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코스: 강천보-여주보-상백1리정류장
탐방일자: 2026. 2. 1일(일)
탐방코스: 강천보-영월루-세종대교-여주보-양화교-상백1리정류장
탐방시간: 11시38분-17시38분(6시간)
동행 : 나 홀로

한강을 따라 걷느라 들이 평평하고 산이 멀어 야평산원(野平山遠)의 낙토(樂土)라 불리는 여주 땅을 원없이 걸었습니다. 강천보에서 시작해 영월루, 여주보와 양화나루터를 차례로 지나 상백1리 버스정류장에 이르기까지 약16Km를 걸으면서 한 치도 여주 땅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낙토의 여주 땅에 첫발을 들인 것은 1968년 여름입니다. 대학교에 들어가 처음으로 여름방학을 맞아 고교동창과 둘이서 동해안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 여행은 서울을 출발해 춘천-인제- 속초-울산바위/토왕성폭포-양양-주문진-강릉-삼척-영주-원주-여주-수원을 거쳐 서울로 돌아오는 8박9일의 긴 나들이였습니다. 동행한 고교동창과 원주에서 헤어져 저 혼자서 여주로 향한 것은 한 친구의 본가가 여주군의 가남면에 있어서였습니다. 그 친구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여주의 신륵사를 구경한 후, 여주역으로 이동하여 협궤의 증기기관차가 운행하는 수여선을 타고 수원으로 가서 상경했습니다. 제가 58년 전의 일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한강 가에 자리한 신륵사의 풍광이 빼어난 데다 석탄을 태워 운행하는 증기기관차가 신기해 보여서였습니다.
그 당시 여주가 유명했던 것은 신륵사나 수여선 운행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여주는 남한강 주변으로 기름진 충적평야(沖積平野)가 발달해 쌀농사의 최적지입니다. 여주에서 생산되는 여주쌀은 밥맛이 일품으로 정평이 난 최고의 쌀로 조선시대에는 임금님의 수랏상에 올라가는 진상미였습니다. 여주 쌀의 밥맛이 이토록 빼어난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첫째, 깨끗하고 풍부한 남한강 물입니다. 둘째, 미네랄이 풍부한 황토의 사양토입니다. 셋째, 주변에 높은 산이 없어 일조시간이 길며 일교차가 커 낟알이 잘 영글고 쌀에 전분이 많이 축적된다는 것입니다.
옛날 농업사회에서는 쌀이 가장 중요한 생산물이었습니다. 농업사회에서 지식사회로 바뀐 오늘날에는 반도체가 쌀을 대신해 우리나라 산업을 이끌고 있습니다. 여주와 이천은 모두 최고의 미질(米質)인 진상미를 생산하는 지역이었습니다. 이런 여주와 이천이 인구에서 큰 차이를 보인 것은 이천에 반도체 생산단지가 조성되고 나서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025년의 인구는 반세기 전인 1975년 대비 여주가 약102천명에서 약114천명으로 12% 늘어났고, 이천은 약114천명에서 약223천명으로 96% 증가했습니다. 이천은 단독으로 국회의원을 선출하고 있는데, 여주는 인근 양평과 합쳐 국회의원 1명을 뽑는 것은 이러한 인구 변화 때문입니다.
여주가 이천과 다른 점은 한강을 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천이 반도체를 생산해 산업도시로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했다면, 여주는 한강이 흐르고 있어 관광도시로 성장해 나갈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
산본 집을 출발해 이번 한강 탐방의 출발지인 여주의 강천보로 이동하는데 이용한 대중교통수단은 다양했습니다. 군포시 산본에서 분당의 판교역까지는 버스로, 판교역에서 여주역까지는 전철 경강선으로, 여주역에서 강천보까지는 택시로 이동했습니다. 산본 집을 나와 강천보에 다다르기까지 대략 2시간이 걸렸습니다.
11시38분 강천보를 출발했습니다. 4개월 전 강천보를 건너며 보았던 한강보다 이번에 바라본 한강이 더욱 파랗고 차디차 보였습니다. 수력발전소가 설치된 강천보를 사진 찍은 후 잘 포장된 한강 좌안의 자전거도로를 따라 걸어 이호대교를 지났습니다. 이내 자전거도로에서 벗어나 맨 흙의 강변 벌판으로 들어서자 한강에 내려앉은 동장군이 저를 반겨 맞았습니다.
50년 전에 집사람과 데이트할 때 여주대교에서 신륵사까지 한강 우안의 천변 길을 걸은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맞은편의 좌안 길을 따라 걸었기에 신륵사와 그 주변을 강 건너에서 조망했습니다. 조선중기 문신인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이 저서 『택리지』에서 “강 북쪽에는 신륵사(神勒寺)가 있고 절 곁에는 강월헌(江月軒)이 있는데, 강을 임한 바윗돌이 아주 기이하다.”라고 말힌 바와 같이 신륵사의 강변 풍경은 볼만했습니다.
조선시대 한강에 띄운 황포돛배가 어떠했는가는 황포돛배 안내문을 읽고 확실히 알았습니다. 조선시대 4대 나루터는 서울의 광나루와 마포나루, 여주의 신륵사 앞 조포나루와 이포리의 이포나루였다고 합니다. 2025년에 복원한 황포돛대의 소개 글에 따르면 여주의 조포나루와 이포나루를 오가던 황포돛대는 길이가 약15.67m, 너비가 4.33m, 그리고 깊이는 1.10m이며, 총톤수는 8.55톤으로 당시로는 제법 큰 배였였던 것 같습니다. 안내팜플렛에는 남한강을 따라 강변유원지, 영월루, 신륵사를 유람할 수 있다고 했는데 탑승지인 강변유원지 선착장이 텅 비었고, 운항 중인 황포돛배도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시베리아 기단의 남하로 동장군의 기승이 부리는 여기 여주의 남한강, 즉 여강(驪江)의 강변에서 야영을 하고, 수상스키를 즐기는 젊은이들을 보자 그들의 젊음이 마냥 부러웠습니다. 시간만 넉넉했다면 올라가 건넜을 아취형의 모던한 여주남한강출렁다리를 그냥 지나쳐 많이 아쉬웠습니다.
13시20분 영월루(迎月樓)를 들렀습니다. 영월루는 원래 군청의 정문으로 18세기 말 건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앞면 3칸, 옆면 2칸에 팔작지붕의 2층의 자그마한 누정인 현재의 영월루는 1925년에 군청을 옮기면서 지금 자리로 옮겨 다시 세운 것으로 낮은 기단과 기다란 몸체, 치켜 올라간 지붕이 조화를 이루고 있고, 누각 바로 아래에는 커다란 괴암이 절벽을 이루고 있으며, 바위 위에는 마암(馬巖)이라는 글자가 힘 있는 필치로 새겨져 있다고 안내문은 전하고 있습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강 남쪽 언덕 밑에 마암(馬巖)이 있고, 바위 밑에는 검은 용이 산다는 말이 전해 온다.”고 적혀 있습니다. 2층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을 폐쇄해 누각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영월루에서 도로변으로 내려가 ‘여주군 6.25참전기념비’, ‘대한민국무공유훈자공적비’와 ‘그리스군참전기념비’를 둘러본 후 여주대교로 이동해 이 다리를 아래로 지나 강변로로 올라섰습니다.
강변로를 따라 걸어 여주여자중학교/세종고를 지난 후 여주시청 뒤편에 자리한 청심루터 석비를 사진 찍었습니다. 청심루(淸心樓)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많은 문인들이 찾아와 시를 짓고 풍경을 즐겼던 여주의 명소로 포은 정몽주 선생도 이곳에 머물며 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읍내에 있는 청심루(淸心樓)는 제법 강과 산의 경치가 아름답다.”라고 상찬했습니다.
강가의 선착장에 정박한 어선과 민물고기와 다슬기를 판다는 안내판이 붙어 있는 가건물이 여러 채 있는 것으로 보아 여기 여강에서는 민물고기가 제법 많이 잡히는 것 같습니다.
14시37분 세종대교를 지났습니다. 소양천 위에 놓인 하리보도교를 건너 세종대교 아래에 이르자 야구장이 들어선 양섬공원으로 들어가는 길이 넓게 나 있었습니다. 세종대교를 아래로 지나 굽이진 강변 길을 따라 걸어 능서면으로 접어들었습니다. 한강 좌안과 양섬 사이의 강물은 꽁꽁 얼었는데, 양섬을 지나 만난 넓은 한강은 아직 얼지 않고 강물이 새파래 대비되었습니다.
한강하구전방 127Km 지점을 지나 다다른 곳은 여주 8경의 여주 입암(笠巖)입니다. 겹겹이 층을 이루어 쌓인 층암이 잘 발달해 뚜렷하게 보이는 이 바위는 여주시 향토자연유산으로 지정된 명소로 여주 8경 중의 한 곳입니다. 층리가 북동쪽(?)으로 30도 가량 경사사져 주향선(?)이 뚜렷하게 보이는 이 바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안내판에 실린 아래 소개 글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입암(笠巖)은 여주팔경 중 하나로, 해동지도 · 광여도 등에 제6경 입암층암(笠巖層巖)으로 기록된 여주의 자연경관 유적이다. 1872년 지방도에는 '笠護'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일명 삿갓바위라 칭하는 입암이 층층이 쌓여 있는 형태로 묘사되어 있다. 입암이 시작되는 면이 바른 바위면 중앙이 '笠峰'이라 각자되어 있고, 당시 여주목사였던 이인응(李寅應), 당시 세력가인 민영목(閔泳穆)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또한 이복영(李福永), 이사영(李社永) 등의 이름이 보이는데, 이복영은 1865년(고종2년)에 영릉 참봉에 제수된 인물이다. 그리고 바위면 각자체의 감독관인 간역(看役)으로 정해조(鄭海朝), 권복규(權復圭)의 이름이 세져져 있다. 경오막추각(庚午莫秋刻)이라 새겨져 있어 경오년(1870년) 늦은 가을에 글씨를 새긴 것임을 알 수 있다.”
15시35분 여주보에 도착했습니다. 여주 입암을 지나 여주보가 가까워지자 저 멀리 양평의 추읍산과 그 뒤쪽 용문산이 보이기 시작해 엄청 반가웠습니다. 한강의 본류인 남한강은 한강기맥과 한남정맥 사이를, 한강의 제1지류인 북한강은 한북정맥과 한강기맥 사이를 흐릅니다. 제가 걷고 있는 강은 남한강으로 이 강을 따라 걸으며 조망한 산줄기는 용문산을 지나는 한강기맥입니다. 저 멀리 보이는 두 산이 추읍산이고 용문산인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던 것은 두산 모두 정상을 오른 적이 있어서였습니다.
귤낭 카페를 지나 여주보에 도착해 여주보문화관을 들르고자 한 것은 여주보에 관한 자료를 얻기 위해서였는데, 문이 닫혀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 옆 전망타워를 올라가 세종대왕이 발명한 자격루에 새겨진 용 문양을 재현하고 해시계의 형상을 반영했다는 여주보와 도도히 흐르는 한강의 물 흐름을 카메라에 담아 왔습니다. 3층 전망대에서 한강을 내려다보면서 떠올린 것은 소설가 유주현이 소설 「임진강은 흐른다」에서 “천년을 한가지로 흐르면서 세월을 셈하는 것은 오로지 강물뿐”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나이가 80세에 가까워지자 저도 모르게 세월을 셈할 때가 있습니다만, 그 셈은 강물처럼 천년을 셈하는 것이 아니고 여생(餘生)이 얼마나 될까 하는 셈일 뿐입니다. 전망타워에 올라 확인한 또 하나는 듣던 바대로 여주는 들이 평평하고 산이 멀어 야평산원(野平山遠)의 낙토(樂土)라 불릴 만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해가 지기까지 두 시간 넘게 남아 이번 한강 탐방을 여주보에서 마치려는 계획을 바꾸어 상백1리까지 진행하기로 하고 공도교인 여주보 다리를 서둘러 출발했습니다. 공도교(公道橋)란 원래 나라나 도, 시 등에서 설치 관리하는 공도(公道)에 놓인 다리를 뜻하는데, 여기 여주보의 공도교는 “댐이나 보(洑)를 유지 관리하기 위해 상부에 따로 설치한 교량‘을 가리키는 것으로금강의 공주보나 낙동강의 달성보에서도 본 바가 있습니다. 소수력발전소가 설치된 여주보를 출발해 제방길을 따라 걸으며 바라본 고구마 모양의 백석리섬에는 앞서 지난 양섬처럼 야구장 같은 운동장이 들어서지 않아서인지 섬으로 들어가는 접근로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백석리의 제방길을 걸으며 떠올린 것은 즐문토기의 출토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잉여의 생산과 보관으로 인해 새로운 단계로 이행하는데,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 편년은 즐문토기를 기준으로 한다고 합니다. 한반도의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토기는 물고기 뼈를 형상화한 즐문토기입니다. 시흥의 오이도, 강화군 초지리, 파주시 덕은리, 고양시 고봉동, 여주시 백석리 등의 한강의 강안이나 하구에서 즐문토기가 출토되었다는 것은 한반도의 신석기문화가 주로 어로(漁撈)를 배경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전우용 교수의 논고 '한강과 황해가 만난 역사'의 논지인 것 같습니다.
멸종위기 식물인 층층둥굴레가 자생하는 보호구역을 지나 뒤들천1교를 건넜습니다.
16시20분 능서양수장을 지났습니다. 뒤들천1교를 건너 다다른 양화천의 능서양수장은 여주지역의 고품질 쌀 생산을 위한 핵심 인프라 중의 하나입니다. 이 양수장이 하는 일은 남한강이나 양화천의 하천수를 펌프로 퍼 올려 자연적으로 물을 대기 어려운 농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것입니다. 농업용 양수장으로 가장 큰 양수장은 경기도 김포시에 위치한 신곡양수장이라 하는데,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 눈짐작으로는 여기 능서양수장이 이제껏 한강을 따라 걸으며 만나 본 양수장 중 가장 큰 것 같은데, 과연 그런지는 확인해 볼 뜻입니다.
한강 좌안 제방길을 걸으며 눈여겨 본 것은 강변에서 수십m 떨어진 들판에 일정 간격으로 설치한 토치카(벙커)였습니다. 최전방 지역인 제 고향 파주에서 토치카를 보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야평산원(野平山遠)의 여주 땅에 설치되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토치카에서 좀 떨어진 도로변에 외따로 서 있는 하얀 외벽의 2층 가옥이 평화롭게 보여 방어용 진지인 토치카와 대비되었습니다.
바람 한 점 쉬어갈 곳이 없는 너른 길옆의 충적평야를 바라보면서 제방길을 걷다가 외로움을 느낀 것은 이 길을 걷는 사람이 저 혼자라는 것을 자각하고 나서입니다. 로스팅 하우스 아베(Ave)를 지나 다다른 양화나루터는 남한강가에 있는 교통의 요지로 여주읍까지는 20리, 이천읍까지 30리 거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팔당댐이 축조되기 전에는 뗏목꾼들이 머물렀던 곳으로서 6. 25전만해도 50여 가구가 살았다고 표지석에 적혀 있습니다.
이곳이 우리나라 역사에 오르내리는 것은 조선조 광해군 때 일어난 ‘강변칠우’ 역모사건이 시작된 곳이어서 그러할 것입니다. 소설『홍길동전』의 작가로 알려진 교산 허균(許筠, 1569-1618)의 몰락을 가져온 이 사건의 전말은 양화나루터에서 조금 떨어진 강변칠우사건의 현장에 세워진 안내판에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조선 광해 5년(1613)에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가 영창 대군과 반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계축옥사의 시발점이 된 곳이다. '칠우(七友)'란 고위 관료의 서자로 관직에 진출하지 못하는 처지를 한탄하던 박응서, 서양갑, 심우영, 이경준, 박치인, 박치의, 김평손 일곱 사람을 말한다. 이들은 춘천 소양강가에 '무륜(無倫)'이라는 정자를 짓고 시와 술로 세월을 보내며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모방해 스스로 '칠우'라 불렀다. 이들은 광해군 집권 초기에는 여주 양화강(현 양화천)에 모여 살며 식량이 없으면 도적질도 했다. 그러다가 박응서 등이 광해 5년에 새재(鳥嶺)에서 은(銀) 상인을 죽이고 수백 냥의 은을 강탈했다가 모두 붙잡혔다. 이때 박응서 등은 목숨을 살려 주겠다는 대북파 이이첨 등의 꾐에 넘어가 '영창 대군을 왕으로 모시기 위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선조의 장인 김제남이 시켜서 저지른 일'이라고 허위로 자백했다. 결국 김제남은 역모죄로 사형을 당하고 영창 대군은 강화로 유배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전해 오는 말에 따르면, 칠우가 모여 시가를 벗 삼으며 적자와 서자가 평등한 세상을 갈구하던 이곳 여주 양화천 언덕에 후세 사람들이 당집을 짓고 해마다 장승제를 올렸다고 한다. 무당이 원귀를 달래는 넋두리와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굿판은 인근 사람들의 큰 구경거리였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17시38분 상백1리버스정류장에 다다라 25차 한강따라 걷기를 마쳤습니다. 강변칠우사건 현장을 지나 양화천 위에 놓인 양화천교를 건넜습니다. 이 다리를 건너 잠시 길을 찾지 못해 왔다 갔다 하다가 카카오톡의 도움으로 제 길로 들어서 하동정씨 합동묘역을 지났습니다. 마을 뒤 고개를 넘어 삼거리에 세워진 이정표에서 ‘한강하구 119Km’의 문구를 보았습니다. 한강과 서해가 만나는 한강하구까지 남은 거리가 119Km라고 하니 앞으로 8번만 더 탐방한다면 한강하구인 유도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상백1리 버스정류장에서 택시를 불러 여주역으로 이동해 경강선을 타고 귀가했습니다.
....................................................................................................................................
한강은 강 길이가 494Km로 남한에서 낙동강 다음으로 길지만, 유역면적은 38,831Km2에 달해 가장 넓습니다. 경기도, 서울시와 인천시 등 수도권의 1,500만 인구에 물을 공급하는 상수원 역할을 하고 있는 한강의 유역을 잘 관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한강유역관리의 요체는 필요한 곳에 댐과 보를 설치해 한강을 관리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남한 땅 한강 유역에 설치된 댐과 보는 모두 18개소입니다. 이들 댐과 보를 용도별로 살펴보면 다기능보 3개소, 다목적댐 3개소, 홍수조절댐3개소, 홍수전용댐 2개소, 수력발전댐 7개소 등으로 세분됩니다. 다기능 보로는 강천보, 여주보, 이포보 등이 있고, 다목적댐으로는 소양강댐, 횡성댐, 충주댐이 있습니다. 홍수수조절댐으로는 군남홍수조절지, 한탄강홍수조절댐과 평화의 댐이 있고, 홍수전용댐으로는 달방댐과 광동댐이 있으며, 수력발전댐으로는 화천댐, 춘천댐, 의암댐, 청평댐, 팔당댐, 도암댐, 괴산댐등이 있습니다. 이중 아직 제가 가보지 못한 댐과 보는 이포보, 횡성댐, 달방댐, 도암댐과 괴산댐 등 5개소입니다.
제가 좀 특이하다고 생각한 댐은 홍수조절댐입니다. 이들 홍수조절댐이 특이한 것은 모두가 북한과 가까운 최전방에 위치해 있고 거의 항상 댐에 물이 채워 있지 않고 비어 있다는 것입니다. 현장에 가서 알게 된 것은 이들 댐은 홍수 때 북한의 무단방류에 대비하기 위해 축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북한과 가까운 최전방에 건설되었고, 언제 북한에서 강물을 방류할지 몰라 홍수조절댐을 비워둘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고약한 이웃을 북쪽에 두어 부담해야 하는 쓸 데 없는 비용이 점차 줄어들기를 바라며 탐방기를 맺습니다.
<탐방사진>




















우리들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앵베실 작성시간 26.06.16 올해 겨울 2월 초하룻날에 시인마뇽님 홀로 여주땅 깊숙히 들어오셔서 강천보(康川湺)에서부터 여강 하류쪽으로 발걸음 하셨군요.
제가 통산 4.5회 종주 중인 여주의 남한강 驪江길(14개 코스, 140㎞)의
제1코스(옛나루터길) 중간 강천보에서부터 逆으로 - 제4코스(5일장터길)와 제6코스(왕터쌀길) 상백2리마을회관 직전 상백1리 정류장까지를 두루두루 걸으셨네요. 이전 포스팅 댓글로 언급했듯이 이웃 利川에 비해서 인구 증가 속도가 많이 떨어지는 여주시(郡에서 승격한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답니다) 유수의 여강길을 많이 걸어봤기 때문에 구석구석이 눈에 익숙합니다. 한 때 여강길 걷기에 미쳐 있었기에.이미지 확대
-
작성자앵베실 작성시간 26.06.16 여주의 남한강 여강(驪江)길 하면 또 제가 오래오래 자랑거리로 주절거리고 있는
여강길 명예의 전당(HOF) 1호 완주자로 등재되어 있다는 것인데요. 그 인연으로 8년 넘게 여강길 사무국 朴OO 局長님(대학원 후배)과 金OO 과장님과 소통하고 있답니다. 한국걷는길연합(KTA) 완주 인증 관련으로 어제 金 課長님과 전화 통화 및 문자메시지 주고 받았거든요. 2021년 1월 6일 여주 금은모래강변공원에 있던(지금은 신륵사 경내로 옮겼음) 여강길 사무국 2층에 들러 완주자 명부에 1빠로 신상내용을 적었더니 위 金 과장께서 완주증서에 직접 완주번호와 이름을 쓰시라 하는 바람에 電算化 되기 전이라 제 완주증을 제 글씨로 썼던 꽤 삽상한 추억도 갖고 있습니다. ㅋ이미지 확대
-
작성자시인마뇽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7 여주와는 각별한 인연이 있으셨네요. 저는 대학교1학년 때인 1968년 여름 방학 때 신륵사를 둘러보고 수원까지 기차를 타고 온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제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화부가 석탄을 집어넣어 계속 불을 지피는 것을 보았습니다. 기차가 증기기관차여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기차역도 역이름이 화성역이고 지금의 남문 근처에 자리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앵베실 작성시간 26.06.17 네에~ 5년 전과 2년 2개월 전인 2024년 4월 12일에는 국가유산청(前 문화재청)의 <나만의 국가유산해설사> 앱으로 국가유산 탐방 기록을 쌓아 가면서 楊平郡 龍門面 거쳐서 인근 驪州市 북내면 소재의 천년 高達寺址와 여주박물관에 들러 고달사 원종대사 탑비 원본(국립박물관에서 이전) 등도 열람하고 왔었답니다.
https://m.cafe.daum.net/ggtrail/8XTQ/7602?svc=cafeapp