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영웅진해시(自古英雄盡解詩)
| 어조사 자 · 옛 고 · 꽃부리 영 · 수컷 웅 · 다할 진 · 풀 해 · 시 시 |
[뜻]
옛날부터 영웅은 모두 시를 알았다. 문무를 겸비해야만 진정한 영웅이라는 말이다.
[출전]
쑥과 가시나무는 백 척 터전에 헛되이 쌓였는데
주흥이 돋아 대풍사를 불렀었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 말하지 마소
자고로 영웅은 모두 시를 알았다오
蒿棘空存百尺基
酒酣曾唱大風詞
莫言馬上得天下
自古英雄盡解詩
- 임관(林寬) 〈가풍대(歌風台)〉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은 회남왕(淮南王) 경포(黥布, 영포(英布))의 반란을 평정하고 돌아가는 길에 고향인 패현(沛縣)에 들러 고향 사람들에게 주연을 베풀었는데, 주흥이 돌자 천하를 손에 넣은 감회가 솟구쳐 〈대풍가(大風歌)〉를 지어 불렀다. 사람들은 한고조 유방이 노래 부른 것을 기념하여 누대를 짓고 이를 가풍대(歌風台)라 불렀다. 당나라 때 사람 임관은 〈가풍대〉라는 시를 지어, 유방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무력에만 의존한 무부(武夫)가 아니라 시를 이해할 줄 아는 문무를 겸비한 영웅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고조 유방의 〈대풍가〉는 다음과 같다.
큰바람 이니 구름이 날리네
위엄을 천하에 더함이여, 고향에 돌아왔도다
어떻게 용사를 얻어 천지 사방을 지킬꼬
大風起兮雲飛揚
威加海內兮歸故鄕
安得猛士兮守四方
[용례]
정치나 사업을 하려면 문학을 공부해야 한다네. 문학에는 인생이 담겨 있어. 인생을 알아야 정치도 사업도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나. 그래서 예로부터 ‘자고영웅진해시’, 즉 영웅치고 시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네.
〖역사 · 문화 자료─경포의 반란〗
경포(黥布)는 육(六, 안휘성(安徽省) 육안시(六安市) 북쪽) 사람으로 원래 성은 영(英)씨이었다. 그가 젊었을 때, 어떤 길손이 그의 상을 보고 형벌을 받은 후에 왕이 될 상이라고 말했다. 그가 장년이 되었을 때 남의 죄에 연좌되어 먹을 넣는 형벌을 받게 되었는데, 경포는 흔연히 형벌을 받아들였다. 경(黥)이란 얼굴에 죄명을 자자(刺字)하던 형벌을 말하는데, 그로부터 그는 경포라 불리게 되었다. 경포는 죄수가 되어 여산(麗山, 섬서성(陝西省))으로 호송되었는데, 그곳에는 수십만의 죄수가 있었다. 경포는 죄수 가운데 반장이나 호걸들과 사귀다가 친한 사람들을 이끌고 도망하여 강수(江水, 장강) 근방으로 가서 도둑질을 일로 삼았다.
진섭(陳涉)이 봉기하자 경포도 무리들을 이끌고 일어나 군사 수천 명을 모았다. 진섭이 죽고 항량(項梁)이 일어나 강동과 회계(會稽, 절강성(浙江省) 소흥시(紹興市))를 평정하고 강수를 건너 서쪽으로 진출하자 경포도 항량에게 귀복했다. 경포는 항량이 회수(淮水)를 건너 각지를 평정할 때 많은 공을 세웠다. 항량은 초(楚)나라 왕족의 후예를 찾아 회왕(懷王)으로 옹립했는데, 회왕은 항량을 무신군(武臣君)으로 봉하고, 경포를 당양군(當陽君)으로 봉했다.
BC208년, 항량이 진(秦)나라 장군 장한(章邯)에게 패하여 전사했고, 장한은 승세를 몰아 조(趙)나라를 포위했다. 초의 회왕은 송의(宋義)를 상장에, 항우(項羽)를 차장에, 범증(范增)을 말장으로 임명하여 원병을 파견했다. 이때 경포도 장군으로 참전하여 송의의 지휘를 받았다. 그런데 항우가 내부 반란을 일으켜 송의를 죽이고 상장군이 되자 경포도 항우의 지휘 아래 들게 되었다. 항우는 경포에게 명하여 하수(河水)를 건너 진(秦)을 치게 했는데, 경포는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으므로 항우는 이에 힘입어 진군을 쳐부술 수 있었으며, 경포가 적은 군사로 자주 대군을 깨뜨린 덕에 제후들의 군사가 초나라에 귀복했다. 경포는 또한 항우의 명령을 받고 장한의 군대를 야습하여 진나라 군대 20여만 명을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항우가 함양(咸陽)에 입성하는 과정에서 경포는 언제나 선봉의 역할을 맡았다. 항우는 초패왕(楚霸王)이 되어 제후를 봉하면서 경포를 구강왕(九江王)으로 삼고, 육(六)에 도읍하도록 했다.
BC206년, 제후들이 항우의 지휘 아래서 떠나 각기 자기 봉국(封國)에 취임하였는데, 이때 항우는 회왕을 제위에 옹립하여 의제(義帝)로 받드는 한편, 비밀리에 구강왕 경포에게 명하여 의제를 치게 했다. 경포는 부하 부장을 보내 의제를 살해했다. 그런데 이즈음을 기점으로 하여 경포의 행동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전처럼 항우의 명령에 절대 복종을 하지 않고 저울질을 하는 듯한 행동을 보인 것이다. 그 무렵 제왕(齊王) 전영(田榮)이 초나라를 배반하자 항우는 구강에서 군사를 징발했는데, 구강왕 경포는 병을 칭하며 나가지 않고 부장에게 병사 수천 명을 인솔해 보냈다. 유방의 한(漢)나라가 팽성(彭城)에서 초군을 깨뜨렸을 때도 경포는 역시 병을 칭하고 초나라를 돕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에 항우는 자기편으로 믿을 만한 사람은 경포뿐이었으며, 앞으로 경포의 재능을 써먹어야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경포를 치지 않았다.
한왕(漢王) 2년(BC205), 유방은 팽성의 싸움에서 패하고 후퇴하면서, 경포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계획을 세우고 알자(謁者, 빈객을 주인에게 인도하거나 문서를 수발하는 직책, 요즘의 비서)인 수하(隨何)를 사자로 파견했다. 수하는 어렵사리 경포를 만나 설득에 성공한다. 마침 초나라의 사자도 경포를 찾아와 출병을 종용하고 있었는데, 경포는 초나라의 사자를 죽이고 군사를 동원하여 초나라를 공격했다. 초나라는 항성(項聲)과 용저(龍且)를 보내 경포를 쳐부쉈다. 경포는 항우의 공격을 피해 수하와 함께 샛길로 한나라로 갔다.
한왕 3년(BC204), 경포가 한나라에 도착했을 때 유방은 교의에 몸을 기대고 발을 씻기면서 경포를 불러 인견했다. 경포는 유방의 무례함에 화가 나 한나라에 온 것을 후회하고, 자결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숙소에 들어가 보니 숙소가 유방의 것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좋았다. 경포는 이런 특별 대우에 마음이 녹아 사자를 보내 구강에 숨어 들어가게 했다. 하지만 초나라가 이미 구강의 군대를 장악하고, 배신자 경포의 처자를 모두 살해한 뒤였다. 경포의 사자는 경포의 옛 친구와 신하들을 규합하여 수천 명을 이끌고 한나라에 귀순했다.
한왕 4년(BC203) 7월, 유방은 경포를 회남왕(淮南王)으로 봉하고 함께 항우를 쳤다. 경포는 구강에 들어가 대사마(大司馬) 주은(周殷)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함께 해하의 전투에 참전시켜 초나라를 깨뜨리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항우가 죽고 천하가 평정된 후, 경포가 회남왕으로서 한고조 유방에게 신하의 도리를 다하며 평화롭게 지내던 도중, 그를 모반의 길로 달려가게 만든 일이 발생했다. 바로 고조의 황후 여후(呂后)가 양왕(梁王) 팽월(彭越)을 죽인 후, 그 시체를 소금에 절여 한 그릇을 보내온 것이다.(▶ 석권(席卷) 참조) 마침 사냥을 하고 있던 회남왕 경포는 다음은 자기 차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껴 은밀히 군사들의 대오를 정비하고 이웃 고을에도 위급함을 알렸다.
경포에게는 총애하는 미희가 있었는데, 병이 나서 의사를 찾아 치료를 받고 있었다. 의사의 집 맞은편에 중대부(中大夫) 분혁(賁赫)이 살고 있었다. 본래 경포의 시중(侍中)이었던 분혁은 그 여인에게 선물을 하고, 때로 의사의 집에서 함께 술도 마셨다. 상사의 부인에게 아첨을 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고, 특히 출세를 꿈꾸는 사람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 아닐까? 당연히 총희는 분혁에 대해 좋은 말을 했고, 경포는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하여 분혁을 체포하려고 했다. 분혁은 장안(長安)으로 도망하여 고변했다. 한고조 유방이 사자를 보내 조사를 하자, 경포는 분혁의 일족을 멸하고 군사를 들어 모반을 일으켰다.
한고조 유방은 등공(滕公)의 추천을 받은 계략에 능한 설공(薛公)에게 자문을 구했다. 설공이 대답했다. “경포가 상책으로 나오면 산동(山東)은 한나라의 영지가 되지 못할 것이며, 중책으로 나오면 승패는 미지수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책으로 나오면 폐하는 베개를 높이 베고 편안히 주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산동은 진(秦) · 한(漢) 때에 효산(崤山) 혹은 화산(華山)의 동쪽을 가리키는 말로, 관동(關東)이라고도 하며, 진나라를 제외한 전국(戰國) 6국의 고지(故地)를 말한다.
유방이 물었다. “어떤 것을 상책이라 하는가?” “동으로 오(吳)를 취하고, 서쪽으로 초(楚)를 취하고, 제(齊)를 아우르고, 노(魯)를 빼앗아 격문을 연(燕)과 조(趙)에 보내고, 굳게 그 범위를 지킨다면 산동은 한나라의 영지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어떤 것을 중책이라고 하는가?” “동으로 오를 취하고, 서쪽으로 초를 취하고, 한(韓)을 아우르고 위(魏)를 취하여 오창(敖倉)의 양곡을 확보하고, 그 들머리를 막는다면 승패는 미지수라 하겠습니다.” “어떤 것을 하책이라고 하는가?” “동으로 오를 취하고, 서쪽으로 하채(下蔡, 안휘성)를 취하고, 치중(輜重)을 월(越)로 돌려 스스로 장사(長沙)로 돌아간다면 폐하는 베개를 높이 베고 편안히 주무시게 되며 한나라는 무사태평할 것입니다.” “그는 어떤 방책으로 나오겠는가?” “하책으로 나올 것입니다.” “어째서 상책과 중책을 버리고 하책으로 나올 것이라 판단하는가?” “경포는 본디 여산의 도적이었습니다. 자기 힘으로 왕의 자리에 오르긴 했으나 모든 것은 자기 일신을 위해 한 일이며, 뒷날 인민들의 만세를 위해서 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책을 가지고 나올 줄로 압니다.” 한고조 유방은 몸소 군사를 이끌고 출병했다.
사실, 경포가 두려워한 것은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과 양왕 팽월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다 세상에 없으므로 한번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고 모반을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하지만 경포는 설공의 예측대로 먼저 동쪽의 형(荊, 오(吳)의 땅)을 쳤다. 형왕 유가(劉價)는 패해 부릉(富陵, 강소성(江蘇省) 홍택현(洪澤縣) 서북)으로 달아나다 죽었다. 경포는 형 땅을 무너뜨리고, 회수를 건너 초나라를 깨뜨리고, 유방의 군대와 기(蘄, 안휘성 숙주시(宿州市) 서남)의 서쪽 추(甀, 안휘성 숙주시 남쪽)에서 맞부딪쳤다. 경포의 군사는 정예부대였고, 그 포진법은 항우의 군진에 비해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정연했다. 유방은 멀리서 경포를 바라보며 소리를 질렀다. “무엇이 괴로워 모반을 하였는가?” 경포가 대답했다. “황제가 되려는 것뿐이다.”
하지만 경포는 유방의 군대에 패해 강남으로 달아났다. 장사(長沙)의 애왕(哀王)이 사자를 보내 경포를 속여 초나라로 유인해 데려갔다. 경포는 일찍이 파군(番君)의 딸을 아내로 삼았었는데, 애왕이 파군의 아들이었으므로 두 사람은 처남 매부 관계였다. 하여 경포는 안심하고 사자를 따라 파양(番陽, 강서성 파양현)에 갔다가 자향(玆鄕)의 농가에서 살해당했다. 한왕 12년(BC195)의 일이었다. 같은 해, 한고조 유방은 영포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화살에 맞은 부상으로 인해 사망했다.
경포는 자기와 같은 창업 공신인 팽월과 한신이 한고조 유방에게 팽(烹)을 당하자 그 화가 자기에게까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모반을 일으켰는데, 사마천은 《사기(史記) 〈경포열전(黥布列傳)〉》에서 경포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을 내리고 있다.
「몸은 형벌을 당했으면서도 그 출세는 얼마나 빨랐던가? 항우가 구덩이에 묻어 죽인 사람은 그 수가 천을 헤아리고 만을 헤아리는데, 경포는 항상 잔학한 일에 앞장섰었다. 공이 제후 중에 으뜸이어서 왕이 되었지만, 자신도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화는 사랑하는 여자로부터 나왔고, 질투에서 환란이 생겼으며, 마침내는 나라를 망치고 말았다.」
[글]
김성일(金聖日)은 문학박사. 전라북도 도청에서 국제정책전문위원으로서 중국과의 국제교류 업무를 담당하는 한편, 단국대학교, 전남대학교,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백석대학교 등에서 중국어문학을 가르쳤다..펼쳐보기
[출처]
【名品】 벗♡ 쉼터 幸福 사랑http://cafe.daum.net/gf52es
선인의 경험이 깃들어 있고, 지혜와 지식의 보고인 고사성어. 우리 생활과 밀접한 일상의 언어이기도 하다. 고사성어에 얽힌 역사적 사실과 문화적 배경을 철저한 조사와 고..펼쳐보기
| [사자성어] 정문일침(頂門一鍼) |
| 어조사 자 · 옛 고 · 꽃부리 영 · 수컷 웅 · 다할 진 · 풀 해 · 시 시 |
[뜻]
옛날부터 영웅은 모두 시를 알았다. 문무를 겸비해야만 진정한 영웅이라는 말이다.
[출전]
쑥과 가시나무는 백 척 터전에 헛되이 쌓였는데
주흥이 돋아 대풍사를 불렀었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 말하지 마소
자고로 영웅은 모두 시를 알았다오
蒿棘空存百尺基
酒酣曾唱大風詞
莫言馬上得天下
自古英雄盡解詩
- 임관(林寬) 〈가풍대(歌風台)〉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은 회남왕(淮南王) 경포(黥布, 영포(英布))의 반란을 평정하고 돌아가는 길에 고향인 패현(沛縣)에 들러 고향 사람들에게 주연을 베풀었는데, 주흥이 돌자 천하를 손에 넣은 감회가 솟구쳐 〈대풍가(大風歌)〉를 지어 불렀다. 사람들은 한고조 유방이 노래 부른 것을 기념하여 누대를 짓고 이를 가풍대(歌風台)라 불렀다. 당나라 때 사람 임관은 〈가풍대〉라는 시를 지어, 유방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무력에만 의존한 무부(武夫)가 아니라 시를 이해할 줄 아는 문무를 겸비한 영웅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고조 유방의 〈대풍가〉는 다음과 같다.
큰바람 이니 구름이 날리네
위엄을 천하에 더함이여, 고향에 돌아왔도다
어떻게 용사를 얻어 천지 사방을 지킬꼬
大風起兮雲飛揚
威加海內兮歸故鄕
安得猛士兮守四方
[용례]
정치나 사업을 하려면 문학을 공부해야 한다네. 문학에는 인생이 담겨 있어. 인생을 알아야 정치도 사업도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나. 그래서 예로부터 ‘자고영웅진해시’, 즉 영웅치고 시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네.
〖역사 · 문화 자료─경포의 반란〗
경포(黥布)는 육(六, 안휘성(安徽省) 육안시(六安市) 북쪽) 사람으로 원래 성은 영(英)씨이었다. 그가 젊었을 때, 어떤 길손이 그의 상을 보고 형벌을 받은 후에 왕이 될 상이라고 말했다. 그가 장년이 되었을 때 남의 죄에 연좌되어 먹을 넣는 형벌을 받게 되었는데, 경포는 흔연히 형벌을 받아들였다. 경(黥)이란 얼굴에 죄명을 자자(刺字)하던 형벌을 말하는데, 그로부터 그는 경포라 불리게 되었다. 경포는 죄수가 되어 여산(麗山, 섬서성(陝西省))으로 호송되었는데, 그곳에는 수십만의 죄수가 있었다. 경포는 죄수 가운데 반장이나 호걸들과 사귀다가 친한 사람들을 이끌고 도망하여 강수(江水, 장강) 근방으로 가서 도둑질을 일로 삼았다.
진섭(陳涉)이 봉기하자 경포도 무리들을 이끌고 일어나 군사 수천 명을 모았다. 진섭이 죽고 항량(項梁)이 일어나 강동과 회계(會稽, 절강성(浙江省) 소흥시(紹興市))를 평정하고 강수를 건너 서쪽으로 진출하자 경포도 항량에게 귀복했다. 경포는 항량이 회수(淮水)를 건너 각지를 평정할 때 많은 공을 세웠다. 항량은 초(楚)나라 왕족의 후예를 찾아 회왕(懷王)으로 옹립했는데, 회왕은 항량을 무신군(武臣君)으로 봉하고, 경포를 당양군(當陽君)으로 봉했다.
BC208년, 항량이 진(秦)나라 장군 장한(章邯)에게 패하여 전사했고, 장한은 승세를 몰아 조(趙)나라를 포위했다. 초의 회왕은 송의(宋義)를 상장에, 항우(項羽)를 차장에, 범증(范增)을 말장으로 임명하여 원병을 파견했다. 이때 경포도 장군으로 참전하여 송의의 지휘를 받았다. 그런데 항우가 내부 반란을 일으켜 송의를 죽이고 상장군이 되자 경포도 항우의 지휘 아래 들게 되었다. 항우는 경포에게 명하여 하수(河水)를 건너 진(秦)을 치게 했는데, 경포는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으므로 항우는 이에 힘입어 진군을 쳐부술 수 있었으며, 경포가 적은 군사로 자주 대군을 깨뜨린 덕에 제후들의 군사가 초나라에 귀복했다. 경포는 또한 항우의 명령을 받고 장한의 군대를 야습하여 진나라 군대 20여만 명을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항우가 함양(咸陽)에 입성하는 과정에서 경포는 언제나 선봉의 역할을 맡았다. 항우는 초패왕(楚霸王)이 되어 제후를 봉하면서 경포를 구강왕(九江王)으로 삼고, 육(六)에 도읍하도록 했다.
BC206년, 제후들이 항우의 지휘 아래서 떠나 각기 자기 봉국(封國)에 취임하였는데, 이때 항우는 회왕을 제위에 옹립하여 의제(義帝)로 받드는 한편, 비밀리에 구강왕 경포에게 명하여 의제를 치게 했다. 경포는 부하 부장을 보내 의제를 살해했다. 그런데 이즈음을 기점으로 하여 경포의 행동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전처럼 항우의 명령에 절대 복종을 하지 않고 저울질을 하는 듯한 행동을 보인 것이다. 그 무렵 제왕(齊王) 전영(田榮)이 초나라를 배반하자 항우는 구강에서 군사를 징발했는데, 구강왕 경포는 병을 칭하며 나가지 않고 부장에게 병사 수천 명을 인솔해 보냈다. 유방의 한(漢)나라가 팽성(彭城)에서 초군을 깨뜨렸을 때도 경포는 역시 병을 칭하고 초나라를 돕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에 항우는 자기편으로 믿을 만한 사람은 경포뿐이었으며, 앞으로 경포의 재능을 써먹어야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경포를 치지 않았다.
한왕(漢王) 2년(BC205), 유방은 팽성의 싸움에서 패하고 후퇴하면서, 경포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계획을 세우고 알자(謁者, 빈객을 주인에게 인도하거나 문서를 수발하는 직책, 요즘의 비서)인 수하(隨何)를 사자로 파견했다. 수하는 어렵사리 경포를 만나 설득에 성공한다. 마침 초나라의 사자도 경포를 찾아와 출병을 종용하고 있었는데, 경포는 초나라의 사자를 죽이고 군사를 동원하여 초나라를 공격했다. 초나라는 항성(項聲)과 용저(龍且)를 보내 경포를 쳐부쉈다. 경포는 항우의 공격을 피해 수하와 함께 샛길로 한나라로 갔다.
한왕 3년(BC204), 경포가 한나라에 도착했을 때 유방은 교의에 몸을 기대고 발을 씻기면서 경포를 불러 인견했다. 경포는 유방의 무례함에 화가 나 한나라에 온 것을 후회하고, 자결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숙소에 들어가 보니 숙소가 유방의 것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좋았다. 경포는 이런 특별 대우에 마음이 녹아 사자를 보내 구강에 숨어 들어가게 했다. 하지만 초나라가 이미 구강의 군대를 장악하고, 배신자 경포의 처자를 모두 살해한 뒤였다. 경포의 사자는 경포의 옛 친구와 신하들을 규합하여 수천 명을 이끌고 한나라에 귀순했다.
한왕 4년(BC203) 7월, 유방은 경포를 회남왕(淮南王)으로 봉하고 함께 항우를 쳤다. 경포는 구강에 들어가 대사마(大司馬) 주은(周殷)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함께 해하의 전투에 참전시켜 초나라를 깨뜨리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항우가 죽고 천하가 평정된 후, 경포가 회남왕으로서 한고조 유방에게 신하의 도리를 다하며 평화롭게 지내던 도중, 그를 모반의 길로 달려가게 만든 일이 발생했다. 바로 고조의 황후 여후(呂后)가 양왕(梁王) 팽월(彭越)을 죽인 후, 그 시체를 소금에 절여 한 그릇을 보내온 것이다.(▶ 석권(席卷) 참조) 마침 사냥을 하고 있던 회남왕 경포는 다음은 자기 차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껴 은밀히 군사들의 대오를 정비하고 이웃 고을에도 위급함을 알렸다.
경포에게는 총애하는 미희가 있었는데, 병이 나서 의사를 찾아 치료를 받고 있었다. 의사의 집 맞은편에 중대부(中大夫) 분혁(賁赫)이 살고 있었다. 본래 경포의 시중(侍中)이었던 분혁은 그 여인에게 선물을 하고, 때로 의사의 집에서 함께 술도 마셨다. 상사의 부인에게 아첨을 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고, 특히 출세를 꿈꾸는 사람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 아닐까? 당연히 총희는 분혁에 대해 좋은 말을 했고, 경포는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하여 분혁을 체포하려고 했다. 분혁은 장안(長安)으로 도망하여 고변했다. 한고조 유방이 사자를 보내 조사를 하자, 경포는 분혁의 일족을 멸하고 군사를 들어 모반을 일으켰다.
한고조 유방은 등공(滕公)의 추천을 받은 계략에 능한 설공(薛公)에게 자문을 구했다. 설공이 대답했다. “경포가 상책으로 나오면 산동(山東)은 한나라의 영지가 되지 못할 것이며, 중책으로 나오면 승패는 미지수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책으로 나오면 폐하는 베개를 높이 베고 편안히 주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산동은 진(秦) · 한(漢) 때에 효산(崤山) 혹은 화산(華山)의 동쪽을 가리키는 말로, 관동(關東)이라고도 하며, 진나라를 제외한 전국(戰國) 6국의 고지(故地)를 말한다.
유방이 물었다. “어떤 것을 상책이라 하는가?” “동으로 오(吳)를 취하고, 서쪽으로 초(楚)를 취하고, 제(齊)를 아우르고, 노(魯)를 빼앗아 격문을 연(燕)과 조(趙)에 보내고, 굳게 그 범위를 지킨다면 산동은 한나라의 영지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어떤 것을 중책이라고 하는가?” “동으로 오를 취하고, 서쪽으로 초를 취하고, 한(韓)을 아우르고 위(魏)를 취하여 오창(敖倉)의 양곡을 확보하고, 그 들머리를 막는다면 승패는 미지수라 하겠습니다.” “어떤 것을 하책이라고 하는가?” “동으로 오를 취하고, 서쪽으로 하채(下蔡, 안휘성)를 취하고, 치중(輜重)을 월(越)로 돌려 스스로 장사(長沙)로 돌아간다면 폐하는 베개를 높이 베고 편안히 주무시게 되며 한나라는 무사태평할 것입니다.” “그는 어떤 방책으로 나오겠는가?” “하책으로 나올 것입니다.” “어째서 상책과 중책을 버리고 하책으로 나올 것이라 판단하는가?” “경포는 본디 여산의 도적이었습니다. 자기 힘으로 왕의 자리에 오르긴 했으나 모든 것은 자기 일신을 위해 한 일이며, 뒷날 인민들의 만세를 위해서 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책을 가지고 나올 줄로 압니다.” 한고조 유방은 몸소 군사를 이끌고 출병했다.
사실, 경포가 두려워한 것은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과 양왕 팽월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다 세상에 없으므로 한번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고 모반을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하지만 경포는 설공의 예측대로 먼저 동쪽의 형(荊, 오(吳)의 땅)을 쳤다. 형왕 유가(劉價)는 패해 부릉(富陵, 강소성(江蘇省) 홍택현(洪澤縣) 서북)으로 달아나다 죽었다. 경포는 형 땅을 무너뜨리고, 회수를 건너 초나라를 깨뜨리고, 유방의 군대와 기(蘄, 안휘성 숙주시(宿州市) 서남)의 서쪽 추(甀, 안휘성 숙주시 남쪽)에서 맞부딪쳤다. 경포의 군사는 정예부대였고, 그 포진법은 항우의 군진에 비해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정연했다. 유방은 멀리서 경포를 바라보며 소리를 질렀다. “무엇이 괴로워 모반을 하였는가?” 경포가 대답했다. “황제가 되려는 것뿐이다.”http://cafe.daum.net/gf52esr^
하지만 경포는 유방의 군대에 패해 강남으로 달아났다. 장사(長沙)의 애왕(哀王)이 사자를 보내 경포를 속여 초나라로 유인해 데려갔다. 경포는 일찍이 파군(番君)의 딸을 아내로 삼았었는데, 애왕이 파군의 아들이었으므로 두 사람은 처남 매부 관계였다. 하여 경포는 안심하고 사자를 따라 파양(番陽, 강서성 파양현)에 갔다가 자향(玆鄕)의 농가에서 살해당했다. 한왕 12년(BC195)의 일이었다. 같은 해, 한고조 유방은 영포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화살에 맞은 부상으로 인해 사망했다.
경포는 자기와 같은 창업 공신인 팽월과 한신이 한고조 유방에게 팽(烹)을 당하자 그 화가 자기에게까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모반을 일으켰는데, 사마천은 《사기(史記) 〈경포열전(黥布列傳)〉》에서 경포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을 내리고 있다.
「몸은 형벌을 당했으면서도 그 출세는 얼마나 빨랐던가? 항우가 구덩이에 묻어 죽인 사람은 그 수가 천을 헤아리고 만을 헤아리는데, 경포는 항상 잔학한 일에 앞장섰었다. 공이 제후 중에 으뜸이어서 왕이 되었지만, 자신도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화는 사랑하는 여자로부터 나왔고, 질투에서 환란이 생겼으며, 마침내는 나라를 망치고 말았다.」
[글]
김성일(金聖日)은 문학박사. 전라북도 도청에서 국제정책전문위원으로서 중국과의 국제교류 업무를 담당하는 한편, 단국대학교, 전남대학교,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백석대학교 등에서 중국어문학을 가르쳤다..펼쳐보기
[출처]
【名品】 벗♡ 쉼터 幸福 사랑http://cafe.daum.net/gf52es
선인의 경험이 깃들어 있고, 지혜와 지식의 보고인 고사성어. 우리 생활과 밀접한 일상의 언어이기도 하다. 고사성어에 얽힌 역사적 사실과 문화적 배경을 철저한 조사와 고..펼쳐보기
| [사자성어] 정문일침(頂門一鍼) |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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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멋진인연 작성시간 26.06.21 카페지기님께 ~
방문을 할때마다 지식 게시물 감사를 드려요^^
환절기 건강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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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엣랑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22 new
방가요^^
바쁜 일과 중에함께 참여를 해주셨서 감사를 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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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淸風明月 人生 작성시간 26.06.21 울 대박 공감 정보 ㄳ 를 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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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엣랑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22 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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