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구간: 충주조정지댐-목계교-복여울교
탐방일자: 2025. 10. 16일(목)
탐방코스: 충주조정지댐-목계솔밭 캠핑장-목계삼거리-철새전망대-복여울교
탐방시간: 9시3분-12시45분(3시간43분)
동행 : 나 홀로

한강을 따라 걷는 길에 서원(書院)을 탐방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충주터미널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충주시금가면하담리로 이동해 하강서원(荷江書院)과 모현정(慕賢亭)을 둘러보았습니다. 모현정은 한강 탐방길에 들른 두 번째 누정으로, 그 첫 번째 누정은 강원도 정선의 구미정입니다.
여기 한강 우안의 하담리에 자리한 하강서원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 1549∼1615)을 배향하기 위해 1786년(정조 10)에 풍산홍씨 후손(後孫)들과 홍이상의 후유(後儒)들이 창건한 서원이고, 모현정 또한 1937년에 후손들과 후유들이 세운 정자입니다.
홍이상은 1573년(선조 6)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예조와 호조의 좌랑, 이조참의 등을 역임하였으며, 임진왜란 때는 왕을 호종하였고,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대사성에 올랐습니다. 이후 성혼(成渾, 1535∼1598)을 위해 변명하다 체직(遞職)되기도 하였고, 광해군 때는 대사헌, 개성 유수 등을 지냈으며, 저서 『모당유고(慕堂遺稿)』를 남겼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전하고 있습니다.
하강서원은 하강단소와 강당이 벽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왼쪽의 하강단소는 겹처마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되어있고, 오른쪽의 강당은 홑처마 팔작지붕에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되어있으며, 중앙의 3칸에는 넓은 우물마루의 대청을 두었고, 양쪽에는 각각 1칸의 온돌방이 있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소개되어 있는데, 문이 닫혀 있어 안으로 들어가서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하강서원에서 백m 남짓 떨어져 나지막한 사휴봉에 자리한 모현정은 그간 강을 따라 걸으며 들렀던 여러 누정과 달리 따로 방을 들이지 않고 마루만 놓여 있었습니다. 1937년에 창건되어 1974년 중수된 현재의 모현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의 단순한 구조로 되어있으며, 편액(扁額)도 1974년 중수 때 지은 ‘慕賢亭記(모현정기)’ 하나만 걸려 있어 참으로 단출해 보였습니다.
이 정자에 걸려 있는 편액이 하나 밖에 없는 것으로 보아 하강서원을 들른 사대부들은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강서원에서 모현정을 오가는 길에 눈에 띈 것은 길가의 시비(詩碑)였습니다. 시비에 실린 한시(漢詩)는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상묘(上墓)’ 등 5수와 김시양(金時讓, 1581-1643)의 ‘충주우음(忠州偶吟), 김창흡(金昌翕,1653-1722)의 ‘과하담(過荷潭)’, 홍양호(洪良浩, 1724-1802)의 ‘하담(荷潭)’ 등 총 8수입니다. 생존연대로 보아 김시양이나 김창흡은 하강서원이 건립되기 전에 하담을 방문했고, 홍양호와 정약용은 하강서원이 건립된 후에 서원을 찾아와 시를 지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참고로 홍양호는 풍산홍씨로 홍이상의 후손이고, 정약용은 여기 하담리가 선영을 모신 곳이자 외가인 풍산홍씨 일가가 살았던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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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강서원과 모현정을 둘러본 후 대기 중인 택시로 이동해 강 건너 충주조정지댐 우안의 삼거리에서 하차했습니다. 3만 원이 넘는 택시비가 아깝지 않은 것은 한강을 따라 걸으며 처음으로 서원을 탐방해서입니다.
9시3분 충주 조정지댐을 출발했습니다. 599번 도로를 따라 3-4분 북진하다 수달 카페를 막 지나 오른쪽의 자전거길로 내려섰습니다. 3.3Km 길이의 카누노선과 나란히 나 있는 자전거도로를 따라 걸으며 꽤 넓게 자리한 장천늪을 지났습니다.
길가에 세워진 안내판에 실린 애틋한 전설은 장천늪과 사랑바위에 관한 두 가지였습니다. 장천 늪에 관한 전설은 인색하고 몰인정한 천석꾼 장자가 시주하러 온 노승에게 행패를 부렸는데, 이를 본 며느리가 노승에 쌀 한 박을 시주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뒤를 돌아보거나 소리를 지르지 말라는 상좌승의 당부를 잊고 며느리가 자기도 모르게 굉음이 나는 곳을 돌아보며 소리를 지르자 장자는 물속으로 가라앉아 사라지고, 며느리는 안타깝게도 선 채로 부도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바위에 관한 전설은 아이를 못 낳은 며느리와 5대 독자 남편에 관한 사랑이야기입니다. 가문에서 손을 이으려고 들여놓은 첩을 남편이 찾지 않아 아기를 낳지 못합니다. 이를 본 며느리는 남편이 첩을 찾도록 스스로 장자못에 빠져 죽고, 남편도 따라 죽습니다. 그 후 장자못이 마르고 남녀의 성기를 닮은 두 바위, 즉 사랑바위가 생겨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전설이 민담과 다른 것은 제시할 만한 증거가 있다는 것인데, 장천늪과 사랑바위가 그 증거라 하겠습니다.
천변길을 지나 제방길로 들어서는 지점에 세워진 이정표에는 한강하구까지 남은 거리가 170Km로 표기되어 있었습니다. 앞으로 최소한 10번은 더 한강을 따라 걸어야 김포시 유도의 한강하구에 다다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가 그치고 구름이 걷히자 보이기 시작한 가을 특유의 파란 하늘이 작물들로 뒤덮여 온통 진초록색을 띠고 있는 제방 아래 밭들과 대비되었습니다. 판교-문경을 잇는 KTX 열차가 지나는 새하얀 아취형의 철교와 제천-영동 고속도로가 지나는 교량을 거쳐 다다른 세 번째 다리는 38번 국도가 지나는 목계대교입니다.
10시18분 목계솔밭캠핑장에 다다랐습니다. 3개의 대교를 밑으로 지나 천변길로 내려선 후 작은 다리를 건너 목계솔밭 캠핑장에 이르자 4동의 하얀색 몽고텐트(?)가 저를 반겼습니다. 목계솔밭캠핑장은 장자늪카누체험장을 중심으로 4개의 캠핑단지가 들어선 한강 강변의 캠핑사이트로, 총 167동의 텐트가 들어설 수 있습니다. 여기 캠핑사이트에는 분리수거장, 화장실, 샤워실, 흡연장, 매장, 개수대, 세척장, 주차장과 더프스테이션 등이 갖추어져 있고, 이것들을 관리하고 유지, 보수하는 관리사무소가 있습니다. 타원형의 캠핑촌을 빙 도는 일방통행의 차도가 나 있는데, 저는 이 차도를 따라 시계방향으로 돌다가 중앙탑면과 소태면을 잇는 목계교를 건넜습니다.
다리 건너 목계삼거리에서 길 건너 목계나루를 사진 찍은 후 왼쪽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북진했습니다. 선창마을 입구를 지나 다다른 월촌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부론쪽으로 이어지는 599번 도로를 따라 ‘한강 따라 걷기’를 이어갔습니다. 목계삼거리에서 복여울교까지는 그 거리가 6.9Km에 이르는데, 이 도로는 인도가 따로 없어 오가는 차량들에 신경을 많이 써야하는 1차선의 좁은 차도입니다. 그런데도 제가 한강 좌안의 한적한 길 대신 우안의 이 길을 택한 것은 한강 가까이에 낸 이 길을 걸어야 보다 가까이에서 한강을 볼 수 있어서였습니다.
11시20분 철새전망대에 올라 한강의 도도한 물흐름을 지켜보았습니다. 월촌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꺽어 만난 하천은 구룡저수지에서 흘러내려오는 구룡천입니다. 거석의 표지석이 세워지고 태극기가 펄럭이는 월촌마을 입구를 지나 강변에 바짝 붙여 낸 차도를 걸으면서 탁류로 변해버린 한강 물과 여우섬을 카메라에 옮겨 담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오가는 차량들로 신경이 쓰였는데, 얼마간 더 걸어 철새전망대에 이르러서는 마음 놓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2층의 철새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한강은 요 며칠간 내린 비로 물이 불어 여우섬이 많이 잠겼습니다. 그래서인지 철새들을 보지 못했는데, 설사 보았더라도 그 새가 무슨 새인지는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AI에 물어본 즉, 이 섬을 찾아오는 철새는 청둥오리, 큰기러기, 왜가리 등의 겨울철새여서 여우섬이 물에 잠기지 않았어도 이번에는 철새를 만나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이 전망대에서 점심식사를 하면서 20분 가까이 푹 쉰 후 덕은로로 들어서 또 다시 한강 따라 걷기를 이어갔습니다. 전망대 출발 후 20분 남짓 지나 오른쪽으로 소태면행복센터 길이 갈리는 삼거리에 다다랐습니다. 이 삼거리에서 왼쪽 길을 따라 걸어가자 강 건너로 나무를 베어내고 밑동까지 뽑아내어 맨흙이 전부 드러난 민둥산이 보였습니다. 산이 낮은 데다 차가 다닐 수 있는 임시 도로가 나 있는 것으로 보아 광물을 채석하기 위해 산을 파헤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12시50분 복여울교에 도착해 22차 한강탐방을 마쳤습니다. 민둥산 앞에서 오른쪽으로 확 휘어 북쪽으로 흐르는 한강을 따라 걸어 복탄양수장을 지났습니다. 통통한 배추들이 밭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아직 결구가 안 되어서인지, 아니면 일손이 모자라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언제 별안간 기온이 떨어져 서리가 내릴지 모르는 일이어서, 가을걷이를 서두르는 것이 좋겠다 싶었습니다. 복탄삼거리에 다다라 잠시 원주시의 부론으로 가는 599번 도로를 따라 걷다가 곧바로 왼쪽길로 들어서 복여울교 앞에 도착했습니다.
이 다리를 건너야 양천온천역으로 이동해 판교로 가는 15시12분 KTX를 탈 수 있는데, 강물이 불어 건널 수 없다며 입구를 폐쇄해 난감했습니다. 이 다리는 비가 많이 내려 물이 불으면 다리가 잠기는 잠수교라는 것을 사전에 확인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 상황이어서 피해갈 방법이 없어 더욱 난감했습니다. 내친 김에 부론까지 걸어가 원주로 가서 열차 타고 가는 방법이 있지만, 그러려면 16Km를 더 걸어야 해 포기하고, 버스를 타고 온 길로 되돌아가 목계교를 건너 양성온천역으로 가는 방법을 두고 생각하는 중 안양에서 오래 사셨다는 한 분이 당신 차로 양성온천역까지 태워주겠다고 말씀 해주어 고맙고 또 고마웠습니다. 80이 넘으신 부친을 모시고 양성의 음식점으로 가려고 이 다리를 찾아온 60대의 아드님도 이다리를 건널 수 없게되자 목계교로 돌아가기로 했다면서 안양 근처 산본에 사는 저를 반갑다면서 태워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 차를 타고 양성의 자매식당 칼국수집으로 가서 칼국수를 들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제가 이분들께 고마워하는 것은 차편을 제공받아서만은 아닙니다. 그것에 더하여 이분들로부터 아직도 세상인심이 각박하지 않아 서로서로 도와가며 믿고 살 수 있다는 것을 배운 것입니다.
식사 후 양성온천역으로 이동해 15시12분에 출발하는 판교행 열차에 올라 하루 여정을 마무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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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강서원에서 백여m 떨어져 있는 모현정에 오르자 한강과 그 주변의 너른 들판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모현정은 지어진 지 오래되지 않아 고색창연한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사방이 탁 트인 데다 도도하게 흐르는 한강이 한눈에 잡혀 이만한 풍광이면 옛날에도 승지(勝地)로 불렸을 법합니다. 여기 모현정이 승지를 뛰어넘어 명승지가 되지 못한 것은 주어진 승경에 인문학적 가치를 부가하는 일을 맡아 할 만한 사대부들이 별반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일은 그 지역과 연고가 있는 사대부들이 맡아 해야 하는데, 모현정은 그렇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명문가인 풍산홍씨 후예들이 살아 그나마 서원과 정자가 여기 하담리에 세워졌기에 이렇게 찾아와 글을 남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원의 주기능은 교육(敎育)과 제향(祭享)입니다. 조선시대 서원은 오늘의 사립대학에 상응하는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사족(士族)들만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누정의 주된 기능은 산자수명한 자연경관을 탄상하며 즐기는 유흥상경(遊興賞景)이라 하겠습니다. 누정기(樓亭記)나 누정시(樓亭詩) 같은 누정 문학이 사대부들에 의해 거의 독점적으로 생산되고 유통되며 소비된 것으로 보아, 누정 또한 서원과 마찬가지로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전유물이었을 것입니다.
1796년에 하담을 떠나며 아래 시를 지은 다산 정약용 또한 정조 임금의 총애를 받은 사대부였습니다.
離荷潭 이하담
四休亭下水蓮蓮 사휴정 아래는 물결이 잔잔하고
客馬悲鳴上渡船 나룻배 올라타니 길손의 말 슬피우네
行到嘉興江口望 가흥역 흘러가 강어귀 바라보면
薔薇山色杳東天 장미산 푸른 빛에 아득한 동쪽 하늘
서원이나 누정 모두 사대부들의 전유물이어서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낙동강을 따라 걸으면서 여러 곳에서 들른 서원이나 누정을 한강을 따라 걸으면서 거의 만나보지 못한 것은 한강이 흐르는 강원도나 충청북도가 낙동강 강변의 경상도에 비해 사대부들이 거의 살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충주는 그나마 한강의 수운이 시작되는 교통의 요충지로 사대부들이 살만했던 곳이기에, 충주의 사대부들이 여기 하담리에 서원과 누정을 세웠다고 생각합니다.
<탐방사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