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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시절의 삽화

작성자tina11|작성시간26.06.13|조회수14 목록 댓글 0

                            소년 시절의 삽화   

 

글쓴이 :  故 구상 세례자 요한   ㅣ 시인

예수의 소년 시절의 이 일화를 전하는 루카복음은 이를 소개하기 앞서
그 성장 상태를 "아기는 날로 튼튼하게 자라면서 지혜가 풍부해지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저러한 예수의 소년기의 출중한 모습은 장성한 후 그가 공적 활동에서 

발휘한 인품이나 언동으로 미루어 보아도 넉넉히 짐작되는 바요,
한편 신탁으로 점지된 이 아해를 그의 양친이 얼마나 지극한 애정과
큰 소망을 가지고 키웠고 그 건강이나 교육에 유의하였으며
특히 종교적 훈도에 힘썼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다.

그래서 소년 예수는 옛 우리가 가정에서도 3,4세부터 민족의 

전승 설화들을 들려주고 천자와 통감과 사서삼경을 읽혔듯 일찍부터

구약의 설화를 익혔음은 물론 시편과 지혜서와 예언서 등을 따로 외웠을 것이다.
또 당시 예배소이며 학교인 회당에 다니면서 율법사들로부터 언어나 문자
또는 구약에 대한 주석 교육을 받았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또한 이러한 종교적 수련은 소년 예수에게 있어 그의 자질에 부합했을 뿐 아니라
그 탁월성을 드러내는 기회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저러한 소년 예수가 열두 살이 되던 해, 

이스라엘 민족이 에집트에서의 탈출을 기념하는 해방절에 

예년과 마찬가지로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명절을 지내러 올라갔다가 

행방불명이 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먼저 이해해 둘 것은 이스라엘의 율법으로는
남아 열두 살이면 성년이 되고 그 행동의 자유와 책임이 본인에게 속하게 되므로
소년 예수도 막말로 하면 한참 건방질 나이에 속해 있었다는 점이다.

이제 이야기의 줄기로 옮기면

 "명절의 기간이 다 끝나 집으로 돌아올  때에 어린 예수는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의 부모는 

아들이 일행 중에 끼어 있으려니 하고 하룻길을 갔다.
그제야 생각이 나서 친척들 가운데서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으므로 줄곧 찾아 헤매면서 예루살렘까지 되돌아갔다.
성전에서 그를 찾아보았는데 거기서 예수는 학자들과 한 자리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의 지능과 대답하는 품에 경탄하고 있었다."
고 하는데 앞서 말한바 성년이 된 예수가, 특히나 지적 탐구욕과 

진리에의 추구심이 강한 예수가 시골 회당의 율법사들에게서는

도저히 만족한 해답을 얻지 못하던 문제들을 가지고 성전에 모인

저명한 학자들에게서 그 지적 욕구를 마음껏 채우기에 정신이 팔려 
부모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일마저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그리 신기해 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반가워 어쩔 줄을 모르면서

 "예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웠느냐?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고 

마리아가 말했을 때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십니까? 라고 한,
얼핏 듣기엔 매정하고 퉁명스럽게까지 들리는 예수의 대답도 

그 장소와 환경과 앞서 말한 연령 등을 미루어 살피면 인간적 취향에서도 
나는 별로 이상 할 것이 없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소년 예수에게 있어서, 

아니 전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예수살렘 성전은

 '하느님 아버지가 계신 집' 즉 '아버지의 집'이라는 관념이 

철저히 박혀 있었을 것으로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일로서 부모의 힐난을 받을 건덕지가 없다고 

어느 소년이나 여겼으리라고 보기 때문이요.
또 저러한 자기 자신의 정당성을 제시하기 위한 항변과 같은 강력한 어조는 
보통 부모의 질책 앞에서 소년들이 변명 대신 사용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루카복음의 그 다음 대목인
"그러나 부모는 아들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였다"든가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라는 말을 

소홀히 하려거나 이 사건의 복음 삽입 자체가 예수의 신성에 대한
전개라는 것을 몰라서 하는 풀이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우리의 실제 가정 경험과 엇비슷한 소년 예수의

일화 자체를 너무나 신학적으로 치우쳐 해석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임으로써 어버이와 자식의 참된 관계란 어떤 것인가?
실상 동물과 같은 본능적 사랑 이외에 다른 게 무엇인가?라는 등의

심각한 의문에 부딪쳐 마침내 어버이와 자식도 서로 하느님의 자손으로서 

어버이는 자식을 하느님에게서 맡았고,

자손은 하느님이 삶을 어버이를 통해 주었다는 자각과 신뢰 속에서 

새로 맺어져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이 사건을 음미하는 데 
더욱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 복음은 

"예수는 부모를 따라 나자렛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다"고 전하고 

또다시 반복하여
"예수는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면서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더욱 받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렇듯

 '이웃의 총애'가 첨가된 것은 소년 예수가 저렇게 유다른 자질을 가지면서도 

괴벽하거나 유난스럽지 않았음을 알려 주고 있다.

- 출처 : 구상 신앙 에세이 「그분이 홀로 가셨듯이」中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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