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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작성자tina11|작성시간26.06.19|조회수23 목록 댓글 0



예수님은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글쓴이 : 정 세라피아 수녀님 ㅣ성 베네딕도수녀회 마음의 창이요, 거울인 눈은 무게 7그램, 지름 2.4 센티미터의 동그란 탁구공만 하며 발생학적으로나 해부학적으로 보아 뇌의 일부분이라고 한다. 세상을 보는 것은 뇌이다. 눈이 물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뇌(마음)가 세상을 보는 것이어서 눈을 보면 곧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들 한다. 힘차고 예리한 눈, 초점을 잃은 눈, 희망과 기쁨으로 빛나는 눈, 만족과 고마움으로 가득찬 눈, 수심 가득한 눈, 인자한 눈, 독기 서린 눈, 총기로 반짝이는 눈…. 모두가 내면 세계의 반영이다. 복음에서 소경은 육신의 눈이 먼 것이 아니라 영혼의 눈이 어두웠던 것 같다. 눈이 뜨이면서 사람도 알고, ‘걸어다니는 나무’란 표현도 쓰기 때문이다. 이 눈뜬 장님은 바로 제자들이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니 눈뜬 장님 이야기가 생각난다. 수십 년 동안 장님이었던 사람이 길을 가다 문득 눈이 떠져 천지만물을 밝히 보게 되었다. 기뻐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제 집을 못 찾아 길에서 울고 만다. 울고 서 있는 그에게 내려진 처방은 ‘도로 눈을 감아라’였다. ‘눈에는 두 가지가 있다. 외안, 곧 육체의 눈 그리고 내안, 곧 마음의 눈이 그것이다. 육체의 눈으로는 사물을 보고, 마음의 눈으로는 이치를 본다. 사물치고 이치 없는 것은 없다. 장차 육체의 눈 때문에 현혹되는 것은 반드시 마음의 눈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그렇다면 쓰임새가 온전한 것은 마음의 눈에 있다 하겠다. 또 육체의 눈과 마음의 눈이 교차되는 지점을 가려서 옮기게 되면, 육체의 눈은 도리어 마음의 눈에 해가 된다.’ 복음에서 소경이 눈을 뜨는 것과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육체의 눈이 떠지고, 마음의 눈이 떠지고, 영의 눈이 점차 떠진 소경의 치유 장소는 마을 밖이다. 예수께서는 고쳐주신 뒤에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당부하신 말씀은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였다. 그 마을은 벳사이다였다. 예수께서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라고 탄식하신 그 동네, 많은 기적들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던 그 도시이다. 행여 겉모습에 현혹된 육신의 눈이 마음의 눈과 영혼의 눈을 멀게 할까 염려하셨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야말로 육신의 눈이 멀면 불편할 뿐이지만 마음의 눈이 멀면 대책이 없다는 말이 맞다. 우리의 생명이 눈을 뜸에서 시작하고, 눈을 감으면서 끝이 난다면 본다는 것이 참 중요한 일이나, 가려서 보아야 하고 절제해서 보아야 하겠다. 마음으로, 또 영적으로 눈을 뜨지 못하면 참으로 살아 있다고 말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하시면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며 내 눈이 병들면 온몸이 어두울 것” 이라고 하신 것이리라. 소경에게 두 번씩이나 손봐주신 예수님, 저도 눈뜨게 손 좀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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