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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작성자tina11|작성시간26.06.05|조회수1 목록 댓글 0


우상 숭배 나무를 쓰러뜨리는 성 보니파시오(Bonifatius)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그리스도의 양떼를 지키는 충실한 목자
          말씀자료 : 이기양 요셉 신부님 ㅣ 서울대교구 오늘은 독일의 사도로 알려진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보니파시오 성인은 독일 선교를 위해서 일생을 헌신하신 분입니다. "그곳은 이교도적 생활 방식이 지배적이었다. 그가 그곳에서 본 그리스도교는 완전한 이교로 타락한 것이었으며 오류와 뒤섞인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주로 성직자들에게 그 책임이 있었는데 그것을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데다가 정신이 해이했기 때문이며, 때로는 그들의 주교에게 순명하고 있는 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어떤 경우에는 그들의 신품 자체까지도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722년 로마에 보고된 독일 교회에 관한 보고서의 내용입니다. 교황은 보니파시오 사제에게 독일 교회의 선교와 개혁을 지시합니다. 특히 로마 교회식으로 세례를 줄 것과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로마교회의 자문을 구할 것을 강조하면서 교황은 '빈프리트'라는 이름 대신에 로마의 순교자인 '보니파시오'라는 새로운 이름을 그에게 지어줍니다. 이때부터 보니파시오는 본격적으로 독일 선교에 뛰어들게 되지요. 원래 보니파시오는 영국 태생으로 675년경 영국 워섹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주로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너슬링 베네딕도회에 입교하여 30세에 사제 서품을 받은 그의 학문과 웅변력은 수도원 밖에까지 알려지게 됩니다. 보니파시오는 영국에서의 명성보다는 선교사가 되기를 희망하였지만 716년의 프리즈란트 선교는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당시 그곳은 라드보트 공작의 방해로 그리스도교가 배척당하고 있었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보니파시오의 선교는 거의 불가능하였던 것이지요. 너슬링 수도원으로 돌아간 그는 717년에 수도원장이 사망하자 후계자로 선출되지만 이를 거절하고 이듬해 교황 그레고리오 2세를 알현하기 위해 로마로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교황으로부터 독일 교회의 선교 사명을 받고 보니파시오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게 되지요. 그는 우선 튀링겐으로 가 지식인들에게 설교하고 선교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고, 722년에는 가장 이교도지역인 헤센으로 가 아뫼네부르크에 베네딕도회의 최초의 수도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는 등 선교 활동에 성공을 거두자, 교황은 보니파시오를 로마로 불러들여 주교로 서품하고 교회의 법령집과 독일의 모든 수도자들과 관리들에게 보내는 추천서를 써주게 됩니다. 이 추천서는 그의 독일 선교활동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특히 프랑크 왕국의 재상인 카알 마르텔의 보호를 받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보니파시오는 카알 마르텔의 보호를 받으며 723-725년에 제2차 헤센 선교에 나섰는데 이 때 그는 가이스마르에서 이교도들이 신성시하고 두려워하는 떡갈나무를 베어 경당을 짓는데 사용합니다. 이방신앙의 대상이었던 떡갈나무를 통하여 그리스도교의 우의를 드러내 보인 보니파시오는 이방인들을 모아들이는데 성공하였고, 이 사건은 개종자들이 크게 확산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731년 신임 교황이 된 그레고리오 3세는 보니파시오를 명의 대주교로 승품시키고 창설될 독일 지역의 주교들을 서품할 권한을 주었습니다. 737년 세 번째로 로마를 방문하였을 때 교황은 그에게 독일 교회 설립을 위임하면서 독일 주재 교황 특사로 임명하였습니다. 바이에른의 잘츠부르크 교구, 레겐스부르크 교구, 프라이징 교구를 설립한 보니파시오는 740년에 그의 주재로 최초의 바이에른 교회 회의를 주재했으며 이듬해 몇 개의 다른 교구들과 하이덴하임에 수도원을 설립하고, 744년에는 풀다에도 수도원 설립합니다. 특히 보니파시오에게 있어 풀다는 영성적인 쇄신의 장소였으며 선교회의의 중요한 중심지요, 독일에서 종교적이고 지성적인 생활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742년 쇠퇴 일로에 있는 프랑크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제1차 게르만 민족 종교회의가 742년 4월 21일에 개최되었고 또 다른 교회 회의가 이듬해 3월 1일 리프티나에서 개최되었습니다. 744년에는 피핀 3세가 스와송에서 왕국 전체를 위한 교회 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여기서 보니파시오는 프랑크 왕국 주재 교황 대리가 되었습니다. 보니파시오는 쾰른에 자신의 대 주교좌를 설립하고 싶어했지만 쉽지 않았지요. 왕궁의 모든 주교들이 참석한 747년에 개최된 교회 회의에서 보니파시오는 이들의 신앙과 충성의 고백으로 로마 교회와 일치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보니파시오의 이러한 노력은 어려움을 겪게 되고 카알 피핀 3세가 유일한 왕이 되면서 보니파시오는 마인츠의 대주교가 되지만 보니파시오의 여러 제안을 왕이 꺼려하였으므로 보니파시오의 권위는 점차 하락하게 됩니다. 대주교직을 사임한 보니파시오는 프리즈란트에서 색슨족에 대한 선교 개혁을 시도하여 큰 성과를 거둡니다. 그러나 754년 6월 5일 성령강림대축일에 도쿰 근처의 보르네 강변에서 견진 성사를 준비하던 중 프리즈란트 이교도들의 습격을 받아 그의 동료 52명과 함께 살해되어 그의 유언대로 유해는 풀다로 옮겨져 안장됩니다. 성인은 1874년 비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보니파시오는 독일교회가 로마교회와 일치하게 하기 위해서, 또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를 위해서 두 가지 원칙을 따릅니다. 첫째는 로마 교회와 일치를 이루고 있는 주교에 대한 성직자들의 순명 정신 회복이었고, 둘째는 베네딕도 수도회의 형식을 가진 기도의 집을 많이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보니파시오의 노력으로 독일은 로마와 밀접히 일치된 조직으로 변화되었고 프랑크의 성직자를 개혁시키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성인은 선교 활동을 지속시키기 위해 여러 수도원을 설립하였는데 그가 세운 수도원들은 많은 주교와 교수들을 배출함으로써 프랑크 교회 교육과 신앙을 크게 향상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음은 그리스도의 양떼를 지키는 충실한 목자가 되기를 한결같이 기도해온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의 편지 일부분입니다. "고통과 고뇌의 날들이 우리에게 닥쳐온 이때, 주님의 날이 임할 때까지 굳건한 자세로 전투에 임합시다. 우리 선조들과 함께 영원한 유산을 나누어 받을 수 있도록 그들의 거룩한 법을 수호하기 위해 하느님의 뜻이라면 죽음까지 불사합시다. 짖지 못하는 개가 되거나 말 못하는 양치기가 되지 맙시다. 늑대가 가까이 올 때 도망쳐 버리는 삯꾼이 되지 말고, 그리스도의 양떼를 지키는 충실한 목자가 됩시다. 성 그레고리오께서 당신의 사목 지침서에서 제시하신 것과 같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한, 잘난 사람에게나 못난 사람에게나 가난한 이에게나 부자에게나 모든 계층과 연령의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하느님의 온갖 뜻을 꾸준히 전파하도록 합시다." (Ep. 78: MGH, Epistolae, 3, 352. 354) 교회는 세상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면서 이 현세 생활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유혹의 물결에 시달리는 큰 배와 같으며 우리는 이 배를 포기할 수 없고 어떠한 환경에서라도 꾸준히 조종해야 한다는 성인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복음과 가톨릭 교회의 정통을 따라야 함을 보여준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을 지내면서 고통 속에서 더욱 한결같아야 하는 우리의 믿음 생활을 다시 한번 되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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