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7년 최초의 전기점등
1887년 3월 6일 저녁. 어스름이 짙게 깔린 경복궁 내 건청궁. 작은 불빛 하나가 깜빡깜빡 하는가 싶더니 처음 보는 눈부신 조명이 갑자기 주위를 밝혔습니다. ‘아~!’ 주위에 모여든 남녀노소들이 모두 감탄사를 터트렸습니다. 마침내 우니라라 최초로 전등이 점화된 것입니다. 에디슨이 백열등을 발견한 지 고작 8년 만에 서울에 전등이 켜졌으니 당시로는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전기는 문명의 총아라 해도 과언이 아니어서 전등 가설에는 큰 돈이 들었습니다. 궁정에 제일 먼저 전기불이 켜진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죠. 향원정 연못가에 세워진 발전설비는 당시 동양에서 가장 성능이 뛰어난 것으로, 16촉광 백열등 750개를 켤 수 있는 규모였습니다. 이때 사용된 발전기의 조립, 설치, 전등 가설은 미국 에디슨 전기회사으 윌리엄 멕케이(William Mckay)라는 전기기사가 수행하였습니다. 향원정 연못에서 물을 얻어 석탁을 연료로 발전기를 돌렸는데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어찌나 우렁차던지 마치 천둥이 치는 듯 했다 합니다. 발전기 가동으로 연못 수온이 상승해서 물고기가 Ep 죽음을 당한 후로, 전등을 일러 물고기를 끊인다는 뜻인 ‘증어(蒸魚)’라 부르기도 했구요. 또 성능이 아직 완전치 못한 탓에 자주 불이 꺼지고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게 꼭 건달 같다 해서 우스갯소리로 ‘건달불(乾達火)’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1898년 한성전기회사 설립
일제시대의 잘못된 역사교육 탓인지 최초의 전력사업도 일본이 도와준 게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한 후 전력사업을 독점한 결과 역사와 전통이 왜곡됐기 때문이지요. 일본이 부산ㆍ인천ㆍ원산 등의 개항지를 중심으로 소규모 전력사업에 참여한 것은 1901년부터입니다. 반면에 우리나라 최초의 전력회사인 ‘한성전기회사’는 1898년 고종황제가 미국인 콜브란(Colblan)의 조언 아래 이근배, 김두승, 두 사람의 이름으로 설립한 우리의 민족기업입니다. 한성전기회사는 곧바로 서울시내의 전등ㆍ전차ㆍ전화사업 운영권을 허가 받아 사업을 시작합니다. 경복궁에서의 첫 시등(始登)이 조그만 자가발전설비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한성전기회사의 사업은 중앙의 발전소에서 배전설비를 이용하여 일반 가정과 사무실에 전기를 공급하는 본질적인 전력사업이라는 것에 의의가 있습니다. 마침내 전기의 상업화가 가능하리만큼 전력생산이 크게 늘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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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최초의 전차개통
1899년 5월 4일은 전기를 이용한 기차, 즉 전차가 처음으로 동대문과 홍화문(지금의 서대문, 옛 서울고등학교 자리) 구간을 시험 운행한 날입니다. 드디어 우리나라에도 근대적 대중교통이 시작된 것이지요. 인천과 노량진 간에 경인철도가 개통되기 4개월 전의 일. 당시 서울의 교통수단이 인력거와 자전거 정도였으니 가히 대중교통의 혁명이라 불릴만한 사건이었습니다. 20일부터 시민들의 탑승이 시작되었는데 차비는 엽전 5전 당시의 전차는 일정한 정거장이 없었습니다. 승객은 골목 어귀에서 기다리다가 손을 번쩍 들어 전차를 세우고 승차하면서 요금을 지불했지요.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하던가요? 운행 6일만인 5월 26일 예기치 못한 사고가 일어납니다. 파고다공원 앞에서 한 어린이가 달리던 전차에 치여 생명을 잃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은 개화문물에 은근한 반감을 품고 있던 백성들의 폭동을 불러일으켜 전차가 불태워지고 마침내 8월 9일까지 운행이 전면 중지되기에 이릅니다. 이처럼 전차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장안의 새로운 명물로 등장한 반면, 을미사변으로 시해된 명성황후가 묻힌 홍릉을 자주 찾았던 고종황제는 ‘황실전용전차’를 꼭 상여처럼 생겼다. 해서 잘 이용하지 않았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옵니다.
1900년 최초의 민간전기 점등
한성전기회사는 전등사업을 본격화합니다. 동대문 발전소에 200kW 발전설비를 설치. 전차와 전등에 전력을 공급한 거지요. 멀리 동대문이 보이는 초가집 뒤쪽 높이 솟은 굴뚝(동대문 발전소 굴뚝)d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그 앞길로 조랑말 몰고 삿갓 쓴 행인들이 오가는 당시의 사진은 개화문물과 전통이 어우러진 구한말의 시대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900년 4월 10일에는 단군 이래 처음으로 길거리에 조명용 전등이 등장합니다. 전차를 야간에 운행시키기 위해 민간조명용 전등을 설치한 것이죠. 비록 현대적 의미의 가로등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수천년 동안 해만 지면 길거리가 캄캄해지는 게 상식이었던 이 땅에서, 참으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1901년이 되면 전등 보급이 더욱 확대되기 시작합니다. 당시 진고개(지금의 충무로)에는 일본인 상가가 밀집해서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이곳에 민간조명용 전등 600개가 보급된 것이죠. 정부의 고관대작, 외국사절, 상인을 비롯한 수 많은 구경꾼들이 거리를 가득 메운 가운데 치러진 진고개의 점등식은 서울을 떠들썩하게 만든 성대한 이벤트였다고 합니다. 좁은 진고개 골목길과 초가집들 사이로 키 큰 나무처럼 비쭉 솟아오른 전봇대의 모습. 보고 또 봐도 감회가 새로운 우리의 옛 모습입니다.
1944년 대규모 수력발전
사업이 확장됨에 따라 한성전기회사는 1903년에 용산구 청암동 한강변에 용산발전소를 건설합니다. 250kW 발전기 2대로 운영된 이 발전소는 그 후 6번이나 시설을 키운 결과, 1938년 1월에 폐쇄될 때까지 서울에서 가장 큰 발전소로 이름을 떨치게 되지요. 1900년대를 지나면서부터 편리함과 효율성이 증명 되어, 이를 구내에 들여와 사업을 펼치는 전기회사가 한때는 60개나 될 정도로 성황을 이루게 됩니다. 전력사업은 계속 발전하여 1920년대가 되면서 전기회사의 난립과 무리한 사업확장 때문에 폐해가 속출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전기요금 인하와 전기사업 공영화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납니다. 전력 소비가 이제 본궤동 들어섰다는 이야기지요. 1930년대를 전후한 시기는 우리나라 전력사업 역사의 분수령이 됩니다. 대규묘 수력발전에 적합한 한국 북부 지역에 많은 수력발전소가 건설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1929년부터 1945년까지 부전강ㆍ장진강ㆍ허천강ㆍ압록강 수풍 등에 21개 발전소 약 160만kW의 수력발전 설비가 건설되어 우리나라 전체 발전 능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된 것이지요. 특히 동양 최대 규모인 60만kW 하이댐 방식의 수풍발전소와 22만V급이 동양 최초 초고압 송전시설은 당시 세계 전력사업계를 깜짝 놀라게 한 대규모 사업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1948년 5.14 단전
마침내 8.15 광복, 그러나 곧 38선으로 국토가 분단되고 반만년 동안 함께 울고 웃던 민족은 남북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해방 당시 우리나라 전력설비는 모두 해서 172만 2천kW 전력생산은 거의 수력에 의존한 실정이었고, 그나마 88.5%의 발전시설이 북한 지역에 치우쳐 있었지요. 남한 지역의 발전설비는 소규모의 수력과 영월, 당인리 등의 낡은 화력발전 설비가 전부였던 반면 북한 지역은 풍부하고 값싼 수력발전으로 전기 생산에 여유가 있었습니다. 남한이 공산품ㆍ기계류 등을 주로 장거리 초고압 전송선을 통해 필요 전기의 60% 정도를 빌려올 수 밖에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북한은 정치적인 이유를 트집잡아 1948년 5월 14일 정오를 기해 남쪽에 대한 송전을 일방적으로 중단해버리고 맙니다. 갑작스런 단전으로 인해 남한 지역은 큰 혼란과 괴로움에 봉착하게 됩니다. 가까스로 가동해오던 생산시설들이 속속 문을 닫고 일반 가정에도 3분제나 격일제로 송전을 하는 등 격심한 전력난에 빠지게 된 것이죠. 이 같은 어려움을 일제 강점기에서 조차 겪어보지 못한 것으로 한 나라의 경제와 살림살이를 정상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전력이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사실을 국민 모구가 뼈저리게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61년 3사 통합 한전창립
6.25전쟁을 거치면서 우리 경제기반은 완전히 황폐화되어 버립니다.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한 전후 상황에서 전력문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전력생산시설이 부서지다 보니 심각한 전력기근현상이 나타났고, 전력사업에도 만성적 적자운영이 되풀이된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획기적인 전환점이 마련됩니다. 1961년 마침내 한국전력주식회사가 발족한 것을 받아 1961년 7월 1일을 단행된 것입니다. 전력기근과 전력사업의 악순환을 이대로 방치해 두다가는 국가경제의 발전은 물론 인생에도 큰 차질을 줄 게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전력의 창립은 업체 난립으로 인한 과다한 전력손실ㆍ낮은 노동생산성ㆍ수지불균형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우리 전력사업이 성장궤도에 들어서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많은 자금력과 인력ㆍ기술이 동원되어야 하는 본격적 전원 개발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고 이를 통해 급속한 경제성장을 선도해야 하는 시대적 명제를 완성한 것이기도 했지요. 한국전력 창립은 곧바로 열매로 맺기 시작합니다. 전력생산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고 전력생산이 크게 늘어난 것입니다. 한전 창립 당시 36만 7천kW에 불과했던 발전시설 용량이 2012년 12월 현재 81,805MW로 늘어난 것이 단적인 증거라고 하겠지요.
1964년 농어촌 전화사업
1964년 4월 1일은 우리나라 전력사업 역사상 기념비가 된 날입니다. 이날을 기해 1948년 북한의 단전 이래 계속되던 제한송전 조치가 전연 해제 됐기 때문이죠. 특선전기, 격일제 송전 등으로 얼룩진 암울한 상황을 일거에 극복하는 결정이었습니다. 부산화력발전소에 설치된 6만 6천kW 용량 발전기 가동으로 최대 전력 49만kW, 전력예비율 5% 달성을 계기로 단행된 것이지요. 그러나 이 같은 무제한 송전은 3년이 지나 예비율이 0.9%로 떨어지자 다시 제한송전으로 바뀌게 되고 14개월 후에 다시 9만kW의 울산화력발전소 준공으로 원상회복되는 그 후 3차에 걸친 제한 송전의 우여곡절을 겪게 됩니다. 전력난 해소와 안정적 전력수급을 위해 1962년부터 66년까지 제1차 정원개발 5개년 수립ㆍ실행됩니다. 그 대표적 성과가 바로 농어촌 전화사업의 성공입니다. 사업을 시작한 1965년 말 농어촌 12%, 도시 51% 수준에 불과했던 전화율(電化聿)이 1979년이 되면 보급률이 전국 평균 96.7%로 급 상승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추진된 전화사업은 1987년이 되면 보급률이 99.8%에 이르러 명실공히 세계 제1의 전기보급률을 자랑하게 됩니다. 무인도나 인적이 닿지 않는 깊은 산속을 제외한 우리 국토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전기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1978년 원자력시대 개막
대규모의 효율적 전력생산과 함께 환경까지 생각하는 기술은 없을까? 그 같은 의문의 해결점으로 1978년에 등장한 것이 바로 원자력 발전입니다. 1978년 4월 10일, 경나 양산 고리에 58만 7천kW의 가압경수로형 고리 원자력 1호기가 준공됨으로써, 세계 21번째로 건설된 원자력 1호기는 우리나라 건설 사상 최대의 투자사업이었습니다. 인류가 개발한 가장 효율적인 발전방식이라 불리는 원자력 발전 사업은 이후 계속되고 있습니다. 1998년 9월, 한국표준형 원전 울진원자력 3호기가 준공되어 우리나라 원자력 발전설비는 총 14기, 1200만kW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제 3의 불’이라 일컬어지는 원자력 발전은 고속증식으로 기술을 거쳐 ‘영원한 에너지ㆍ핵융합로’시대로 향하는 최첨단 발전방식입니다.
이에 따라 한국전력은 원자력 발전에 대한 고유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합니다. 고리 1호기 건설로 시작된 원자력 발전 기술은 한국표준형 원전 개발로 이어지는데, 이는 안전성과 운전편리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킨 세계 최첨단의 원전입니다. 한국인의 운전관행과 국내 기술을 조화시킨 고유 모델 한국표준형 원전 기술은 이후 북한원전 건설의 주춧돌로 자리잡게 됩니다.
1996년 북한원전 개발
전력설비가 국민 1인당 1kW를 넘어선 것은 1997년 8월, 태안화력 3ㆍ4호기가 상업운전에 들어가고 발전설비 용량이 마침내 4천만kW를 돌파한 때부터입니다. 해방 당시 20만kW에 불과했던 것과 비교하면 무려 200배가 늘어난 셈이지요. 이처럼 눈부시게 발전한 전력생산 능력과 관련 기술은 북한원전 건설을 통해 갈라진 조국의 허리를 잇는 통일 사업으로까지 연결됩니다. 1996년 3월 한국전력은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0’에 의해 북한에 2개의 경수로를 공급하는 주계약자로 지정됩니다. 그리고 2년 10개월이 지난 1997sus 8월 19일에 북한 함남 신포시 금호지구에 북한원전 부지착공식을 거행합니다. 100만kW급 원전 2기를 공급하게 되는 이번 건설을 통해 안전하고 경제성 있는 한국 표준형 원전 기술을 세계에 과시하는 것은 물론, 북한과의 관계 개선으로 통일 기반을 조성하고 남북협력을 한발 앞당기는 중요한 발걸음을 딛게 된 것이죠.
자료출처 : 전기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