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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쓰는 인간 - 앙리 베르그송의 글쓰기 이론

작성자괴목|작성시간25.02.03|조회수39 목록 댓글 0

쓰는 인간
Homo Scribens

- 앙리 베르그송의 글쓰기 이론 - 


글 위에서
글에서
글 안에서
그 안으로부터

서론 

 

글의 시간을 재발굴해야 한다. 이 글은 종이 위에 찍힌 잉크로부터 글자들을, 글자들로부터 글을, 글로부터 글의 흐름을, 글의 흐름이자 지속으로부터 기억이라는 한 내재성을 찾아낼 것이다. 이 모든 작업은 베르그송의 개념화작업(conceptualisation)과 더불어서 행해진다. 그래서 이글은 베르그송의 글쓰기 이론을 재현한다.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그의 이론에서는 언제나 공간화와 지속(durée)의 날카로운 구별이 지켜진다. 하지만 우리가 항상 그의 이론을 사유할 때 마주하는 문제가 있다. 이 변별되는 공간과 상호침투하는 시간의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베르그송에게 이 관계는 거의 부정적이지만, 드물게 긍정적이다. 하지만 모든 경우가 필연성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 글은 이 필연성의 가치를 드높이겠다.

 

1. 글 위에서

 

그는 종이 위에 있다. 종이에는 글이 있다. ㄱ, ㅡ, ㄹ. 그가 가장 처음에 만나는 글의 공간이다. 글‘에 대한’ 어떤 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읽기의 원초적 순간. 황량한 백색 평면(le plan branc desert) 위 점점이 잉크 자국들. 이는 전혀 신비롭지 않고, 흔하기 짝이 없는 물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읽기의 초보적 순간에 그는 이 글자의 대지는 신경쓰지 않고 마치 잉크만이 있는 것처럼 여긴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해야만 이 읽기는 창성하기 시작한다 : 추상으로부터 구체로, 질료(hylé)로부터 물체(corps)로. 잉크로부터 글자로, 언어의 방향(le sens)이 일어난다. 

문자의 사건이란 우리가 이 잉크의 공간성을 마주했다는 것이다. 이 공간은 일종의 인접성 그 자체이다; 어떤 자음과 어떤 모음이 얼마만큼의 거리에서 조합되어야 하는가. 이 인접성으로부터 글의 사건은 자신의 공간성을 구현하고, 이 공간적 인접성의 내용으로서 우리는 하나의 법칙을 받아들이는데, 그것이 문자 체계이다. 이 언어 체계는 문자의 인접성(la contiguïté)의 헌법이다. 어떠한 해석에도 앞서서 언제나 동질적인 것이다. 이 헌법에 따라 한편의 글은 어떤 필체로 어떤 공간에 놓여 있어도 해석에 앞서 동일한 정체성을 지닌다. 그것은 이것이 변화와 지속의 정체성이 아니라, 고정과 공간의 정체성을 순수하게 실현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글씨체의 전모는 공간적 비율과 공간적 비례로 기하학적으로 충분히 잘 정의 된다. 여기서 다시 문자의 사건을 더 잘 정의할 수 있다. 문자의 사건이란 이 체계를 따라 인접한 잉크 더미를 통해서 언어가 공간화되는 것이다. 

읽기의 이 원초적 순간은 극복 가능한 어떤 착각을 일으킨다. 문자들은 같은 열을 이루고 다른 문자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오직 실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언어 체계라는 거대한 이념의 공간적 환유처럼 깊이 없이 그저 평면 위에 찍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저 잘 읽히기만 하는 글은 이렇게 우리를 속인다 ; 앞의 단어의 가능성은 뒤의 단어가 이미 결정했다. 어떤 문법이 표현을 이미 조건지우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요소의 연합만이 표현의 정체이다. 이들 전부가 관념에서 창조적 사유를 삭제하고 표면의 현상들(phenomènes)만을 남기는 연합주의(associationnisme)의 변양이다.  

 

 

1. 글에서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듯이 글은 단순히 잉크의 더미는 아니며, 우리는 이 착각에 오래 빠져 있지 않는다. 문자들이 여태 몰랐던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문자들은 자신만의 지속을 지닌다. 이제 글의 사건이 열린다. 진중한 읽기에 돌입하면, 이 단어들은 따로이 있는 개체와 개체, 개체군들과 개체군들, 개체의 생태계와 생태계 처럼 파악된다. 마치 수면 위에 떠다니는 개구리밥처럼(la lentille d'eau), 이 관념들은 당연히 공간성을 동질적으로 드러내며 같은 표면 위에 있을지라도, 수심에 각자 달리 뿌리내리고 있는 이질적인 말들이다. 

이러한 말들은, 우리가 뒤에서 살펴볼 것처럼, 하나의 생성계(système générateur)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natuellement) 암시한다. 이 언어 이론은 일차원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기표와 기의의 이명론(binomial)이 아니라, 다차원의 심층에서 일어나는 끝없이 분열하는 표현과 내용의 다중론(multipolaire)이다. 우리는 사전을 찾아보는 것만으로는 글을 읽을 수 없다. 글이 끝없이 생산하는 표현과 내용을 거듭 사고하면서 깊이를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거대한 내재성에 뿌리내리고 있는 표현이기에 문학의 다의성은 ‘가능한’것이다. 이 내재성은 언어의 공간성을 사소한 것으로 만든다. 한편의 문학 작품은 단지 잘 정리된 언어학의 용례가 아니다. 반대로 언어학은 문학의 사소한 표면이고, 이 문학의 깊이는 우리의 기억이다. 

 

이 언어의 실존이 뿌리 내리고 있는 혼돈의 기저(le substrat cosmologique)를 살펴보기 전에 조야한 글들을 계속 먼저 언급하는 것은 가치가 있다. 사실 언어는 그 견고한 공간적 동질성 때문에 일부러 노력하여 쓰지 않으면 그 즉시 몰개성의 유산이 된다. 마치 자아를 잃어버린 자아의 그림자처럼, 이러한 조야한 글은 실체를 잃어버린 그림자이다. 이러한 그림자는 언어라는 벽 위에 아무런 주권없이 진부하게 너울거린다. 이때부터는 그 글은 개체의 고유한 영혼이 아니라 그 벽의 모양새를 드러낸다. 자아의 표현이 아니라 언어의 법을 노출한다. 이 법은 단순히 문법만이 아니라, 담론의 법칙, 즉 사회 그 자체인 사회적인 규격이다. 이 무게 없고 크지 않은 그림자들이 더 쉽게 생산되고 더 쉽게 유통된다. 그래서 이러한 일상의 텍스트들이 우리 자신의 일상적인 인격(caractère)을 규정한다. 아이들의 말과 수학자들의 말은 그들의 다른 인격만큼이나 다르다. 언어 교육하기는 그래서 그 사람의 인격이 마땅히 놓여야 하는 자리와 벽을, 즉 공간을 그의 집단이 지정하는 일련의 수업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간화된 글쓰기는 앞서 말했듯이 진정한 자아가 아니라 기생하는 자아(le moi parasite)의 소산이다. 기생하는 자아는 이처럼 담론의 질서에 순응하는 글쓰기를 한다. 역으로 이렇게 진부한 관념은 우리의 자아에서 이미 떨어져나가 있을 뿐만 아니라,우리를 우리의 기억으로부터 장차 떨어져나가게 한다. 

 

1. 글 안에서

 

그렇다면 온전한 자아는 어떠한 글을 쓰는가? 예컨대 제대로 방향잡은 초현실주의 문학은 일종의 고발문이다. 이 고발문은 폭로한다. 우리가 공공의 영역에 횡행하는 이미지로 우리 기억의 변동을 따라잡게 하려면, 이미지들의 기괴한 병치를 부당하게 무릅쓸 수밖에 없다. 초현실주의 문학은 더 나아가야할 의무가 있었다. 조합된 진부함의 기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생적이다. 도래하는 문학은 자신의 목표를 위해 이미지를 수집할 뿐만 아니라, 그 이미지들 전체를 폭발시키는 새로운 문체를 창작해야 한다. 

그렇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문체이다. 강력한 문체는 그 위에 우리의 어떤 사물들을 싣더라도 자신만의 속도로 흘러가게 만들어 버린다. 물론 이 말의 사물들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다. 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는 이 말의 사물들을 잘 사용할 수 있도록 교육받았다. 그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사물들은 새로운 방향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자아의 흐름이 있다. 이 자아는 그 자체로 샘솟기 때문에, 이 원천(source)을 직관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 다만 우리가 이 직관까지 닿기가 힘든 것이다. 이 직관은 나를 진정한 나만의 것으로 있을 수 있게 만든다. 즉 나를 자유롭게 만든다. 각자의 영혼은 고유한 목소리가 있고 이 고유함을 표현할 수 있는 권리란 자유로운 것을 생산할 수 있는 권리이다. 

 

그런데 주의할 것이 있다 ; 자유(la liberté)와 자유로움(le libre)은 다르다. 그러나 자유와 자유로움은 연접적 관계이다. 이 자유로운 것은 하나의 깊이를 지니는데, 이것은 자유로운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자유롭지 않은 것까지 포함하는 무한한 생성 그 자체이다. 이것이 자유(la liberté)이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 생명의 탄생이 필연이든 우연이든 상관없이 생명을 태어나게 하거나 태어나지 않게 할 수 있는 지속의 이 자유가 절대적인 제일 근거(la raison)이어야 한다. 이 자유는 원인을 예비하고 있는 원인이다. 우리는 이 순수 생성을 방황하는 원인(planomène aitia)이라고 칭하자. 이 자유로부터 현존이 끊임없이 창발하고, 실존이 계속 진화하고, 존재가 연속한다. 

결국 자유로움조차도 이 자유의 파생이다. 이 자유로움(le libre)으로부터 자유에 도달할 수 있다. 우선(d'abord) 영혼이 담론의 감옥에서 탈옥해야 하고, 이어서(en suite) 이 영혼이 기생적 자아(le moi parasite)를 해체해야 하며, 결국에는(enfin) 온영혼의 자유로운 생성에 참여해야 한다. 그리하여 자유(la liberté)는 자유로움으로(le lbire), 영혼(l'Ame)은 영혼(l'âme)으로 변주될 것인데, 이 변주를 자연스럽게 만들어내는 사람은 전 존재의 생성 그 자체의 흐름을 하나의 경향으로서 직관한다. 그는 현자이다. 사실 그는 자유로운 사람이기 보다 자유 그 자체이다. 이렇게 문학의 평면(plan)이 자유 위에 펼쳐진 자유로운 것의 영역이라는 것은 문학의 자유를 거의 보장한다. 자유성은 도도하게 진행되지만 자유로운 것은 그렇지 않다. 어떠한 오류, 착각, 실수들도 작가는 묘사할 수 있다. 심지어 권장될 수 있다. 문학은 자유로운 것을 그리므로 윤리적이지 않다. 

 

베르그송이 자유롭게 행동하는 자로 알세스트(Alceste)를 예로 들고 있는 것은 굉장히 흥미롭다. 루소를 동경하는 알세스트는 매우 진솔한 사람인데, 그렇지만 특별히 선한 자가 아닐 뿐더러 악한자도 아니다. 몰리에르의 “인간혐오자”(Anthrophobe)는 알세스트의 자유를 신성하게 그리고 있지 않다. 이는 에우리피데스의 희곡 “알세스트”의 전통이기도 하다. 이 희곡에서 알세스트는 심지어 죽은채로 살아있는 여자이다. 알세스트는 생사를 자유롭게 오가는 것이다. 또한 알세스트는 매우 선한 행동을 자유롭게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는 다른 모든 사람을 악하게 강제한다. 이것이 과연 선한 행동일까. 알세스트는 훌륭한 사람일까. 선한 행위의 아이러니가 일어난다. 이런 모든 물음들이 의 희곡의 마지막 장면에서 베일을 쓰고 등장한 알세스트의 침묵으로 집약된다. 그리하여 몰리에르의 알세스트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단 한 사람은 자신만큼이나 순수해야 한다. 여자는 이를 거부하고, 이는 여자를 타락한 사람으로 만든다. 몰리에르의 알세스트는, 자연의 인간을 구현하기 위하여, 함께 오지로 떠나자고 여자를 설득하지만, 여자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아마도 베르그송에게 자유로운 행위란 여자에게 분노하며 홀로 떠나는 알세스트의 결단을 일컫는 것일 터이다. 이 행동은 순수한 인간과 공공의 인간 사이에서, 진정한 자아와 기생적 자아의 사이에서, 진정한 자아를 선택한 행동이다. 

 

 

1. 글 안으로부터

 

베르그송은 말한다 ; 이렇게 자유로운 행위는 기생적 행위와는 달리 영혼 전체를 표현할 수 있다. 문학을 통해 생각해보자면, 하지만, 문학 속 인물의 모든 인생이 한 자유로운 행위에 대한 묘사에서 집약되어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또한, 내 생각에 실재로, 베르그송의 이 진술은, 한 자유로운 행위가 인생의 모든 장면들을 집약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영혼의 글을 작가가 욕망한다는 것, 그것은 그러므로 상징, 은유, 운율 등등의 수사학적 기예를 작가가 고도의 수준에서 요청한다는 것일 수 없다. 그것들은 욕망의 필연적인 외곽을 구성하지만, 이 욕망의 알맹이는 이 모든 생성의 원천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원천은 하나의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모든 과거를 흐르게 했었고, 모든 지금을 샘솟게 하고, 모든 미래를 흘러보낼 흐르는 개념이다. 달리 말해 이 원천은 일종의 태어나는 방향(le sens naissant)이다. 문학의 용어에서라면 이를 우리는 문체라고 칭할 것이다. 문학의 문체를 통해서 영혼의 문체를 묘사해야 한다. 독자와 작가는 이러한 작업을 마주하면서, 사물이 아니라, 운동의 정체성인 방황하는 원인을 느낄 수 있다. 이 직관은 한꺼번에 지성에서부터 치솟아오를 것이다. 생성은 분리할 수 없기에 우리는 오로지 추억들에 대한 고도의 압축을 통해서만 전체를 전체로서 체험할 수 있다. 

 

글쓰기는 결코 신성한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글쓰기는 혼종적인 사실이다(logos nothos). 상투적인 말의 구조를 그저 반복하여 써내려가기도 하고, 떠오른 다른 사람의 글 혹은 스타일에 기대기도 한다. 물론 나만의 문장을 쓸 때도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금 들이켠 커피의 쓴맛이 불현듯 떠오르게 하는 단어가 있을 수도 있고, 며칠 동안 내내 앓다가 떠올린 단어도 있을 수 있다. 예컨대 윌리엄 포크너는 자신이 어떤 특정한 장면에서부터 영감을 얻는다고 말했다. 물론 그 장면이 소설에 반드시 삽입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소설가들이 첫 번째 영감에 대해서 증언한다고 할지라도, 글쓰기의 현실은 일차적이지 않다. 

 

그 첫 번째 장면의 세목을 확보하려,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그 장면을 반복해서 추억한다고 할지라도, 글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글쓰기 자체가 하나의 경험이며, 하나의 언어적 현실이다. 그 때문에 글쓰기에는, 우리의 체험만으로는 보충되지 않는, 언어적 현존이 있다. 쉽게 말해, 오히려 썼던 문장과 어울리는 다음 문장을 쓰고자 하는 언어적 현존의 언어적 행위가 글쓰기의 수고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이러한 언어존재로 인해서, 작가가 아무리 개성적이라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언어 체계 안에서 산다. 인간이 사물의 질서를 벗어날 수 없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하지만 사물 한가운데에서 인간이 자신의 질서를 수립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작가는 동일한 langue 안에서, 다른 langage에 의해, 특이한 parole을 창작한다. 

 

이 구도 안에서 작가의 개성은 희극적으로 패배를 위해 패배하거나, 비극적으로 패배할지라도 패배한다. 정의상 점은 부피가 없는데도 그가 이 점으로 면을 그릴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이 숙업은 가능하면서도 불가능한 일이다. 이 실재적인 환각이 문학의 허구성의 핵심이다 : 운동의 문자로의 통약불가능성. 그리하여 우리는 차원들의 강제적인 환원을 청원한다. 이는 마치 점묘화가가 가장 좋은 자리를 잡아서 자연의 운율을 화폭에 묘사하는 것과 같다. 작가는 자연의 지속을 증언하려(실재 현실), 세계에 입체적으로 접근하고(정치적, 경제적, 등등), 점(點)들의 관념을 남긴다(인물, 배경 등등). 

 

 

1. 안에서부터

 

여기서 자연의 지속은 작가에게는 기억(mémoire)으로 존재한다. 이 기억은 작가가 필요한 만큼 떼어내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글쓰는 작업의 본질이 있다. 글쓰기에 대한 더 나은 정의 : 기억Memoire은 어떤 것으로도 나눌 수 없는 절대적 연속인데, 작가는 이 기억을 추억souvenir이라는 입체로 압축하고, 이 입체를 다면적으로 고찰하면서, 점과 같은 관념들을 생산하고, 이 관념들을 심지어는 잉크라는 물질로서 자신에게서 분리한다. 이 관념들은 작가의 지속(durée)을 독자에게 암시(suggérer)하는데, 이 관념들이 그럴듯하게 여겨진다면, 점들이 운동을 독자에게 설득한 것이다. 달리 말해, 살아있는 개성을 보존하고 있는 이 글쓰기에 독자가 설득당한 것이다. 이 작업이 가능한지 묻는 것보다, 글쓰는 인간이 상존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더 낫다.

 

더 자세하게 읽어보자. 글을 쓰고 있는 현존(présence)은 동시에 글을 떠올리고 있는 현존이다. 이 현존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환경(방의 분위기 종이의 질, 소음 등등)을 겪으면서 동시에 그 자체로 글을 쓰고자 하는 추억-이미지, 즉 의도를 배양한다. 행동하기와 떠올리기가 어떻게 교차하느냐에 따라 또 어디에 가까운가에 따라 글쓰기의 다종다양한 성향들이 마치 글의 사조들처럼 생산된다. 그러나 지금은 이 두 경향으로만 나누어서 말하자.

 

내가 묘사했던 것처럼, 이 생생한 성향들은 모두 현행적이고, 회고적이지 않다. 이것들 모두 생성의 체계에로서 방황하는 원인의 산물들이다. 지속이 사물의 현실을 끝없이 생산하므로 현실의 원인은 지속이며, 이 지속이 이성의 능력(faculté)이 아니라 창발의 권능(pouvoir)이기에, 필연(nécessité)을 만드는 우연(hasard)이라는 점에서, 방황하는 원인(la cause errante)이다. 플라톤의 이 용어를 생의 내재성의 평면으로 끌어올리면, 그것은 기억(mémoire)이라 하겠다. 이 기억은 무차별하게 모든 과거를 끌어안고서, 그 끌어안는 만큼 존재를 앞으로 내어밀 수 있는 생리학적 인과성으로서 우연적인 필연이다. 즉 방황하는 원인이다.

다시 돌아가서, 그러므로 이 행동 성향(tendance à faire)과 추억하려는 성향(tendance à se souvenir)은 모두 기억에서부터 비롯한다. 기억으로부터 행동까지의 긴장과 기억으로부터 추억까지의 긴장이 있다. 마치 꿈꾸듯이 자기 추억 안에서만 사는 몽상가의 풀린 긴장이 있고, 반대로 행동할 수 있는 추억만을 보존하는 행동가의 탱탱한 긴장이 있다. 이 모두 기억이라는 절대 평면 위에서 자신의 존재성을 당긴다. 

글쓰기의 실천은 이 상이한 긴장들을 하나의 평면 위에 언어로 투사하는 것이다. 내적 기억으로터 외적 지각으로의 투영. 나를 나에게서부터 나의 바깥으로 탈영토화하는 운동. 그래서 어떠한 글쓰기일지라도 항상 그리는 전개가 있다. 즉자에게서 타자에게로의 운동, 이 운동은 완료되지 않고 언제나 전개되고 있는 중이다.

 작가는 자신에 대해(sur), 자신을 위해(pour), 자신 아래에서(sous) 쓰면서도 역설적으로 그것이 자신이 아닌 한 사물이 될 수 있도록 욕망한다. 그래서 글쓰기는 언제나 영혼의 기묘한 심리학이다. 사실은 자유로운 작가의 영혼이 연필 한 자루를 통해서 종이 위로 떨어뜨려 놓는 그 순간에, 그러면서도 작가가 글자와 자신의 관계를 놓지 않는 그 순간에, 글자들이 작가와 무관하게 서로서로 이산과 조우를 반복하며 공간을 인쇄하는 그 순간에, 전부 예고되어 있었다. 타자와 즉자, 동일성과 차이, 지속과 공간 사이의 기 의미심장한 연관(rapport)에 대한 형이상학적 논의에 대해서는 지금은 미루어 두자.

 

다만 여기에서는 그 심리학적 방법론만을 언급한다. 우선 우리는 생의 이러한 긴장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관찰하여, 이 긴장들이 어떠한 심리학적 혹은 비매개적 자료에 속하는지 범주화해야 한다. 인물의 행동까지 이어지는 긴장과 인물을 몽상에 빠지게 하는 긴장이 어떤 원인성(causalté) 아래에서 분리되고 연속하는지 알아야 한다. 이어서, 이 심리적 사실들이 어떤 정신적 기조(ton)를 구현하는지 탐색해야 한다. 이제 관념화된 순간들은 영혼의 사건들을 채색할 수 있다. 마침내, 이러한 사태들이 인간의 생의 어떤 역사들을 통해 단 한번, 혹은 거듭 반복하여 발생하는지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 기억으로부터 영혼까지의 선들은 이 전개를 통해 정교한 사유들이 된다. 그리고 이 관념들은 일종의 문학적 심리학 혹은 심리학적 문학을 제안한다. 이 제안이 우리에게 생성의 방향을 설득하겠다.

 

결론 혹은 실천적인 물음 Conclusion ou Questioner Pragmatiste

 

나는 문자의 공간론이 차차로 문학의 시간론으로 해체되는 과정을 추적했다. 이렇게 탐구를 심화될 수록, 글자들이 글의 흐름에 녹았고, 글의 흐름들이 지속되는 동안 우리는 문학의 내재성을 두드렸다. 

이렇게 내재성의 충위까지 우리는 내려갔지만, 여전히 하나의 물음이 풀리 않은 채로 남아있다. 결국에 모든 글쓴이에게 마지막까지 남겨진 물음, 그러므로 처음부터 있었던 첫 번째 물음은 절대 어렵지 않다. 이 물음에 세상의 모든 글쓴이가 달려든다. 아니다. 너무나 어려운 물음이다. 세상의 모든 글쓴이가 전혀 풀지 못했다. 글쓰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어야 하는가? 글은 무엇을 실어야 하는가? 

베르그송과 더불어 답해 보자면, 생성의 방향을 글쓰기는 전달한다. 세계를 만드는 흐름이 있는데 이 흐름에는 방향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 방향을 표현하는 도구와 방법을 발명한다. 그렇다면, 자기장이 철가루를 담듯이 모든 글들을 싣고 있는 이 방향은 어떻게 확언되어야 하는가? 기억을 추억하자. 

일종의 실용주의만이 이 방향의 기호일 수 있다. 글은 글 자체로서가 아니라, 글읽기와 글쓰기로서만 가치를 지닌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지한 글에 하강해서는 어떤 답도 얻을 수 없다. 우선 우리가 그 글을 읽고 있을 때, 이어서 그 글과 더불어 살고 있을 때, 그 글과 함께 상승하며, 하나의 운동 자체를 실천(pratiquer)한다. 정지한 글이 아니라, 이 운동만이 확언한다. 영구혁명!

예컨대 라스코 동굴 벽화를 그리던 인류가 타자를 치기까지 흐른 시간이 있다. 같은 말이 있다 : 끝없이 부풀어 오르면서 표현들을 쏘아올린 기억이 있다. 다시 한번 기억은 방황하는 원인이다. 처음에 표현들의 창발은 무작위로 보이나, 우리가 열심히 읽어보건대, 어떤 것들은 몰살당하고 어떤 것들은 번성하면서 어떠한 진화사를 남기고 있다. 글을 읽는 사람, 그는 그 글로부터 사유한다. 그는 문학의 진화사를 평가한다. 그렇게 작가들은 제각각 생성의 흐름을 직관하면서 영혼의 의지대로 미래에 참여하겠다. 

즉, 작가는 추억을 수축하여, 앞서 말했듯이, 자신을 표현할 것이다. 그래서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이 표현들이 기억으로부터 표현 자신이 쏘아 올려진 방향을 증언할 것인데, 인류는 이 증언을 말소하거나 보존하여서 내재성이라는 실재적 흐름을 재독할 것이다. 단, 흐름도, 흐름에 대한 재독도, 모두 흐름이다, 표현은 사물일지라도. 아아, 이렇게나 넘쳐흐르는 첨예란!

 

 

 

Zauri Barbara
 De la création 

Homo Scribens
-La théorie d'écrire chez Henri Bergson

 

Introduction

Il faut redécouvrir le temps immanent à l'écrire. Cet essaie donc trouvera l’immanence de la mémoire ; à partir du regard sur l'écriture, des lettres à l’écriture, de l’écriture au flux dans l’écriture, et du flux à la durée dedans. Ce processus constitue la table des matières de cet essaie. Tout ce travail est réalisé en lien avec la conceptualisation de Bergson. Ainsi, cet essaie reproduit la théorie de l’écriture de Bergson. En fait, une distinction nette, comme on le sait sur la pensée chez Henri bergson, entre spatialisation et durée, est indéfectible. Alors, il y a un problème auquel nous sommes toujours confrontés lorsque nous réfléchissons à sa théorie. C’est précisément la relation entre cet espace distinct et le temps imprégnant. Pour Bergson, cette relation est presque hostile, mais rarement amicale. En fait, tous les cas sont faits dans la nécessité fluide. Cet essaie mettra en évidence la valeur de cette nécessité naissante.


1. Sur l’Écriture

Il est sur l'écriture. s, c, r, b.... C'est l'espace de l'écriture qu'il rencontre pour la première fois. Le moment balbutiant de lire où rien n’est fait sur le texte, non du texte. Marques d'encre parsemées sur le plan blanc désert. Ce n’est pas du tout mystérieux et c’est une matière banal. Néanmoins, dans ce moment rudimentaire de lecture, il ne se soucie pas de la base de ces lettres et les traite comme s'il n'y avait que de l'encre. Et c’est seulement lorsqu’on la considère comme telle que cette lecture commence à s’épanouir. Maintenant, de l'abstrait au concret, de la hylé à le corps, de l’encre aux lettres, se produirait le sens du langage. 

 

 

Le fait des lettres, c'est que l’on rencontre la spatialité de cette encre. Cet espace est lui-même une sorte de contiguïté ; Quelles consonnes et quelles voyelles doivent être combinées à quelle distance ? De cette contiguïté, ce fait incarne sa spatialité, et comme contenu de cette contiguïté spatiale nous acceptons une loi, qui est le système d'écriture. Ce système linguistique est une constitution de contiguïtédes  lettres. Avant toute interprétation, elle est toujours homogène. Selon cette constitution, un écrit a la même identité avant interprétation, quelle que soit l’écriture avec laquelle il est écrit ou l’endroit où il est placé. C’est parce qu’il réalise purement l’identité de la fixité et de l’espace, et non l’identité du changement et de la durée. Par exemple, la police est suffisamment bien définie géométriquement en termes de proportions spatiales et de ratios spatials. Là encore on peut mieux définir le fait des lettres : la spatialisation du langage à travers des tas d’encre adjacents selon ce système.

Ce moment débutant de lire suscite une illusion surmontable. Les lettres forment la même colonne et semblent exister uniquement en relation avec d'autres lettres. Telle une métonymie spatiale d’un système linguistique, les lettres semblent legèrement estampées sur une surface plane sans aucune profondeur. Un texte seulement facile à lire nous trompe ainsi ; La possibilité du mot précédent a déjà été déterminée par le mot suivant, une certaine grammaire conditionne déjà l'expression‎. Pour eux, seule l’assiciation des éléments constitue l’identité de l’expression‎. Ce sont toutes des variantes de l’associationnisme qui supprime la pensée créatrice des idées et ne laisse que des phénomènes superficiels.



1. À l’Écriture

 

Rene Magritte, 1952, Les valeurs Personnelles

 

 

Cependant, comme chacun le sait, écrire n’est pas qu’un ensemble d’police, et nous ne restons pas longtemps dans cette illusion. Les lettres fluent vers un sens inconnu jusqu'á présent. Ces lettres ont leur propre durée. Maintenant, l'évenement du texte s'ouvre. Lorsque vous commencez à lire sérieusement, ces mots peuvent être compris comme des individus et individus distinctes, des végétations et végétations, ainsi que comme un écosystème. Telles des lentilles d'eau flottant, ces idées révèlent naturellement une spatialité homogène et bien qu'elles soient sur la même surface, ce sont des mots hétérogènes qui s'enracinent différemment dans la profondeur de l'eau.

 Ces mots, comme nous le verrons plus loin, impliquent néanmoins naturellement un système générateur. Cette théorie linguistique n’est pas un binôme de signifiants et de signifiés qui se produisent à la surface d’une dimension, mais un multipolaire d’expressions et de contenus qui se divisent sans fin et qui se produisent dans les profondeurs de multiples dimensions. Nous ne pouvons pas lire le texte juste en cherchant dans le dictionnaire. Nous devons créer de la profondeur en réfléchissant de manière répétée aux expressions et aux contenus que l’écriture produit sans cesse. La polysémie en littérature est « possible » parce qu’elle est une expression‎ ancrée dans cette énorme immanence. Cette immanence rend triviale la spatialité du langage. D’une part, les œuvres littéraires ne sont pas purement des exemples bien organisés de linguistique. Au contraire, la linguistique est la surface triviale de la littérature, et la profondeur de cette littérature est notre Mémoire.

Avant de penser le substrat cosmogonique sur lequel s’enracine l’existence de cette langue, il convient de continuer à se référer aux écrits bruits. En fait, en raison de sa solide homogénéité spatiale, le langage devient à l'instant un lettre d'adieu de l’individuation s’il n’est pas utilisé avec un effort délibéré. Comme l’ombre d’un moi qui a perdu son moi, ces écrits grossiers sont une ombre qui a perdu sa substance. Ces ombres flottent banalement sans aucune souveraineté sur le mur du langage. Dès lors, l’écriture révèle la forme du mur, et non l’âme unique de l’individu. Il expose la loi du langage, et non l’expression‎ de soi. Cette loi n’est pas seulement une grammaire, mais une loi du discours, c’est-à-dire une norme sociale même de la société. Ces ombres légères et petites sont plus facilement produites et distribuées plus facilement. Ces textes du quotidien définissent donc notre personnalité superficielle au quotidien. Le discours des enfants et celui des mathématiciens sont aussi différents que leurs personnalités. L'enseignement des langues est donc une série de cours dans lesquels le groupe d'une personne désigne le lieu et le mur, ou l'espace, où doit être placée sa personnalité.

Cependant, comme mentionné précédemment, cette écriture spatialisée n’est pas le vrai moi, mais le produit d’un moi parasite. Le moi parasite écrit ainsi dans le respect de l’ordre du discours. A l’inverse, ces idées banales non seulement m’ont déjà séparé de moi-même, mais elles me feront aussi me séparer de ma mémoire à l'avenir. Alors, quel genre d’écriture le vrai moi écrit-il ? Par exemple, la littérature surréaliste bien dirigée est une sorte de réquisitoire. Cet acte d’accusation le révèle : pour suivre l'évolution de la mémoire avec les images déchaînés dans la sphère publique, il n'a d'autre choix que de risquer injustement la juxtaposition bizarre des images. La littérature surréaliste se devait d'aller plus loin. L'insolite de la banalité collectée n’en est pas moins parasite. La littérature d'agir doit non seulement collecter des images pour ses propres objectifs, mais aussi créer un nouveau style qui fait exploser toutes ces images.

Oui, le plus important c'est le style d'écriture. Un style d'écriture puissant le fait couler à son propre rythme, peu importe ce que nous y mettons. Bien entendu, les chose des mots n’ont pas été créés par nous. Cela l'entourait depuis sa naissance, contre sa volonté. Il a été éduqué pour bien utiliser ces mots. On ne peut le nier. Cependant, il existe un flux de moi qui fait renaître ces objets dans un nouveau sens. Parce que ce moi jaillit de lui-même, avoir l’intuition de cette source nous libère. Il nous est cependant difficile d’accéder à cette intuition. Cette intuition me permet d’être mon vrai moi. En d’autres termes, cela me rend libre. Chaque âme a une voix propre, et le droit d’exprimer cette singularité est celui de produire le libre. 

Il y a, en fait, une mise en garde ; La liberté et le libre sont différentes, mais, jonctures. la liberté a une profondeur libre ; elle est le devenir infini lui-même, incluant non seulement ce qui est libre, mais même ce qui ne l'est pas. En ce qui concerne la liberté, personne ne peut le nier ; que la vie naisse par nécessité ou par hasard, cette liberté de durée, qui permet à la vie de naître ou de ne pas naître, doit être la première raison absolue. Cette liberté est une cause préparant de cause. Appelons ce devenir pur la cause errante ( la planomène aitia ; πλανωμενη αἰτια : Platon, 󰡔Timée󰡕, 47e-48c. ). A cause de cette liberté, le présence émerge sans fin, l’existence évolue sans arrêt, l’etre continue sans cesse.



1. Dans l'Ecriture

En fin de compte, même le libre est un dérivé de cette liberté. La liberté peut être atteinte à partir de ce libre. D'abord l'âme veut s'évader de la prison du discours, en suite cette âme doit dissoudre le moi parasite, et enfin peut participer au devenir libre de l'Ame. Ainsi, la liberté se transformerait en lbire, et l'Ame en l'âme. Celui qui crée ces variations naturellement, qui évolue de manière créatrice, a l'intuition ; Le flux de la création de l’existence entière lui-même comme tendance. C'est un homme sage. En fait, plutôt que d’être une personne libre, il est la liberté elle-même. Ainsi, le fait que le plan de la littérature soit un champ de libre étendu sur la liberté, cela garantit presque la liberté de la littérature. La liberté progresse grandiosement, mais pas le libre. Toute erreur, hallusinasion ou erreur peut être décrite par l'auteur. Elle peut même être encouragée. La littérature n'est pas éthique car elle représente le libre.

Il est très intéressant que Bergson cite Alceste comme un homme d'agir librement. Alceste, qui admire Rousseau, est une personne très honnête, mais ce n'est ni une personne particulièrement bonne ni méchante. « Le Misanthrope » de Molière ne décrit pas l'acte libre d'Alceste comme sacrée. C'est aussi la tradition à partir de la pièce « Alceste » d'Euripide - en grec ancien Ἄλκηστις / Álkêstis. Dans cette pièce, Alceste est une femme morte et pourtant vivnate. Alceste fait l'acte libre de se déplacer entre la vie et la mort. Alceste libère aussi de très bonnes actions, mais paradoxalement, il prend tout le monde pour un méchant. Est-ce vraiment une bonne action ? Alceste est-il une personne supérieure ? Il s'agit l'ironie de Bien. Toutes ces questions sont résumées dans le silence d'Alceste, qui apparaît voilé dans la scène finale de la pièce. Ainsi, pour l'Alceste de Molière, la seule personne qu'il aime doit être aussi pure que lui. La femme rejette cela, ce qui fait d’elle une personne corrompue. L'Alceste de Molière persuade une femme de partir avec lui dans une région reculée afin d'incarner un humain naturel, mais cela ne fonctionne pas pour la femme. Peut-être que, pour Bergson, l'action libre fait référence à la décision d'Alceste de partir seul tout en étant en colère contre la femme. Cet acte est celui de choix de l’humain naturel entre l’humain pur et public, et du moi spirituel entre le moi vrai et parasite.

Bergson dit : Cette action libre, contrairement à l’action parasitaire, peut exprimer l'âme entière. Si nous y réfléchissons à travers la littérature, cela ne signifie pas que toute la vie d’un personnage littéraire doive être condensée et exprimée dans la description d’une seule action libre. Aussi, en réalité, je pense que cette déclaration de Bergson ne veut pas dire qu'un acte libre est remplie de toutes les scènes de la vie. L’écrivain désire l’écriture de l’âme, cela ne peut pas réveler seulement que l'auteur demande des techniques rhétoriques telles que des symboles, des métaphores, des rimes, etc. à un niveau élevé. Ils constituent l'écale travaillée du désir, mais le noyau de ce désir est d'exprimer la source de toute création. 

Cette source n'est pas un concept fixe, mais un concept fluide qui a coulé dans tout le passé, jaillit dans tout le présent et coulera dans tout le futur. Autrement dit, cette source est une sorte de sens naissant. En termes littéraires, nous appellerions ce style d’écriture. Il faut décrir le style de l’âme par le style de la littérature. En rencontrant ces œuvres, les lecteurs et les écrivains peuvent ressentir la cause errante qui est l’identité du mouvement, pas celle de la chose spatialisée. Cette intuition jaillirait de l’intellect d’un seul coup. Parce que le devenir est indissociable, nous ne pouvons expérimenter le tout dans son ensemble que par le canal de la compression sophistiqué des souvenirs.

Écrire n’est en aucun cas une tâche sacrée. L’écriture est plutôt un fait hybride (logos nothos). Parfois, je répète simplement la structure des clichés, et parfois je m'appuie sur l'écriture d'autres personnes ou sur les styles qui me viennent à l'esprit. Bien sûr, il y a des moments où j’écris mes propres phrases. Ce n'est pas seulement ça. Si j'avais bu une gorgée de café, ce goût amer aurait pu me faire penser à un certain mot. Il y a peut être des mots qui me viennent après plusieurs jours de réflexion. Par exemple, William Faulkner a déclaré qu'il s'inspirait de certaine scène ― cette scène n’est pas nécessairement insérée dans le roman. Même si les romanciers témoignent d’une inspiration première, la réalité d'écrire n’est pas parcellaire.

Même si l’on se souvient de la scène encore et encore, comme sous hypnose, afin de détenir les détails de la première scène, l’écriture n’est pas complète. L'écriture elle-même est une expérience scribens, une réalité linguistique. C’est pourquoi l’écriture a une présence linguistique qui ne peut être  entièrement complétée par l'expérience de la vie. Pour faire simple, Une partie notable de l’effort d’écriture est l’acte linguistique de l'homo scribens pour écrire la phrase suivante correspondant à la phrase déjà écrite. En raison de cette existence du langage, aussi individuel soit-il, un écrivain vit fondamentalement au sein d’un système linguistique. C’est le même phénomène que les humains ne peuvent échapper à l’ordre des choses. Cependant, tout comme les humains établissent leur propre ordre au milieu des choses, l'artiste crée une parole singulaire, par le langage différente, au sein d'une même langue. 

Dans ce schème, l'individualité de l'auteur perd comiquement pour perdre. Ou, elle est tragidiquement vaincu, même s’il est vaincu. Tout comme on croit pouvoir tracer un plan à partir d’un point même si par définition un point n’a pas de volume, cette mission est à la fois possible et impossible. Cette hallucination réaliste est au cœur de la fictionnalité de la littérature : l'incommensurabilité du mouvement dans le texte. Ainsi, c'est comme un pointilliste peignant le rythme de la nature sur toile en trouvant la meilleure position. L'auteur tente de témoigner de la durée de la nature ( réalité ), aborde le monde en trois dimensions (politique, économique, etc.) et laisse derrière lui des idées en pointillés (personnages, contexte, etc.). 
Ici, la durée de la nature existe comme une mémoire pour l'auteur. Cette mémoire n’est pas quelque chose que l’écrivain peut emporter et utiliser selon ses besoins. C’est là que réside l’essence du travail de l'homo scribens. Une meilleure définition de l'écriture : mémoire est une durée absolue qui n'est jamais divisée, et l'auteur compresse cette mémoire en un objet tridimensionnelle appelée souvenir et, en examinant cet objet tridimensionnel sous de nombreux angles, produit des idées en forme de points, sépare même ces idées de lui-même avec une matière appelée encre. Ces idées suggèrent au lecteur la durée de l'écrivain, et si ces idées sont conçues comme plausibles, les points ont persuadé le lecteur du mouvement. Autrement dit, le lecteur est convaincu par cette écriture qui préserve une personnalité vivante. Plutôt que de se demander si cette tâche sur l'incommensurabilité est possible, mieux vaut rappeler que l'homo scribens subsite toujours.

Lisons plus en détail. La présence d'inscrire l'écriture est aussi celle de se souvenir de l’écriture. Cette présence expérimente l'environnement dans lequel j'écris ― l'atmosphère de la pièce, la qualité du papier, le bruit, etc., et cultive en même temps en elle une image-souvenir, une intention d'écrire. Selon la façon dont l'action et la pensée se croisent et selon où les tendances sont proches, diverses tendances dans l'écriture se produisent comme le courant littéraire et artistique. Mais pour l’instant, divisons-le uniquement en ces deux tendances.



2. Dedans

 

 

 

 

 

 

 

Comme je l’ai illustré, ces tendances vives, tendance à faire et à se souvenir, sont toutes actuelles et non rétrospectives. Ce sont tous des produits de « cause errante » dans le système  générateur. Puisque la durée produit sans cesse la réalité des choses, la cause de la réalité est à priori la durée. Et car cette durée n'est pas la faculté intellectuelle mais le pouvoir d'émergence, c'est un hasard créant la nécessité. À cet égard, la durée est cause de l’errance. Si l'on élevait ce terme de Platon au plan de l'immanence de la vie, on l'appellerait mémoire. Cette mémoire est une nécessité accidentelle, « cause errante », en tant que causalité physiologique qui embrasse indistinctement tout le passé et fait avancer l'existence autant qu'elle embrasse.  

En remontant donc, ces tendances à faire et à se souvenir, de la mémoire à l’action et de la mémoire à souvenir, proviennent toutes de la mémoire. Il y a deux tension : la tension détendue du rêveur qui ne vit que dans ses souvenirs, comme dans un rêve, et, à l'inverse, la tension résiliente du militant qui ne conserve que les souvenirs qui lui permettent d'agir. Tout cela tire l'existence d'une personne sur le plan absolu de la mémoire. 
La pratique de l’écriture consiste à projeter ces différentes tensions via la langue sur un seul plan. Projection de la mémoire interne vers la perception externe. Un mouvement qui me déterritorialise de moi-même vers l'extérieur de moi. Ainsi, quel que soit le type d’écriture que vous faites, il y a toujours un progrès à dessiner. Ce mouvement d'en-soi à pour-soi n’est jamais achevé et se déroule toujours dans la litterature. L'homo scribens écrit surement sur lui-même, pour lui-même et sous lui-même, mais désire paradoxalement que l'écriture devienne une chose autre que lui-même. L’écriture est donc toujours une mystique psychologie de l’âme. En fait, tous les processus étaient prédits à ce même moment-là où l'âme d'un écrivain libre laisse tomber l'écriture sur le papier à travers un crayon, où l'auteur ne lâche pas sa relation avec l'écriture, où les lettres, bien qu'ayant fait cela, impriment l'espace en répétant la séparation et la rencontre quel que soit l'écrivain. Reportons pour l'instant la discussion métaphysique du rapport significatif entre les conceptualisations impliqués dans ce phénomène : l'autre et le moi, l'identité et la différence, la durée et l'espace.

Mais ici, mentionnons seulement la méthodologie psychologique. D'abord, nous devons observer comment ces tensions dans la vie opèrent et catégoriser à quelle donnée psychogène ou immédiate ces tensions appartiennent. Donc, Il faut savoir sous quelle causalité ces tensions ― à aller jusqu'à l'actions du personnage, et à faire tomber le personnage dans le rêve ―  se séparent et se succèdent. Ensuite, nous devons examiner quel ton d'âme ces faits psychologiques incarnent. Les moments désormais idéalisés peuvent colorer des événements d'âme. Enfin, nous devons être capables de réfléchir si ces situations se produisent une fois ou de manière répétée à travers certaines histoires de la vie humaine. Les lignes allant de la mémoire à l'âme deviennent la pensée élaborée grâce à ce développement. Et ces idées suggèrent une sorte de psychologie littéraire ou de littérature psychologique. Cette proposition nous persuaderaot le sens de devenir.



1. Conclusion ou Ecrire l'Ecriture

J'ai retracé le processus par lequel la théorie spatiale des lettres a été progressivement démantelée en théorie temporelle de la littérature. Au fur et à mesure que l’enquête s’approfondissait, les lettres se fondaient dans le flux de l’écriture, et on sonderait l’immanence de la littérature, durant le flux de l’écriture. Bien que nous soyons descendus au niveau de l’immanence, une question reste encore en suspens. Oui, la dernière question laissée à tout écrivain, et donc la première question posée depuis le début, ce n’est pas difficile du tout. Tous les écrivains du monde se précipitent sur cette question. Non, c'est une question tellement difficile. Tous les écrivains du monde ont été incapables de résoudre ce problème. Qu'est-ce que l'écriture nous doit donner ? Que doit porter le texte ? 

Pour répondre avec Bergson, l'écriture porte un sens du devenir. C'est parce qu'il y a un flux qui crée le monde, et il y a Un Sens à ce flux. On invente des outils et des méthodes pour exprimer ce sens. Alors, comment peut-on affirmer ce seul sens, qui contient toutes les écritures comme le champ magnétique contient de la poudre de fer ? Souvenons-nous la mémoire pour le fair.
Seule une sorte de pragmatisme peut être un signe de sens. Un texte n’a pas de valeur en tant que texte en soi, mais seulement en tant que faire de lire et d’écrire. Nous ne pouvons donc obtenir aucune réponse en descendant dans le texte immobile. On doit donc agir. D'abord quand on lit le texte, et ensuite quand on vit avec lui, on s'élève pour lui et on pratique un mouvement lui-même. Seul ce mouvement, pas le texte fixe, se confirm‎e. Révolution permanente !( Karl Marx ) Une force descendante est le besoin de s'installer dans le vaste système capitaliste spatialisé, et la force ascendante propre de l'âme est le désir de le surmonter avec sa propre création faisant la difference. 
Il y a le temps, par exemple, depuis les peintures rupestres de Lascaux jusqu'à la machine à écrire. C'est la même chose que de dire qu'il y a une mémoire de l'humanité qui gonfle à l'infini et lance des expressions. Encore une fois, la mémoire est la «  cause errante ». À première vue, L'émergence des expressions semble aléatoire, mais si nous lisons attentivement, certains sont anéantis et d’autres prospèrent, laissant derrière eux une histoire évolutive. L'homo scribens qui lit, il pense à partir de ces écrits en évolution. Il évalue l'histoire évolutive de la littérature. De cette manière, chaque artiste aurait une intuition sur le flux du devenir et participerait au futur selon la volonté de son âme. Donc l’écrivain s’exprimerait, comme évoqué plus haut, en contractant des souvenirs. 
D'où  il y a un faire d'écrire : Homo scribens. Ces expressions témoigneront du sens dans laquelle elles ont été lancées depuis la mémoire, et l'humanité effacerait ou conserverait ce témoignage pour relire le flux réel de l'immanence. Cependant, le flux et la relecture du flux... sont tous des flux, sauf l'expression‎ du flux. Ah, quelle superflue acuité ! ●



●J'ai concentréet analyséle texte ci-dessous : 
EM : Henri Bergson, Essai sur les données immédiates de la conscience (P.U.F.), 1889.
MM : Henri Bergson, Matière et Mémoire, P.U.F., 54e éd. 1896. 


EM, II DE LA MULTIPLICITÉ DES ÉTATS DE CONSCIENCE, LES DEUX ASPECTS DU MOI, P. 97-102.

Nos sensations simples, considérées à l’état naturel, offriraient moins de consistance encore. Telle saveur, tel parfum m’ont plu quand j’étais enfant, et me répugnent aujourd’hui. Pourtant je donne encore le même nom à la sensation éprouvée, et je parle comme si, le parfum et la saveur étant demeurés identiques, mes goûts seuls avaient changé. Je solidifie donc encore cette sensation ; et lorsque sa mobilité acquiert une telle évidence qu’il me devient impossible de la méconnaître, j’extrais cette mobilité pour lui donner un nom à part et la solidifier à son tour sous forme de goût. Mais en réalité il n’y a ni sensations iden­tiques, ni goûts multiples ; car sensations et goûts m’appa­raissent comme des choses dès que je les isole et que je <98>les nomme, et il n’y a guère dans l’âme humaine que des progrès. Ce qu’il faut dire, c’est que toute sensation se modifie en se répétant, et que si elle ne me paraît pas chan­ger du jour au lendemain, c’est parce que je l’aperçois maintenant à travers l’objet qui en est cause, à travers le mot qui la traduit. Cette influence du langage sur la sen­sation est plus profonde qu’on ne le pense généralement. Non seulement le langage nous fait croire à l’invariabi­lité de nos sensations, mais il nous trompera parfois sur le caractère de la sensation éprouvée. Ainsi, quand je mange d’un mets réputé exquis, le nom qu’il porte, gros de l’approbation qu’on lui donne, s’interpose entre ma sensation et ma conscience ; je pourrai croire que la saveur me plaît, alors qu’un léger effort d’attention me prou­verait le contraire. Bref, le mot aux contours bien arrê­tés, le mot brutal, qui emmagasine ce qu’il y a de stable, de commun et par conséquent d’impersonnel dans les impressions de l’humanité, écrase ou tout au moins recouvre les impressions délicates et fugitives de notre conscience individuelle. Pour lutter à armes égales, celles-ci devraient s’exprimer par des mots précis ; mais ces mots, à peine - formés, se retourneraient contre la sensation qui leur donna naissance, et inventés pour témoigner que la sensation est instable, ils lui imposeraient leur propre stabilité.
Nulle part cet écrasement de la conscience immédiate n’est aussi frappant que dans les phénomènes de senti­ment. Un amour violent, une mélancolie profonde envahis­sent notre âme : ce sont mille éléments divers qui se fon­dent, qui se pénètrent, sans contours précis, sans la moindre tendance à s’extérioriser les uns par rapport aux autres ; leur originalité est à ce prix. Déjà ils se déforment quand nous démêlons dans leur masse confuse une multiplicité numérique : que sera-ce quand nous les déploierons, isolés les uns des autres, dans ce milieu homogène qu’on appel­lera maintenant, comme on voudra, temps ou espace ? <99> Tout à l’heure chacun d’eux empruntait une indéfinissable coloration au milieu où il était placé : le voici décoloré, et tout prêt à recevoir un nom. Le sentiment lui-même est un être qui vit, qui se développe, qui change par consé­quent sans cesse ; sinon, on ne comprendrait pas qu’il nous acheminât peu à peu à une résolution : notre réso­lution serait immédiatement prise. Mais il vit parce que la durée où il se développe est une durée dont les moments se pénètrent : en séparant ces moments les uns des autres, en déroulant le temps dans l’espace, nous avons fait perdre à ce sentiment son animation et sa couleur. Nous voici donc en présence de l’ombre de nous-mêmes : nous croyons avoir analysé notre sentiment, nous lui avons substitué en réalité une juxtaposition d’états inertes, traduisibles en mots, et qui constituent chacun l’élément commun, le résidu par conséquent impersonnel, des impressions res­senties dans un cas donné par la société entière. Et c’est pourquoi nous raisonnons sur ces états et leur appliquons notre logique simple : les ayant érigés en genres par cela seul que nous les isolions les uns des autres, nous les avons préparés pour servir à une déduction future. Que si main­tenant quelque romancier hardi, déchirant la toile habile­ment tissée de notre moi conventionnel, nous montre sous cette logique apparente une absurdité fondamentale, sous cette juxtaposition d’états simples une pénétration infinie de mille impressions diverses qui ont déjà cessé d’être au moment où on les nomme, nous le louons de nous avoir mieux connus que nous ne nous connaissions nous-mêmes. Il n’en est rien cependant, et par cela même qu’il déroule notre sentiment dans un temps homogène et en exprime les éléments par des mots, il ne nous en présente qu’une ombre à son tour : seulement, il a disposé cette ombre de manière à nous faire soupçonner la nature extraordi­naire et illogique de l’objet qui la projette ; il nous a invi­tés à la réflexion en mettant dans l’expression‎ extérieure <100>quelque chose de cette contradiction, de cette pénétration mutuelle, qui constitue l’essence même des éléments expri­més. Encouragés par lui, nous avons écarté pour un instant le voile que nous interposions entre notre conscience et nous. Il nous a remis en présence de nous-mêmes.
Nous éprouverions une surprise du même genre si, bri­sant les cadres du langage, nous nous efforcions de saisir nos idées elles-mêmes à l’état naturel, et telles que notre conscience, délivrée de l’obsession de l’espace, les aper­cevrait. Cette dissociation des éléments constitutifs de l’idée, qui aboutit à l’abstraction, est trop commode pour que nous nous en passions dans la vie ordinaire et même dans la discussion philosophique. Mais lorsque nous nous figu­rons que les éléments dissociés sont précisément ceux qui entraient dans la contexture de l’idée concrète, lorsque, substituant à la pénétration des termes réels la juxtaposi­tion de leurs symboles, nous prétendons reconstituer de la durée avec de l’espace, nous tombons inévitablement dans les erreurs de l’associationisme. Nous n’insisterons pas sur ce dernier point, qui sera l’objet d’un examen approfondi dans le chapitre suivant. Qu’il nous suffise de dire que l’ardeur irréfléchie avec laquelle nous prenons parti dans certaines questions prouve assez que notre intel­ligence a ses instincts : et comment nous représenter ces instincts, sinon par un élan commun à toutes nos idées, c’est-à-dire par leur pénétration mutuelle ? Les opinions auxquelles nous tenons le plus sont celles dont nous pour­rions le plus malaisément rendre compte, et les raisons * mêmes par lesquelles nous les justifions sont rarement celles qui nous ont déterminés à les adopter. En un cer­tain sens, nous les avons adoptées sans raison, car ce qui en fait le prix à nos yeux, c’est que leur nuance répond à la coloration commune de toutes nos autres idées, c’est que nous y avons vu, dès l’abord, quelque chose de nous. Aussi ne prennent-elles pas dans notre esprit la forme <101>banale qu’elles revêtiront dès qu’on les en fera sortir pour les exprimer par des mots ; et bien que, chez d’autres esprits, elles portent le même nom, elles ne sont pas du tout la même chose. A vrai dire, chacun d’elles vit à la manière d’une cellule dans un organisme ; tout ce qui modifie l’état général du moi la modifie elle-même. Mais tandis que la cellule occupe un point déterminé de l’or­ganisme, une idée vraiment nôtre remplit notre moi tout entier. Il s’en faut d’ailleurs que toutes nos idées s’incor­porent ainsi à la masse de nos états de conscience. Beau­coup flottent à la surface, comme des feuilles mortes sur l’eau d’un étang. Nous entendons par là que notre esprit, lorsqu’il les pense, les retrouve toujours dans une espèce d’immobilité, comme si elles lui étaient extérieures. De ce nombre sont les idées que nous recevons toutes faites, et qui demeurent en nous sans jamais s’assimiler à notre substance, ou bien encore les idées que nous avons négligé d’entretenir, et qui se sont desséchées dans l’abandon. Si, à mesure que nous nous éloignons des couches profondes du moi, nos états de conscience tendent de plus en plus à prendre la forme d’une multiplicité numérique et à se déployer dans un espace homogène, c’est précisément parce que ces états de conscience affectent une nature de plus en plus inerte, une forme de plus en plus impersonnelle. Il ne faut donc pas s’étonner si celles-là seules de nos idées qui nous appartiennent le moins sont adéquatement exprimables par des mots : à celles-là seulement, comme nous verrons, s’applique la théorie associationiste. Exté­rieures les unes aux autres, elles entretiennent entre elles des rapports où la nature intime de chacune d’elles n’entre pour rien, des rapports qui peuvent se classer : on dira donc qu’elles s’associent par contiguïté, ou par quelque raison logique. Mais si, creusant au-dessous de la surface de contact entre le moi et les choses extérieures, nous pénétrons dans les profondeurs de l’intelligence organisée <102>et vivante, nous assisterons à la superposition ou plutôt à la fusion intime de bien des idées qui, une fois dissociées, paraissent s’exclure sous forme de termes logiquement contradictoires. Les rêves les plus bizarres, où deux images se recouvrent et nous présentent tout à la fois deux per­sonnes différentes, qui n’en feraient pourtant qu’une, don­neront une faible idée de l’interpénétration de nos concepts à l’état de veille. L’imagination du rêveur, isolée du monde externe, reproduit sur de simples images et parodie à sa manière le travail qui se poursuit sans cesse, sur des idées, dans les régions plus profondes de la vie intellectuelle.



EM, III De l’organisation Des Etats de Conscience, l’acte libre, P. 123-127.

Le moi touche en effet au monde extérieur par sa sur­face ; et comme cette surface conserve l’empreinte des choses, il associera par contiguïté des termes qu’il aura perçus juxtaposés : c’est à des liaisons de ce genre, liaisons de sensations tout à fait simples et pour ainsi dire imper­sonnelles, que la théorie associationniste convient. Mais à mesure que l’on creuse au-dessous de cette surface, à mesure que le moi redevient lui-même, à mesure aussi ses états de conscience cessent de se juxtaposer pour se péné­trer, se fondre ensemble, et se teindre chacun de la colo­ration de tous les autres. Ainsi chacun de nous a sa manière d’aimer et de haïr, et cet amour, cette haine, reflètent sa personnalité tout entière. Cependant le langage désigne ces états par les mêmes mots chez tous les hommes ; aussi n’a-t-il pu fixer que l’aspect objectif et impersonnel de l’amour, de la haine, et des mille sentiments qui agitent l’âme. Nous jugeons du talent d’un romancier à la puis-<124>sance avec laquelle il tire du domaine public, où le lan­gage les avait ainsi fait descendre, des sentiments et des idées auxquels il essaie de rendre, par une multiplicité de détails qui se juxtaposent, leur primitive et vivante individualité. Mais de même qu’on pourra intercaler indé­finiment des points entre deux positions d’un mobile sans jamais combler l’espace parcouru, ainsi, par cela seul que nous parlons, par cela seul que nous associons des idées les unes aux autres et que ces idées se juxtaposent au lieu de se pénétrer, nous échouons à traduire entièrement ce que notre âme ressent : la pensée demeure incommensurable avec le langage.
C’est donc une psychologie grossière, dupe du lan­gage, que celle qui nous montre l’âme déterminée par une sympathie, une aversion ou une haine, comme par autant de forces qui pèsent sur elle. Ces sentiments, pourvu qu’ils aient atteint une profondeur suffisante, représentent chacun l’âme entière, en ce sens que tout le contenu de l’âme se reflète en chacun d’eux. Dire que l’âme se déter­mine sous l’influence de l’un quelconque de ces sentiments, c’est donc reconnaître qu’elle se détermine elle-même. L’as- sociationniste réduit le moi à un agrégat de faits de cons­cience, sensations, sentiments et idées. Mais s’il ne voit dans ces divers états rien de plus que ce que leur nom exprime, s’il n’en retient que l’aspect impersonnel, il pourra les juxtaposer indéfiniment sans obtenir autre chose qu’un moi fantôme, l’ombre du moi se projetant dans l’espace. Que si, au contraire, il prend ces états psychologiques avec la coloration particulière qu’ils revêtent chez une per­sonne déterminée et qui leur vient à chacun du reflet de tous les autres, alors point n’est besoin d’associer plusieurs faits de conscience pour reconstituer la personne : elle est tout entière dans un seul d’entre eux, pourvu qu’on sache le choisir. Et la manifestation extérieure de cet état interne sera précisément ce qu’on appelle un acte libre, puisque <125>le moi seul en aura été l’auteur, puisqu’elle exprimera le moi tout entier. En ce sens, la liberté ne présente pas le caractère absolu que le spiritualisme lui prête quelque­fois ; elle admet des degrés. — Car il s’en faut que tous les états de conscience viennent se mêler à leurs congé­nères, comme des gouttes de pluie à l’eau d’un étang. Le moi, en tant qu’il perçoit un espace homogène, pré­sente une certaine surface, et sur cette surface pourront se former et flotter des végétations indépendantes. Ainsi une suggestion reçue dans l’état d’hypnotisme ne s’incor­pore pas à la masse des faits de conscience ; mais douée d’une vitalité propre, elle se substituera à la personne même quand son heure aura sonné. Une colère violente soulevée par quelque circonstance accidentelle, un vice héréditaire émergeant tout à coup des profondeurs obscures de l’organisme à la surface de la conscience, agiront à peu près comme une suggestion hypnotique. A côté de ces termes indépendants, on trouverait des séries plus complexes, dont les éléments se pénètrent bien les uns les autres, mais qui n’arrivent jamais à se fondre parfaite­ment elles-mêmes dans la masse compacte du moi. Tel est cet ensemble de sentiments et d’idées qui nous viennent d’une éducation mal comprise, celle qui s’adresse à la mémoire plutôt qu’au jugement. Il se forme ici, au sein même du moi fondamental, un moi parasite qui empié­tera continuellement sur l’autre. Beaucoup vivent ainsi, et meurent sans avoir connu la vraie liberté. Mais la sug­gestion deviendrait persuasion si le moi tout entier se l’assimilait ; la passion, même soudaine, ne présenterait plus le même caractère fatal s’il s’y reflétait, ainsi que dans l’indignation d’Alceste, toute l’histoire de la personne ; et l’éducation la plus autoritaire ne retrancherait rien de notre liberté si elle nous communiquait seulement des idées et des sentiments capables d’imprégner l’âme entière. C’est de l’âme entière, en effet, que la décision libre émane ; et<126> l’acte sera d’autant plus libre que la série dynamique à laquelle il se rattache tendra davantage à s’identifier avec le moi fondamental.
Ainsi entendus, les actes libres sont rares, même de la part de ceux qui ont le plus coutume de s’observer eux- mêmes et de raisonner sur ce qu’ils font. Nous avons mon­tré que nous nous apercevions le plus souvent par réfraction à travers l’espace, que nos états de conscience se solidi­fiaient en mots, et que notre moi concret, notre moi vivant, se recouvrait d’une croûte extérieure de faits psycholo­giques nettement dessinés, séparés les uns des autres, fixés par conséquent. Nous avons ajouté que, pour la commo­dité du langage et la facilité des relations sociales, nous avions tout intérêt à ne pas percer cette croûte et à admettre qu’elle dessine exactement la forme de l’objet qu’elle recouvre. Nous dirons maintenant que nos actions journa­lières s’inspirent bien moins de nos sentiments eux-mêmes, infiniment mobiles, que des images invariables auxquelles ces sentiments adhèrent. Le matin, quand sonne l’heure où j’ai coutume de me lever, je pourrais recevoir cette impression  ξύν όλη τή ψυχή, selon l’expression‎ de Platon ; je pourrais lui permettre de se fondre dans la masse confuse des impressions qui m’occupent ; peut-être alors ne me déterminerait-elle point à agir. Mais le plus souvent cette impression, au lieu d’ébranler ma conscience entière comme une pierre qui tombe dans l’eau d’un bassin, se borne à remuer une idée pour ainsi dire solidifiée à la surface, l’idée de me lever et de vaquer à mes occupations habi­tuelles. Cette impression et cette idée ont fini par se lier l’une à l’autre. Aussi l’acte suit-il l’impression sans que ma personnalité s’y intéresse : je suis ici un automate conscient, et je le suis parce que j’ai tout avantage à l’être. On verrait que la plupart de nos actions journalières s’ac­complissent ainsi, et que grâce à la solidification, dans notre mémoire, de certaines sensations, de certains senti-<127>ments, de certaines idées, les impressions du dehors pro­voquent de notre part des mouvements qui, conscients et même intelligents, ressemblent par bien des côtés à des actes réflexes. C’est à ces actions très nombreuses, mais insignifiantes pour la plupart, que la théorie association- niste s’applique. Elles constituent, réunies, le substrat de notre activité libre, et jouent vis-à-vis de cette activité le même rôle que nos fonctions organiques par rapport à l’ensemble de notre vie consciente. Nous accorderons d’ail­leurs au déterminisme que nous abdiquons souvent notre liberté dans des circonstances plus graves, et que, par inertie ou mollesse, nous laissons ce même processus local s’accomplir alors que notre personnalité tout entière devrait pour ainsi dire vibrer. Quand nos amis les plus sûrs s’ac­cordent à nous conseiller un acte important, les senti­ments qu’ils expriment avec tant d’insistance viennent se poser à la surface de notre moi, et s’y solidifier à la manière des idées dont nous parlions tout à l’heure. Petit à petit ils formeront une croûte épaisse qui recouvrira nos sen­timents personnels ; nous croirons agir librement, et c’est seulement en y réfléchissant plus tard que nous reconnaî­trons notre erreur. Mais aussi, au moment où l’acte va s’accomplir, il n’est pas rare qu’une révolte se produise. 



EM, III De l’organisation Des Etats de Conscience, l’acte libre, P. 123-127.

Le moi touche en effet au monde extérieur par sa sur­face ; et comme cette surface conserve l’empreinte des choses, il associera par contiguïté des termes qu’il aura perçus juxtaposés : c’est à des liaisons de ce genre, liaisons de sensations tout à fait simples et pour ainsi dire imper­sonnelles, que la théorie associationniste convient. Mais à mesure que l’on creuse au-dessous de cette surface, à mesure que le moi redevient lui-même, à mesure aussi ses états de conscience cessent de se juxtaposer pour se péné­trer, se fondre ensemble, et se teindre chacun de la colo­ration de tous les autres. Ainsi chacun de nous a sa manière d’aimer et de haïr, et cet amour, cette haine, reflètent sa personnalité tout entière. Cependant le langage désigne ces états par les mêmes mots chez tous les hommes ; aussi n’a-t-il pu fixer que l’aspect objectif et impersonnel de l’amour, de la haine, et des mille sentiments qui agitent l’âme. Nous jugeons du talent d’un romancier à la puis-<124>sance avec laquelle il tire du domaine public, où le lan­gage les avait ainsi fait descendre, des sentiments et des idées auxquels il essaie de rendre, par une multiplicité de détails qui se juxtaposent, leur primitive et vivante individualité. Mais de même qu’on pourra intercaler indé­finiment des points entre deux positions d’un mobile sans jamais combler l’espace parcouru, ainsi, par cela seul que nous parlons, par cela seul que nous associons des idées les unes aux autres et que ces idées se juxtaposent au lieu de se pénétrer, nous échouons à traduire entièrement ce que notre âme ressent : la pensée demeure incommensurable avec le langage.
C’est donc une psychologie grossière, dupe du lan­gage, que celle qui nous montre l’âme déterminée par une sympathie, une aversion ou une haine, comme par autant de forces qui pèsent sur elle. Ces sentiments, pourvu qu’ils aient atteint une profondeur suffisante, représentent chacun l’âme entière, en ce sens que tout le contenu de l’âme se reflète en chacun d’eux. Dire que l’âme se déter­mine sous l’influence de l’un quelconque de ces sentiments, c’est donc reconnaître qu’elle se détermine elle-même. L’as- sociationniste réduit le moi à un agrégat de faits de cons­cience, sensations, sentiments et idées. Mais s’il ne voit dans ces divers états rien de plus que ce que leur nom exprime, s’il n’en retient que l’aspect impersonnel, il pourra les juxtaposer indéfiniment sans obtenir autre chose qu’un moi fantôme, l’ombre du moi se projetant dans l’espace. Que si, au contraire, il prend ces états psychologiques avec la coloration particulière qu’ils revêtent chez une per­sonne déterminée et qui leur vient à chacun du reflet de tous les autres, alors point n’est besoin d’associer plusieurs faits de conscience pour reconstituer la personne : elle est tout entière dans un seul d’entre eux, pourvu qu’on sache le choisir. Et la manifestation extérieure de cet état interne sera précisément ce qu’on appelle un acte libre, puisque <125>le moi seul en aura été l’auteur, puisqu’elle exprimera le moi tout entier. En ce sens, la liberté ne présente pas le caractère absolu que le spiritualisme lui prête quelque­fois ; elle admet des degrés. — Car il s’en faut que tous les états de conscience viennent se mêler à leurs congé­nères, comme des gouttes de pluie à l’eau d’un étang. Le moi, en tant qu’il perçoit un espace homogène, pré­sente une certaine surface, et sur cette surface pourront se former et flotter des végétations indépendantes. Ainsi une suggestion reçue dans l’état d’hypnotisme ne s’incor­pore pas à la masse des faits de conscience ; mais douée d’une vitalité propre, elle se substituera à la personne même quand son heure aura sonné. Une colère violente soulevée par quelque circonstance accidentelle, un vice héréditaire émergeant tout à coup des profondeurs obscures de l’organisme à la surface de la conscience, agiront à peu près comme une suggestion hypnotique. A côté de ces termes indépendants, on trouverait des séries plus complexes, dont les éléments se pénètrent bien les uns les autres, mais qui n’arrivent jamais à se fondre parfaite­ment elles-mêmes dans la masse compacte du moi. Tel est cet ensemble de sentiments et d’idées qui nous viennent d’une éducation mal comprise, celle qui s’adresse à la mémoire plutôt qu’au jugement. Il se forme ici, au sein même du moi fondamental, un moi parasite qui empié­tera continuellement sur l’autre. Beaucoup vivent ainsi, et meurent sans avoir connu la vraie liberté. Mais la sug­gestion deviendrait persuasion si le moi tout entier se l’assimilait ; la passion, même soudaine, ne présenterait plus le même caractère fatal s’il s’y reflétait, ainsi que dans l’indignation d’Alceste, toute l’histoire de la personne ; et l’éducation la plus autoritaire ne retrancherait rien de notre liberté si elle nous communiquait seulement des idées et des sentiments capables d’imprégner l’âme entière. C’est de l’âme entière, en effet, que la décision libre émane ; et<126> l’acte sera d’autant plus libre que la série dynamique à laquelle il se rattache tendra davantage à s’identifier avec le moi fondamental.
Ainsi entendus, les actes libres sont rares, même de la part de ceux qui ont le plus coutume de s’observer eux- mêmes et de raisonner sur ce qu’ils font. Nous avons mon­tré que nous nous apercevions le plus souvent par réfraction à travers l’espace, que nos états de conscience se solidi­fiaient en mots, et que notre moi concret, notre moi vivant, se recouvrait d’une croûte extérieure de faits psycholo­giques nettement dessinés, séparés les uns des autres, fixés par conséquent. Nous avons ajouté que, pour la commo­dité du langage et la facilité des relations sociales, nous avions tout intérêt à ne pas percer cette croûte et à admettre qu’elle dessine exactement la forme de l’objet qu’elle recouvre. Nous dirons maintenant que nos actions journa­lières s’inspirent bien moins de nos sentiments eux-mêmes, infiniment mobiles, que des images invariables auxquelles ces sentiments adhèrent. Le matin, quand sonne l’heure où j’ai coutume de me lever, je pourrais recevoir cette impression  ξύν όλη τή ψυχή, selon l’expression‎ de Platon ; je pourrais lui permettre de se fondre dans la masse confuse des impressions qui m’occupent ; peut-être alors ne me déterminerait-elle point à agir. Mais le plus souvent cette impression, au lieu d’ébranler ma conscience entière comme une pierre qui tombe dans l’eau d’un bassin, se borne à remuer une idée pour ainsi dire solidifiée à la surface, l’idée de me lever et de vaquer à mes occupations habi­tuelles. Cette impression et cette idée ont fini par se lier l’une à l’autre. Aussi l’acte suit-il l’impression sans que ma personnalité s’y intéresse : je suis ici un automate conscient, et je le suis parce que j’ai tout avantage à l’être. On verrait que la plupart de nos actions journalières s’ac­complissent ainsi, et que grâce à la solidification, dans notre mémoire, de certaines sensations, de certains senti-<127>ments, de certaines idées, les impressions du dehors pro­voquent de notre part des mouvements qui, conscients et même intelligents, ressemblent par bien des côtés à des actes réflexes. C’est à ces actions très nombreuses, mais insignifiantes pour la plupart, que la théorie association- niste s’applique. Elles constituent, réunies, le substrat de notre activité libre, et jouent vis-à-vis de cette activité le même rôle que nos fonctions organiques par rapport à l’ensemble de notre vie consciente. Nous accorderons d’ail­leurs au déterminisme que nous abdiquons souvent notre liberté dans des circonstances plus graves, et que, par inertie ou mollesse, nous laissons ce même processus local s’accomplir alors que notre personnalité tout entière devrait pour ainsi dire vibrer. Quand nos amis les plus sûrs s’ac­cordent à nous conseiller un acte important, les senti­ments qu’ils expriment avec tant d’insistance viennent se poser à la surface de notre moi, et s’y solidifier à la manière des idées dont nous parlions tout à l’heure. Petit à petit ils formeront une croûte épaisse qui recouvrira nos sen­timents personnels ; nous croirons agir librement, et c’est seulement en y réfléchissant plus tard que nous reconnaî­trons notre erreur. Mais aussi, au moment où l’acte va s’accomplir, il n’est pas rare qu’une révolte se produise. 



MM, III De la survivance des images. La mémoire et l’esprit, PLAN DU RÊVE ET PLAN DE L’ACTION, P.188

Tout se passe donc comme si nos souvenirs étaient répétés un nombre indéfini de fois dans ces mille et mille réductions possibles de notre vie passée. Ils prennent une forme plus banale quand la mémoire se resserre davantage, plus person­nelle quand elle se dilate, et ils entrent ainsi dans une multi­tude ilhmitée de « systématisations » différentes. Un mot d’une langue étrangère, prononcé à mon oreille, peut me faire penser à cette langue en général ou à une voix qui le prononçait autrefois d’une certaine manière. Ces deux asso­ciations par ressemblance ne sont pas dues à l’arrivée acci­dentelle de deux représentations différentes que le hasard aurait amenées tour à tour dans la sphère d’attraction de la perception actuelle. Elles répondent à deux dispositions men­tales diverses, à deux degrés distincts de tension de la mémoire, <189> ici plus rapprochée de l’image pure, là plus disposée à la réplique immédiate, c’est-à-dire à l’action. Classer ces systèmes, recher­cher la loi qui les lie respectivement aux divers « tons » de notre vie mentale, montrer comment chacun de ces tons est déterminé lui-même par les nécessités du moment et aussi par le degré variable de notre effort personnel, serait une entre­prise difficile : toute cette psychologie est encore à faire, et nous ne voulons même pas, pour le moment, nous y essayer. Mais chacun de nous sent bien que ces lois existent, et qu’il y a des rapports stables de ce genre. Nous savons, par exemple, quand nous lisons un roman d’analyse, que certaines associations d’idées qu’on nous dépeint sont vraies, qu’elles ont pu être vécues ; d’autres nous choquent ou ne nous donnent pas l’impression du réel, parce que nous y sentons l’effet d’un rap­prochement mécanique entre des étages différents de l’esprit, comme si l’auteur n’avait pas su se tenir sur le plan qu’il avait choisi de la vie mentale. La mémoire a donc bien ses degrés successifs et distincts de tension ou de vitalité, malaisés à défi­nir, sans doute, mais que le peintre de l’âme ne peut pas brouiller entre eux impunément. La pathologie vient d’ailleurs confir­mer ici, — sur des exemples grossiers, il est vrai, — une vérité dont nous avons tous l’instinct. Dans les « amnésies systé­matisées » des hystériques, par exemple, les souvenirs qui paraissent abolis sont réellement présents ; mais ils se rat­tachent tous, sans doute, à un certain ton déterminé de vitalité intellectuelle, où le sujet ne peut plus se plac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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