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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의 사랑스런 도반, 바르나바

작성자tina11|작성시간26.06.11|조회수2 목록 댓글 1

     

    바오로의 사랑스런 도반, 바르나바

 

말씀자료 : 최종근 파코미오 신부님ㅣ성베네딕도수도회 왜관수도원

사도행전 4장은 초대 교회 예루살렘 공동체 생활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32절). 
그러면서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바르나바 사도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인으로, 사도들에게서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나바라는 별명을 얻은 요셉도, 자기가 소유한 밭을 팔아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36-37). 
열두 사도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사도라는 호칭으로 불러졌던 성 바르나바는 

후대의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의 이른바 칠십두 제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도보다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한 그를 가리켜,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고, 
그 덕분에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사도 11,24) 라며 
사도행전은 바르나바를 자랑스럽게 소개합니다.

타르수스의 사울, 키프로스의 바르나바, 
둘 다 유다 땅 밖 이방인들 사이에서 살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당시 그리스 로마 문화 속에서 자라고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으니, 
이방인들에게 선교하기에 적격자들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특별한 인연은 위로의 아들답게 바르나바의 착한 마음, 

너그러운 마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회개하고

 아직 얼마 안되어 사도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을 때, 바르나바가

사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의 활약상을 소개해주었습니다(사도 9,27). 

그 뒤에도 바르나바는 고향 타르수스에 묻혀 지내고 있는 

바오로를 안티오키아로 데리고 와서는 

“만 일 년 동안 그곳 교회 신자들을 만나며 
수많은 사람을 가르쳤습니다.”(사도11,26). 

그무렵 유다 땅에 기근이 들자, 유다 땅의 신자들을 돕기 위해 바르나바와 

바오로가 안티오키아에서 헌금을 모아 예루살렘에 가서 전해 줍니다. 
사명을 마치고 이 두 사람은 다시 안티오키아로 돌아가는데, 
이때 바르나바의 사촌인 마르코를 데리고 돌아갑니다. 
안티오키아 교회는 그후 서기 45년경 바르나바와 바오로를

선교사로 임명하고 마르코를 조수로 붙여서 선교 여행을 떠나게 합니다.
제일 먼저 바르나바의 고향인 키프로스 섬을 시작으로 해서 
소아시아 지역을 도는데 이것이 소위 사도 바오로의 제1차 선교 여행입니다. 
이후에도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함께 예루살렘 사도회의에도 참석하고, 
그리고 다시 안티오키아에 돌아와서 사도회의의 결과를 전하며 
교회를 성장시켰습니다. 사도 바오로와 사도 바르나바, 
참으로 서로 소중한 인연이요 아름다운 동반자였습니다.

그러나 서기 51년 사도 바오로의 제2차 선교 여행 시작될 무렵,
그 아름다운 동행이 그만 깨져버렸습니다. 원인은 마르코 때문이었습니다. 
1차 선교 여행처럼 바르나바는 마르코도 데리고 가려고 했는데, 
바오로가 브레이크를 걸었습니다. 사도행전은 

교회의 치부가 될 수도 있는 그 사건을 다음과 같이 있는 그대로 전합니다: 
“바르나바는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도 같이 데려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바오로는 팜필리아에서 자기들을 버리고 떠나 

함께 일하러 다니지 않은 그 사람을 데리고 갈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감정이 격해져서 서로 갈라졌다. 

바르나바는 마르코를 데리고서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떠나갔다.”(사도 15,37-39). 

비록 이들은 서로 헤어졌지만, 나중에 각자 선교 여행하면서 만나기도 합니다. 
제2차 선교 여행 중에 바오로가 에페소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콜로사이인들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그 편지 말미에 마르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좋게 말합니다:
“나와 함께 갇혀 있는 아리스타르코스, 
그리고 바르나바의 사촌 마르코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이 마르코에 관해서는 여러분이 이미 지시를 받았으니, 
그가 여러분에게 가거든 잘 받아들이십시오.”(콜로 4,10).

이렇듯, 복음 선교에 대한 열정이 때로 서로 너무 과해서, 
인간적으로 섭섭하고 원망스러운 일을 겪었지만, 
그래도 결국 모두 화해하면서 함께 열심히 하느님 나라를 전했습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예에서도 보듯이, 

사도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춥고 배고프고 매맞는 것보다 

인간 관계 때문에 더 어려워 했던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덕이란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눈꼽만한 죄도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성덕이란 쌓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키우듯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능력이 모자라도 괜찮습니다. 
앓는 이들을 고쳐주거나 죽은 이들을 일으켜주지 못해도 괜찮고,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해주지도 못하고 
마귀들을 쫓아내지 못해도 괜찮습니다.(마태10,7). 
회개하고 뉘우치는 능력을 키울 수만 있다면, 
화해하고 용서하는 능력이 자라도록 애쓰고만 있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믿음과 봉사의 활동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됩니다.”(사도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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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라라라 | 작성시간 26.06.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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