 경계를 넘어 / 10의 -43승 초의 찰나를 통과해 폭발한 / 확률적 순간 // 그 후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 끝없이 서로에게서 멀어지면서 / 영원히 회전하면서 / 불타면서 / 식어가면서 / 빨려들어가면서 // 팽창하는 우주가 임계에 닿으면 / 다시 수축해 한 점이 될 거라고 어떤 이들은 말한다 / 유동하는 없음으로 되돌아갈 거라고 / 다시 임계를 넘어 폭발하는 확률적 순간이 온다고 말한다 // * / 안녕, / 만나고 헤어졌던 우리는 // 안녕, 만난 적도 헤어진 적도 없는 우리는 // * / 시작도 / 끝도 없이 / 날개를 펼쳤다 접으며 날아가는 나비처럼 //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이것이 / 몇 번째로 수축하고 팽창한 우주인지 / 우리는 알지 못하고 / * / 안녕. (속삭이며) / 안녕. (소리치며) // 내 모국어의 안녕은 // 첫인사이자 마지막 인사 (빛, 77쪽부터)

 

힌두교에서는 인식의 소리를 ‘타트 트밤 아지’라고 표현했다. ‘이게 바로 너다’라는 뜻이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이 문장을 ‘개별화의 원리’와 대치시키면서 생철학의 길을 텄다. 개별화의 원리로 구축된 나의 존재와 너의 의미로만 인식된 나의 존재가 대립한다. 그런데 그 대립도 대치도 대결도 모두 사람이기에 문제가 될 뿐이다.

 

나는 나다, 나는 내가 아니다, 둘 다 맞다. 윤동주의 〈자화상〉에서처럼, 우물 속에 있는 한 사나이를 두고 등을 보이며 돌아서는 자도 나고, 우물 속에 남아 떠나가는 그를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며 기다리는 자도 나다. 이상의 《오감도》에서 〈시제15호〉에서처럼, 거울 속에 있지 않고 외출 중인 자도 나고, 거울 없는 방에서 외출 중인 나를 발견하는 자도 나다.

 

니체의 철학적 인물 차라투스트라가 어린아이가 건네준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소스라친 이유는 거기서 자신의 모습이 자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거울에서 악마를 보았다. ‘악마의 험상궂은 얼굴과 비웃음’을 보았다. 나의 얼굴이 악마의 얼굴이었다. 내가 악마였다. 신이 된 자의 얼굴이 원래는 악마였다. 나는 악마다, 나는 예수다, 둘 다 맞다.

 

인식의 소리는 늘 같은 형식 속에 담겨 있다. 그것을 알아보는 것도 능력이고 실력이다. 뭐가 되었든 시간 보내기를 전제한다. 꾸준한 노력이 이뤄져야 능력도 실력도 갖춰진다. 말하는 존재는 말을 해야 하는 시간을 요구한다. 자신의 혀와 입술을 움직여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을 보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어렵고 힘든 일이다. 인생에는 공짜가 없다.

 

‘팽창하는 우주’의 크기는 우리의 만남, 즉 너와 나의 만남에 의해 결정된다. ‘임계에 닿으면’ 멈추거나 나아가야 한다. 한계라면 어쩔 수 없이 멈춰야 하고, 한계가 아니라면 위험을 무릅쓰고 한계를 넘어서서 밖으로 나가야 한다. 한계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머물러야 한다면, 그야말로 시공간이 감옥처럼 느껴질 것이 틀림없다. 그런 감옥의 탄생은 자기 책임이다.

 

‘유동하는 없음’이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유동하는 없음’으로 나아가고 들어간다. 그러면서 ‘다시 임계를 넘어 폭발하는 확률적 순간이 온다’, 그런 순간이 온다! 폭발하는 순간이 기회의 순간이다. 온갖 재앙을 품고 있지만 희망의 순간이기도 하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오면 온갖 병균들이 득실거리는 현실이 기다리고 있지만, 그 현실만이 삶의 기회를 제공해준다.

 

그 순간이 오면 너가 보인다. 만나야 할 사람이 보인다.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너의 존재가 보인다. 그때 건넬 수 있는 말이 ‘안녕’이다. 안녕이라 말하며 만나고, 안녕이라 말하며 이별한다. 떠날 때도 안녕이라는 말로 연을 만들고, 만날 때도 안녕이라는 말로 운명을 맺는다. 안녕이라는 말과 함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가슴과 가슴 사이의 인연이 형성된다.

 

 

7. 아주 작은 것도 알아보게 하는 거울과 그것을 사용하여 빛을 모으는 지혜

 

왔다, 갔다, 둘 다 말이 된다. 둘 다 맞는 말이 된다. 시간과 공간을 깨닫는 게 관건이다. 때가 온다, 인식이 온다, ‘소년이 온다’, ‘순간이 온다’, 미래가 온다, 새벽이 온다, 손님이 온다, 너가 온다, 그 사람이 온다, 다 맞는 말이다. 다 말이 되는 그 현상을 알아볼 수 있는가? 현상을 목격하려면 변화를 알아봐야 한다. 무엇이 변했는가? 무엇이 변하고 있는가?

 

《선악의 저편》을 마감하며 ‘나는 사는 법을 배웠다’고 고백한 니체가 한 말이다. “친구 차라투스트라가 왔다, 손님들 가운데 손님이!”, “빛과 어둠을 위한 결혼식이 다가왔다”고. 빛과 어둠이 사랑을 넘어 제도권의 개념으로 들어와 결혼까지 한다. 그 결혼이 실현되는 공간이 ‘선악의 저편’이다. 니체가 말하는 지상천국이다. 신이 된 철학자가 말하는 천국이다.

 

너의 존재와 의미는 나의 책임이다. 무엇을 두고 너로 인식하고 인정할 것인가? 이 또한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몫이다. ‘이게 바로 너로구나!’ 하며 너를 향해 ‘안녕!’이라고 말할 수 있는 대상은 그 사물을 알아보는 나의 존재에 의해서만 실현된다. 사람은 모두 나의 존재로, 생각하는 존재로만 자신의 존재를 실현시킬 뿐이다. 자의식이 자신을 알게 해 준다.

 

아주 작은 눈송이 // 아주 작은 눈송이, 너는 / 춤추듯 / 느리게 춤추듯이 왔지 / 내 얼굴로 // 다른 모든 눈송이들처럼 수직으로 떨어지지 않고 / 어쩐 일인지 내 얼굴로 향해 날개를 폈지 // 그리곤 어디로 가버렸니? / 널 다시 보지 못했어 (빛, 81쪽)

 

다시 볼 수 없는 너이지만, 나는 너를 잊지 못한다. 너는 아주 작은 눈송이의 모습으로 내 얼굴을 향해 날개를 펼치며 춤추듯이 왔지만, 나는 너가 떠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어디로 갔을까? 질문은 남고, 기다림은 지속된다. 다시 만날 때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수면 위에 도달할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소요될까. 다 인식을 필요로 하는 삶의 문제다.

 

볼 수 없다고 포기할 수도 없다. 사람은 “어쩌면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때문에라도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열심히 살아줘야 한다. 《빛과 실》을 마감하는 자리에 〈북향 정원〉과 〈정원 일기〉가 일상의 내용을 담아낸다. 〈북향 방〉에서 ‘이 방에서 지내는 법’을 배웠다고 고백했던 시인은 공간을 넓혀 ‘북향 정원’으로 그것을 다시 일기 속에 담아낸다.

 

“투명한 잉크로 일기를 쓰면 책상에 스며들지 않는다 / 날씨는 기록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시인의 생각은 두 개의 글 〈북향 정원〉과 〈정원 일기〉 속에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이야기가 펼쳐졌다. 르네상스의 이야기들을 닮았다. 무엇이 스며들게 했고 또 무엇이 기록되었을까. 사실 일상의 내용이라서 가장 공감이 가는 말들이지만 내용만 적기로 한다.

 

‘북향 정원’은 ‘북향 방’과 마찬가지로 빛이 부족하다. 그런 정원을 갖고 있는 집을, “열다섯 평 대지에 딸린 열 평 집을 삼 년 전 봄에 샀다”는 말로 시작을 알린다. 시작이 읽힌다. 팡파르 같다. 소리가 보인다. 이제 그 집에서 살 일만 남았다. 작지만 큰 집이다. ‘아주 작은 눈송이’ 같지만, 작가 한강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이 된다. 할 일이 너무도 많다.

 

빛이 없는 공간에 빛을 제공하는 일이 일상의 일로 소개된다. 하루의 일과가 설명된다. 바쁘다 바빠! 눈코 뜰 새가 없다! 희극적이다. 미소를 짓게도 하고 웃음을 터뜨리게도 한다. 단테가 《신곡》에 담아놓은 코미디 현상 같다. 한참을 웃다가 다시 책장을 넘기려고 책상 앞에 앉았다. 사는 게 이런 것이다. 물욕은 없다. 사는 게 행복하다.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다.

 

꽃들과 나무들을 조그만 정원에 심었다. 그들에게 거울을 사용해서 빛을 제공한다. 다른 방향으로 향하던 햇빛을 거울로 반사시켜 그들에게 선사한다. 다른 곳을 향하던 것을 의도적으로 방향을 바꿔놓는다. 작가의 행위다. 태양은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아서, 작가는 규칙적으로 반복적으로 지속적으로 거울의 위치와 방향을 바꿔놓는 일을 반복한다.

 

내 안에 세상이 있다. 내 안에 세계가 있다.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맞는 말이다. 그 표상에 빛을 제공하는 것은 ‘나의 일’이다. ‘세계는 무다.’ 이 또한 맞는 말이다. 무를 가능성의 공간으로 인식하는 것도 ‘내가 떠맡아야 할 일’이다. 속이 텅 빈 범종처럼 무의 형식 속에서 의미 있는 말을 해야 하는 것은 ‘내가 해야 할 소중한 일’이다.

 

일기를 쓰려면 날씨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일기를 일기답게 해 주는 것은 개별화의 원리로 인식된 현상들이다. 그 속에 색깔이 담긴다. 남다른 색깔이 발견될 때, 그 색깔의 잉크로 글을 쓰면 책상에 스며들 것이다. 그렇게 스며드는 과정 속에서 별이 탄생한다. 먹물을 밀어내는 맹물의 힘이다. 투명한 맹물이지만, 그 물이 검은 먹물을 밀치고 길을 내며 나가간다.

 

투명하다, 투명하지 않다, 둘 다 맞다. 색깔이 있다, 색깔이 없다, 둘 다 맞다. 빛을 빛으로 인식하는 것은 자신의 시선이고 관점이다. 사물의 탄생은 바라보는 자의 몫이다. 단단丹旦 이동용

 

 

맺는말 — 반가운 손님 같은 글들 속에

 

다시 끝에 섰다. 또다시 마지막 말을 해야 할 순간을 맞이한다. 졸업식 때 받아든 꽃다발처럼 어색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될 순간들이다. 한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매순간 그 순간의 얼굴을 바라보려고 애를 쓰며 시간을 보냈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흰》, 《디 에센셜》, 《빛과 실》을 이어서 읽었다. 읽으며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는 데 동참했다. 넣어 둔 생각이 있었고, 그 생각을 알아보는 데 주력했다. 내 얼굴로 찾아든 아주 작은 눈송이를 알아보듯이, 그렇게 섬세하게 사물을 응시했다.

 

온다, 왔다, 갔다, 떠났다, 다시 온다, 오고 가는 시간 속에서 변화를 거듭하는 시간을 맞이하며 사는 것이 삶이다. 사랑이 있었다. 그 사랑을 알아보고 찾고 품어주는 것이 숙제다. 얼굴이 있었다. 내면의 얼굴을 보았는가? 상대의 얼굴을 보았는가? ‘디 에센셜’이라고 말하는 그 본질의 얼굴을 보았는가? 오고 가는 그 순간의 얼굴을 본 적이 있는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을 바라보며 안녕이라는 말로 맞이할 수 있는가? 안녕이라는 말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가? 한강의 말들이 만들어놓은 구원의 소리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천국의 천사들이 들려주는 합창이다. 빛으로 충만한 복음이다. 실을 붙잡고 길을 걸으며 얻는 빛의 현상이다. 서랍 속에 넣어둔 저녁을 다시 꺼내며 공부했던 이야기다.

 

‘흰’이 있었다. 흐리지만 강렬했던 색깔이 있었다. 흰색도 색깔이다. 공과 무로 채운 종이 범종이다. 그런 범종이 들려주는 소리가 죽은 영혼을 달래준다. 위로의 소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들려준 소리다. 비우는 시간이 있었다. 모든 것을 무로 만든 시간이 있었다. 고통의 시간이 있었다. 생명의 시작 지점이 있었다. 끝까지 사랑하며 살아야 할 시간이 있었다.

 

늘 끝에 가면 묵상해야 할 문장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 말들이 신의 신성을 새롭게 깨닫게 해 준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태복음 24:13) 내가 가장 사랑하는 문장이다. 이런 문장을 백 개 정도 품으리라는 마음으로 평생을 살아왔다. 작가 한강도 치열하게 시간을 맞이하고 시간을 끌어들이며 시간을 만들고 시간을 보냈다.

 

투명한 잉크로 일기를 쓰면 책상에 스며들 수 없다. 흰색이라도 사용해야 스며들 수 있다. 그렇게 형성된 이야기가 《디 에센셜》에 담겼다. 본질의 이야기다. 본질은 현상을 전제한다. 현상과 본질은 하나의 쌍을 이룬다. 스며든 이야기다. 마음에 스며들고 생각에 스며든 이야기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본 시선의 목격담이다. 눈을 감고 눈을 뜨며 바라본 세상 소식이다.

 

늘 인식은 ‘어느 순간, 갑자기’ 들이닥친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현상이 이야기로 엮인다. ‘씌어지는 것보다 씌어지지 않는 것’이 더 진한 말이라는 사실이 글 속에 담겼다. ‘인생은 아름다운 거야’라고 반복해서 말해줘도 그 말을 들을 마음이 없으면 그 말이 들리지 않는다. 마치 강의가 끝나는 날, 왜 니체는 신이 죽었다고 말했는가, 라는 질문을 남겨놓듯이.

 

돌고 돌아 다시 원점이다. 끝났지만 시작이다.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다. 다시 빛을 동경한다. 지금 이 순간이 한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가 내가 죽어야 할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나의 영웅들을 모아야 한다. 다시 아르고 호에 승선해야 한다. 다시 모험 여행을 떠나야 한다. 공이 떨어진다. 여기 모여라! 공을 잡아야 한다. 손을 내밀어야 한다.

 

발을 가진 자는 발로 서고 걷고 달리고 춤도 춰야 한다. 눈을 가진 자는 눈을 뜨고 사물을 바라보고 그것을 인식해야 한다. 마음에도 눈이 있다고 했다. 마음의 눈으로 봐야 소중한 것이 보인다고 했다. 형이상학이 문제가 되는 것은 물리적인 것으로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다. 문학과 철학으로 평생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말을 하며 살다가 말을 하며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시공간이 나의 삶이라 불릴 것이기 때문이다. 단단丹旦 이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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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I] 

http://www.editbiznews.co.kr

출판교육문화뉴스>오피니언>교육 전문가 칼럼

두 개의 질문

이동용 (출판교육문화뉴스, 2025년 9월 29일 칼럼)

 

지금까지 써오던 노트가 마지막 공간까지 나에게 내주고 말았습니다. 그 마지막 노트의 첫 페이지로 되돌아가 보았습니다. “2023년 9월 17일. 추석이 다음주. 아직도 무덥다. 아직도 모기가 남아 있다.” 이 말을 새로운 노트의 첫 페이지에 적고 나서 이 년이 지난 지금의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2025년 9월 26일. 추석이 이 주 후.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조용히.”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작가 한강이 일기장을 바꿀 때마다 맨 앞에 적어놓았던 질문입니다. 끝도 없이 빨려 들어가는 심연, 바닥이 없는 무대,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흑암, 질문의 끝을 형성하는 물음표의 갈고리가 나의 아가리를 낚아채도록 조용히 나를 방치했습니다. 질문이 이끄는 대로 가보려 했습니다.

 

발버둥 치면 나만 손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나는 그저 질문에 입을 허락하고 침묵을 지키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인식이 올 때까지 두 개의 질문을 기억했습니다. 볕이 들 때까지 질문을 고수했습니다. 생각하는 존재는 생각으로 자신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을 진작부터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러다가 독서는 한강이 벼락처럼 얻은 깨달음에 이르렀습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빛과 실》 속에 진하게 새겨진 나이테 같았습니다. 이렇게 주어와 목적어를 뒤집어야 한다는 인식에 도달한 것입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다. 순간, 작가는 ‘생명의 빛’을 보았습니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둘 다 맞습니다. 둘이 서로의 원인과 결과로 이어지는 빛의 출현을 도왔습니다.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둘 다 중요한 의미를 담아냅니다. 시간과 공간이 변했고, 무게의 중심이 옮겨졌을 뿐입니다. 질문의 주체가 수면 위로 부상했습니다.

 

과거가 상처를 입었고 위기에 처했습니다. 지나간 시간이 치명적인 병에 걸렸습니다. 어두운 방 안에서 하염없이 울고 있는 어린 아이처럼 그렇게 과거는 방치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과거도 나의 것이라는 사실이, 그것은 지나갔어도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이 인식되었습니다. 자신은 자기에게 손을 뻗어야 합니다. 손을 잡으면 사력을 다해 끌어주어야 합니다. 수면 위로 떠오를 때까지 힘으로 버텨주어야 합니다. 시간 속의 과거를 구해야 합니다.

 

과거의 존재론, 그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책임지고 보살펴야 할 개념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폭력적인 동시에 희생적입니다. 인류는 언제나 전쟁과 평화 사이에서 방황을 거듭합니다. 죽으면 그만이다, 죽으면 끝이다, 라고들 말합니다. 한강은 정반대의 말을 떠올립니다. 한강이 치열하게 고민했던 문제입니다. 중요한 질문입니다. 현재를 구할 수 있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물음표의 날카로운 갈고리에 아가리를 맡기고서 보내는 시간은 쉽지 않습니다.

 

양파의 껍질은 양파 안에서 형성됩니다. 모든 잉태가 내부에서 시작되듯이, 껍질은 안에서 생겨납니다. 바깥이 내면에서, 속에서, 안에서 형성되어 시간 속에 머뭅니다. 질문이 존재의 껍질을 형성합니다. 질문이 품은 의미만큼 자신을 감싼 세상의 크기가 형성됩니다. 세계관, 인생관이 커질수록 그 안의 존재 또한 그 질문에 걸맞은 모습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매번 두 번째 질문에서는 삶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개념이 충돌합니다. 서로가 힘겨루기를 하며 절대로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삶이 죽음을 구할 수 있는가? 죽음이 삶을 구할 수 있는가? 돌고 도는 생철학적 질문입니다. 스스로를 구원하는 자, 구세주가 될 수 있는가? 대답은 기다려야 합니다. 함부로 입을 떼려 하면 아가리가 찢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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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II] 강연자 이동용의 저서, 역서, 공저 목록 (발표 년도 역순)

 

51) [저서28] 2024.09.15: 《꽤 괜찮은 어른이 되고 싶다면 니체를 만나라. 현명하게 나이 들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니체의 가르침》, 초록북스, 304쪽.

50) [저서27] 2024.06.10: 《키르케고르와 철학적 절망. 〈죽음에 이르는 병〉이 전하는 생철학적 처방과 절망의 기술》, 휴먼컬처아리랑, 345쪽.

49) [번역14/엮음] 2024.05.14: 《고통과 권태 사이에서인생을 견뎌낸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문장들》, 이동용 엮음, 세창미디어, 172쪽.

48) [번역13] 2024.04.11: 《불안의 개념》, 쇠렌 키르케고르 지음, 세창출판사, 496쪽.

47) [저서26] 2024.04.03: 《삶이라는 지옥을 건너는 70가지 방법. 어제의 불행이 오늘의 행복이 되는 쇼펜하우어의 지혜》, 추수밭, 352쪽.

46) [번역12/엮음] 2024.02.27: 《우리에겐 절망조차 금지되어 있다키르케고르 아포리즘》, 세창미디어, 228쪽.

45) [저서25] 2024.01.30: 《사형당한 철학자 소크라테스크세노폰의 〈회상록〉이 전하는 철학자에 대한 고발 사건》, 휴먼컬처아리랑, 357쪽.

44) [번역11] 2022.10.25: 《아침놀》,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세창출판사, 616쪽.

43) [저서24] 2022.08.03: 《초인 사상으로 보는 인문학》, 세창출판사, 292쪽.

42-41) [저서22-23] 2022.04.25: 《사랑한다! 괜찮아! 니체의 〈즐거운 학문〉과 행복한 인생 이야기》, 휴먼컬처아리랑, 제1권, 342쪽; 제2권, 347쪽.

40) [저서21] 2022.04.21: 《신을 탄핵한 철학자 니체와 안티크리스트》, 휴먼컬처아리랑, 305쪽.

39) [저서20] 2021.10.15: 《오늘도 걷고 있는 생각의 낙타. 칼럼으로 읽는 이동용의 철학 에세이》, 휴먼컬처아리랑, 260쪽.

38) [공저9] 2021.05: 《자유를 향한 꿈》, 이동용 외 16명 공저, 시화음, 전체 355쪽; 〈나의 도전, 독일 유학〉(172-187쪽).

37) [저서19] 2021.01.27: 《니체와 초인의 언어. 잠언으로 철학하기, 삶을 위한 니체의 문체론》, 휴먼컬처아리랑, 390쪽.

36) [저서18] 2020.12: 《방황하는 초인의 이야기. 불후의 명작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다》, 휴먼컬처아리랑, 241쪽.

35) [공저8] 2020.10: 《철학, 중독을 이야기하다》, 이동용 외 10명 지음, 세창출판사; 〈우상을 보라! 이 사람을 보라! ― 우상 중독과 니체〉(153-179쪽).

34) [저서17] 2020.08: 《야스퍼스의 비극론과 실존을 위한 근거》, 휴먼컬처아리랑, 318쪽.

33) [저서16] 2020.01: 《니체의 잔인한 망치와 〈우상의 황혼〉》, 휴먼컬처아리랑, 337쪽.

32) [저서15] 2019.11: 《니체, 문학과 철학의 두물머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휴먼컬처아리랑, 317쪽.

31) [번역10] 2019.06: 《이 사람을 보라. 어떤 변화를 겪어서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지음, 세창출판사, 원제: 《Ecce homo》. (1쇄 = 2019년 6월 20일, 2쇄 = 2020년 10월 20일, 3쇄 = 2022년 4월 11일)

30) [저서14] 2018.07: 《스스로 신이 되어라.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와 초인의 신화탄생》, 이담북스, 385쪽.

29) [공저7] 2018.06: 《나를 키우는 생각 생각을 키우는 동화》, 본인 외 8명 공동저, 현암주니어; 〈달님과 구름〉(24-29쪽), 〈‘순간’을 찾아 나선 여행〉(75-80쪽).

28) [저서13] 2018.04: 《디오니소스의 귀환. 신을 탄핵한 광기의 철학》, 이담북스, 369쪽.

27) [공저6] 2018.03: 《철학에게 나를 묻다. 일상에서 한 뼘 가깝게 다가가는 철학 여행》, 본인 외 6명 공동저, 도서출판 동녘; 〈극복 — 넘어져도 괜찮아 일어서면 되는 거야〉(95-112쪽), 〈여행 — 여행하라, 너 자신을 만날 것이다〉(113-127쪽).

26) [저서12] 2018.02: 《나는 너의 진리다바그너에 대한 니체의 진심》, 이담북스, 379쪽.

25) [저서11] 2017.09: 《사람이 아름답다. 니체의 〈선악의 저편〉이 들려주는 생의 예찬》, 이담북스, 487쪽.

24-23) [저서9-10] 2017.07: 《사막의 축제.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생의 예찬》, 이파르, 1권 474쪽, 2권 507쪽.

22) [저서8] 2017.04: 《춤추는 도덕. 사랑의 길을 가르쳐주는 니체의 〈도덕의 계보〉》, 이담북스, 398쪽.

21) [저서7] 2016.05: 《내 안에 코끼리. 언제였던가, 언제부턴가 네가 있었다》, 이파르, 232쪽.

20) [저서6] 2016.03: 《망각 교실. 니체의 〈반시대적 고찰〉로 읽는 현대의 한계 논쟁》, 이파르, 595쪽.

19) [공저5] 2016.03: 《삐뚤빼뚤 질문해도 괜찮아. 세상과 마주하기 시작한 10대들을 위한 철학 상담소》, 본인 외 8명 공동저, 도서출판 동녘; 〈의지, 노력하는 인간〉(95-116쪽).

18) [저서5] 2015.10: 《니체와 함께 춤을. 〈비극의 탄생〉으로 읽는 디오니소스 미학과 삶의 예찬》, 이파르, 556쪽.

17) [공저4] 2015.07: 《쓸모없어도 괜찮아. 한뼘 다르게 생각해 보는 청소년 철학 동화》, 본인 외 8명 공동저, 도서출판 동녘; 〈새로운 경험 — 새끼 물고기〉(79-86쪽), 〈모험과 다양성 — 샘물의 여행〉(96-100쪽).

16) [공저3] 2015.07: 《세상을 바꾼 철학자들. 고대부터 현대까지 핵심개념으로 읽는 철학사》, 본인 외 9명 공동저, 도서출판 동녘; 〈플라톤 — 비극을 불태우다〉(41-50쪽),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 지극히 인간적인 삶에 대하여〉(213-223쪽),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 아모르 파티!〉(243-254쪽).

15) [저서4] 2015.04: 《지극히 인간적인 삶에 대하여쇼펜하우어 〈인생론〉으로 되찾는 삶의 의미》, 동녘, 291쪽.

14) [저서3] 2014.11: 《쇼펜하우어, 돌이 별이 되는 철학. 나를 마주하는 당당한 철학,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읽기》, 동녘, 464쪽.

13) [공저2] 2013.12.: 《삐뚤빼뚤 생각해도 괜찮아. 고민하는 10대를 위한 철학상담소》, 희망네트워크 엮음 (본인 외 12명 공동저), 도서출판 동녘; 〈돈이란 무엇인가?〉(177-199쪽).

12) [저서2] 2008.05: 《바그너의 혁명과 사랑. 음악극과 미래예술의 이해》, 도서출판 이파르, 172쪽; 2012.10: 개정증보판, 240쪽.

11) [번역9] 2007.08: 《The Making 더 메이킹. 건강한 이기주의로 성공 꿈꾸기》, 슈테파니 글라슈케 지음, 이콘출판(주), 독어원제: 《Das Frosch-Prinzip. So verwandeln Sie Ihre Ideen in greifbare Erfolge》, 216쪽.

10) [번역8] 2007.02: 《산만한 아이 다정하게 자극주기.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아이들을 위한 상황별 훈련 클리닉》, 우타 라이만 횐 지음, 도서출판 알마, 독어원제: 《ADS — So stärken Sie Ihr Kind. Was Eltern wissen müssen und wie sie helfen können》, 288쪽.

9) [공저1] 2006.10: 《독일문학과 한국문학》, 본인 외 18명 공동저, 도서출판 월인; 〈릴케의 시에 나타난 거울의 의미〉(325-346쪽).

8) [번역7] 2005.10: 《교실혁명. 어른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아이들은 더 잘할 수 있다》, 페에 치쉬 지음, 랜덤하우스중앙, 독어원제: 《Kinder können mehr. Anders lernen in der Grundschule》, 479쪽.

7) [번역6] 2002.11: 《세상에서 가장 큰 알》, 수잔네 벳티거 지음, 두산동아, 독어원제: Wer legt das grösste Ei.

6) [번역5] 2002.11: 《노아는 내 친구》, 요한 판 베르젤 지음, 두산동아, 독어원제: Oh Noah schön, dass du Freund bist.

5) [번역4] 2002.11: 《숲 속의 밤》, 요한 판 베르젤 지음, 두산동아, 독어원제: Eine zauberhafte Nacht.

4) [번역3] 2002.11: 《달의 왕자와 랄루》, 헬가 호르눙 지음, 두산동아, 독어원제: Der kleine Lalu.

3) [번역2] 2002.11: 《천국의 토요일》, 헬메 하이네 지음, 두산동아, 독어원제: Samstag im Paradiese.

2) [번역1] 2002.05: 《꼬마늑대》, 케테 레하이스 지음, 청솔출판사, 독어원제: Der kleinste Wolf.

1) [저서1] 2001.09: 《나르시스, 그리고 나르시시즘릴케 시 분석》, 도서출판 책읽는 사람들, 407쪽

 

단단丹旦 이동용 (010-3261-3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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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III] 이동용, 철학아카데미 담당 강의제목:

1. “연극과 철학”(2009년 1-2월);

2.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철학과 생의 의지의 비밀”(2009년 10-11월);

3. “쇼펜하우어의 사랑은 없다”(2010년 1-2월);

4. “니체의 비극의 탄생과 허무주의”(2010년 6-7월);

5.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과 인간신론”(2011년 1-2월);

6. “니체의 반시대적 고찰 강독 — 잊을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것이다”(2011년 7-8월);

7.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제1권 강독 — 너는 네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2011년 9-11월);

8.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제2권 강독 —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기”(2012년 1-2월);

9. “아침놀 — 인생 길 홀로 천천히 가야 하는 길”(2012년 4-5월);

10. “릴케와 거울 앞에 선 나르시스”(2012년 4-5월);

11. “오페라와 뮤지컬 감상하기”(2012년 4-5월);

12. “니체의 ‘즐거운 학문’ 읽기 — 신은 죽었다. 하지만 인간은 살아 있다”(2012년 7-8월);

13.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읽기”(2012년 10-11월);

14. “니체의 가치철학과 도덕철학”(2013년 1-2월);

15. “릴케에게서 배우는 느린 걸음”(2013년 1-2월);

16. “돌이 별이 되게 하는 염세주의 철학, 쇼펜하우어 읽기”(2014년 4-5월);

17. “위안의 철학 염세주의 철학”(2014년 7-8월);

18. “니체의 ‘비극의 탄생’과 디오니소스 미학”(2014년 10-11월);

19. “니체의 ‘반시대적 고찰’ — 우리는 지금도 중세의 빙하 속에서 살고 있다”(2015년 1-2월);

20.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읽기 — 사랑에는 멈춤이 없다”(2015년 4-5월);

21.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2 — 철학은 삶을 예술로 만든다”(2015년 7-8월);

22. “니체의 ‘아침놀’과 함께 떠오르는 힘의 의지”(2015년 10-11월);

23. “사랑한다! 괜찮아! — 니체의 ‘즐거운 학문’ 읽기”(2016년 1-2월);

24. “춤추는 별 —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읽기”(2016년 4-5월);

25. “니체의 ‘선악의 저편’과 진실한 사랑”(2016년 7-8월);

26. “니체의 ‘도덕의 계보’와 인간에 대한 믿음”(2016년 10-11월);

27. “니체의 진심 — 끝까지 갖고 가는 바그너에 대한 감정”(2017년 1-2월);

28. “디오니소스의 귀환 — 철학을 통한 니체의 변신”(2017년 4-5월);

29. “니체와 힘의 춤 — ‘권력에의 의지’로 읽는 삶의 이야기”(2017년 7-8);

30. “시 읽는 오후 릴케와 데카당”(2017년 7-8월);

31. “니체와 함께 춤을 — 고대 그리스 비극의 비밀”(2017년 10-11월);

32. “릴케와 데카당 — 사랑하지 않으면 죄인”(2017년 10-11월);

33. “잊고자 하면 잊을 수 없다 — 니체가 사는 방법”(2018년 1-3월; 10강 체제로 전환);

34. “릴케와 데카당 — 사랑의 노래, 위대한 노래”(2018년 1-3월);

35. “초인의 언어 — 혼돈 속에 태어난 별 차라투스트라”(2018년 4-5월);

36. “릴케와 데카당 — 《형상시집》 강독”(2018년 4-5월);

37. “쇼펜하우어, 돌이 별이 되는 철학”(2018년 7-8월);

38. “초인의 언어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강독”(2018년 7-8월);

39. “릴케와 데카당 — 《신시집》 강독”(2018년 7-8월);

40.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와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마음”(2018년 10-11월);

41.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와 죽음 연습”(2018년 10-11월);

42. “니체의 《아침놀》과 새로운 시작”(2019년 1-2월);

43. “괴테의 《파우스트》 읽기 — 방황하는 초인의 이야기”(2019년 1-2월);

44. “야스퍼스의 《비극론》과 실존을 위한 근거”(2019년 4-5월);

45. “니체의 《즐거운 학문》과 읽기 — 네 삶을 위한 시인이 되라”(2019년 4-5월);

46. “야스퍼스의 《니체와 기독교》 그리고 실존의 희망”(2019년 7-9월);

47. “니체의 문학과 철학의 두물머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2019년 7-9월);

48. “니체의 잔인한 망치와 《우상의 황혼》”(2019년 10-12월);

49. “플라톤에서 니체까지”(2020년 1-3월);

50. “신을 탄핵한 철학자 니체와 《안티크리스트》”(2020년 1-3월);

51. “멋진 인생과 니체의 문체론”(2020년 5-7월);

52. “인간은 학문에 의해 인간을 넘어선다 — 베이컨의 《학문의 진보》 강독”(2020년 8-9월)

53. “춤추는 니체와 광기의 노래 — 삶의 축제를 위한 니체의 《디오니소스 송가》”(2020년 8-10월)

54. “사랑에 빠져도 지혜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 베이컨의 《학문의 진보》 강독”(2020년 10-11월)

55. “아침놀과 동그라미 철학 ― 니체의 잠언으로 철학하기”(2020년 10-11월)

56. “니체와 초인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2021년 1-2월)

57. “파우스트와 초인”(2021년 4-6월)

58. “초인을 찾아서 — 헤시오도스부터 이육사까지”(2021년 4-6월)

59. “사람이 아름답다 — 니체의 《선악의 저편》과 생의 예찬”(2021년 7-9월)

60. “별이 된 하이데거의 《숲길》 읽기”(2021년 7-9월)

61. “하이데거의 시 짓기와 존재의 집 — 《횔덜린의 송가》 읽기”(2021년 10-12)

62. “니체와 17년의 집필인생”(2021년 10-12)

63. “하이데거와 강물 철학 — 《횔덜린의 송가 〈이스터〉》 읽기”(2022년 1-3월)

64. “독일어로 철학하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원서 강독”(2022년 1-3월부터 현재까지, 오픈런)

65. “릴케의 불안과 사랑”(2022년 1-3월)

66.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2022년 4-6월)

67. “합리주의적 이단자 버트런드 러셀”(2022년 4-6월)

68. “단단(丹旦), 아침의 현상학 — 니체의 《아침놀》 속으로”(2022년 7-9월)

69. “하이데거의 《회상》과 함께 생각하는 훈련”(2022년 7-9월)

70. “키르케고르의 《불안의 개념》 강독”(2022년 10-12월)

71. “초인과 인문학”(2022년 10-12월)

72. “키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 강독”(2023년 1-3월)

73. “니체전집읽기 1. 《비극의 탄생》과 춤추는 철학자”(2023년 1-3월)

74. “키르케고르의 《유혹자의 일기》 강독”(2023 4-6월)

75. “니체전집읽기 2. 《반시대적 고찰》과 부정의 힘”(2023년 4-6월)

78. “쇼펜하우어와 위로 철학”(2023년 7월-9월)

79. “니체전집읽기 3.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의 이야기”(2023년 7월-9월)

80. “소크라테스의 재판과 법적 논쟁”(2023년 10월-12월)

81. “니체전집읽기 4. 《아침놀》과 빛의 현상학”(2023년 10월-12월)

82. “키르케고르와 아포리즘”(2024년 1월-3월)

83. “니체전집읽기 5. 시와 철학, 《즐거운 학문》”(2024년 1월-3월)

84. “키르케고르와 아브라함”(2024년 4-6월)

85. “니체전집읽기 6.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2024년 4-6월)

86. “포이어바흐, 인간이 신이 되는 철학 《기독교의 본질》”(2024년 7-9월)

87. “니체전집읽기 7. 행복을 위한 철학 《선악의 저편》”(2024년 7-9월)

88. “딜타이, 생철학과 해석학의 탄생”(2024년 10-12월)

89. “니체전집읽기 8. 금발의 야수와 《도덕의 계보》”(2024년 10-12월)

90. “수필과 철학, 꽃을 피운 인연들과 유언처럼 남겨진 말들”(2025년 1월-3월)

91. “니체전집읽기 9. 《우상의 황혼》, 이상과 우상 사이에서 형상을 구원하는 망치”(2025년 1월-3월)

92. “한강의 문학과 철학. 《소년이 온다》《채식주의자》《흰》《작별하지 않는다》 읽기”(2025년 4월-6월)

93. “니체전집읽기 10. 《안티크리스트》, 신을 탄핵한 철학자 니체와 안티크리스트”(2025년 4월-6월)

94. “한강의 시간. 인식의 그물 속에 걸려든 인간적인 이야기들. 《희랍어 시간》《바람이 분다, 가라》《그대의 차가운 손》《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읽기”(2025년 7월-9월)

95. “니체전집읽기 11. 《바그너의 경우》, 바그너와 니체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2025년 7월-9월)

96. “한강의 영원 공식. 순간에서 시작된 빛과 실의 이야기. 《노랑무늬영원》《여수의 사랑》《검은 사슴》《빛과 실》 읽기”(2025년 10월-12월)

97. “니체전집읽기 12. 《니체 대 바그너》, 대립과 태극의 이념”(2025년 10월-12월)

98. “한강의 빛과 열매. 참고 견디며 보낸 시간의 이야기. 《내 여자의 열매》《디 에센셜》 읽기”(2026년 1월-3월)

99. “니체전집읽기 13. 《이 사람을 보라》, 신이 된 철학자의 자서전”(2026년 1월-3월)

100. “한강의 말과 문체. 이야기로 엮고 웃음으로 키운 삶의 꽃.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흰》《디 에센셜》《빛과 실》”(2026년 4월-6월)

101. “니체전집읽기 14. 《디오니소스 송가》, 무한에 좌초당한 디오니소스의 송가 ― 유혹자의 언어와 심연을 향해 던진 물음표”(2026년 4월-6월)

 

단단丹旦 이동용 (010-3261-3913; 이메일 sapereaude@hanmail.net; 홈페이지 https://cafe.daum.net/germanist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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