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무장(武將) 홍화보(洪和輔)의 면모
명나라의 번방(藩邦)으로 자처하며 대국과의 충돌을 피하고자 했던 조선은 병력을 드러내놓고 키울 수 없었다. 자연히 문신 우위가 될 수밖에 없었다. 명목상 문무(文武) 양반이지, 문신이 무관직을 겸직하는 경우는 허다했지만 무신이 재상 이상으로 올라간 경우는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심지어 정묘호란에서 끝까지 싸우다 전사한 남이흥(南以興) 장군은 죽기 전에 “내가 장군이 되어 (역모를 의심받을 까 두려워) 한 번도 진법을 훈련시키지 못하고 죽으니 이것이 애통하다.”고 하였다. (臨死有言曰。吾爲閫帥。一未習陣而死。是可痛也。蓋以其時譏察之人。往來頻數。故不敢鍊兵習陣。而有此言也。《동계집(桐溪集)》, 병자차자(丙子箚子))
선생의 장인 홍화보(洪和輔, 1726~1791)는 진사시에 합격하고 다시 무과를 보아 급제한 무신이었다. 이 글에서 사위는 병마절도사로 진주에 주둔하고 있던 장인을 찾아갔을 때의, 단 두 장면만을 서술했지만, 장인의 여러 면모를 한꺼번에 엿보게 한다. 찾아온 사위를 환영하며 부하들에게 연회 준비를 시키는 장면에서는 ‘어 사위가 왔다고 이렇게 공적인 일처럼 부하들을 부려도 되나’ 의심된다. 그러나 다음날 연회에서는 무신으로서의 강직하고 충성스런 심회를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부대의 공적인 연회에 사위가 참관하는 결과가 된다. 이 기회에 전도양양한 사위에게 무신으로서의 억눌린 회포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촉석루연유시(矗石樓燕游詩)의 서(序)
정조임금 즉위 4년 봄, 아버님께서 예천군수로 옮기시고, 장인어른 홍공(洪公)은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진주에 머물고 계셨다. 내가 예천에 가면서 진주에 들러 홍공을 찾아가 뵈었더니 공께서 “기쁘구나! 너희들이 왔구나!”(1)라고 하셨다. 그리고 여러 비장(裨將)을 불러 이르시기를 “내일 촉석루에서 크게 잔치를 열겠다.”라고 하고, “누구야, 음식은 네가 맡아라. 술이 향기롭지 않거나 회가 푸짐하지 않으면 너의 책임이다.”하고, “누구야 악기연주는 네가 맡아라. 연주가 여유롭게 잘 어울리지 못하여 시끄럽고 조급하면 너의 허물이다.”하고, “누구야 춤추는 기생을 네가 맡아라. 무릇 포구락(拋毬樂)(2), 처용무 등을 연주에 맞추지 못하면 네 잘못이다.”라 하셨다. 다음날 아침, 절도사가 대장기와 북을 세우고 촉석루에 오르고, 여러 장교와 아전들이 예견(禮見)을 마치자, 연회와 연주의 준비물이 명한대로 올라왔다. 술이 두어 차례 돌자, 공이 장검을 어루만지며 동호(銅壺)를 치고, 비장하게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였다. “옛날 삼장사(三壯士)(3)가 이 촉석루에 올라 술을 마시고, 남강에 몸을 던지면서 후회하지 않았다. 당시에, 여러 진장이 병력을 거느리고 있으면서 구원하지 않았고, 조정은 사사로운 감정으로 독책하였다. 아직 외구(外寇)들을 제거하지 못했는데, 내홍이 먼저 일어났으니, 마침내 충신, 의사(義士)들이 머리를 맞대고, 비분강개하며 죽었다. 나는 생각이 여기에 미칠 때마다, 피가 거꾸로 흐르고 복장이 터진다.”라고 하며 줄줄 눈물을 흘리시니, 좌우에서 격려되어 머리털이 서늘해지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윽고 옥천종이에 붓을 휘둘러 칠언시 두 수를 쓰고, 이를 새겨 걸도록 명하고, 나에게 그 전말을 서술하라 하시니, 내가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이와 같이 기록한다.
(1) 시 <봄날 아내를 데리고 진주로 갔다. 화순을 떠나면서 섭섭한 마음이 들어 짓다>의 주에서 선생은 “이른 봄에 백씨(伯氏 다산의 맏형 약현(若鉉))께서 내 아내를 데리고 진주로 갔는데 2월에 홍일보(洪日輔)가 모시고 돌아왔었다. 이때 부친께서 예천군수(醴泉郡守)로 전임되었으므로 나는 마침내 아내를 데리고 먼저 진주로 갔다. 장인 홍공(洪公)께서 이때 영우절도사(嶺右節度使)가 되어 진주에 계셨다.”라고 하였다. (春日領內赴晉州 將離和順 悵然有作 【早春伯氏領余室人往晉州,二月洪日輔陪還。時家君移守醴泉,余遂領內先至晉州。外舅洪公時爲嶺右節度在晉州】, 정본여유당전서 178쪽)
(2)포구락(抛毬樂): 공던지기 운동을 가무화한 것이라 한다.
(3)삼장사(三壯士) : 임진왜란 중에 진주성을 지키다 전사한 분들인데, 그 세 명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김성일(金成一), 조종도(趙宗道), 이노(李魯) 또는 곽재우(郭再祐)라고도 하고, 의병장으로 1593년 진주성을 지키다 전사한 최경회(崔慶會), 김천일(金千鎰), 고종후(高從厚)라고도 하는데, 다산 선생은 김천일, 최경회, 황진(黃進)을 삼장사라 칭하였다. 장인인 홍공이 지칭한 삼장사도 다산과 같지 않았을까 생각되지만 분명하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