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철의 자기혁명 에필로그 중
의식과 무의식은 서로 견제와 균형을 반복한다. 의식을 가다듬고 집중해서 무의식을 들여다보면 마치 지독하게 잘게 부서진 파편 같다. 그런데 이 파편들은 나의 의식이 약화되었을 때, 수면 위로 떠올라 의식을 교란한다. 의식이 정돈되어 무의식을 잘 통제하고 있을 때는 바닥에 가라앉아 있지만, 의식이 산만하거나 집중력이 느슨해지면 장마철 호수 위에 떠오른 쓰레기더미처럼 나의 의식을 오염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긴장을 늦추며 살아가면 나의 의식은 늘 무의식과 함께하게 된다.
무의식은 치명적인 약점들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긍정적이고 기억하고 싶은 것들,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들은 의식의 흐름 속에 자리잡지만, 부정적이고 잊고 싶은 것들은 의식의 가위질로 편집되어 깊은 심연 속에 조각조각 던져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의식을 잘 통제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적어보라고 하면 장점과 단점 항목을 최소한 비슷하게 나열하지만, 무의식이 통제되지 않고 의식의 틈새에 얼기설기 끼어 있는 사람들은 장점은 두세 개에 불과하고 단점은 수십 개나 적는다.
본능과 그 변화
명료하면서도 분명하게 정의된 기본 개념에서 출발하는 과학은 없다.....모든 것이 자의적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경험적 재료들과 의미 있는 관계-이 관계는 우리가 그 관계를 분명하게 인지하고 증명하기 이전에 감(感 )으로 느끼는 관계이다-를 맺음으로써 결정된 그 개념들에 달려 있을지라도, 그 개념들은 기존에 존재하는 관습과 비슷한 성격의 개념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과학적 개념을 더욱 정확하게 설정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계속되는 수정 과정을 통해 그 개념들이 어느 한 영역 전체에 도움이 되는 일관성 있는 개념들이 되기 위해서는 해당 관찰 영역에 대한 더욱 철저한 연구와 조사가 선행되어야 한다. 지식이 발전하려면 개념의 정의가 경직되어서는 안 된다.
심리학에서 이런 종류의 관습적인 기본 개념 가운데 아직까지 모호한 채로 있으면서도 반드시 필요한 개념이 <본능>이라는 개념이다.
본능
<정신과 육체 사이의 경계선에 있는 개념으로 신체 기관 내에서 발생하여 정신에 도달하는 심리적 대표자>
<신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사이의 경계에 있는 개념이며 그 안에 유기체의 힘을 나타내는 심리적 대리자>
<본능은 몸속으로 끊임없이 흐르는 자극의 근원이 심리적으로 표현된 것으로서 그러므로 본능의 개념은 정신과 육체 사이의 경계에 놓여 있는 것들 중의 하나이다>
<신체적인 힘의 심리적 대표자로 보는 태도>
프로이트는 1910년에 발표한 심인성시각장애에 관한 짧은 논문에서 <자아본능>이란 용어를 불쑥 소개하면서, 이 본능을 한편으로는 자기보존 본능과 동일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억압기능과 동일시하였다. 이때 이후로 갈등은 두 종류의 본능, 즉 리비도와 자아본능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 표현되기 시작했다.(97)
본능의 분류에 관한 프로이트의 견해는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부터 일대 전기를 맞기 시작, 이글에서 프로이트는 그때까지 자신이 취한 입장의 어려움을 털어놓으며, 나르시시즘적 리비도는 성적 본능의 힘이 발현된 것으로 자기 보존 본능과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리비도적 본능 이외에 자아 본능과 대상 본능이 있다는 주장을 계속 유지했으며, 더 나아가 죽음 본능에 관한 가설도 내놓았다.(98)
<본능>이란 개념을 <자극>이란 개념아래 포함시키고, 본능은 바로 정신에 가해지는 자극이라고 말한다고 해도 무리는 없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본능을 정신에 가해지는 자극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정신에 가해지는 자극에는 본능적인 자극 이외에 생리적인 자극과 유사한 자극도 있기 때문이다.(101)
본능적인 자극은 외부세계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기관의 내부에서 발생한다. 본능적 자극은 생리적인 자극과는 다르게 정신에 작용하며, 자연히 그 자극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다른 행동이 필요하다.
본능은 <순간적인>충격을 주는 힘으로서가 아니라 늘 <지속적인>충격을 주는 힘으로서 작용.
더욱이 본능은 외부에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 내부에서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피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 본증적인 자극을 적절히 표현하자면 <욕구>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 욕구를 해소시키는 것이 <만족>이며, 자연히 만족은 자극의 내적 근원을 적절하게 변화시킴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103)
외부로부터의 자극은 그 자극에서 물러서라는 단 하나의 과제만을 부과하며, 우리는 근육운동으로 그 과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신체 기관 내부에서 발생하는 본능적 자극은 이런 메커니즘으로 처리할 수가 없다. 본능적 자극은 신경 체계로 하여금 복합적인 활동을 통해 외부 세계를 변화시켜 자극의 근원인 내부의 원인에 만족을 줄 수 있도록 하라는 고차원적인 요구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한한 능력을 지닌 신경 체계를 현재와 같은 고도의 수준으로 발달하도록 이끈 원동력이 바로 외부의 자극이 아닌 본능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105)
<생물학적인>관점에서 정신적인 삶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본능>이라는 것이 정신과 육체 사이의 경계선에 있는 개념으로, 신체 기관 내에서 발생하여 정신에 도달하는 자극의 심리적 대표자로, 그리고 정신이 육체와 연관된 결과로 정신에 부과된 일정 수준의 요구로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107)
본능의 목표는 어떤 경우든지 만족이다. 이 만족은 본능의 근원에 있는 자극의 상태를 제거함으로써만 달성할 수 있다.
억압에 관하여
본능의 경우엔 자아가 그 자신으로부터 도피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기 때문에 그런 도피가 아무 소용이 없다. 일정 시간이 흐른 뒤에는 판단에 따른 거부(견책)가 본능 충동에 대처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억압은 바로 도피와 판단에 따른 거부의 중간 단계에 있는, 말하자면 판단에 따른 거부의 예비 단계라 할 수 있다.(137)
배고픔과 같이 본능 충동이 만족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는 경우, 이 배고픔의 본능 충동도 오직 그것을 만족시키는 행동에 의해서만 가라앉힐 수 있는 피할 수 없는 명령이 된다. 만족시키는 행동이 있기 전까지는 욕구의 긴장이 지속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억압의 본질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어떤 본능 충동을 만족시키지 못해 생기는 긴장이 참을 수 없는 정도의 수준으로 올라가는 경우에서는 억압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억압상태에 있는 본능은 만족시키는 일이 가능하고 본질적으로 그 만족은 쾌락을 준다.(138)
(임상관찰을 통한 억압의 본질적인 면)
따라서 어떤 본능의 만족은 한 곳에는 쾌락을 가져다주지만 다른 곳에는 불쾌를 안겨 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결과로 만족을 통한 쾌락보다 불쾌의 원인이 더 강한 힘을 획득하는 억압의 조건이 생겨나게 된다. 억압은 처음부터 존재하는 방어기재가 아니라 의식의 정신활동과 무의식의 정신활동 사이에 확연한 간극이 생길 때 발생한다. 억압의 본질은 어떤 것을 의식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하여 의식과 거리를 두게 하는 데 있는 것이다.(139)
억압의 첫 번째 단계-<원초적 억압>
=의식으로 진입을 거부당한 본능의 정신적 대표자와 관계, 이 원초적 억압과 더불어 고착이 일어난다.
억압의 두 번째 단계-<본래적인 의미의 억압>
=억압된 표상의 정신적 파생물, 혹은 다른 곳에서 생겨나 그 억압된 표상과 연계관계를 맺게 되는 관념들에 영향을 미친다. 본래적인 의미의 억압은 사실상 후압박인 셈이다.
억압은 그 작용이 <개별적으로>이루어진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억압은 <유동적>이다. 억압 과정이란 살아 있는 것을 죽이면 그때부터 그것은 죽은 상태로 있는 것처럼, 그렇게 단 한 번 발생하여 그 결과가 영속적으로 지속되는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다. 억압은 지속적인 힘의 소모를 요구하며, 따라서 그런 힘의 행사가 중단되면 억압의 성공 여부가 불투명해져 불가피하게 새로운 억압 작용이 필요하게 된다.(144)
말하자면 근본적으로 불쾌감을 불러일으키는 표상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는 힘을 지니게 되면 그 순간부터 갈등은 현실적인 것으로 되고, 그와 같은 표상의 활동성이 곧바로 억압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억압과 관련해서 언급하자면, 집중된 에너지의 양이 증가한다는 것은 곧 무의식으로 접근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게 되며, 그 양이 줄어든다는 것은 무의식에서 거리가 멀어진다거나 어떤 변형의 과정을 거친다는 의미와 같은 것이 된다. 혐오감이나 불쾌감을 주는 것을 약화시키는 것, 그것에서 우리는 억압과 같은 의미의 힘의 작용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