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약불가능성 Incommensurabilité 테아이테토스 구절 147d 플라톤 벩송.hwp
통약불가능성 Incommensurabilité 테아이테토스 구절 147d 플라톤 벩송
평설
벩송은 말했다: “사유는 언어<langage>에 통약불가능한 것으로<incommen-surable> 있다”(『시론』출처는 하기 참조). 이때 등장하는 것이 통약불가능성 개념인데, 이 말 Incommensurabilité는 그리스어‘ἀσύμμετρος’을 어원으로 한다. ἀσύμμετρος는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에도 등장하는데, 여기서 통약불가능성은 수학적인 어의를 바탕으로 한다. “수학에서 두 가지 변항을 측정 할 수 있는 단위가 없는 경우 두 가지 변항은 통약불가능하다. 즉, 이 두 가지 양의 비율이 비례적이지 않은 수라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대각선과 사각형의 측면은 통약불가능한데, 이 길이의 비율은 √2이다.”(fr.wiki) 여기서 보듯이, 아직 까지도, 플라톤의 설명 방식과 거의 다르지 않게, 직각을 이루는 두 변에 그은 대각선이 무리수로서 그 변과 정수비를 갖지 못하는 관계를 통약불가능성의 예로 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벩송이 랑가주와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이 용어를 썼을 때, 첫째로 의도한 것은 랑가주가 사유의 진면모를 드러내는 단위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어지는 그의 서술을 보면, 영혼의 사유는 내재성의 무한을 반영하며 전체로서 움직이지만, 랑가주는 그것들을 조각내서, 마치 영혼 자체가 부분화될 수 있는 것 같은 환상을 만들어내기까지 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영혼의 구별되지 않는 질적 다수성, 쉽게 말해서 덩어리로서의 영혼의 작동을 매우 아름답게 서술하고 있다. “아침에 내가 습관적으로 일어나는 시간〔의 종〕이 울릴 때, 나는 그런 인상을 플라톤의 표현을 따르자면<ξῦν δλη τῇ ψυχῇ (전 영혼으로)>『국가론』, 518c8> 받아들인다. 나는 그 인상을.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인상들의 혼돈된 덩어리로 녹아들도록 놓아둘 수도 있을 것이며. 그때 그것은 아마도 나를 행동하도록 결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런 인상은 대야물에 떨어진 돌처럼 나의 의식 전체를 뒤혼들기 보다는 표면에 서 말하자면 응고된 한 관념, 즉 일어나서 나의 일상사에 종사해 야 한다는 관념을 혼드는 데에 멈춘다.” 이 응고된 관념으로서 작동하는 가장 대표적인 장치가 벩송에게는 랑가주이다. 둘째로 벩송이 의도한 것은 플라톤의 용법과 겹쳐서 이해해 볼 수 있는 측면이 있다. 랑가주는 사유에 완전하게 상응하는 단위가 될 수는 없지만, 직각 삼각형의 변과 대각선의 관계가 그러하듯이, 만남을 이룬다. 이때의 만남은 접합관계이다. 수학에서 이 만남은 말 접합connexion으로 칭하며, 말 접촉contact과 구별한다. 이 뿐만 아니라, 옐름슬레우도 기호가 표현과 내용으로 필연적으로 이중분절된다고 말하였을 때, 함께 말한 것이 이 이중분절의 필연적인 접합connexion이었다. “the sign is an entity generated by the connexion between an expression and a content"(『서설』13절 표현과 내용) 이 기호학적 구도를 영혼과 사유(스피노자), 무한과 유한(칸토어), 필연과 우연(박홍규)의 구도로 두면서 이들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에 대해 고찰하는 매우 흥미로울 작업은 여기서는 미루어두자. 어찌하였든 이렇게 사유와 랑가주가 접합한다고 볼 때, 그것은 본성상 다른 두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진행을 따라가는 심급들일 터인데, 아주 미묘한 관계를 만든다. 두 변을 통해서만, 이것이 대각선이 무리수의 속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역설적이게도, 랑가주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내재성의 무한이 있다는 사고를 정당하게 해볼 수 있다. 말하는 것으로서만 드러나는 말할 수 없음이라는 이 역설을 제대로 사유해볼 수 있어야 한다. 스토아주의의 형언할수있는것(lekton)이 비구현적인(incorporels)이란 정언이 함의하는 바도, 형언할수있는것에서 필연적으로 드러나는, 내가 선호하는 단어로는 암시하는(allusion) 이 통약불가능성이, 결국에는 모든 형언할수있는것들과 접합하면서, 형언할수있는 것들을, 고리타분한 랑그로 쓰였으나, 누구도 완전히 식게 만들 수는 없는 기호학적<Sémiotique> 권능체로 자리잡게 한다는 것이다. 이 통약불가능성 자체가 다양체로서 다양한 경로로 해석될 수 있고, 되어야 마땅하다. 특히 플라톤의『테아이테토스는』이 ‘통약불가능성<ἀσύμμετρος>’을 ‘일차적인 것<πρῶτα>’으로, 나아가 ‘단지 이름붙일 수만 있는 것<ἀκούειν τινῶν ὅτι τὰ μὲν πρῶτα οἱονπερεὶ στοιχεῖα, ἐξ ὧν ἡμεῖς τε συγκείμεθα καὶ τἆλλα, λόγον οὐκ ἔχοι.>(201e)’으로, 그리고 영혼의 말로 해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는데, 이에 대한 고찰도 지금은 미루어두자(게시한 “테아이테스에서 말함의 문제”참조).
그런데 벩송과 함께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사유와 랑가주의 통약불가능성을 마치 언어적 조작에 매달려있는 특유의 환각처럼 취급해서는 안 된다. 글이든 말이든, 언어는 마법이 아니다. 인간의 한 기호일 뿐인 것이다. 우리가 통약불가능성에서 알아야 할 것은 실재적인 잠재성 자체이다. 수 만년 간 인간이란 존재는 말의존재가 되어가면서 언어적이미지를 함의할 수 있는 기억을 갖게 되었다. 이 기억은 잠재적인 이미지를 통해 현현하고, 이 이미지는 자신을 정교화하고 복잡화하고, 단위화하면서 일종의 공간에 자신을 투사한다. 즉 표현한다. 이때가 말이다. 따라서 언어와 영혼 간의 통약불가능성을 깨닫는 자에게 드러나는 말할수없음<ineffabilité>은 이 잠재적 이미지가 언어의 마땅한 내용이라는 예고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언어학적인 것이 사유의 방향으로 진동할 때 자명해진다. 달리 말해, 랑그가 암시하는 랑가주라는 심층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차이가 차이난것보다 먼저 존재한다는 데리다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인간류에게 언어에 대한 잠재적이며 내재적인 이미지가 먼저 존재한 것이며, 그 이미지를 역량으로서 갖는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내재성, 존재의 심층 기억, 기억의 심층 자연…….
통약불가능성, 어의
Incommensurabilité
https://fr.wikipedia.org/wiki/Incommensurabilit%C3%A9
-수학에서 두 가지 변항을 측정 할 수 있는 단위가 없는 경우 두 가지 변항은 통약불가능하다. 즉, 이 두 가지 양의 비율이 비합리적인 수라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대각선과 사각형의 측면은 통약불가능한데, 이 길이의 비율은 √2이다.
-이 용어는 측정하기에 너무 거대한 것에 적용된다. 예를 들어 은하 간 거리는 통약불가능하다거나 인간의 탐욕은 통약불가능한다는 식으로 말한다.
-마찰학<tribologie>에서, 통약불가능성은 두 개의 결정격자 망의 거의 모든 원자 위치가 서로 마찰하며 상응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인식론에서, 통약불가능성이라는 용어는 Kuhn과 그의 논문 『과학 혁명의 구조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이후 동일한 과학에 적용되는 두 개의 연속적인 패러다임의 상태를 설명하는데, 여기서 이것들의 비교는 불가능하다. 그들 구조와 그것들을 도입한 사고의 회로들의 근본적인 차이가 그 이유이다.
-결정학에서, 통약불가능성은, 3 차원으로 다른 차원을 번역하여 결정격자를 얻을 수는 없는 것과 같이, 일부 결정이 보여주는 준규칙성의 속성을 가리킨다 (마찰 학의 정의와 연관된 속성이다) : 사실 통약불가능한 결정은 3보다 크고 6 이하의 공간에서 완벽한 결정이다.
* 다음 논문을 참조하면 통약불가능성에 대한 더 자세한 고대 관점들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유료여서 읽지 못했다.
Le problème de la mesure dans la perspective de l’Être et du non-Être
Zénon et Platon, Eudoxe et Dedekind : une généalogie philosophico-mathématique
Imre Toth
Dans Mathématiques et Philosophie (1991), pages 21 à 99
통약불가능성,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여기 계신 테오도로스 선생님께서는 제곱근(각주91)과 관련해서, 즉 3피트의 제곱근 및 5피트의 제곱근과 관련해서(92) 저희에게 작도를 해 주시면서,(93) 제곱근들이, 길이(94)에서 1피트인 변(95)과는 통약될(96)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셨고,(97), 17피트의 제곱근에 이르기까지 각기 하나씩 택하여 그런 식으로 해주셨답니다. 한데 어찌된 일인지 거기서 막히셨습니다.(98) 그래서 다음과 같은 생각이 우리에게 떠올랐답니다. 제곱근들이 개수에서 무한한 것으로 드러난 만큼, 그것들을 하나로 모으는 시도를 하여 그것을 가지고서 이 모든 제곱근들을 불러야겠다고 말입니다.(99).
|소크라테스: 정말로 자네들 두 사람이 그런 것을 찾아냈단 말인가?
|테아이테토스: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만, 선생님도 검토해 보시죠.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정준영 옮김, 이제이북스, 2014., 82~83쪽, 147d~147e
각주; 241~243.
각주91) 제곱근:
제곱근(dynamis》: ‘dynamis’는 원래 힘(power) 또는 능력(faculty)을 뜻한다. 그러나 지금의 맥락에서는 ‘곱을 해서 일정한 자연수나 자연수 단위의 면적 을 가지는 도형을 형성할 수 있는 잠재적인 힘 내지 그런 힘을 가진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번역에서 일상용어인 ‘힘’으로 옮기지 않고 ‘제곱근’으로 옮기 는 데는 부담스러운 점이 있다. 그러나 일상용어로 옮길 때 오히려 독자들의 혼동이 가중될 것 같아 수학 전문 용어를 번역어로 채택했다 그러나 여기서 의 ‘dynamis’가 곱하면 자연수가 될 수 있는 ‘잠재력’(potentiality)을 뜻한다 는 점은 주목해야 한다 가능성 내지 잠재력의 ‘dynamis’를 부정하는 것이 메가라학파가 주장하는 견해로 전해지고 있는데(아리스토텔레스의《형이상 학(Metaphysica)》K. 3 참고), 이런 점을 고려하면 액자 이야기의 대화자가 메가라학파의 일원들로 설정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플라톤은 잠재력과 그것의 현실태를 구별하지 못하는 메가라학파의 입장이 ‘앎’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난점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있는 것 같기 때문 이다 아닌 게 아니라 앎에 대한 두 번째 정의에 대해 논의할 때 소크라테 스는 ‘새장의 비유’를 제시하기도 하는데. 거기서는 잠재적인 앎 개념과 현실화된 활동적인 앎 개념을 구별하고 있다. 어쨌든 우리에게 전해지는 문헌 들 가운데 ‘dynamis’와 유관성이 있는 용어가 이런 수학적 의미로 사용되는 건 이미《국가〉546a-M7a 등의 맥락에서 여러 번 볼 수 있지만, ‘dymamis’ 를 엄밀하게 수학적으로 규정하는 시도를 하는 것은 이 대목이 최초의 일이 다. 우리는 (테아이테토스〉이후에《티마이오스》32a에서처럼 ‘dynamis’가 ‘제곱근’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를 만날 수 있기도 하다 이 낱말은 나중에 유클리드(Euclid : 그리스어 이름으로는 Eukleides) 의《원론(stoicheia)〉X권, 정의 4와 명제 17에서 사용된다. 그리고 보통 원론의 X권은 테아이테토스 의 저작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각주96) 통약될(symmetroi):
‘symmetron’(단수)의 어원적 의미는 ‘‘metron’(척도)으로 함께 젤 수 있음’을 뜻한다. 수학적으로는 산술 차원뿐만 아니라 기하학 차 원에서도 사용된다. 어원적 의미를 살리면 ‘함께 측정할 수 있는’으로 옮길 수 있지만, 여기서는 독자들의 통상적인 선이해를 전제로 ‘통약’이란 말을 넣어 옮겼다. 여기서 ‘길이’ 단위의 수와 통약될 수 없다는 건 그것이 무리수임 을 뜻한다. 참고로 유클리드의〈원론》X권, 정의 4는 ‘asymmetron’(통약 불가능한 것)한 것을 ‘aloga’(단수는 ‘alogon’), 즉 무리수라고 규정하고 있다.
97) 보여 주셨고(apophainōn) :
부정사는 ‘apophainein’. OCT 구판이나 신판 모 두 T 사본을 따라 apophainōn’을 빼는 쪽올 택한다. 그러나 필사본 (3W는 apophaindn’을 넣는 쪽을 택한다. 옮긴이는 뒤쪽을 좇았다 이런 논란은 아 마도 후대의 아르키메데스의 경우처럼,증명 없는 주장으로서 의 ‘apophasis’(‘apophainein’의 명사형)와 중명으로서의 ‘apodeixis’를 구별하 는 용례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아르키메데스의《에라토스테네스의 방법에 관하여(Ad Eratosthenem methodus)〉III. 84 참고. 그러나 후대의 아르키메데 스의 용어 사용법을 가지고서 플라톤 시기에 이미 같은 방식으로 사용되었 다고 단정할 만한 명확한 근거는 없어 보인다. 이런 점에서 노어(Knorr)에 따 라 이 대목의 apophaindn’을 ‘증명하다’(prove)라는 의미로 보아 필사본 βW를 따른다. Knorr(1975), 75~78쪽 참고. 물론 여기서 증명하는 방식은 작도 법에 의한 것이었을 게 분명하기에 번역상으로는 ‘보여 준다’로 옮겼다.
각주98) 막히셨습니다(enescheto) :
‘enescheto’의 의미 자체가 애매하다. 우리의 번역 과 달리 중립적인 의미로 ‘멈추었다’로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옮긴이는 테오도로스가 뭔가 난관에 봉착해서 ‘막힌’ 것으로 이해하고 옮겼다. 사실 여기서 테오도로스가 왜 47에서 멈춘 것인지와 관련해서는 고 대 이래 지금까지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어쨌든 아마 부터 제곱근마 다 작도법에 의한 개별적인 논증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서는 Knorr(1975) 참고.
각주99)
테아이테토스는 ‘무한한 것’(apeiron)을 정의에 의해 ‘하나(hen)로 모 을 수 있음을 이해하고 있다.
통약불가능성, 벩송
논문: 베르그송과 랑가주
랑가주 비판은 베르그송 철학 작업의 변치 않는 관심사이다. 베르그송은 “의식에 관한 비매개적인 자료들에 대한 시론”의 서문 첫 번째 문장은(“우리는 필연적으로 말들을 통해서 우리를 표현한다”) 랑가주를 잘못된 문제들에 있는 철학적 미망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 : “우리의 랑가주는 심리학적 분석의 미묘함들이 잘못 드러나게 만든다.(원주2)” 작품의 다른 곳에서, 사유와 운동은 이 비판과 매우 중요한 지점에서 일치한다. ―이 작품의 방법론적 특징이 그 근거이다.
작품에서 빠지지 않은 채로, 이러한 관심사는 시론의 3장의 네 번째 문장에서 매우 분명하게 작성된 주제를 통해 요약되고 판단된다 : “사유는 랑가주에 통약불가능하게 있다.(원주(3) Ibid., p. 124.)” 사유와 랑가주 사이의 격차는 공통척도의 부재를 의미한다. 이것은 가리키기를, 랑가주는 한 실재성인데, 이 실재성은, 가장 특이하고도 가장 문제적인 방식으로, 지속과 공간, 질과 양의 이질성을 표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학설의 관점들 아래 통약불가능성에 대한 주제가 규명되기에 앞서, 우리는 이 통약불가능성이 말하는 것의 진가를 알아볼 수 있다. 통약불가능성은 함축한다. 사유는, 가장 일반적인 그 결정작용 속에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ineffable>으로 있다. 그리고 그자체로 합당한 것이다. 사유에 대한 모든 언어학적 드러냄은 그 드러냄이 표현하려는 것과 연관하여, 격차 안에 있다. 사유의 소재는<L'étoffe>, 본래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언어학적이지도 추론적이지도 않다.
Pierre Lauret, Bergson et le langage, 번역자 ㅊㄷㅎ, Cahiers philosophiques, n°103, page 45 (10/2005)
원문: 시론, 베르그송
베르그송,『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에 관한 시론』, 최화 번역. 206~214. 본서 124~126.
이렇게 하여 우리는 위에서 병치의 다수성과 융합fusion과 상호 침투의 다수성 사이에 확립한 구별로 다시 돌아왔다. 이런 감정,저런 관념은 무수한 의식의 사실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다수 성은 어떤 이들이 지속이라 부르지만 사실은 공간인 동질적 장 소에서의 일종의 전개에 의해서만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그때 서로에 대해 밖에 있는 항들을 볼 것이며, 그 항들은 더 이상 의식의 사실들 자체가 아니 라 그것들의 상징 , 또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들을 표현하는 말이다. 우리가 증명했던 것처럼, 공간과 같이 동질적 장소를 생각하는 능력과 일반적 관념에 의해 사 유하는 능력 사이에는 내적인 상호 연관corrélation이 있다. 의식의 상태들을 이해하고 분석하려고 시도하자마자, 그 고도의 개인적인 상태는 서로에 대해 밖에 있으며 각각이 유의 관념을 불러일으키고 말로 표현되는 비개성적인 요소들로 해체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이 공간의 관념과 상징을 창조하는 능력을 무기 로 갖추고 있어서 전체로부터 그런 다수의 요소들을 끌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그 요소들이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체 가운데에 있을 때 . 그것들 은 어떠한 공간도 점하지 않았으며 상징으로 표현되려고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상호 침투했으며, 서로 속에 녹아들 었다. 따라서 연상주의가 정신 속에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현상을 철학이 그것에 대해 부여하는 인위적 재구성으로 끊임없이 대체 하고. 그리하여 사실의 설명과 사실 자체를 혼동하는 것은 잘못 이다. 특히 영혼의 더 깊고 더 포괄적인 상태들을 고려함에 따라 그것을 더욱 분명히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자아는 사실 그 표면으로 외부세계에 접촉한다.61〗 그 표면은 사물의 자국empreinte을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자아는 병렬된 것 으로 지각한 항들을 인접성 contiguïté에 의해 연상할 것이다. 연상주의 이론이 적합한 것은 그런 종류의 연결. 즉 완전히 단순하고 말하자면 비개성적인 감각들의 연결들에 대해서이다. 그러나 그런 표면의 아래를 파고들어감에 따라, 즉 자아가 다시 자기자신이 됨에 따라, 의식의 상태들 또한 병치되기를 멈추고 상호 침 투하며 , 전체가 융합되어, 각각이 다른 모든 것들의 색채로 물든 다. 이처럼 우리들 각자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나름의 방식이 있 으며, 그러한 미움과 그러한 사랑은 인격 personnalité 전체를 반124영한다. 그러나 언어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동일한 말로 그런 상 태를 지시한다. 따라서 그것은 사랑, 증오 그리고 영혼을 혼드는 수천의 감정들의 객관적이고 비개성적인 면만을 고정할 수 있을 뿐이다. 소설가는 다수의 세부들을 병렬함으로써 감정과 관념들 에 그들의 원시적이고 살아 있는 개성 individualité을 되돌려 주려고 애쓰는데, 우리는 그 감정과 관념들을 공공의 영역一언어 가 그처럼 그것들을 내려가게 했던62〉_으로부터 끌어내는 힘에 의해 그의 재능을 판단한다. 그러나 한 운동체의 두 위치 사이에 점들을 무수히 끼워 넣어도 지나간 공간을 결코 메울 수 없는 것 과 마찬가지로,우리가 말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가 관념들을 서로 연계시키며 그 관념들이 상호 침투하지 않고 병치된다는 사 실만으로도,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느끼는 것을 완전히 번역하는 데 실패한다.63 즉, 사유는 언어와 통약 불가능한incommen-surable 것으로 남는다.
영혼이 마치 그것에 작용하는 그만큼의 힘들에 의해서인 것처럼 공감이나 반감, 마음 등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심리학은 따라서 언어에 속은 조야한 심리학이다. 충분한 깊이에 도달하기만 하면, 그런 감정들은 각각 영혼 전체를 대표하는 바 영혼의 모든 내용이 그들 각각에 반영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 하다. 영혼이 그런 감정들 중 무엇이든 어느 하나의 영향으로 결 정된다고 말하는 것은 따라서 영혼이 스스로를 결정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연상주의자는 자아를 의식의 사실들, 즉 감각. 감정. 관념의 집합체로 환원한다. 그러나 그가 그런 다양한 상태 들에서 그들의 이름이 표현하는 것 이상의 그 무엇도 보지 못한 다면, 즉 거기서 비개성적 측면만을 붙잡는다면 그것들을 무한히 병치시킬 수는 있을지언정 자아의 유령. 즉 공간에 투사된 자아 의 그림자 이외의 다른 것은 얻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그런 심리 적 상태들을 그것들이 특정한 개인에게서 취하는 특별한 색채 그 리고 그것들 각각에게 다른 모든 것들의 반영 reflet으로부터 오는 특별한 색채와 함께 포착한다면, 개인을 재구성하기 위해 여러 의식의 사실들을 연합할 필요가 전혀 없다. 즉 그것을 선택할 수 만 있다면 그 개인 전체가 그것들 중 오직 하나에 들어 있다. 그 리고 그 내적 상태의 외적 표현이 바로 사람들이 자유로운 행위 라 부르는 것일 것이다. 오직 자아만이 그것의 저자auteur이며, 125그것이 자아 전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는 정신론 spiritualisme이 가끔 그것에 부여하는 절대적 성격 caractère absolu을 나타내지 않으며, 정도차를 받아들인다.一왜냐하면 의식의 모든 상태들이 연못의 물에 빗방울이 섞이듯이 그들의 동류에 섞여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아는 동질적 공간 을 지각하는 한에서 어떤 표면을 나타내며 , 그 표면에서 독립적 개체군végétations들이 형성되고 떠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최면 상태에서 받은 암시는 그처럼 의식의 사실들의 덩어리에 통합되 지 않으나, 어떤 고유의 생명성을 부여받아 시간이 울리면 인격 자체를 대신할 것이다. 어떤 우연적 상황에 의해 일어난 격렬한 분노나 유기체의 어두운 심층부로부터 갑자기 의식의 표면으로 솟아오르는 유전적 결함64>은 거의 최면의 암시처럼 작용할 것이 다. 그런 독립적 항들 옆에서는 더욱 복잡한 연쇄들이 발견될 것 이다. 그것의 요소들은 분명 서로 침투하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 결코 완전하게 자아의 치밀한compact 덩어리 속으로 융합되기에 이르지는 못한다.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 교육, 즉 판단보다는 기억에 호소하는 교육으로부터 온 관념이나 감정들의 총체가 그 러하다. 여기서 바로 근본적 자아moi fondmental의 한가운데에 그것을 부단히 continuellement 침범하는 어떤 기생적 자아moi parasite가 형성된다.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이 살며 진정한 자 유를 알지도 못하고 죽는다,그러나 그러한 암시는 자아 전체가 그것을 동화한다면 설득으로〔바뀌게〕될 것이다.67》열정은, 갑작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알세스트의 분개indignation6에서처럼 개인의 전 역사가 거기에 반영되어 있다면. 더 이상 동일한 숙명 적 fatal 성격을 나타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권위적인 교 육이라도 단지 영혼 전체에 스며들 수 있는 관념과 감정들을 전 달한다면, 우리 자유의 아무것도 삭제하지 않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유로운 결정이 나오는 것은 영혼 전체에서이기 때문 이다. 행위는 그것이 연결된 동적인 연쇄가 근본적 자아와 더욱 같아지려는 경향을126 가질수록 그만큼 더 자유로워질 것이다.71》
이렇게 이해하면,자유로운 행위는 드물다. 자기자신을 관찰하고 자기가 하는 것에 대해 따지는 습관을 아주 많이 가진 사람들 에게조차도 그렇다.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공간을 통해 굴절되게 자신을 보고 우리의 의식상태들은 말로 응고되며. 우리의 구체 적 자아, 우리의 살아 있는 자아는. 명료하게 그려지고 서로로부터 분리되며 따라서 고정된 심리적 사실들의 외부 껍질로 덮여 있음이〔앞에서〕밝혀졌다. 우리는 [또〕언어의 편의와 사회 관계 의 용이함을 위해 그 껍질을 뚫지 않는 데에 그리고 그것이 덮고 있는 대상처의 형태를 그 껍질이 정확히 그리고 있다는 것을 인정 하는 데에 우리의 모든 이익이 있다고도 덧붙였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일상적 행동이 무한히 유동적인 우리의 감정 자체보다는 분명 그 감정이 고착되어 있는 불변의 상들로부터 영감을 받 는다고 말할 것이다. 아침에 내가 습관적으로 일어나는 시간〔의 종〕이 울릴 때, 나는 그런 인상을 플라톤의 표현을 따르자면<ξῦν δλη τῇ ψυχῇ (전 영혼으로)>『국가론』, 518c8> 받아들인다. 나는 그 인상을.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인상들의 혼돈된 덩어리로 녹아들도록 놓 아둘 수도 있을 것이며. 그때 그것은 아마도 나를 행동하도록 결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런 인상은 대 야물에 떨어진 돌처럼 나의 의식 전체를 뒤혼들기보다는 표면에 서 말하자면 응고된 한 관념, 즉 일어나서 나의 일상사에 종사해 야 한다는 관념을 혼드는 데에 멈춘다. 그런 인상과 그런 관념은 끝내 서로 이어진다. 따라서 나의 인격이 거기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행위는 인상을 따른다. 즉. 나는 여기서 의식이 있는 자동기계이며. 내가 그러한 것은 거기에 모든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우 리의 일상적 행동들 대부분은 그와 같아 이루어지며. 어떤 감각 들, 어떤 감정들, 어떤 관념들이 기억 속에서 응고된 덕분에 외부로부터의 인상들이 의식적이며 심지어는 지적인 것이라 할지라 도 많은 측면에서 반사적 행동과 닮은 운동을 우리에게 일으킨다 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연상주의 이론이 적용되는 것은 그와 같이 매우 많으나 대부분 무의미한 행동들에 대해서이다. 그것들 은 결합하여 우리의 자유로운 행위의 기저 substrat를 이루며. 유기체의 기능이 우리의 의식적 삶 전체에 대해 하는 것과 동일한 역할을 그런 활동에 대해 수행한다. 게다가 우리는 자주 더 중 대한 상황에서도 자유를 포기하며, 우리의 인격 전체가 말하자면 진동해야 할 때, 타성에 의해서건 무기력에 의해서건. 그와 같은 국지적 과정만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둔다는 것을 결정론에 대해 인정 할 것이다.75> 우리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 한결같이 우리의 어 떤 중요한 행동에 대해 충고했을 때, 그들이 그토록 집요하게 표 현한 감정들이 우리 자아의 표면에 와서 놓이고. 거기서 우리가 방금 말한 관념들과 같은 방식으로 응고된다. 그 감정들은 점점 우리의 개인적 감정들을 덮는 두꺼운 껍질을 형성할 것이며, 우 리는 자유롭게 행동했다고 믿을 것이나, 얼마 후 거기에 대해 반 성해 보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잘못76>을 인정하게 될 것 이다. 그러나 또한 행위가 이루어지려는 순간, 반란이 일어나는 일도 드물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